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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화> 만고에 도움이 안 되는 남자 (550/733)

<제33화> 만고에 도움이 안 되는 남자2021.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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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아드네는 체자레가 지은 그 표정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체자레가 별 볼 일 없는 사람에게 약간의 흥미가 동할 때 짓는 표정이었다. 형용하기 힘든 수치심과 분노가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올랐다. 아리아드네의 이런 감정은 <수선화의 성모>를 반드시 가져야겠다는 결기로 나타났다.

16630316214922.jpg“10 두카토 나왔습니다! 더 없으십니까?”

아리아드네가 체자레를 죽일 듯이 한 번 노려본 것의 효과였는지 그는 거기에서 재차 레이스를 붙지는 않고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내려놓았다.

16630316214922.jpg“5, 4, 3, 2, 1⋯⋯!”

상인은 테이블 위에 단정하게 올려놓아진 <수선화의 성모>를 한 손으로 가리키며 필요 이상으로 큰 갈색 도장을 양피지 위에 드라마틱하게 팡 찍었다.

16630316214922.jpg“데 마레 영애께 낙찰되었습니다―!!”

아리아드네는 그제야 숨을 깊게 내쉬며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다음 작품 역시 우르비노의 베르나르도의 것이었다. 시작가인 5 두카토에서 아리아드네가 응찰하자, 체자레가 곧바로 따라붙었다. 체자레가 듣기 좋은 테너 톤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가격을 불렀다.

16630316214934.jpg“10 두카토!”

아리아드네는 이번에는 옆자리의 체자레를 싸늘하게 째려보고는 더는 손을 들지 않았다.

16630316214922.jpg“10 두카토! 데 코모 백작님께 낙찰되었습니다!”

경쾌한 도장 소리와 두 번째 작품이 체자레에게 돌아갔다. 마지막 세 번째로 올라오는 작품은 아리아드네로서는 양보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오늘의 경매에는 우르비노의 베르나르도의 회화가 총 세 점이 나왔는데, 앞의 두 점은 재테크 목적으로 접근한 것이었지만 이 마지막 작품은 특정인에 대한 선물 내지 뇌물로서의 가치가 있었다. 그녀에게 끈을 대기 위해서, 아리아드네에게 이 마지막 작품은 꼭 필요했다.

16630316214922.jpg“신인 화가의 작품이 인기가 좋습니다! 좋습니다, 좋아요! 다음은 이 작가가 내놓은 오늘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우르비노 성채의 성모>!”

이는 타란토의 비앙카의 어머니인, 이제는 죽고 없는 타란토 공작 부인 카타리나를 모델로 삼아 그린 그림이었다. 우르비노의 베르나르도는 지금 시점까지는 인생에서 우르비노를 단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었을 터였으나, 전대의 타란토 공작 부인인 카타리나는 우르비노 후작 부인인 사촌 자매를 방문하러 우르비노에 몇 달 머문 적이 있었다. 그때 젊은 베르나르도는 고귀한 신분의 젊은 공작 부인을 먼발치에서 보고 영감을 얻어 <우르비노 성채의 성모>를 완성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식 궁정화가도 아닌 베르나르도에게 그 그림에 귀부인의 이름을 달아 그녀에게 바치거나, 혹은 그녀가 모델이라고 공공연히 떠벌리고 다닐 방도는 없었다. 애초에 그녀를 어디서 어떻게 보았냐고 하면 할 말도 없었고 귀부인의 명예에 흠집을 낼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녀를 보았던 장소의 이름을 붙이고 성모를 그린 종교화라고 하여 발표를 했다. 그림의 진짜 모델이 누구였는지는 몇 년 뒤에 알음알음 알려지게 된다. 아리아드네는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타란토의 비앙카와 전혀 접점이 없었으나, 언젠가는 그녀와 안면을 트고 싶었다. 천하를 호령하는 화가가 된 우르비노의 베르나르도가 젊은 시절에 먼발치에서 한 번 만난 귀부인을 동경하면서 그린, 이제는 돌아가시고 안 계시는 그녀 어머니의 초상화는 완벽한 선물이 될 것이다.

16630316214922.jpg“입찰하실 신사 숙녀분 안 계십니까? 5 두카토에 시작합니다!”

1663031621495.jpg“15 두카토!”

아리아드네의 허스키한 저음이 치보 후작가의 홀을 꽉 채우며 울렸다.

16630316214922.jpg- “완전 신인인데 저렇게까지 투자할 가치가 있을까요?”

16630316214922.jpg- “체자레 백작 때문에 페이스를 잃은 것 아니에요?”

16630316214922.jpg- “용감하네요⋯⋯.”

아리아드네의 기세에 청중은 다들 질린 것 같았다. 체자레도 잠시 고민해보는 듯했다. 확실히, 아직 학생 티를 벗지 못한 20대의 젊은 작가에게 15 두카토(약 1500만 원)는 과한 금액이기는 했다. 체자레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응찰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작가의 작품을 이미 한 점은 갖고 있지 않은가.

16630316214922.jpg“5, 4, 3, 2, 1⋯⋯! 데 마레 영애께 낙찰되었습니다!”

  - 땅! 도장 소리가 경쾌했다.

1663031621495.jpg‘방해꾼은 있었지만, 이것으로 오늘 여기 온 목적은 다 달성했어.’

아리아드네는 숨을 내쉬며 의자에 늘어지고 말았다. 이제는 마음 놓고 구경만 해도 될 터였다. 가볍게 나온 나들이였는데 벌써 생각보다 힘든 하루였다. 우르비노의 베르나르도 외에도 몇몇 작가들의 작품들이 경매에 부쳐졌다. 한두 점은 응찰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유찰되었고, 한두 점은 귀족들 간에 경쟁이 붙어서 입찰가를 아득히 따돌리고 높은 가격에 낙찰되었다. 몇몇은 저렴한 가격에 팔렸고, 몇몇은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팔렸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비토리아 니케>가 단상 위로 올라왔다.

16630316214922.jpg“신사 숙녀 여러분―!! <비토리아 니케>입니다!!!”

귀족들은 숨을 삼킨 채 단상 위의 조각상에 주목했다. 바퀴 달린 받침대에 실려서 인부 여덟 명이 달라붙어 간신히 옮긴 대리석 조각상은 전반적으로 핑크빛이 돌았다. 온기를 띤 사람의 피부 같은 색깔이었다. 머리카락을 올려 묶은 젊은 여자가 올리브 가지로 엮은 면류관을 쓰고 양팔을 벌린 채 앞으로 한 발을 내딛는 역동적인 자세의 석상이었다.

16630316214922.jpg- “오오 대단해요⋯⋯!”

16630316214922.jpg- “고대 미술 발굴작품 중에 이렇게까지 보존 상태가 좋은 것은 처음 보는군!”

16630316214922.jpg- “보통 헬레니아 시대의 대리석 조각은 좀 칙칙한 회색인데, 이건 정말로 사랑스러운 핑크색이네요.”

포르토 상인은 자신만만해 보였다.

16630316214922.jpg“<비토리아 니케>에 관한 것이라면 더 드릴 말씀조차 없습니다! 북부 도시 라스테라의 유적에서 최근에 발굴된 헬레니아 시대의 역작! 역사가 할리카르도토스의 <헬레니아 기행문>에서도 언급되었던 바로 그 조각상! 바로 시작하지요!”

포르토 상인은 기세등등하게 경매의 시작을 알렸다.

16630316214922.jpg“시작가는 1200 두카토(약 12억 원)입니다―!”

인파가 웅성거렸다. 살 사람도, 사지 못하고 구경만 하러 온 사람들도 흥미가 돋는 모양이었다.

16630316214922.jpg- “잠깐만, 시작가가 생각보다는 저렴한데?”

16630316214922.jpg- “그러게요? 이렇게 상태가 좋은 물건이 왜 이렇게 싸게 시작하죠?”

16630316214922.jpg- “그러면 낙찰만 받을 수 있으면 완전히 제대로 한 건 하는 것 아닌가요? 이걸 누가 낙찰받게 될까요?”

아리아드네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을 생각이었다. 그녀의 기억이 가물가물했지만, 이건 아마도 발데사르 후작가가 낙찰을 해갔었던 것 같았다.

1663031621495.jpg“아니, 마르케즈 백작가였나?”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갸웃하며 과자를 하나 더 집어 먹었다. 오늘 인파 속에서 발데사르 후작가 사람이 아무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추문이 하도 재미있어서 그 자체는 기억하고 있었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자 막상 그 디테일은 가물가물한 것들이 좀 있었다.

16630316214922.jpg“아무도 안 계십니까!”

상인의 외침에 홀의 가장 앞쪽, 정중앙에 앉은 사람이 손을 들었다.

16630316226479.jpg“내가 입찰하지.”

황금빛 머리카락에 왕가의 상징인 보라색 망토를 두른 알폰소 왕자였다. 아리아드네는 먹던 과자를 뱉을 뻔했다.

1663031621495.jpg‘네가 왜 거기서 나와!’

타는 아리아드네의 속도 모르고 왕자는 침착하게 손을 들었고 경매 진행자는 좋다고 카운트를 진행했다.

16630316214922.jpg“시작가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귀한 물건을, 시작가에서 바로 낙찰이 되게 가만히 내버려 두면 너무 아쉽지 않습니까? 다른 신사 숙녀분 계십니까?”

인파가 웅성웅성했지만 아무도 응찰하는 사람은 없었다.

16630316214922.jpg“카운트 들어가겠습니다!”

16630316214922.jpg“5!”

16630316214922.jpg“4!”

16630316214922.jpg“3!”

16630316214922.jpg“2!”

16630316214922.jpg“1300 두카토!”

홀의 구석에서 손이 올라가고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호가를 불렀다.

16630316214922.jpg“어떤 분이십니까! ⋯⋯오, 마르셀루 백작님이시군요! 1300 두카토 나왔습니다!”

1663031621495.jpg‘아아, 십년감수 했다.’

아리아드네는 긴장으로 몰아쉬었던 숨을 후 내쉬었다. 누군가가 응찰을 해서 천만다행이었다. 하지만 너무 혼란스러웠다. 마르셀루 백작가는 수도에서 오래된 유서 깊은 가문이기는 하지만, 아리아드네의 기억에 <비토리아 니케>를 낙찰받았던 그 가문은 절대로 아니었기 때문이다.

1663031621495.jpg‘발데사르였나? 아니면 마르케즈였나? 누구라도 상관없으니까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아리아드네는 홀을 둘러보았지만 어디에도 발데사르 후작가나 마르케즈 백작가의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행위로 인해 인과가 바뀌는 것은 각오했었던 일이었다. 예를 들어 아세레토의 사도를 저지했기 때문에 성황청 내의 권력 구도가 바뀌는 것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추기경 승진이 예정되었던 주교가 실각하고, 그 주교가 실각해서 그의 가문이 힘이 빠지고, 그 라이벌 가문이 부각되고 그로 인하여 전혀 상관없는 곳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방식의 나비효과 역시 아리아드네의 계산 내지는 각오 속에 있었다. 하지만 성황청에서 아직 공식 인사발령조차 내지 못했을 이른 시점에, 그리고 아무 연관이 없는 사소한 일에서부터 무언가가 바뀔 줄은 몰랐다. 아리아드네는 자신이 오전에 잠시 알폰소 왕자와 정원에서 가졌던 산책이 왕자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아 그가 무심코 충동 입찰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알폰소 왕자는 아리아드네의 속도 모르고 마르셀루 백작의 응찰가를 따라가며 재입찰했다.

16630316226479.jpg“1500 두카토!”

16630316214922.jpg“1500 두카토 나왔습니다―!!! 다른 분 아니 계십니까―!!”

포르토 상인의 자지러지는 비명이 홀을 가득 메웠다. 레이스와 상관없는 구경꾼들은 손에 땀을 쥐며 흥미진진하게 관전했다.

16630316214922.jpg- “1600!”

16630316226479.jpg- “1700!”

알폰소 왕자와 마르셀루 백작의 <비토리아 니케>를 향한 경주는 팽팽했다. 둘 중 누구도 <비토리아 니케>를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알폰소가 호기롭게 외쳤다.

16630316226479.jpg“2000 두카토!”

그때, 앞에서는 경쟁이 펼쳐지는 내내 홀 안을 애타게 살피던 아리아드네의 시야에 드디어 마르케즈 백작과 마르케즈 백작 부인이 잡혔다. 응찰을 하고 싶어하는 마르케즈 백작을 마르케즈 백작 부인이 옆에 붙어서 말리고 있는 형국이었다.

1663031621495.jpg‘참, 마르케즈 백작 부인은 마르그리트 왕비 폐하의 최측근이지⋯⋯!’

갑자기 잡히지 않던 퍼즐 조각이 하나 떠오르며 기억이 좌르르 맞춰졌다. 전생에서 저 조각을 낙찰해 갔던 것은 마르케즈 백작가가 맞았다. 정문 앞의 분수대를 허물고 지었던, 조각을 올릴 쓸데없이 웅장한 받침대까지도 기억났다. 이번 생에서는 알폰소 왕자가 난데없이 <비토리아 니케>에 응찰을 하게 된 것이 패착이었다. 왕비와 가까운 마르케즈 백작 부인이 마르그리트 왕비의 배로 낳은 왕자인 알폰소가 낙찰받을 수 있도록 남편을 설득해 <비토리아 니케>에의 응찰을 막고 있는 모양이었다. 섬세한 충성심이었지만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1663031621495.jpg“안 돼, 저건 마르케즈 백작가가 사야 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마르케즈 백작 부인을 말리러 아리아드네가 살짝 빠져나가려던 순간이었다.

16630316214934.jpg“알폰소 왕자가 저 조각을 사면 왜 안 되지, 꼬마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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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옆자리에서 내내 모자를 푹 눌러쓰고 경매를 구경하던 체자레 백작이 말을 건넸다. 아리아드네가 눈을 홉뜨고 옆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뭐라고 질타의 말을 하기도 전에 체자레 백작이 목소리를 크게 높여서 홀 전체에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16630316214934.jpg“여기 이 꼬마 아가씨가 저 조각은 사면 안 되는 조각이라고 하시는데, 어떻게 생각하시오, 포르토 공화국에서 온 빈센시오 델 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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