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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화> 데뷔탕트 무도회 (2) (560/733)

<제43화> 데뷔탕트 무도회 (2)2021.05.02.

국왕 폐하의 사절인 체자레 백작은 실내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와 데 마레 추기경이 서 있던 입구 근처의 강단을 선택했다. 국왕의 사절이 올라오자 데 마레 추기경은 황급히 옆으로 비켜 강단을 양보했다. 체자레는 자신을 향해 모두 부복한 무도회 손님들을 눈 아래로 내리깔아 돌아보며, 국왕 폐하의 칙서를 펼쳤다. 그의 목소리로 전해지는 국왕의 메시지였다.

16630316833632.jpg“나의 백성은 들으라. 오늘 데 마레 추기경의 차녀, 아리아드네 데 마레가 데뷔탕트 무도회를 갖는다. 산 카를로의 충실한 신민인 아리아드네 데 마레는 신앙심이 깊어 나라의 백성들이 널리 본을 받을 만한 소녀로, 일전에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운 바 있다. 이에 그 성인이 됨을 축하하고, 그 데뷔탕트 무도회에 그녀를 에스코트할 파트너로 데 코모 백작 체자레를 보낸다. 이상.”

무도회장 안의 모든 관중이 마치 그가 국왕이라도 되는 양, 국왕 폐하를 모시는 것과 동일한 예를 갖추어 모시고 있었다. 그는 척추를 타고 오르는 짜릿함을 만끽하며 양피지를 다시 돌돌 말아 옆의 시종에게 건넸다. 그리고 그제야 강단 위의 데 마레 추기경에게 눈을 맞추고 인사했다.

16630316833632.jpg“오늘 이렇게 뵙게 되었습니다, 데 마레 추기경 예하.”

데 마레 추기경은 마주 목례를 했다.

16630316833647.jpg“체자레 백작. 보잘것없는 우리 집에 이렇게 와 주어서 영광입니다.”

16630316833632.jpg“따님은 오늘 하루 제가 잘 모시겠습니다.”

16630316833647.jpg“국왕 폐하께 감사드려야 하겠군요.”

체자레는 고개를 까딱해서 국왕에게 전달하는 그 인사를 대신 받았다. 그는 데 마레 추기경과 함께 올라 있던 강단에서 내려가 메인 홀의 반대편 끝, 아리아드네와 알폰소 왕자가 있는 연단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개선장군의 행진 같았다. 체자레는 만인의 주목을 한몸에 받으며 무도회의 주인공처럼 무도회장을 누볐다. 좀 전에 들어갔던 알폰소 왕자를 본 하객들만 웅성대고 있을 뿐이었다.

16630316833632.jpg‘⋯⋯!’

연단 끝에 도착한 체자레는 그제야 연단 아래에 서 있는 알폰소 왕자를 발견했다. 알폰소의 표정, 태도, 순백색의 의상과 아리아드네를 에스코트하던 그의 자세를 보고는 체자레의 입가에 위험한 미소가 걸렸다.

16630316833632.jpg‘뭐야, 그런 거였어?’

체자레는 과장되게 놀란 척을 하며 알폰소 왕자에게 인사했다.

16630316833632.jpg“아니 이게 누구야, 왕국의 작은 태양 아니십니까?”

알폰소의 준수한 미간에 약간의 주름이 잡혔다. 체자레는 빈정대며 알폰소를 약 올렸다.

16630316833632.jpg“오늘은 국왕 폐하의 대리인으로 왔으니 인사는 생략하겠습니다, 전하.”

며칠 전 무릎 인사의 굴욕을 되갚는 말이었다.

16630316833632.jpg“에트루스칸의 태양이신 레오 3세 국왕 폐하께옵서 이 영애의 데뷔탕트 파트너는 저라고 하시는군요. 비켜 주셔야겠지요, 전하?”

국왕의 칙령에는 그 누구도 반항하지 못했다. 여기에는 왕위계승권자인 알폰소 왕자도 예외가 되지 못했다. 체자레는 굳어 있는 알폰소 왕자를 무시하고는 아리아드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리아드네가 선뜻 그 손을 잡지 않자, 그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16630316833632.jpg“지엄하신 왕명입니다, 데 마레 영애.”

내민 체자레의 손에는 언제나처럼 트레이드마크인 사슴 가죽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마지 못해 체자레에게 그녀의 왼손을 내밀었다. 맨손과 맨손이 닿는 것이 아니라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녀는 체자레에게 손을 내밀며 알폰소 왕자의 기색을 살폈다. 알폰소는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이었다. 아리아드네는 눈으로 알폰소에게 사과했다.

16630316837884.jpg- “나 때문에 이렇게 돼서 미안해.”

아리아드네가 본인에게 집중하지 않고 있음을 눈치챈 체자레가 과장되게 큰 동작으로 아리아드네의 왼손에 키스했다. 알폰소 왕자를 노린, 보란 듯한 행동이었다. 알폰소는 멍하게 웃고는, 아리아드네에게 인사를 해 보였다.

16630316837889.jpg“오늘의 내 역할은 여기까지네. 조금 이따가 봐, 아리아드네.”

16630316837884.jpg- “미안해, 알폰소.”

아리아드네는 입 모양으로 그에게 인사를 해 보였다. 체자레는 이 상황이 너무나 짜릿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오늘 이 무도회에 오면서 속으로 어머니, 루비나 백작 부인의 원망을 있는 대로 다 하면서 온 참이었다. 국왕 레오 3세에게 가서 어떤 감언이설로 구워삶았는지 왕명을 떡하니 받아 온 어머니가 정말로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생각하며 시키니까 마지못해 데 마레 추기경의 무도회까지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행차하신 김이었는데, 여기서 이렇게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16630316833632.jpg‘어머니한테 효도라도 해드려야겠어.’

그는 이제껏 가지고 있던 눈앞에 있는 여자아이에 대한 이미지를 수정했다. 그는 본디 그녀가 비루먹고, 사납고, 엉망인 패션 감각의 소유자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성장(盛裝)을 하고 눈앞에 서 있는 아리아드네는 퍽 아름다웠다. 우선 티끌 한 점 없는 고요한 피부가 있었고, 사나워 보인다고 생각했던 이목구비도 화장으로 눈매가 강조되고 나니 의외로 단정하고 우아한 미인상이었다. 오늘 입은 드레스는 가슴선이 파여 그녀의 쇄골뼈와 데콜테를 기품 있게 강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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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자레는 아리아드네를 비싼 도자기를 만지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에스코트하여 연단으로 올라섰다. 반대편 강단에서는 데 마레 추기경이 자신의 차녀가 얼마나 훌륭하고 정숙한 숙녀인지, 신앙심이 얼마나 깊고 그 성품이 유순한지에 대해서 손님들에게 연설을 하고 있었다. 아리아드네와 체자레는 그림 같은 한 쌍처럼 연단 위에 서서 쏘아져 오는 호기심의 시선들의 객체가 되었다. 데 마레 추기경의 짧은 연설이 끝나고 하객들은 모두 축하를 하며 시종들이 날라오는 과실주를 허공에 들어 건배하고 마셨다. 아리아드네와 체자레 역시 연단 위에 시종이 가져다주는 과실주를 쟁반에서 들어 한 모금씩 마셨다. 성인이 되었다는 의미였다. 곧이어 악단의 연주가 흘러나왔다. 첫 번째 왈츠의 시간이었다. 데뷔탕트와 데뷔탕트의 파트너가 첫 춤을 추지 않으면 아무도 춤을 시작할 수 없었으므로, 체자레는 아리아드네를 에스코트해서 무도회장의 중앙으로 이동했다. 왈츠의 시작 포즈로 아리아드네의 한쪽 허리에 손을 감고 다른 쪽 손을 맞잡은 그는 다정하게 인사했다.

16630316833632.jpg“몇 주 만에 뵙습니다, 아리아드네.”

체자레의 입가에 그가 가장 자신하는 매력적인 미소가 그려졌다.

16630316833632.jpg“약속은 약속이니 오늘부터는 공대를 하도록 하지요.”

어린이니 말을 편하게 하겠다는 일전의 말을 잊지 않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왈츠에 맞춰서 스텝을 밟으며 인상을 풀지 않고 쏘아붙였다.

16630316837884.jpg“데 마레 영애라고 부르세요.”

싸구려 미소 한 번에 넘어가지 않는 기개까지. 완벽해. 브라보. 그는 이제껏 아름다운 이사벨라의 비루먹은 여동생에게는 일말의 관심도 없었으나, 오늘의 일을 계기로 아리아드네에게 진정으로 관심이 생기고 있었다. 알폰소가 가진 것은 그게 무엇이든 빼앗고 싶었다. 그런데 그것이 생기 넘치는 미모의 소녀라니, 이제까지 알아보지 못한 본인의 눈알을 찌르고 싶을 지경이었다.

16630316833632.jpg“우리가 친해지는 그날까지 기다리지요, 데 마레 영애.”

체자레는 목표물로 삼은 여자에게 보여주는 최상의 매너를 유지하며 왈츠를 리드했다. 아리아드네는 최고의 댄서는 아니었지만 능숙하게 춤을 췄다.

16630316833632.jpg“사교계에 갓 데뷔한 영애치고는 춤을 잘 추십니다. 집에서 많이 배우셨나요?”

집에서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당신과 춤을 췄지, 14년 동안. 반복해서. 여러 번. 전생에서는 그녀와의 춤을 그다지 내키지 않아 했던 체자레의, 새삼 꿀이 떨어지는 달콤한 태도는 적응하기 어려웠다. 아리아드네는 복잡해지는 감정을 누르기 위해 일말의 기대가 올라왔을 때 ‘푸른 심해의 심장’을 팔지 않겠느냐고 물어봤던 체자레를, 아니, 너 따위를 네 아버지가 나에게 들이댔을 때 내가 느꼈을 모멸감을 아느냐고 소리를 지르던 회귀 전의 체자레를 생각했다. 자동으로 심장이 고동이 늦가을의 폭우처럼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녀의 눈매와 목소리도 차갑게 내려앉았다.

16630316837884.jpg“잘 추는 춤이 아닙니다. 기본만 할 뿐이에요.”

왈츠의 클라이맥스가 다가오며 체자레는 아리아드네의 왼손만 잡고 파트너를 멀리 보냈다가, 휘감기듯 돌려서 품에 안았다.

16630316833632.jpg“이게 ‘푸른 심해의 심장’이군요. 보석이 빛나지만 영애의 미모에는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16630316837884.jpg“허튼수작 마세요.”

입술에서 내뱉는 말이 차가운 것과 별개로, 소녀의 체온은 몹시 따듯했다. 체자레는 매서운 소녀의 입술 끝에서 떨어지는 단어와 달리, 품 안에 안겨드는 소녀의 온기에 집중했다. 그는 시간만 주어진다면 서투른 10대 소녀의 심장 따위는 얼마든지 녹여버릴 자신이 있었다. 그는 모르고 있었지만, 그는 전생에서 그것을 이미 완벽하게 해낸 전적이 있었다. 산 카를로 최고의 인기인인 체자레 백작에게 여자의 마음이란 시간문제일 따름이었다. * * * 체자레 데 코모 백작이 철벽을 친 아리아드네 데 마레에게 꿀 바른 멘트들을 연이어 던지고 있을 때, 알폰소 왕자는 멍하니 메인 홀의 벽에 등을 대고 가운데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아가씨들이 수군거리며 그쪽을 다들 쳐다보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에게 다가가지는 못했다. 무도회의 춤 신청은 신사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하는 것이 확고한 규칙이었다. 왕자가 아무 의욕도 없이 벽에 기대서 한숨을 푹푹 쉬고 있는데 거기에 다가갈 간 큰 아가씨가 있을 리가 없었다. 단 한 명만 빼고. 무어 제국에서 공수한 순백색의 오간자로 만든 드레스를 입고 공작새의 사촌처럼 꾸민 이사벨라는 왕자를 발견하자마자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이사벨라는 사뿐사뿐 왕자의 옆으로 다가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왕자 옆의 서랍장 위에 장식용으로 올라간 흰배롱나무 꽃병을 밀었다. 눈앞에서 화병이 바닥에 떨어질 것 같자 알폰소의 두 눈이 커지며 본능적으로 도자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도자기가 떨어지려는 자리에는 도자기 대신 자기 몸을 들이민 이사벨라가 있었다. - 쨍그랑! 화병이 깨지는 요란한 소리가 울리고 가뜩이나 모든 아가씨가 다 쳐다보던 알폰소 왕자의 방향으로 모든 사람이 일순간에 집중했다. 알폰소 왕자는 본의 아니게 이사벨라를 붙든 상황이 되었다. 당황하는 알폰소에게 이사벨라는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제의했다.

16630316840657.jpg“왕자님께서 저한테 춤 신청을 하고 싶으셨던 거로 해요.“

호기심에 가득 물든 수많은 눈들이 그의 방향을 바라봤다.

16630316840657.jpg“사람들이 다 바라봐요, 어서요.”

알폰소는 여기서 동의를 하지 않으면 무단으로 손을 뻗어 여자를 만진 놈이 될 것 같아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곧장 이사벨라에 의해 메인 홀의 정중앙으로 끌려나갔다. 이사벨라는 설탕처럼 달콤하게 알폰소 왕자의 손을 잡아서 자기의 허리 위에 얹었다. 알폰소는 어쩔 도리가 없이 이사벨라의 허리를 감은 채 왈츠의 리듬에 맞춰서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겉으로 보면 완벽한 커플이었다. 순백색의 오간자 드레스를 입은 이사벨라와 데뷔탕트 파트너의 복장을 충실히 지킨 알폰소는 멀리서 보면 한 쌍의 데뷔탕트 커플처럼 보였다. 진하고 옅은 금발의 조합이 선남선녀였고, 언뜻 보면 도리어 이 둘이 데뷔탕트 무도회의 주인공 같아 보였다. 하지만 그 둘 사이의 케미스트리는 영 시원치 않았다. 이사벨라는 춤을 추는 내내 집요하게 왕자에게 말을 걸었다.

16630316840657.jpg“오늘 무도회는 마음에 드시나요?”

16630316837889.jpg“훌륭한 무도회네요.”

그리고 더 이상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16630316840657.jpg“왕자님은 참 안정적으로 춤을 잘 추시는 것 같아요. 왕궁의 사교댄스 선생님은 어느 분이신가요?”

16630316837889.jpg“로레발드 선생님께 배웠습니다.”

왕자의 대답은 단답형으로 끝이었다. 하지만 집요한 이사벨라는 포기하지 않았다. 왈츠의 리듬에 따라 크게 턴을 돌고 왕자의 품에 착 안기며, 이사벨라는 다시 한번 화젯거리를 던졌다.

16630316840657.jpg“실내장식이 참 독특하고 아름답지요? 제 동생인 아리아드네가 고른 장식이랍니다.”

그제야 왕자의 눈에 빛이 돌았다. 이사벨라는 신체접촉이 드디어 먹혔나, 라고 생각하며 예쁜 눈을 빛냈다. 하지만 왕자의 관심사는 다른 곳에 있었다. 대답하는 알폰소의 말의 속도가 빨라졌다.

16630316837889.jpg“영애의 여동생인 아리아드네는 참 대단한 것 같아요. 창의적이고 똑똑해서 깊은 감흥을 받았습니다.”

알폰소 왕자의 긍정적인 반응은 이사벨라와 피부가 맞닿아서가 아니었다. 전통적인 태피스트리 장식을 생략한 점을 이야기하며 당돌한 아리아드네의 험담을 하려던 이사벨라는 그렇게 진행하면 왕자의 반응이 매우 좋지 않을 거라는 직감을 느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왕자의 주제선정에 탑승해 동생 칭찬을 함께했다.

16630316840657.jpg“아리아드네가 똑똑하긴 하죠. 공부도 열심히 해요.”

16630316837889.jpg“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은 뭔가요? 역시 신학?”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는 것 이외로는 동생에게 큰 관심이 없던 이사벨라는 대답을 하느라 쩔쩔매기 시작했다. 이사벨라는 남자와 대화를 나누면서 그녀 자신에 대한 이야기 외에 다른 여자에 관해 이야기하게 된 것이 맹세코, 머리털이 난 이후로 처음이었다. 세상에, 천하의 이사벨라 데 마레가 언제 또래 남자에게서 이런 취급을 받아보았겠는가! 그녀는 이를 갈면서 초조하게 아리아드네의 방향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녀는 왕자가 보기에 아리아드네가 좋지 못한 상품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만한 사건을 미리 준비해 놓았다. 그것만 터지면 알폰소 왕자의 굴러온 돌에 대한 관심도 사그라질 것이 틀림없었다. 분명히 손을 써 두었는데, 도대체 언제 터지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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