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화> 특별 대우2021.04.07.
알폰소 왕자의 명령에도 체자레는 아리아드네의 손목을 바로 놓지 않았다. 알폰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황하거나 흥분하지 않고, 체자레의 코앞까지 걸어가 전혀 언성을 높이지 않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말을 못 들었나 보군. 그 손 놓지, 데 코모 백작.”
체자레보다 네 살 어린 알폰소는 아직 누가 보나 완연한 소년이었다. 뺨에 난 솜털과 부드러운 피부, 앳된 목소리 같은 것들이 그의 나이를 숨기지 못하고 드러냈다. 하지만 태도에 깃든 기품은 어린 나이를 무색하게 했다. 체자레는 체구가 호리호리한 것에 비해 키가 큰 편이라서 4 피에디 하고도 3 디토(약 183 센티미터)나 되었다. 하지만 아직 한창 자라는 중이라 그보다 반 뼘은 작은 알폰소 왕자는 곧게 쭉 벌어진 어깨와 단단한 체구를 가져 자기보다 훨씬 큰 체자레의 옆에 서서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그 대치 상태에서 왕자는 온화하게 한 번 더 말했다.
“그리고 백작은 왕족에게 예를 표하는 것도 잊어버린 것 같군.”
이것은 무시할 수 없는 말이었다. 일반인이 왕족에게 예를 표하지 않은 경우 왕실 모독죄로 처벌을 받게 된다. 체자레는 레오 3세의 인지를 받지 못했다. 그는 공식적으로 왕족이 아니었다. 체자레는 이를 악물고 아리아드네의 손목을 붙든 채로 알폰소에게 왕족에게 하는 목례를 했다. 알폰소는 체자레가 붙든 아리아드네의 손목을 흘깃 바라보더니, 체자레를 똑바로 바라보며 한 번 더 말을 꺼냈다. 왕자의 목소리는 매우 평온했고, 대리석 위에 물방울이 미끄러지듯 고저가 없었다.
“데 코모 백작. 그 인사 말고. 우리는 오늘 지금 처음 만나는 자리라네.”
에트루스칸 왕국에선 공식적으로 왕족을 알현할 때에는 남녀 모두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상태로 첫인사를 올렸다. 같은 날 두 번째로 만났거나, 노령이나 거동 불편 등을 이유로 왕족이 괜찮다며 양해해 주었거나, 혹은 아주 막역한 사이인 경우에는 남자는 왕족에게 하는 목례, 여자는 드레스 자락을 잡고 무릎을 굽혀 보이는 인사로 갈음할 수 있었다. 알폰소 왕자는 이 점을 지적한 것이었다. 알폰소는 웬만한 경우에는 소탈하게 왕족에 대한 인사를 사양하며 넘기는 편이었으나, 이번만큼은 에누리가 없었다. 체자레는 이를 갈면서 아리아드네의 손목을 놓은 다음에 한 걸음 뒤로 떨어져서 알폰소에게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고 고개를 깊게 숙여 인사를 올렸다. 동작 하나하나가 느릿하고 원한에 차 있었다. 어찌나 이를 박박 갈고 있는지, 그의 턱 근육은 터져나갈 것 같이 부푼 채였다. 아리아드네는 체자레가 오늘 밤에 잠이 안 올 정도로 화가 났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체자레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무릎 꿇기인데.’
무릎 꿇기 중에서도 체자레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배다른 남동생인 알폰소에게 꿇는 무릎이었다. 한때 체자레가 왕위 찬탈을 결심한 이유 중 3할 정도는 왕이 된다면 법황을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지 않아도 되기 때문 아닐까 생각해 보았을 정도였다. 알폰소는 심지어 체자레의 인사를 바로 받아주지도 않았다. 그는 체자레를 그대로 바닥에 꿇려 놓은 상태로, 체자레에게서 풀려나 손목을 매만지고 있던 아리아드네에게 인사를 했다.
“좋은 오후입니다, 데 마레 영애.”
“왕국의 작은 해이신 알폰소 왕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녀도 무릎을 꿇고 인사를 하려던 찰나에, 알폰소 왕자가 그녀의 팔을 붙잡고 만류했다.
“데 마레 영애, 우리는 오늘 오전에 이미 만났잖아요.”
무릎은 체자레만 꿇고 아리아드네는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였다. 아리아드네는 작은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다행히 소리를 내는 것은 자제하는 데에 성공해서, 웃는 표정은 알폰소 왕자만 보았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체자레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알폰소 왕자는 싱긋 웃고는 아리아드네를 자기 쪽으로 잡아당겼다.
“데 마레 영애, 이쪽으로 오세요. 치보 후작 내외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끄덕여 알폰소 왕자의 등 뒤로 넘어갔다. 체자레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였다. 알폰소는 아리아드네가 체자레로부터 안전한 거리까지 벗어난 후에야 잊고 있었다는 듯이 체자레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아, 데 코모 백작. 만나서 반가웠네. 이제 가보게.”
분노로 얼굴에 핏대가 서 있는 체자레를 향해 아리아드네가 알폰소 왕자의 등 뒤에 서서 한마디 덧붙였다.
“아 참, 치보 후작가 마룻바닥 수리비는 그쪽이 대세요!”
체자레는 알폰소 왕자 앞임에도 불구하고 돌을 발로 찰 뻔한 자신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저 쥐방울만 한 꼬맹이가! * * * 아리아드네와 알폰소는 치보 후작가의 본관으로 걸음을 옮기며 담소를 나눴다.
“정말 대단해, 아리아드네. 넌 원래 저게 위작이라고 알고 있었던 거야?”
알고는 있었는데⋯⋯. 뭐라고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전생의 미래에서 보고 왔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의심만 하고 있었어. 작품이 너무 깨끗하지 뭐야. 결국엔 잘 풀려서 너무 다행이야.”
“미리 귀띔해 줬으면 안 샀을 텐데.”
“네가 살 줄 몰랐지!”
알폰소 왕자가 멋쩍게 웃었다. 그는 이 소녀 앞에만 서면 멍청이가 되는 것 같았다.
“그건 또 그렇네.”
하지만 잠시 뒤에는 다른 생각이 들었다.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라도 나와 나누어 줄 만큼 친근하지는 않은 사이인 걸까. 그래서 왕자는 재차 물었다.
“그런데 왜 확신이 없는데도 터트린 거야?”
알폰소는 본인이 인식하고 있지는 못했지만 내심 듣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래서 집요하게 그녀의 답을 물었다.
“아, 그건⋯⋯.”
아리아드네는 잠깐 머뭇거렸다. 네 배다른 형이 쓰레기 짓을 해서, 라는 것도 일어난 사실에 대한 적합한 서술이었겠지만 감정적으로는 더 솔직한 답이 있었다.
“네가 살 것 같아서.”
알폰소 왕자의 얼굴이 훅, 붉어졌다. 그가 무의식중에 갈구하던 답이었다. ‘네가 특별해’. 그가 듣고 싶었던 단어가 그녀의 입술에서 나왔다. 알폰소는 그녀에게 하나의 질문을 더 하고 싶었다. 하지만 분위기가 야릇해지기 전에 아리아드네는 예의 빵 터지는 웃음을 경쾌하게 뿌리며 알폰소의 어깨를 한 대 쳤다. 소년은 아쉬움에 입술을 닫아야 했다.
“너, 내 덕에 2000 두카토(약 20억 원) 아낀 거다? 은혜 갚아야 한다?”
너무나도 담백한 그녀 덕에 알폰소는 본인의 상념에서 강제로 빠져나왔다. 그 역시 그녀와 함께 웃었다.
“그게 그렇게 되나? 이거 금액이 정말 큰데? 이 은혜는 어떻게 갚아야 할까요, 영애?”
“2000 두카토 금화 일시불 지급?”
“대도가 여기 계셨네!”
알폰소는 짐짓 크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두 손 두 발을 모두 들어 보였다.
“포르토 상인은 가짜 조각상이라도 가져왔지 영애께서는 아주 맨입으로 드시려고 하시는군요!”
알폰소 왕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리아드네가 또 한 번 경쾌하게 웃었다.
“나중에 소원 들어줘!”
“소원? 뭘 빌 건데?”
왕자의 반문에 아리아드네는 캐주얼하게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
“나도 몰라.”
“그래, 알았어.”
알폰소 왕자는 그 내용이 확정조차 되지 않은 채무 이행 약속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궁정 신하들이 보았다면 ‘통촉하시옵소서 전하, 그러시면 아니 되옵니다’를 단체로 외칠만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리아드네에게 뭐라도 다 내주고 싶었다. 그녀와 얽힐 핑계라면 무엇이든 좋았다. 아리아드네가 왕국을 달라고 하면 협상을 빙자해 3주일은 더 볼 수 있을 것 아닌가.
“하아, 이제는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
오늘 만남의 끝을 고한 것은 그들 사이에서는 최초로 알폰소 왕자였다. 알폰소는 저녁에 왕궁에서 석찬 모임이 예정되어 있어 일정에 맞추려면 서둘러서 궁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는 발걸음을 떼기 아쉬운 마음에 아리아드네 쪽을 두어 번 쳐다보다가, 손으로 필기하는 흉내를 내보였다.
“편지 써!”
“응?”
“아니다, 내가 편지 쓸게! 답장해!”
아리아드네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는 재차 확인했다.
“답장 꼭 해야 해!”
고장 난 태엽 인형처럼 아리아드네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데에도 불구하고 안심이 안 되는지 알폰소 왕자는 두 번, 세 번 확답을 받고서야 마차에 올랐다. 황금으로 칠을 한 사두마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치보 후작가의 정문을 떠나는 와중에 사두마차 뒤의 커튼이 드르륵 걷히고 창문 밖을 내다보는 알폰소 왕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아리아드네는 웃으며 마차가 더 이상 안 보일 때까지 손을 오래오래 흔들어 주었다. * * * 치보 후작가에서 포르토 상인의 사기극을 밝혀낸 일이 온 산 카를로에 소문이 난 이후로 아리아드네는 또 데 마레 추기경에게 끌려가서 ‘혜안’의 출처를 밝히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 그녀는 집 안을 뒤져 고미술품과 고고학, 고대 헬레니아 시대의 역사를 기술한 책들을 모두 찾은 다음 새로 생긴 그녀의 서재에 높이 쌓아두고 읽었다. 누가 ‘그 사실은 어떻게 알게 되었냐’라고 물어봤을 때 바로 암기해서 대답할 수 있도록 해당 내용이 관련 문헌 몇 장 몇 절에서 나오는지를 싹 정리해 놓은 이후에야 한숨 돌리고 여유를 찾았다. 포르토 공화국 출신 상인인 ‘빈센시오 델 가토’의 이름을 사칭한 자는 라스테라 출신 귀족의 서출인 한 조각가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들은 도박 친구 사이였는데, 도박 자금 관련해서 진짜 빈센시오 델 가토와 다툼을 벌이다가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고는, 기왕 사람을 죽인 김에 도박 때문에 진 빚도 청산할 겸 빈센시오 델 가토의 이름을 빌려 겸사겸사 그의 미술품 창고도 털고, 사기도 크게 한탕 치고 잠적할 요량으로 일을 벌였던 것이었다.
‘체자레는 닭 쫓던 개 신세가 됐겠네.’
이 이야기를 들은 아리아드네는 내심 고소해했다. 체자레는 이 뒤에 상인 조직과 이권 다툼, 포르토 공화국의 내부 문제 같은 것도 있을 줄 알고 부왕의 눈에 들기 위해 판을 벌였을 텐데. 막상 다 캐고 나니 개인의 일탈 행위라니, 이건 치보 후작가의 마룻바닥 값도 안 나올 만한 일이었다. 하늘은 높고 날씨는 청명했다. 무더위가 일찍 가신 아름다운 초가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데 마레 추기경이 본인의 응접실에 아리아드네와 루크레치아를 모두 호출했다. - 똑똑. 아리아드네는 데 마레 추기경의 응접실 문에 노크를 한 후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응접실에는 루크레치아가 이미 와서 앉아 있었다.
“아버지, 불초 자녀 부르셨습니까.”
“음. 게 앉거라.”
그녀는 남들 앞에서 데 마레 추기경을 괴롭히고 싶을 때 외에는 이제껏 그를 꼬박꼬박 ‘추기경 예하’라고 불렀지만, 데뷔탕트 무도회를 열어주겠다는 약속 이후로 그만 마음이 조금 풀어져 아버지라고 그를 지칭하고 말았다. 루크레치아는 저 호칭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아니면 이미 데 마레 추기경에게 무슨 이야기라도 들었는지 불만에 가득 찬 표정이었다.
“네 어머니하고는 이미 이야기를 마쳤다. 네가 나이도 차고 했으니 아마 여러 가지 개인 지출이 있을 것으로 안다.”
‘금고도 샀고 미술품도 샀지요.’
속으로는 날름 말대답을 하는 중이었지만 아리아드네는 겉으로는 고개만 더욱 숙여 보였다.
“송구합니다, 아버지.”
“아니, 아니, 다 자란 딸이 적당한 개인 지출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그래서, 네 개인 지출은 네가 직접 용돈을 받아서 관리를 해 보는 게 어떨까 싶다. 조만간 데뷔탕트 무도회를 열어야지?”
아리아드네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그간 못 누리고 살았으니 지금이라도 따라잡아야지. 데뷔탕트 무도회에 대한 일체의 예산도 네게 주겠다.”
데 마레 추기경은 루크레치아를 흘긋 곁눈 짓 했다.
“네 어머니가 요새 몸이 별로 좋지 않아서 무도회 준비에 많이 도움을 주지 못할 것 같구나.”
루크레치아는 꿩처럼 건강했다. 다만 데 마레 추기경은 루크레치아에게 구박받는 둘째의 무도회 준비를 맡겼다가는 전체 예산의 절반 정도는 루크레치아의 뒷주머니에 잠시 머물렀다가 지긋지긋한 루크레치아의 친정 사람들에게로 모두 흘러갈 것이라고 몹시 합리적으로 예측했다. 구멍 난 예산으로 마련된 초라한 데 마레 가의 무도회의 오명은 가장인 본인이 뒤집어쓰게 되겠지. 루크레치아는 뒷주머니를 차다가 집안의 경제권을 일부라도 뺏겼다는 이야기를 굳이 자기 입으로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데 마레 추기경의 핑계에 아픈 척 동참하기로 했고, 아리아드네도 두 분이 이렇게 합의까지 했는데 굳이 실체적 진실을 들고나와서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릴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더할 나위 없이 건강한 루크레치아의 건강을 사뭇 걱정하며 덕담 한두 마디를 나눴다.
“일단 150 두카토(약 1억 5000만 원)를 주마. 이걸로 준비를 해 보고, 모자라면 언제든지 와서 더 달라고 해.”
그는 정부도 믿지 않았지만 열다섯 살 먹은 작은 딸도 믿지 않았다. 데 마레 추기경이 생각한 데뷔탕트 무도회의 적정 예산은 약 300 두카토였고, 최대로 지출을 하게 된다고 치면 500 두카토였다. 일단 쪼들리게 내주고 진행 상황을 확인할 요량이었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9년간 에트루스칸 왕궁의 살림을 꾸려나갔던 프로 중의 프로 관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