소설리스트

<제29화> 진흙탕 속에서 피어난 연꽃 (546/733)

<제29화> 진흙탕 속에서 피어난 연꽃2021.03.14.

16630315993394.jpg“말이야 바른 말이지, 협업이라면 공동 작곡이라고 명시는 해야죠.”

체자레 데 코모는 느릿하게 다가와서 오타비오를 비롯한 친우들과 손뼉을 마주치며 인사를 했다.

16630315993394.jpg“아름다운 이사벨라, 오랜만입니다.”

그는 능글맞게 무릎을 굽혀 이사벨라에게 예를 취해 보였다. 이사벨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목례를 한 후 그에게 손을 내밀었고, 체자레는 이사벨라의 손등 위 허공에 큰 소리를 내며 가짜 키스를 한 후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16630315993394.jpg“여전히 아름다우시군요. 오늘도 여전히 산 카를로 최고 미녀의 이름에 걸맞는 미모이십니다.”

그는 루크레치아가 쳐다보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고 이사벨라에게 성큼 다가가서 그녀의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근접한 거리에서 남자는 나른한 톤으로 이사벨라에게 귀엣말을 하듯이 속삭였다.

16630315993394.jpg“당신의 장점은 아름다움입니다. 괜히 남한테 휩쓸려서 맞지도 않는 옷을 입으려고 몸부림을 쳐 봤자 추악하기만 합니다. 오늘처럼.”

이사벨라는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체자레를 바라보았다.

16630315993413.jpg“남한테 휩쓸렸다뇨?”

16630315993394.jpg“아닌가요?”

16630315993413.jpg“전 그런 애 의식하고 있지 않아요!”

16630315993394.jpg“전 누구라고 말씀드린 적이 없는데, 찰떡같이 알아들으시는군요. 이런 미모에 지성까지 갖추셨다니, 세상에나.”

그는 과장되게 두 손을 들어 보였다.

16630315993394.jpg“얘들아! 데 마레 영애께서 저렇게나 머리가 좋으시단다!”

오타비오를 비롯한 영식들이 합을 맞추듯이 같이 낄낄거렸다. 이사벨라의 얼굴이 수치스러움으로 새빨개졌고 줄리아 데 발데사르는 옆 사람에게 뭔가를 속삭이고는 입꼬리를 한쪽만 올리며 웃었다. 이사벨라는 줄리아가 자신을 비웃었다고 확신했다. 카멜리아 데 카스틸리오네는 감히 줄리아처럼 대놓고 비웃지는 못하고 고개를 숙여 필사적으로 표정 관리를 했다. 루크레치아가 뭐라고 개입을 하려던 차에 체자레가 선수를 쳤다.

16630315993394.jpg“오늘은 좋은 음악이 있다고 해서 구경을 하러 왔는데 생각지도 못한 다른 구경을 하고 갑니다. 볼 건 다 본 것 같으니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는 루크레치아에게 우아하게 목례를 한 채 바로 몸을 돌려 나가버렸고, 오타비오를 비롯한 체자레의 무리들은 같이 루크레치아에게 인사를 한 후에 우르르 자리를 떠났다. 정혼자가 자리를 비우자 카멜리아 데 카스틸리오네도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이사벨라와 루크레치아에게 각각 인사하고 자리를 떴고, 줄리아 데 발데사르도 입가에 예의 거리감 있는 미소를 한 줄 띄우고 일어서서 나가버렸다. 다른 영애들도 줄리아까지 떠나자 함께 와르르 일어섰다. 혼자 남은 이사벨라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남은 것은 성황당 내에 소속된 연주자들과 담당 수녀, 몇몇 사제들뿐이었다. 다 아버지, 데 마레 추기경의 절대적인 영향력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사벨라는 유력한 귀족 자제들 앞에서는 꾹꾹 눌러 놓았던 분통을 터트렸다.

16630315993413.jpg“뭘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어! 다 꺼져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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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체자레는 일군의 친구들을 이끌고 산 에르콜레 대성황당의 정문을 유유히 나섰다. 항상 타고 다니는 적갈색의 애마에 훌쩍 올라타려던 차에, 옆에서 자기의 말의 고삐를 잡은 오타비오가 말을 걸었다.

16630316000985.jpg“이봐, 체자레 백작. 웬일로 오지랖이야?”

체자레는 오만하게 고개를 돌려 오타비오를 돌아보았다.

16630315993394.jpg“무슨 소리지, 오타비오?”

16630316000985.jpg“자네, 이사벨라 데 마레를 꽤 마음에 들어하는거 아니었어?”

오타비오는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

16630316000985.jpg“자존심이 꽤 세잖아, 이사벨라 데 마레. 솔직히 얼굴은 꽤 곱상하니까 그럴 만도 하고. 다시 어르고 달래려면 공이 꽤 들을 텐데 저러고도 넘길 자신이 있는 거야 아니면 아예 흥미가 식은 거야?”

체자레는 인상을 확 찌푸렸다. 정말로 기분이 상한 듯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말을 내뱉었다.

16630315993394.jpg“아닌 건 아닌 거지. 언제부터 이 체자레 백작이 고작 여자 눈치를 보면서 하고 싶은 말을 못 하고 다녔나?”

불쾌한 듯이 모자를 벗고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그는 오타비오를 일별했다.

16630315993394.jpg“나랑 만나고 싶으면 자기가 참아야지. 싫은 소리 듣기 싫으면 현명한 말만 하는 머리를 갖추던가. 자네는 나를 이렇게나 모르나? 시뇨르 오타비오.”

체자레는 훌쩍 뛰어 말 위에 올라탔다.

16630315993394.jpg“나는 먼저 출발하네. 살롱에서 만나세. 기분이 상해서 한잔해야겠어."

그리고는 윤기가 흐르는 적갈색의 애마에게 박차를 가해서 말의 기운찬 울음소리와 함께 먼저 달려 나가 버렸다. * * * 집으로 끌려온 아라벨라는 바로 루크레치아에게 목덜미를 잡힌 채 어머니의 응접실로 질질 끌려갔다. 이사벨라는 친구들을 보러 가기 위해 세심하게 치장했던 옷차림 그대로 루크레치아의 등 뒤에서 서럽게 울고 있었다.

16630315993413.jpg“엄마, 엄마. 나 이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녀요.”

이사벨라는 울다가 탈진할 것처럼 눈물을 방울방울 쏟아냈다.

16630315993413.jpg“체자레 백작 얼굴 봤어요? 경멸하는 눈이었어! 줄리아 데 발데사르 표정 보셨어요? 앞으로 나한테 말도 안 걸 거야! 사교계에서 날 따돌리면 어떡하지?”

16630316008409.jpg“우리 딸, 불쌍한 우리 딸, 울지 마라. 다 괜찮을 거야.”

이사벨라의 머릿결을 어루만져주며 루크레치아는 큰딸을 달랬다. 그러고는 구석에서 떨고 있는 작은딸에게 무섭게 윽박질렀다.

16630316008409.jpg“넌 거기서 그렇게 나대면 어떡해!”

아라벨라는 고개를 숙여서 한없이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16630316008418.jpg“아, 아니 그게⋯⋯. 난 언니가 허락한 줄 알고⋯⋯. 악보가 잘못 들어간 상태로 곡이 발표될 상황이었단 말이에요⋯⋯.”

16630316008409.jpg“곡이 잘못 발표되든 말든 뭐가 그리 중요해! 그깟 곡! 지금 너희 언니 이름에 먹칠이 돼서 난리가 났단 말이야!”

난리가 났다는 엄마의 말에 이사벨라는 더욱 서럽게 울었다. 아라벨라는 바닥의 대리석에 있는 무늬가 이건 당나귀, 저건 강아지를 닮았다고 생각하며 최대한 엄마의 분노에 휩쓸려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16630316008409.jpg“거기서 그냥 조용히 있었어야지!”

삿대질을 하며 어르는 루크레치아의 등 뒤에서 이사벨라가 쏙 끼어 양념을 쳤다.

16630315993413.jpg“그래! 괜히 나대서 내 곡에 이상한 소문이나 내고!”

최대한 먼 산을 보려고 노력하고 있던 아라벨라는 이사벨라의 ‘내 곡’이라는 한 마디에는 드디어 발끈했다.

16630316008418.jpg“네 곡? 그건 내 곡이잖아!”

16630315993413.jpg“뭐라고?”

16630316008418.jpg“내가 쓴 곡이잖아! 니가 뺏어갔잖아!”

16630315993413.jpg“야!”

아라벨라는 이사벨라의 상대를 그만두고 루크레치아를 보고 애원했다.

16630316008418.jpg“엄마, 엄마. 그건 진짜로 내 곡이에요. 언니가 뺏어간 거란 말이에요. 남들은 다 몰라줘도 엄마는 알아줘야 해요.”

하지만 루크레치아가 꽂힌 건 다른 부분이었다.

16630316008409.jpg“너 지금 언니한테 대든 거니?”

16630316008418.jpg“엄마!”

16630316008409.jpg“손윗형제한테는 항상 공손해야지! 엄마가 너한테 언니한테 대들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아라벨라가 억울함에 자기도 모르게 울기 시작한 와중에 루크레치아는 아라벨라를 호되게 혼냈다.

16630316008409.jpg“니 곡 내 곡이 그렇게 중요해? 자매는 뭐든지 다 같이 쓰는 거야! 너희 언니 혼삿길 막히면 네가 책임질 거야?!”

‘혼삿길이 막힌다’는 말에 뒤에서 발작하듯 오열하는 이사벨라를 두고 루크레치아는 아라벨라를 더더욱 혼냈다.

16630316008409.jpg“우리 이사벨라가 얼마나 사교계에서 이름이 높은 보석인데! 얼마나 자랑스러운 엄마의 딸인데! 엄마는 그거 망치는 거 누구라도 용납 못 해! 그게 너든 네 잘나 빠진 곡이든 간에 뭐든 절대로 용서 못 해!”

루크레치아는 체벌용 떡갈나무 막대기를 집어 들었다. 이사벨라에게는 도통 사용된 적이 없고, 원래는 아라벨라에게만, 최근 들어서는 아리아드네까지 해서 천덕꾸러기 두 명만을 위해 애용되고 있는 막대기였다.

16630316008409.jpg“몇 대 맞을래? 잘못한 만큼 네가 몇 대 맞을지 대 봐!”

아라벨라는 울음 범벅이 된 얼굴로 루크레치아에게 말했다.

16630316008418.jpg“난 잘못한 거 없어요! 내 곡을 빼앗아 간 이사벨라 언니가 잘못한 거라고! 훔치지 않았으면 이런 일도 없었잖아요!”

16630316008409.jpg“이 되바라진 것이 엄마한테도 대들어?! 그리고 남의 탓 그만해! 성품이 어찌나 못돼먹었으면 이 지경이 됐는데도 네 언니 탓을 하니?”

  - 부웅! 루크레치아가 위협적으로 허공에 떡갈나무 몽둥이를 휘둘렀다.

16630316008409.jpg"꿇어! 손 내!"

아라벨라는 엄마의 호통에 놀라 어기적어기적 무릎을 꿇기는 했지만 맞기 싫은 마음은 여전했다. 아라벨라는 몸을 뒤틀면서 조금씩 뒤로 몸뚱어리를 빼냈다. 루크레치아는 상체를 앞으로 숙여 달려들듯이 아라벨라를 쫓았다. 아라벨라는 좁은 공간에서 대놓고 도망치지 않는 선을 지키며 최대한으로 어머니를 피했지만 여기서 이사벨라가 야비하게 개입을 했다. 그녀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상태의 아라벨라의 등을 무릎으로 강제로 눌러서 동생을 속박해 엄마에게 바쳤고, 아라벨라의 짧은 몸부림은 끝이 나고 말았다.

16630316008409.jpg“이리 대!”

붙들린 아라벨라는 결국 펑펑 울면서 손바닥을 내밀었다. - 퍽! 루크레치아는 떡갈나무 몽둥이로 아라벨라의 손바닥을 때렸다. - 퍽! 아라벨라는 한 대 한 대 맞을 때마다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그렇지만 루크레치아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열 대를 모두 채운 루크레치아는 아라벨라가 우는 꼴이 보기 싫다고 한 대를 더 때리더니, 그제야 떡갈나무 몽둥이를 바닥에 내던지고는 외쳤다.

16630316008409.jpg“너, 네 방에 가서 근신하고 있어! 한 달 동안 대미사 말고는 아무 데도 못 간다! 식사도 네 방에서 따로 해! 고기는 구경도 못 할 줄 알아라!”

간신히 고맙디고마운 축객령을 받은 아라벨라는 도망치듯이 어머니의 응접실 밖으로 몸을 던졌다. - 쾅! 육중한 고동색의 떡갈나무 문이 아라벨라의 눈앞에서 닫혔다. 탈출에 성공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내쫓긴 것은 가슴이 아팠다. 아라벨라가 끼지 못하는 어머니와 언니 간의 사랑과 유대가 루크레치아의 응접실 안에 있었다. 루크레치아의 응접실에서 내쫓긴 아라벨라는 도망치듯 자녀들이 사용하는 서쪽 동(wing)으로 달아났다. 울면서 달려가는 작은 아가씨를 보며 하녀들은 쑥덕대긴 했지만 아무도 말을 걸거나 챙겨주는 사람은 없었다. 아랫사람 입장에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주인마님의 분노가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대신 서쪽 동에는 루크레치아가 동쪽 동 응접실에서 벌이는 소동을 전해 듣고 나와 있던 아리아드네가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엉망인 아라벨라의 꼬락서니를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만 양팔을 벌려 주었다. 아라벨라도 미안하다거나, 잘못 생각했다거나 같은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다만 그대로 아리아드네의 열린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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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아드네의 방 안으로 들어간 아라벨라는 아리아드네의 품 안에 안겨서 눈물 콧물을 쏙 빼면서 엉엉 울었다. 아리아드네는 아무 말 없이 아라벨라의 조그만 등을 토닥여 줄 뿐이었다. 아라벨라의 조그만 몸뚱이가 작은 산짐승처럼 아리아드네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체온과 체온이 만났고, 무언의 사과와 이해가 오갔고, 그 둘 사이에서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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