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화> 회심의 일격2021.05.12.
아름다운 데 마레 추기경의 두 딸이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하자 사람들은 그녀들에게 끌리는 시선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들의 외양에 대한 평가가 따라왔다.
- ‘이사벨라 데 마레가⋯⋯. 욕심이 컸었나 보다. 오늘은 헛발질했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날이 있다더니 원.’
- ‘평소답지 않게 왜 이렇게 과해? 옷은 왜 또 흰색이지?’
- ‘동생 쪽이 꾸민 듯 안 꾸민 듯해서 차라리 더 나은데?’
의상과 화장과 헤어까지, 전부 다 과한 이사벨라를 본 숙녀들의 소감이었다.
- ‘다 가렸는데 몸매가 옷을 뚫고 나오네!’
- ‘내가 왜 아까 그 장면을 놓쳤지?!’
- ‘둘째가 첫째보다 나은데?’
신사들이 아리아드네를 보고 한 찬탄이었다. 아리아드네와 이사벨라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에서는 은은히 긴장감이 튀었다. 이사벨라가 호언장담했던, ‘우애 좋은 자매’의 모습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둘의 대치 구도를 보며 사람들의 뒷말이 폭발했다.
- “이사벨라는 그런데 왜 흰 옷을 입고 있어요?”
- “둘이 친해서 동생이 먼저 부탁해서 그렇게 입기로 했다는데요.”
- “사이 좋은 거 맞아요? 분위기 장난 없는데요.”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배경음 삼아서 아리아드네는 훌쩍이고 있는 이사벨라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언니, 왜 울고 계세요?”
이사벨라는 본능적으로 아리아드네에게 치댔다. 아리아드네의 표정이 썩 우호적이지는 않아 보였지만 이사벨라는 뱃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확신이 있었다. 쟤는 나보다 기가 약한 애고, 내가 강하게 밀면 따라올 것이라는. 그리고 이사벨라에게는 아리아드네의 기분보다는 뒤에서 자기를 쳐다보는 산 카를로 사교계 명사들의 눈이 훨씬 중요했다.
“아리아―! 그게, 왕자님과 마르케즈 백작 부인께서 우리 사이를 오해하셨지 뭐야. 내가 네 얘기를 나쁘게 했다나.”
이사벨라는 뒤의 사람들의 기대하는 시선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더 의도적으로, 아리아드네를 만나서 너무나 반갑다는 듯이 기쁘게 여동생에게 다가가 손을 맞잡았다.
“나는 그냥 의상 사고에도 불구하고, 아니, 의상 사고가 전화위복이 되어서 네가 더 예뻐 보였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 뿐인데 말이야! 몸매가 정말 좋더라고!”
알폰소 왕자가 기가 막혀서 얼굴을 붉혔다.
“아니, 그게 아니었잖―.”
그때 아리아드네가 침착하게 알폰소 왕자의 손끝을 살짝 잡아 그를 제지했다. 표정은 담담했지만 속으로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 상태였다. 이사벨라가 ‘아리아’라는, 생전 처음 듣는 애칭으로 아리아드네를 칭한 순간에 지금 이사벨라가 어떤 수법을 쓰고 있는 것인지 감이 바로 왔기 때문이었다. 전생에서도, 어린 시절 내내는 물론이고 성인이 된 다음에도, 이사벨라는 똑같은 짓을 자주 했다. 본인이 남의 험담을 있는 대로 해 놓고 딱 걸렸을 때 사람들 앞에서 그 피해자에게 친한 척을 하면서 뒷말이 나오는 것을 뭉개는 것은 이사벨라의 단골 레퍼토리였다. 사람들은 피해자와 이사벨라가 친한 것을 보고 피해자가 그런 말 정도는 하도록 용인해 주었겠거니 하고 넘어가고는 했다. 이사벨라의 평판이 ‘털털하고 직설적이지만 모두와 친한 애’가 되는 부수적인 효과도 있었다. 아주 어려서는 이사벨라가 무서워서 이사벨라가 사람들 앞에서 요사를 부릴 때 반박을 못 하고 질질 끌려가고는 했다. 사람들 앞에서는 몹시 친절하던 이사벨라는 아리아드네의 호의 덕에 일이 마무리되면 얼굴을 홱 바꿔서 아리아드네를 무시하거나, 아리아드네에게 누명을 덮어씌워서 네가 애초에 잘못해서 일어난 일이니 네가 수습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합리화하고는 했다. 허구한 날 당하다가 머리가 굵어지고 섭정공의 약혼녀가 된 후에 이제는 더는 이렇게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벼르고 벼르다 이사벨라를 현행범으로 잡아서 몹시 화를 냈던 적이 있었다. ‘이 새빨간 거짓말쟁이야!’라고 외치고는 부끄러움을 느껴 보라는 취지로 이사벨라가 잘못한 일을 딱 팩트만 정리해서 화를 내며 퍼부었더니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불쌍하고 가련한 이사벨라를 권력으로 윽박지른 못돼먹은 이복 여동생이 되어 있었다. 화를 낼 때도 강약 조절을 할 줄 몰랐기 때문에 당한 일이었다. 인간은, 금전이나 이권이 걸려 있는 일이 아니라면 머리를 사용하지 않았다. 사실관계를 파악하고 이성적으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지적 노동을 요하는 일이다. 나태는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에 퍽 지성인인 자도 흥미 위주의 사안에서는 감성과 느낌만으로 시시비비를 판정했다. 아리아드네는 이제는 인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어렴풋하게나마 깨닫고 있었다. 어린 시절 이사벨라에게 당하고 나서 침대에 누워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억울함에 몸을 뒤틀며 ‘그때 내가 다르게 대답했다면 결과가 달랐을까?’라고 시뮬레이션을 해 보았던 수많은 답변들 중 세월이 찾아내 준 정답을 사용할 시간이었다. 이사벨라가 아리아드네의 손을 맞잡자마자, 아리아드네는 깜짝 놀란 듯이 몸을 떨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마치 이사벨라를 몹시 두려워하는 듯한 몸짓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있는 힘껏 감정을 끌어올려 무섭고 괴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연기력이 미천해서 눈물을 뽑아내지는 못했지만, 눈물이 터져 나오기 직전 같은 표정까지는 만들 수 있었다.
“언니! 어떻게 제 몸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을 하고 다니실 수가 있어요⋯⋯?”
이것은 기세 싸움이었다. 누가 더 불쌍한 자의 자리를 선점하느냐에 승패가 달려 있었다.
“그런 얘기 진짜 싫어⋯⋯. 제가 그런 거 무서워하는 거 아시잖아요. 그런 얘기는 칭찬조차도 싫어요. 언급이 아예 안 됐으면 좋겠어요⋯⋯.”
이사벨라는 아리아드네가 그런 이야기를 싫어하는지 까맣게 몰랐다. 모르는 게 당연했다. 애초에 이사벨라가 가슴 크기를 운운하며 아리아드네를 괴롭힌 것은 전생에 일어난 일이자 미래에 발생할 일이었다. 아직 이사벨라의 기준으로는 아리아드네를 제대로 괴롭힌 적도 없었다. 하지만 이사벨라의 실낱같은 억울함을 봐줄 필요는 없었다. 아리아드네는 극적으로 가슴께를 양팔로 가리며 울 듯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사람들이 이상한 눈초리로 저를 쳐다보는 거 진짜 싫어요⋯⋯!”
아리아드네는 상처받은 표정으로 뒷걸음질을 치면서 한 걸음씩 이사벨라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산 카를로 사람들은 흥미진진한 구경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 “아유, 짐승처럼 쳐다보는 사람들이 많았나 봐요, 불쌍해라⋯⋯!”
- “산 카를로 어디에 그런 막돼먹은 사람들이 있다고 그래! 산 카를로 신사들은 그러지 않소!”
- “저 아이는 어려서 농장에서 자라다가 올라왔다고 하지 않았어요? 못 배워먹은 농장 놈들이라면 그럴 수 있죠.”
- “흠흠. 그런 거라면야 그럴 수 있지.”
- “근데 친언니가 저런 거야? 아무리 배다른 동생이라지만 너무 못됐다.”
이대로라면 졸지에 성적인 대상이 되는 것에 트라우마가 있는 배다른 여동생에게 가슴이 어쩌고 몸매가 저쩌고 몸매 품평을 한 위인이 되게 생긴 이사벨라가 당황하며 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아, 아리아. 그게 아니라⋯⋯.”
아리아드네는 멈칫대는 이사벨라에게 회심의 일격을 먹였다.
“언니는 나한테 관심이나 있어요? 전 ‘아리아’가 아니라 ‘아리’예요!”
말을 잃은 이사벨라가 입을 뻥긋거렸다.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모양새였다. 아리아드네는 이사벨라에게 도망칠 시간을 주지 않고 곧바로 밀어붙였다.
“제아무리 제가 새로 생긴 이복동생이라지만 정말 너무해요. 전 언니의 좋은 동생이 되고 싶어서 최선을 다했어요.”
아리아드네는 치명타를 던진 후, 상처받은 얼굴로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뛰쳐나가 버렸다. 이사벨라는 친동생의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몸매 평가 가해자, 본인 동생의 애칭조차 모르는 가족애 없는 냉혈한, 이복동생을 차별하는 상식 없는 차별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가해자가 된 상태로 인파 사이에 갇히고 싶지는 않았던 이사벨라는 동생을 위로하는 척하며 무대에서 탈출했다.
“아리아! 아리아! 오해야! 기다려!”
고집 세게 원래 호칭을 고집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자신은 잘못한 게 없어야 했다. 흠결은 용납할 수 없었다. 아리아드네와 이사벨라가 뛰쳐나간 자리에 남아 있던 손님들은 일제히 시끄러워졌다. 다들 속삭이는 데에도 불구하고 한꺼번에 모두 같이 입을 여는 바람에 볼륨이 한 단계 올라간 듯한 느낌이었다.
“우애가 좋아서 흰 드레스를 맞춰 입었다고? 정말 제대로 거짓말 한 거잖아?”
“아까 이사벨라가 제일 먼저 이야기한 거 알아요? 동생이 관심을 즐겨서 일부러 드레스를 열어젖힌 것 같다고! 와, 그때부터 긴가민가했는데!”
“진짜 인성 파탄이네!”
당분간 산 카를로의 사교계가 심심할 일은 없어 보였다. * * * 뛰쳐나간 아리아드네의 뒤를 쫓은 이사벨라는 2층으로 올라가는 아리아드네를 중앙 현관과 이어지는 계단에서 따라잡았다.
“야! 너 거기 서!”
아리아드네는 서란다고 서는 바보는 아니었으나 이사벨라가 정말 초인적인 힘으로 달려와서 아리아드네의 소맷자락을 낚아채는 바람에 아리아드네는 계단 초입에서 강제로 붙잡혀 버렸다.
“뭐? 가슴 얘기하는 거 싫어하는 거 아시잖아요? 야, 이 야비한 년아! 네가 언제 그런 얘기를 했어!”
이사벨라가 아리아드네를 잡아챈 계단은 아리아드네가 도착한 첫날, 아라벨라가 이사벨라를 밀어 떨어뜨리고는 근신을 당했던 바로 그 층계참이었다. 이 중앙 계단은 기묘하게 높고 또 좁았다. 이사벨라는 그 좁은 층계참에 서서 아리아드네를 거세게 몰아세웠다.
“너 진짜 사람한테 뒤집어씌우는 거 잘한다?”
아리아드네는 아무 대답 없이 이사벨라가 몸으로 덤벼드는 것을 버텨냈다. 아리아드네가 적극적인 반항을 하지 않자 더 기가 산 이사벨라는 숫제 아리아드네의 머리카락을 모두 뽑아버릴 기세로 덤벼들었다.
“아무것도 아닌 년이! 오냐오냐해줬더니 감히 어딜 기어올라!”
분을 못 이겨 펄펄 날뛰던 이사벨라가 급기야는 아리아드네의 따귀를 때리려고 손을 높이 들었다.
“내가 산 카를로 사교계에서 너 하나 못 묻어버릴 거 같아?!”
이사벨라는 풀스윙을 날리려고 하다가, 갑자기 손목이 움직이질 않아서 몸을 뒤틀었다. 이사벨라보다 반 뼘은 키가 큰 아리아드네가 이사벨라의 손목을 꽉 잡고 있었다.
“이거 놔! X 같은 년아!”
하지만 아리아드네의 힘이 들어간 손은 흔들릴지언정 이사벨라를 놔 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아리아드네는 이사벨라의 손목을 머리 위로 높이 잡은 채로 이사벨라의 귀에 자기의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X 같은 XX야, 담가 버릴라.”
이사벨라는 그대로 우뚝 서서 굳어 버렸다. 자기에게 반항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상대에게서 상상도 못 할 만큼 험한 말을 들을 줄이야……! 아리아드네는 낮은 목소리로 빠르게 연달아서 이사벨라에게 경고했다.
“욕은 너만 할 줄 아는 거 같지?”
아리아드네는 이사벨라의 손목을 패대기치듯 뿌리쳐서 던졌다. 신체적으로 압도당한 이사벨라가 손목의 고통에 움찔하며 기세에서 한층 더 밀렸다. 이사벨라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좁디좁은 층계참에서 공간적으로 몰린 이사벨라는 깎아지르게 높은 계단 위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리다시피 서 있게 되었다. 아리아드네는 이사벨라의 코앞까지 자기 얼굴을 들이밀고 맹수가 먹잇감을 노리듯이 노려보았다.
“너 밤에 잘 때 조심해라. 우리 같은 집에 사는 거 잊지 말고. 내가 복도에서 나무 널빤지 하나만 건너면 네 방이야.”
씹어 뱉듯이 내뱉은 아리아드네는 뒤로 돌아서 충격받은 이사벨라를 두고 떠났다. 이사벨라 같은 인물한테 낭비하는 시간 자체가 아까웠다. 주인공 둘이 나가서 비어 있을 파티장에 돌아가 누가 진정한 주인인지 보여줄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