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화> 재편되는 세력 구도2021.05.16.
승리한 아리아드네만 연회장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었다. 기 싸움에서 처절하게 패배한 이사벨라 또한 부끄러움을 모르고 다시 연회장으로 기어들어 왔다. 하지만 개선장군처럼 연회장 정중앙에서 알폰소 왕자의 밀착 에스코트를 받으며 나이 지긋한, 중요한 귀족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아리아드네와 달리, 이사벨라는 파우더룸 구석에 또래 소녀들과 옹송그려 쭈그러져 있었다.
“나쁜 계집애!”
이사벨라는 자신의 친위대를 모아놓고 분통을 터트렸다. 열 명이 조금 넘고 열다섯 명은 안 되는 소녀들의 무리였다. 이들이 산 카를로 사교계의 핵심 또래 그룹이었다. 이들이 입은 옷은 이 그룹에 끼지 못하는 영애들의 유행이 되었고, 그 유행은 그 이듬해에는 ‘산 카를로의 최신유행’으로서 에트루스칸 왕국의 각 지방은 물론이고 저 프리노약 산맥 너머, 문화가 에트루스칸 왕국만큼 발달하지 못한 갈리코 왕국의 몽펠리에 궁전에까지 전파되었다. 그런 고상한 영애의 무리였는데, 그만 그 앞에서 ‘계집애’ 같은 말을 해 버리다니. 이사벨라가 내뱉은 험한 단어에 또래 영애들이 놀라서 이사벨라를 쳐다보았고, 이사벨라는 헛기침을 하며 부채로 자기의 입술을 톡톡 쳤다. 좀 전에 자신에게 일어났던 엄청난 미친 사건, 끔찍한 하극상을 남에게 너무나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이 영애들은 너무 곱게만 자랐다. 이런 일이 있었다고 토로하면 ‘꿈을 꾸신 게 아닐까요, 데 마레 영애?’ ‘친동생이 그런 무서운 말을 하면서 계단에서 영애를 밀어버리려고 했다고요?’라고 이사벨라만 이상한 사람이 될 게 뻔했다. 게다가, 도저히 또래 그룹에게 자기가 자기 밑으로 깔아보던 애한테 쌍욕을 먹고 왔다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건 지나치게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냥 참기에는 분통이 터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사벨라는 본인이 욕을 먹은 사실만 빼고, 자기가 잡을 수 있는 모든 트집을 다 잡아 아리아드네의 험담을 하기 시작했다.
“전 정말 아리아드네가 괜찮다고 해서 흰 드레스를 입은 거라고요! 왜 말을 그따위로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거기 모여 있는 영애들은 모두 이사벨라의 친구들이었기 때문에, 이사벨라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주는 수밖에 없었다. 몇 명은 내심 이사벨라가 헛소리 내지는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 의심했으나, 이사벨라의 시녀들이 딱 붙어서 그녀를 받아 주고 있는 상태에서 뭐라고 말을 꺼내면 배신자라고 몰릴 것이기 때문에 차마 의심을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머지 중 두어 명은 정말 열성적으로 이사벨라를 믿고 추종했다.
“작은 데 마레 영애는 정말 너무 야비하네요.”
“어쩜 그럴 수가 있어요 친언니한테?”
이사벨라는 눈물을 찍어냈다.
“제가 그간 아리아드네에게 얼마나 잘 해 줬는데요! 옷도 빌려주고, 산 카를로 적응도 도와주고, 공부도 도와주고⋯⋯. 그런데 배은망덕하게, 왕자님이 나타나시니까 바로 낯을 싹 바꾸는 걸 봐요!”
그리고 추종자 외에는 질투심에 불타는 치들이 있었다. 이사벨라의 ‘시녀’는 아니지만 새로 데뷔한 농장 하녀의 딸이 왕자님의 손을 잡고 들어왔다가, 체자레 백작과 첫 번째 왈츠를 춘 사실에 강렬하게 질투를 하는 영애들이 분명히 있었다. 기존에 높이 평가하던 다른 아가씨가 왕자의 손을 잡는다면 그러려니 할 것이다. 멋있다고 동경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골 농장에서 굴러먹던 추기경의 사생아가? 그다지 예쁘지도 않은데? 그들은 인지 부조화를 메꾸기 위해 음모론과, 뒷공작과, 떳떳하지 못한 거래가 있었을 거라는 험담을 퍼부었다. 그 외에는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그저 무리를 따라가고자 하는 영애들이 있었다. 이사벨라가 물길을 내자 다른 영애들의 질투와 튀지 않고 무리에 끼고자 하는 열망이 수량이 되어 그 고랑을 넘치도록 채웠다.
“가슴에 콤플렉스 있다면서 누가 그렇게 깊게 파인 네크라인 옷을 입어요? 순 거짓말인 게 틀림없어요.”
“자기가 안 했다는 얘기 나는 안 믿어. 옷이 그렇게 쉽게 뜯어지는 물건이냐고요!”
“왕자님이 그 계집애를 왜 그렇게까지 편을 들어주는 건데요? 진짜 몸으로 꼬신 거 아냐?”
이사벨라는 영애들의 성토대회를 진심으로 즐겼다. 영혼에 진통제를 먹이는 느낌이었다. 아리아드네의 욕을 하자 이사벨라의 상처 난 자존심이 메꿔지는 듯했다. 이사벨라가 ‘아리아드네는 광목천을 쓰고 있다’는 둥, ‘드레스 가게는 싸구려인 라지오네 양장점이다’는 둥 장작으로 쓸만한 조그만 디테일들을 하나씩 던져 주고 있던 차였다. 입을 꾹 다물고 앉아 있던 줄리아 데 발데사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줄리아 데 발데사르는 이사벨라가 ‘절친’으로 대우하는 두 명의 영애 중 하나였다. 이사벨라는 가장 친한 친구 감으로 카멜리아와 줄리아를 점찍었다. 카멜리아는 예쁘고 부유한 남자친구가 있으면서도 이사벨라의 비위를 잘 맞춰 주어서, 그리고 줄리아는 발데사르 후작가가 명망 있는 명문 귀족이자 상당히 부유한 가문으로 귀한 신분이었기 때문이었다. 줄리아 데 발데사르는 일어난 채로 이사벨라에게 딱 한마디를 던졌다.
“데 마레 영애, 어깨끈이 보이네요.”
이사벨라는 그 말을 듣고 자기의 드레스 매무새를 확인하게 고개를 숙였다. 과연, 깊게 파인 순백색 오간자 드레스의 어깨선 옆으로 진한 분홍색의 어깨끈이 삐죽 나와 있었다. 이사벨라의 ‘가슴주머니’ 고정용 끈이었다.
“어머!”
이사벨라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줄리아 데 발데사르는 이사벨라가 절친으로 대우해서 몇몇 개의 비밀 이야기들을 털어놓은 사이였다. 그중에는 ‘가슴주머니’ 얘기도 있었다. 무어 제국에서 끝내주는 물건이 들어왔으니 한번 써 보라고 권유하는 내용이었다. 줄리아는 콧등으로도 듣지 않고 넘겼지만 카멜리아는 환호를 지르며 꼭 구매하겠다고 약속했었다. 결국 사진 않았지만. 이사벨라는 그때 줄리아와 자신이 더 친해졌다고 생각했었다.
‘믿었더니 이게⋯⋯. 이렇게 뒤통수를 쳐?!’
얼굴이 붉어진 이사벨라를 두고 줄리아 데 발데사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서 소녀들이 모여 있던 파우더룸을 나가버렸다. 이에 소녀들 몇이 서로 눈치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서 줄리아의 뒤를 따라 파우더룸에서 나갔다. 나가버린 소녀들의 수는 네다섯 명으로, 절반까지는 못 됐지만 1/3은 족히 되는 수였다.
“이, 이, 배신자들⋯⋯!”
이사벨라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카멜리아 데 카스틸리오네 남작 영애가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남아 있는 소녀들은 불안한 마음을 누르기 위해 아리아드네와 떠난 사람들을 더욱 목소리 높여 욕하기 시작했다. 자리를 떠난 줄리아 데 발데사르는 중앙 연회장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중년 부인들에게 둘러싸여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던 아리아드네가 있었다. 줄리아는 아리아드네에게 다가가 단도직입적으로 인사를 건넸다.
“발데사르 후작가의 장녀인 줄리아예요.”
“시뇨라 줄리아⋯⋯!”
생각지도 못한 사람에게 갑작스럽게 인사를 받은 아리아드네는 놀라워하며 인사를 받았다.
“당신의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줄리아는 이사벨라들의 무리가 모여 있는 파우더룸 방향을 흘긋 쳐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뭐 영양가 있는 얘기는 없었지만.’
발데사르 영애는 담백하게 자기가 할 말만 했다.
“친하게 지내면 좋겠네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아리아드네는 전생에 여자친구들이 많이 없었다. 너무 빨리 지나치게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기 때문에, 그리고 사실 처신을 아주 잘하진 못했기 때문에 질투하는 사람들과 그녀를 이용해서 이득을 보려는 사람들 외에는 주변에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 줄리아처럼 자신에게 얻을 것이 하나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먼저 다가와 주는 또래의 여자 사람 친구가 나타나자 내심 정말로 기뻤다.
“발데사르 후작 영애의 명성은 저도 많이 들었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리아드네는 반갑게 줄리아 데 발데사르의 손을 맞잡고 인사를 하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한마디를 보탰다.
“호의에 감사드려요.”
어찌 들으면 ‘인사를 해줘서 고맙다’는 어이없는 겸양일 수도 있겠지만, 이사벨라의 친구들인 그녀들이 지금 자신과 통성명을 하고 있다는 게 어떤 뜻인지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우더룸에서부터 줄리아를 따라온 서너 명의 영애들이 아리아드네를 둘러싸고 마저 통성명을 했다. 인사를 건넨 줄리아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캐주얼한 말투로 초대를 하나 툭 던졌다.
“참, 아직 확정은 아닌데, 다음 주쯤에 저희 집에서 티파티를 한번 열까 해요. 큰 건 아니고, 그냥 친한 친구들 몇 명 모여서. 혹시 자리를 빛내주실 수 있으실까요.”
아리아드네의 얼굴에 아버지의 인정을 받을 때보다, 어쩌면 남자들의 접근을 받을 때보다 더 기쁜 듯한 반가운 빛이 돌았다. 소녀들의 티파티에 초대된다니, 정말이지 인생 최초였다! 게다가 확정 난 티파티의 초대장을 받는 것도 아니고 기획 단계에서부터 오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받다니, 이것은 정말 친구가 생긴 것 같지 않은가. 아리아드네는 환하게 웃었다.
“물론이에요, 발데사르 후작 영애. 기쁘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 * 그 시점 이후로 아리아드네의 데뷔탕트 무도회는 더할 나위 없이 매끄럽게 치러졌다. 국왕의 사절로 아리아드네의 첫 왈츠를 함께 춘 체자레 백작은 왈츠가 끝나자마자 미리 잡아둔 중요한 일정이 있다고 몹시 아쉬워하며 먼저 자리를 떴다. 하지만 알폰소 왕자는 체자레 백작이 떠난 뒤에도 오후 늦게까지 일정을 모두 소화하고 나서야 아리아드네에게 작별을 고했다. 알폰소는 뭔가 예감을 한 모양이었다. 그는 아리아드네를 붙잡고 당분간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며, 편지 보낼 테니 그동안 몸조심하고 있으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못내 아쉬워하며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알폰소를 보내고 나자 긴긴 하루가 끝났다. 그리고 나서는 데뷔탕트 무도회의 손익결산을 할 시간이었다. 아리아드네는 데 마레 추기경이 예산으로 산정한 150 두카토 중 12 두카토를 남겨서 아버지에게 반환했다.
“정말로 이게 남았다고?”
데 마레 추기경은 놀라움을 가리지 못했다. 그가 정부인 루크레치아에게 생활비를 지급하기 시작한 1100년 이후로 22년 동안 그가 누군가에게 지급한 생활비가 남아서 그에게 돌아온 것은 오늘이 최초였다.
“분명히 빠듯했을 텐데?”
데 마레 추기경은 아껴 쓰면 300 두카토, 호화롭게 준비하면 500 두카토 정도가 들 것으로 생각하고 아리아드네에게 그가 생각한 바람직한 예산의 절반인 150 두카토만을 미리 주었다. 그런데도 돈을 남겨 오다니! 그간 사치스러운 처와 자녀들을 부양해오던 그로서는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비결은 과감한 생략에 있었다. 아리아드네가 이번 데뷔탕트 무도회를 준비하면서 생략한 것은 ‘이야기를 담는 태피스트리’ 뿐만이 아니었다. 무도회 직전까지 식사 메뉴를 정하지 않아서 산차의 애를 태우던 아리아드네는, 무도회 날짜 일주일 전이 되자 산차에게 농장 몇 군데의 이름을 일러 주며 그중에 생산량 조절을 못 해 소출이 지나치게 많은 곳이 있는지 확인을 하고 그곳을 골라서 식재료를 사 오라고 시켰다.
“아니, 메뉴도 정하지 않고 재료부터 보고 오라고요?”
상식을 벗어나는 지시에 산차는 아가씨에게 반문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실하게 시킨 곳을 모두 다 확인하고 돌아왔다. 산차가 농장들을 돌아보니 막판에 기존 거래처 외에 대량 납품을 할 여유가 없다고 거절하는 곳이 대다수였지만, 과연 흑돼지를 치는 농장 한 군데가 원래 납품처가 막판에 계약을 취소했다며 확보한 물량을 몹시 싼 값에 넘겼다.
“아가씨, 알고 계셨어요?”
놀라움에 눈을 휘둥그레 뜬 산차가 농장에서 계약을 완료하고 나서 아리아드네에게 물어보자, 아리아드네는 여상스레 대답했다.
“내가 설사 미래에서 온 사람이라도 그렇지 돼지 농장에 계약이 취소되고 안 되고 같은 일을 어떻게 미리 알았겠니.”
그저 아주 자주 일어나는 일일 뿐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에트루스칸 왕궁의 안살림을 9년간 꾸려오면서 이런 류의 구매 방법에는 도가 튼 터였다. 아예 한 지방의 산출물을 싹 쓸어가는 국가 행사 급의 거대한 행사에는 적용할 수 없지만, 중간 규모 행사를 치를 때는 쏠쏠하게 써먹을 수 있었다. 아리아드네의 각종 행사 지출 통제 방법은 무궁무진했다. 가계부를 깨끗하게 정리한 아리아드네는 데 마레 추기경 앞에 복식 부기를 내밀었다.
“네, 아버지. 아껴 쓰니 가능했습니다. 자세한 장부는 여기 있습니다.”
데 마레 추기경은 집 안에서만, 아니 정확하게는 베르가모 영지의 농장에서 내놓아 키운 어린 딸이 최근 포르토 공화국 상인들 사이에서 대유행한다는 복식 부기로 꾸린 장부를 내밀자 다시 한번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도 대성황당의 일 때문에 최근에야 읽는 법을 배운 복식 부기였다.
“이건 또 어디서 배웠느냐?”
“아버지의 서재에서 발견한 책을 보고―.”
그의 딸은 천재가 틀림없었다. 장표를 뒤적인 데 마레 추기경은 계산이 딱 떨어지는 것 역시 확인했다. 장표에는 심지어 베르가모 영지의 흰배롱나무 관목을 베어내서 발생했을 손실까지 계상되어 있었다. 그는 고개를 내저으며 옆에 있는 하녀를 불렀다.
“지금 당장 루크레치아 마님을 이 방으로 모셔오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