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화> 수국 정원의 소년소녀2021.03.24.
어른들 틈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알폰소 왕자는 아리아드네에게 손짓으로 뒤뜰을 가리켰다. 아리아드네는 흔쾌히 알폰소를 뒤따라 나갔다.
“나오느라 고생했어.”
아리아드네는 인파를 뚫고 나온 왕자에게 고생했다는 위로를 건넸다.
“아니야!”
왕자는 귀족 남성들의 인파를 몸으로 뚫고 나왔음에도 이를 강하게 부정하며 환하게 웃었다.
“난 너 오늘 여기 오는 줄 몰랐어. 어떻게 오게 된 거야? 모친……과 같이 온 거야?”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저었다.
“가정교사 선생님이신 로마니 부인이 임시로 샤프롱을 서 주셔서 올 수 있었어. 치보 후작 부인의 친척이시거든.”
“어쨌든 잘됐다. 그간 어떻게 지냈어! 오늘은 옷이 마음에 들어?”
아리아드네는 저번 느티나무 위에서의 일이 생각나서 얼굴을 붉혔다.
“저번보단 나은 것 같아.”
“내가 준 머리핀은?”
아리아드네는 재차 얼굴을 붉혔다. 이번에는 당황의 뜻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좋게 말하면 참하고 우아하게, 나쁘게 말하면 조금 날카롭게 생겼는데, 귀엽기 짝이 없는 진분홍색 꽃 모양 보석 머리핀은 그녀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선물을 준 본인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기에는 너무 미안했다.
“예뻤는데……. 오늘 옷에는 안 어울려. 다음 번에 꼭 하고 나올게.”
둘은 그 이후로도 시시껄렁한 잡담을 하며 치보 후작가의 후원을 한 바퀴 돌았다. 주로 그간의 안부 비슷한 이야기들이었고, 엄밀히 따지자면 궁정 귀족들 사이에서의 아리아드네의 평가 같은 나름 중요한 정보도 섞여 있었으나 결국에 둘 사이 대화를 한 줄로 요약하자면 ‘시시껄렁하다’고 밖에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사실 단어들과 그 단어가 구성하는 문장, 문장이 전달하는 내용은 지금 둘 사이에서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알폰소의 눈에는 아리아드네의 매끈한 피부, 새카만 머리카락, 진녹색 눈동자, 웃을 때의 반달로 접히는 눈매 같은 것들만 보였다. 보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저절로 보였다. 아리아드네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을 때에는 하얀 앞니와 도톰한 윗입술이 겹쳐서 조금 토끼 같았는데, 문득 거기에 입술을 맞추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을 하자 척추에 전율이 흘렀다. 하지만 거기서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는 왕자였고, 미래의 군주였다. 나라는 그의 것이 될 것이었지만 그 역시 그에 대한 보답으로 스스로를 나라에 바쳐야 했다. 그가 생각하는 온당한 군주라면 으레 그랬다. 그의 혼사는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정하게 될 것이었다. 높은 확률로 그가 미래에 만나게 될 여자는 바다를 건너서 올 어떤 군주의 딸일 것이었다. 그녀가 아름다울지, 착할지, 좋은 사람일지 어떨지는 알 수 없으나 금은보화와 국가의 안녕을 배에 싣고, 혹은 말과 마차에 바리바리 싣고 시집을 올 것이다. 그가 그 결혼에 순응하는 대가로, 즉, 모르는 여인에게 정을 붙이고 그녀와 가정을 꾸리며 자식을 보는 것으로서 그의 국가와 그의 백성은 더 안전하고 더 부강해질 것이었다.
“알폰소, 저거 예쁘지 않아?”
알폰소 왕자는 문득 상념에서 깨어났다. 아리아드네가 해맑은 표정으로 치보 후작가의 후원에 활짝 핀 수국을 가리키며 알폰소를 돌아보는 참이었다. 온통 수국으로 가득한, 수국이 오솔길 양옆을 가득 메운 좁은 통로가 있었다.
“저기 가보자!”
소녀의 리드에 따라, 내가 시작한 것이 아니니까 이것쯤은 괜찮다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디딘 수국길은 장관이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드높게 자란 온통 흰 수국 덤불은 그 안에 들어온 사람의 시야를 막았고, 통로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서니 벌써 세상에 흰 수국 꽃과 통로 양 끝에 보이는 진녹색 이파리들, 그리고 고개를 들면 보이는 새파란 하늘 조각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 단둘뿐이었다. 흰 수국의 물결 속에 단 한 송이의 보라색 수국이 보였다. 수국의 색상이 미묘하게 바뀌는 와중에 혼자서 유독 진하게 색깔이 바뀐 한 송이였다. 안 된다고 생각했다. 지금 손대지 않고,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꺾지 않고, 좋은 관계로서 멀리서 바라보면, 결정의 순간을 최대한 뒤로 미루면 계속 웃으면서 볼 수 있다고, 그러니까 안전거리를 유지하자고 알폰소의 이성은 생각했지만 입은 자기 마음대로 움직였다.
“저거, 갖고 싶어?”
“치보 후작가 꽃인데 마음대로 꺾어도 될까?”
“몰래 꺾자.”
아리아드네가 청량한 웃음을 터트렸다.
“꺾어서 어떻게 몰래 가지고 가라는 거야. 꺾고 바로 버려? 아깝게.”
“치마폭에 숨겨서 들고 들어가.”
아리아드네가 예의 높은 웃음을 터트리며 알폰소의 어깨를 팡 때렸다. 어깨에 와 닿은 소녀의 손길에 알폰소는 머리의 퓨즈가 하얗게 나가버리고 말았다. 일전에 왕비궁의 버려진 분수대에서 아리아드네를 만났을 때 그는 큰 생각 없이 그녀가 나무 위에 올라오는 것을 도왔다. 정말로 사심 없이 그녀의 팔을 잡았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뒤로 문득 잠들기 직전에 그때의, 하얀 드레스를 입은 검은 머리 소녀가 보였다. 그때 그녀의 팔을 잡았던 촉감이, 그녀의 입에서 나오던 숨결이, 보드라운 피부와 머리카락에서 나는 향기가 침대에 누운 그를 덮쳐왔다. 한번 인식한 뒤에는 걷잡을 수가 없었다. 오늘 아리아드네의 손길은 객관적으로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었지만 주관적으로 특별했다. 알폰소는 멈추지 못하고 아리아드네를 나지막하게 불렀다.
“이리 와.”
“어, 어?”
알폰소는 아리아드네의 허리를 잡아 들어 올려 주었다. 이제는 정말이지, 내가 먼저 손 내민 것이 아니라는 변명조차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처음에는 놀란 것처럼 보였던 아리아드네도 알폰소가 들어 올려 주자 덕분에 커진 키로 자기 손으로 수국 덤불 꼭대기에 피어 있던 보라색 수국을 꺾었다. 아리아드네는 꺾은 수국을 꽃다발처럼 손에 들어보았다.
“어때? 예뻐?”
“진짜 예뻐.”
둘의 대화는 겉으로 보기에는 원만히 오간 것 같았지만 사실은 지칭하는 객체가 달랐다. 소녀가 물어본 것은 꽃다발이 예쁘냐는 질문이었지만 소년이 대답한 내용은 소녀가 예쁘다는 답이었다. 주변에는 산책을 하러 나온 살롱의 다른 초대손님들도 종종 보였다. 그들의 눈에는 그들 둘을 제외한 타인은 무생물이나 벽시계, 가구처럼 보이는 지경이었지만 벽시계와 다른 초대손님의 공통된 점을 하나 뽑아 보자면 시간을 알려준다는 점이었다. 남녀는 그것이 후원이든, 건물이든 자연스럽게 한 바퀴를 도는 산책을 할 수는 있었지만 그 중간에서 시간을 많이 지체한다거나, 어딘가에 틀어박혀서 안 나온다든가 하면 대번에 입방아에 오르고는 했다. ‘자연스러운 한 바퀴’라 함은 본인들이 출발할 때 주변에 보였던 다른 초대손님들이 여전히 주변에 보여야 안정권 안에 있다는 뜻이었다. 아리아드네와 알폰소는 이제 슬슬 주변에 익숙한 얼굴들이 드문드문 보이거나,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얼른 들어가야겠다.”
서두르는 아리아드네에게 알폰소도 마지못해 동의했다. 아까 두 손안에 쏙 들어왔던 아리아드네의 허리춤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녀가 입은 노란색 공단 드레스가 잠시 그의 손안에 안겨 있다가 떠났는데, 그것은 마치 햇살이 잠시 창문 안으로 들어왔다가 뚝 끊겨 버린 그런 상실감이었다. * * *
“오늘 이런 훌륭한 자리를 마련해 주신 치보 후작 내외분들과, 이 자리를 빛내 주신 알폰소 데 카를로 왕자 전하, 그리고 모든 신사 숙녀 여러분께 감사 인사 올립니다.”
드디어 미술품 경매가 시작되고 있었다. 경매물품을 들여온 장본인인 상인은 어딘가 매서운 인상에, 뾰족하게 다듬은 수염을 기르고 멋을 과도하게 부린 50대의 장년 남자였다.
“저는 포르토 공화국에서 온 빈센시오라고 합니다. 영광스럽게도 포르토 공화국에서 재무장관을 맡고 계시는 델 가토 가문의 베나시오 님의 남동생의 차남이지요. 오늘은 그 연줄로 이 자리에 환상적인 미술품들을 선보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나올지 여러분들께서도 알고 계시지요?”
포르토 공화국의 유력 가문과의 인연을 강조하고 있었지만 묘하게 길거리 약팔이 같은 느낌이 드는 사내였다. 하지만 <비토리아 니케>의 소문은 과연 대단한 것이어서, 홀에 모여들어 의자에 착석한 초대손님들은 웅성대며 자기들끼리도 기대감을 북돋웠다.
“우선 작고 예쁜 것들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우르비노 출신 신인 화가의 회화 작품들입니다. 눈에 덜 차시더라도, 가능성 충만한 젊은이에게 후원하신다는 느낌으로 너그럽게 보아 주십시오. <수선화의 성모 마리아>입니다.”
아리아드네는 피식 웃었다. 이 그림을 그린 우르비노의 베르나르도는 불과 내년에 세상에 선보일 우르비노 후작의 초상화가 극찬을 받는 바람에 성황청으로 스카우트를 받아 떠나게 된다. 그는 성황청에서 커리어를 이어나가다가 몇 년 뒤에 있을 트레베로 대성황당의 증·개축과 벽화를 담당하게 되어 말 그대로 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을 예정이었다. 우르비노의 베르나르도는 신진 화가라고 부르기에 민망할 정도로 초반 화풍부터 단단하고 안정된 구도와 필치를 자랑했다. 지금은 젊음이 하늘을 찔러 작품들이 대담하기까지 할 시절이었다. 이게 눈에 덜 차는 미술 애호가라면 아예 볼 줄 모르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반대로 눈이 하늘에 달려서 스스로 붓과 유화물감을 들고 그리기 시작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는 양반일 것이다.
“5 두카토로 시작합니다! 아무도 안 계십니까?”
그러나 지금 포르토 공화국 상인이 지나치게 후려치는 멘트로 오프닝을 해 버린 나머지, 내년만 되더라도 몇 배로 값어치가 뛰어오르고, 5년 뒤에는 웬만한 귀족은 살 생각조차 못 하게 될 작품에 단돈 5 두카토를 불렀는데도 호가를 외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아리아드네는 사람들 눈에 띄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한 타이밍 정도 더 충분히 기다렸다가 호가를 외쳤다.
“5 두카토!”
“오, 어느 분이신가요. 아, 데 마레 가문의 차녀이시라고요. 추기경의 차녀께서 5 두카토 부르셨습니다! 그 외에 아무도 안 계십니까!”
외지인이라서 그런지 호칭이 세련되지 못했다. 그 정도는 웃어넘길 수 있었다.
“아무도 안 계시면 카운트 들어가겠습니다. 5!”
“4!”
“3!”
“8 두카토.”
두 번째 호가를 부른 사람은 방금 아리아드네의 바로 옆자리에 착석한 사람이었다. 카운트를 부르는 동안 부스럭거리며 홀에 뒤늦게 들어온 인물이었는데, 자리가 많이 차 있는 편이기는 했지만, 빈자리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는데 굳이 아리아드네의 바로 옆자리까지 찾아 들어와 앉아서 약간 거슬렸던 차였다. 숙녀가 옆 사람을 빤히 쳐다보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호가를 외치는 가운데였기 때문에 아리아드네는 옆 자리의 사람이 어디의 누구인지 확인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아리아드네 대신에 포르토 상인이 옆 자리의 사람에게 질문을 던졌다.
“두 번째 호가를 부르신 신사분은 어느 분이십니까⋯⋯.”
잠시 웅성웅성하다가 포르토 상인이 주최 측에서 확인을 받고 선언을 했다.
“아! 체자레 데 코모 백작님이라고요!”
아리아드네는 불에 덴 듯이 화들짝 놀라서 옆자리를 홱 돌아보았다. 체자레 데 코모 백작은 막 자리에 앉아서 모자를 벗고 옷매무새를 정리하던 차였다. 높은 콧날과 섬세한 턱선이 적갈색 머리카락 아래로 슬쩍 보였다. 그는 이내 그 적갈색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옆자리를 돌아보았고, 경악해서 그를 바라보던 아리아드네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는 왼쪽 눈썹과 왼쪽 입꼬리를 슬쩍 올려 미소도, 비웃음도 아닌 모호한 표정을 짓고 고개를 까딱해서 아리아드네에게 인사했다. 그 표정은 아리아드네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표정이었다. 그때 마침 포르토 상인이 다음 호가를 부를 사람을 찾았다.
“데 코모 백작님께서 8 두카토 불러 주셨습니다, 8 두카토 나왔습니다! 다음 입찰하실 신사 숙녀분⋯⋯!”
포르토 상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리아드네가 득달같이 외쳤다.
“10 두카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