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40화> 파트너 자리를 원하는 세 남자 (557/733)

<제40화> 파트너 자리를 원하는 세 남자2021.04.21.

왕자의 편지는 편지라기보다는 쪽지였다. 「놀라운 아리아드네에게. 그날 잘 들어감? 왕궁 정원 가득히 수국이 피어서 생각나서 연락함. 왕궁에서 만날 일이 생기면 좋을 텐데. - A.」 왕자가 보낸 메시지치고는 자못 로맨틱했다. 예전에 그들이 정했던 비밀 애칭마저 적혀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인생에 단 한 번뿐인 데뷔탕트 무도회에 혐오감이 드는 가짜 사촌과 입장해야 하게 생긴 아리아드네로서는 그 행간을 읽을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다급하게 자기 할 말만 하는 답장을 썼다. 「친애하는 알폰소에게. 소원권을 벌써 쓸 줄 몰랐음. 도움이 필요함. 데뷔탕트 파트너가 되어 주겠음? 왕자님과 함께 입장하는 데뷔탕트가 되어야겠어.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알려 줄게. - 아리아드네.」 답장은 생각보다 몹시 빨리 왔다. 아리아드네가 인편에 편지 답장을 보낸 것이 자노비가 도착한 날의 늦은 오후였는데, 다음 날 아침 일곱 시에 왕자의 파발이 도착한 것이다. 왕궁에서 다음 날 아침 특급으로 보내라고 닦달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속도였다. 「친애하는 아리아드네에게, 네가 왕자와 함께 데뷔하는 데뷔탕트가 되는 데에 소원권까지 쓸 필요는 없어. 날짜와 장소를 알려줘. - 알폰소.」 아리아드네는 알폰소의 쪽지를 받고 잠시간 멍하니 서 있었다. 가장 먼저 와 닿은 것은 전생과 현재 사이의 차이였다. 데뷔탕트조차 치르지 못하고 꽃다운 나이에 바로 유부녀에 준하는 취급을 받으며 시작했었는데, 지금은 모든 소녀가 꿈꾸는, 왕자님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단독 데뷔탕트 무도회를 가지는 입장에 와 있었다.

16630316654018.jpg‘이거, 꿈은 아니겠지?’

슬쩍 손등을 꼬집어 보았지만 확실히 아팠다. 그리고 두 번째로 와 닿는 것은 왕자의 조건 없는 호의에 대한 생경함이었다. 오래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그녀에게 무조건적인 호의를 베풀어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생의 몇 안 되는 아리아드네의 지인들도 그녀와 조건부 호의 내지 교류만을 주고받았다. 아리아드네가 그들에게 어떤 이권을 줄 수 있기 때문에, 혹은 아리아드네가 그들의 푸념을 성심성의껏 들어주었기 때문에 그들은 아리아드네의 감정을 보듬어 주거나 이야기를 들어주고는 했다. 체자레와 데 마레 가문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자면, 푸념하는 입이 아플 정도로 준 것에 비해 돌려받은 것이 없었다. 사랑, 애정, 청춘, 믿음, 헌신, 노고, 충성이 모두 배신당했고 이용당했다. 그런 관계들에만 익숙한 아리아드네에게 왕자의 이런 호의는, 고마움 조금에 어색함 대부분, 그리고 약간의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아리아드네가 멍하게 서 있는 동안 산차가 달려와서 고개를 들이밀었다.

16630316654024.jpg“아가씨, 왕자님이 뭐라고 하셨어요?”

아리아드네 손에 들린 쪽지를 건네받은 산차는 최근 배우고 있는 읽기 실력을 발휘해 더듬더듬 내용을 읽어보더니 비명을 질렀다.

16630316654024.jpg“꺄!!!! 정말이에요 아가씨?!”

16630316654018.jpg“쉿, 쉿, 조용히 해.”

16630316654024.jpg“너무 잘됐어요! 자노비 녀석⋯⋯. 아니, 도련님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 주자고요!”

  * * * 아리아드네의 데뷔탕트 파트너가 이렇게 정해졌지만 아리아드네와 알폰소는 이 사실을 무도회 직전까지는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아리아드네로서는 알폰소 왕자가 데뷔탕트 파트너가 되어 주기로 했다고 공식적으로 이야기하면 우선 집에서 이사벨라와 루크레치아의 눈총을 받으며 몇 주간을 보내야 하는 점이 골치 아팠다. 이사벨라는 순수한 질투로, 루크레치아는 거기에 더해서 자기 친정 조카에게 수고비 조로 돈을 쥐여줄 이벤트가 없어져서 아리아드네를 구박할 것이었다. 성문법까지는 아니었지만, 데뷔탕트의 파트너는 친인척이 아니면 대개 부모님의 인맥으로 구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부모님이 정해주시는 것 관례였다. 사전에 파트너를 알폰소로 교체한 사실을 루크레치아에게 알렸다가는 루크레치아가 ‘엄마는 동의 못 한다’고 뒤로 넘어갈 수가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왕자의 에스코트가 무위로 돌아갈 우려가 있었다. 루크레치아는 순발력이 좋은 인물은 아니었기 때문에, 당일 아침에 왕자가 나타나서 본인이 파트너를 서겠다고 하면 거기에다 대고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리아드네는 루크레치아의 반대는 왕자의 권위와 기습의 협동으로 뭉개기로 했다. 게다가 이사벨라는 마음에 거슬리면 뭔가 고약한 짓을 필시 하고야 마는 종류의 위인이었다. 어떤 심술을 부릴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변수는 줄이면 줄일수록 좋았다. 그리고 자노비가 있었다. 자노비의 체면을 위해서라면 미리 알려주는 편이 좋았겠지만 그놈은 좀 당해봐야 했다. 자노비가 당일 오전에야 왕자와 교체되었다는 사실을 통보받고 부들부들 떨 몰골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16630316654018.jpg“어딜 넘봐, 기분 나쁜 놈.”

아리아드네의 데뷔탕트 무도회에서 파트너로서 그녀를 에스코트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비밀로 하는 것은 알폰소에게도 마음에 드는 일처리 방식이었다. 그에게는 사소하게 보자면 스케쥴의 문제, 크게 보자면 외교적인 문제가 있었다. 알폰소 왕자의 일정은 원칙적으로는 왕자 본인이 정하는 것이 맞았지만 이제까지는 어머니인 마르그리트 왕비가 일일이 관여했다. 허락을 받고 간다면야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알폰소의 느낌상, 마르그리트 왕비와 레오 3세는 알폰소가 아리아드네의 데뷔탕트 파트너가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았다.

16630316654046.jpg“갈리코의 공녀와 혼담이 오가고 있어. 더더욱 몸가짐을 바르게 해야 한다.”

어머니가 며칠 전 그에게 슬쩍 귀띔한 내용이었다.

1663031665405.jpg“그냥, 곤란에 빠진 친구를 도와주는 것뿐인데.”

혼담이라거나, 결혼동맹 같은 거창한 일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라고 알폰소는 무의식중에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었다. 그는 비서관에게 자신의 일정을 확인했다.

1663031665405.jpg“베르나르디노, 다음 달 셋째 주 토요일에 내 일정이 있나?”

16630316654024.jpg“아직은 비어 있습니다, 왕자님.”

1663031665405.jpg“그날 비워 둬. 아무 일정도 잡지 마. 어마마마, 아바마마께서 부르시는 것도 모두 포함이야.”

16630316654024.jpg“무슨 일 있으신지요?”

이때 ‘데 마레 추기경 자택에서 열리는 추기경의 둘째 여식의 데뷔탕트 무도회에 참여한다’고 일러두는 것이 일상적인 일 처리였을 것이다. 하지만 알폰소는 침묵을 택했다. 그는 자신의 비정형적인 일 처리야말로 자신의 마음 상태를 대변한다는 사실을 아직 눈치채지 못했다.

16630316656766.jpg

1663031665405.jpg“내가 개인적으로 할 일이 좀 있어. 그날은 오전부터 밤늦게까지 다 비워 놓도록 해.”

  * * * 아리아드네의 데뷔탕트 파트너 자리를 노리는 것은 자노비와 알폰소 왕자뿐만이 아니었다.

16630316656774.jpg“그 아이가 이번에 따로 데뷔탕트 무도회를 연다고?”

16630316654024.jpg“네, 그렇습니다 백작 부인.”

시녀의 전언에, 루비나 백작 부인은 긴 벨벳 의자에 기대어 누워서 자신의 눈 색깔과 꼭 같은 적포도주를 촛불에 반사해 그 빛깔을 들여다보았다.

16630316656774.jpg“파트너는 누구라고 하더냐?”

16630316654024.jpg“루크레치아 데 로시의 친정 쪽 조카라고 들었습니다.”

루비나 백작 부인의 입가에 미소가 띄워졌다.

16630316656774.jpg“별거 없는 놈이겠구나. 어느 모로 봐도 우리 아들이 훨씬 낫지. 안 그러니, 아들?”

그녀는 어머니의 응접실 구석에 앉아 있는 체자레를 바라보았다.

16630316656774.jpg“이번에 그 아이가 라스테라 조각상이 가짜라는 걸 밝혀냈다며? 궁정에서 그 아이 이야기밖에 안 하더구나. 평민들 사이에서 인망이 높다고 하던데?”

1663031666963.jpg“어머니가 무슨 말씀 하실지 알아요. 그냥 거기까지만 하세요.”

체자레는 인생을 팍 쓴 상태로 어머니의 응접실 구석에 구겨져 있었다. 일이 마음대로 풀리는 것이 없었다. 큰 꿈을 가지고 뒷조사를 해본 포르토 공화국 상인 건은 말짱 꽝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포르토 공화국의 재무장관인 베나시오 델 가토가 조카를 이용해서 국외로 재산을 빼돌리는 줄 알았다. 베나시오 델 가토라면 포르토 공화국 내에서도 차대 통령 후보로 하마평에 오르는 상당한 유력자였다. 그가 에트루스칸 왕국으로 빼돌린 재산을 압수한다면 그의 반대파에게 빚을 지워 놓는 셈이 된다. 아니면 정반대로, 베나시오 델 가토의 조카가 살해당한 것을 발견한 다음에는 조카의 살인범을 잡아서 베나시오 델 가토에게 빚을 지울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까고 보니 도박 때문에 일어난 단순 살인이었다. 알폰소 애송이가 열심히 공이나 차고 있는 동안에 본인은 정치력이 있음을 과시해서 아버지의 눈에 들고 싶었는데 말짱 꽝, 모두 헛수고였다.

16630316656774.jpg“체자레, 고집부리지 말고 엄마 말 귀담아들어. 왕이 되려면 인망이 높아야 하고 명성이 높은 배우자가 있어야 거기에 도움이 된―.”

1663031666963.jpg“거기까지만 하시라고 했잖아요!”

체자레는 벌컥 화를 냈다.

1663031666963.jpg“저도 다 나름대로 생각이 있다고요!”

잘 안 풀렸지만.

1663031666963.jpg“걔가 무슨 계승권을 가진 공주도 아니고 걔랑 결혼만 하면 왕위가 덜렁 떨어진답니까? 좀 합리적으로 사고하시라고요!”

아들의 반항에 루비나 백작 부인의 미간에 굵은 주름이 갔다.

1663031666963.jpg“그리고 그 쥐방울만 한 꼬맹이 성격 장난 없습디다!”

여기에서 굴할 루비나 백작 부인이 아니었다.

16630316656774.jpg“열다섯 살 먹은 사춘기 아이가 성격이 무던하면 그게 신기한 거지! 어린 여자애 하나 못 녹이고 여기까지 와서 나한테 찡찡대는 꼬락서니를 보면 네가 무능한 것 아니냐?”

체자레의 푸른 눈에 짜증과 분노가 서렸다.

1663031666963.jpg“그만 좀 하시라고요! 지금 저한테 그 애한테 데뷔탕트 파트너 신청하라고 하시는 거죠? 죽어도 안 할 겁니다!”

그리고 차마 어머니한테 말하지 못한 그의 내심은, ‘신청해 보았자 거절당할 것이 뻔하다’였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역시 어머니라 루비나 백작 부인은 아들의 속내를 귀신같이 꿰뚫어 보았다.

16630316656774.jpg“무서워서 시도조차 못 하는 꼬락서니가 아주 패배자가 따로 없구나.”

1663031666963.jpg“아 진짜!”

루비나 백작 부인의 비아냥에 체자레는 의자 위에 던져놓았던 망토를 집어 들고 어머니의 응접실을 박차고 나갔다. - 쾅!!  

16630316656774.jpg“저거, 저거 저거! 성질머리 한 번 고약해 빠져서는!”

루비나 백작 부인은 자신을 꼭 빼닮은 아들의 뒷모습을 보며 화를 냈다.

16630316656774.jpg“엄마 말은 죽어도 안 듣지! 제가 그런다고 내가 마음대로 못할 것 같아?”

화가 난 나머지 그녀가 포도주잔을 빙글빙글 돌리던 손길이 거칠어지자 적포도주가 잔을 넘어 벨벳 의자 위로 튀겼다. 루비나 백작 부인의 시녀가 얼른 다가와 공손하게 포도주를 닦아내고는 그녀의 눈짓에 다음 잔을 더 따라주었다.

16630316654024.jpg“백작 부인, 묘수가 있으신가요?”

루비나 백작 부인은 시녀의 질문에 음험하게 적갈색 눈을 반짝였다.

16630316656774.jpg“있다마다. 나는 이제까지 살면서 단 한 번도 마음먹은 일을 못 이룬 적이 없단다.”

  * * * 왕궁의 악당이 아리아드네의 영광에 무임승차하는 것을 노리고 있는 와중에, 데 마레 추기경 관저의 악당은 비교적 정직하게 아리아드네의 영광을 깎아내릴 궁리를 하고 있었다.

16630316677535.jpg“걔 드레스를 라지오네에서 맞추기로 한 게 맞아?”

16630316677539.jpg“네, 라지오네 양장점의 마리니 부인이 다녀갔다고 들었습니다.”

16630316677535.jpg“도대체 무슨 자신감이지?”

미모는 돈으로 가꾸는 것이었다. 금전을 들이면 들일수록 더 태가 났다. 이사벨라의 생각에 그렇게 뛰어나게 예쁘지도 않은 아이가 의상실도 아니고 양장점에서 데뷔탕트 드레스를 맞춘다는 사실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16630316677539.jpg“아가씨가 최고로 예쁘시겠어요.”

콜레지오니 의상실에서 한창 준비하고 있는 이사벨라의 드레스는 포르토 상인들을 통해 수입한 무어 제국의 직물인 오간자로 만드는 중이었다. 얇고, 빛이 나고, 하늘하늘한 실크의 일종인 오간자는 아직 양잠 산업이 발달하지 못한 에트루스칸에서는 만들지 못했다.

16630316677535.jpg“나도 그렇게 생각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사벨라는 손톱을 자근자근 씹었다. 어딘가 불안했다.

16630316677535.jpg“좀 확실하게 내가 더 돋보일 방법 없을까?”

모시는 아가씨의 요청에, 말레타는 단순무식하지만 확실한 방법을 제시했다.

16630316677539.jpg“당일에 드레스 위에 와인이라도 엎을까요?”

이사벨라는 너무나도 짧은 하녀의 식견에 팩 짜증을 냈다.

16630316677535.jpg“그럼 너무 누가 했는지 티가 나잖아! 그리고 걔가 불쌍해 보이잖아!”

말레타를 꾸짖은 이사벨라는 문득 좋은 생각이 났는지 그녀에게 질문을 하나 했다.

16630316677535.jpg“맞다, 네가 아리아드네도 ‘가슴 주머니’를 쓰는 것 같다고 그랬지?”

16630316677539.jpg“틀림없다니까요, 아가씨. 산차 계집애가 광목천을 들고 나가서 정기적으로 빨래하는 걸 봤어요. ‘가슴 주머니’를 안 쓰면 광목천을 어디에 쓰겠어요?”

이사벨라는 부족한 바스트를 무어 왕국에서 특별히 공수해 온 ‘가슴 주머니’와 광목천을 사용해서 만들어내고는 했다. 그 부분은 이사벨라의 가장 큰 콤플렉스였다.

16630316677535.jpg“무도회에서 ‘가슴 주머니’가 흘러내리면 진짜 볼만하겠다, 그지?”

이사벨라의 자수정 눈이 조그맣게 변했다. 말레타가 맞장구를 쳤다.

16630316677539.jpg“광목천이 풀리면 솜뭉치가 튀어나올 거 아니에요! 엄청 티 나고 흉할걸요! 게다가 사교계에 ‘가슴 주머니’같은 삿된 물건을 차고 있다고 소문이 쫙 나겠죠? 도저히 얼굴 들고 못 다니겠는데요?”

산 카를로의 사교계에서 귀부인은 아름다워야 칭송을 받았지만 어디까지나 자연스럽게 예뻐야 했다. 지나치게 진한 화장이나 인위적인 보정 같은 것은 백안시되었고, 카람판의 코르티잔 같다는 뒷말을 불러왔다. 정숙한 귀족 영애로서의 명성에 치명타를 불러오는 것은 물론이었다. ‘가슴 주머니’는 산 카를로의 다른 귀부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고, 무어 제국에서 암암리에 수입되는 정도였다. 당연히, 사용 사실이 밝혀지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었다. 데뷔조차 하지 않았는데 사교계에서 이름이 날로 높아지는 이복 여동생을 견제하던 이사벨라의 눈에 이것이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이사벨라의 조그매진 눈이 음험하게 빛났다.

16630316681808.jpg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