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화> 이재의 귀재2021.05.19.
아리아드네의 서재로 허겁지겁 달려온 루크레치아는 도대체 남편이 자기를 왜 서출 딸의 서재로 부른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뭔진 모르겠지만 확실히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남편이 바깥에서 데려온 둘째 딸의 방문을 노크한 후, 남편의 목소리가 안에서 들린 것을 확인하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루크레치아. 이것 좀 보시오.”
데 마레 추기경은 루크레치아의 눈앞에 대변과 차변이 구분된 복식 부기를 흔들었다. 루크레치아는 이게 무슨 소리인지 긴가민가해 가며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도대체 왜 똑같은 것을 왼쪽에 한 번 오른쪽에 한 번, 두 번씩 작성해 놓은 거지?
“이 애가 데뷔탕트 무도회를 단돈 138 두카토로 꾸렸답니다.”
“예에?”
루크레치아는 그제야 놀랐다.
“그게 가능한가요?”
“가능하니까 지금 내 손에 12 두카토가 남아 있지 않소!”
데 마레 추기경은 금화 열두 닢이 들은 주머니를 루크레치아의 눈앞에서 흔들면서 화를 냈다.
“당신이 저번에 이폴리토의 환송 파티를 열어주면서 얼마를 썼지? 이번과 비교해서 하객 수는 절반밖에 안 됐는데 500 두카토 하고도 36 두카토를 더 썼소!”
데 마레 추기경의 추궁에 루크레치아는 찔끔해서 고개를 숙인 채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이번에는 아리아드네가 무도회 전체를 꾸리는데 138 두카토(약 1억 3천 800만 원)가 들었소. 본인 꾸밈비 20 두카토도 포함한 금액이요. 그런데 이사벨라는? 이사벨라는 혼자서 자기 드레스에 50 두카토(약 5000만 원)를 썼어!”
데 마레 추기경은 할 수만 있다면 가계부로 루크레치아를 갈가리 찢어버릴 기세였다.
“거기에 구두, 장신구, 화장품에 향료까지 다 하니 이사벨라 혼자 몸치장에 쓴 총액이 68 두카토(약 6800만 원)요! 이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시오?”
루크레치아로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이사벨라의 호화로운 드레스를 허용한 것은 루크레치아 본인이었다. 이사벨라의 장신구를 맞추면서 본인의 금붙이 하나를 슬쩍 함께 맞추기도 했다. 나눠 먹은 것이 있었으니 딸의 탓을 할 수도 없었다.
“이제부터 아리아드네의 지출은 아리아드네 본인이 하도록 직접 줄 거요! 그리고 이사벨라는 아리아드네가 쓰는 이상으로 돈을 쓰지 못하게 하시오!”
“예?! 예하!”
집안 살림 권한을 일부나마 서출 딸에게 이양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루크레치아의 표정이 사색이 됐다. 루크레치아에게는 먹여 살려야 할 친정 식구들이 있었다. 한 번 밀리면 계속 밀리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그녀는 여기서 물러설 수 없었다. 루크레치아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뱃속에서부터 끌어올려 데 마레 추기경한테 성질을 냈다.
“예하께서 이러시면 제가 뭐가 됩니까! 적모로서 제 말이 저 아이에게 영이 어디 서겠어요?”
“적모라면 적모답게 굴었어야지!”
그러나 데 마레 추기경은 오늘은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푸른 심해의 심장’이 들어오던 날 내가 뭐라고 했소! 내가 조만간 조치를 취하겠다고 했지?!”
아리아드네를 구박하고 제대로 먹이고 입히지 않은 것이 여러 번에 걸쳐서 산 카를로 사교계에 들통이 났던 때의 일을 이르는 것이었다. 루크레치아는 그 뒤로 남편이 잠잠해져서 잊었거니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두카토 단위까지 기억해서 공세를 취해오니 서럽고 억울하지 그지없었다.
“내가 당신을 모시고 산 지가 어언 20년이 넘었는데! 어떻게 나한테 당신이 이럴 수가 있어요?!”
“정확하게는 22년. 당신이 그 22년 동안 가계부 관리를 깔끔하게 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으면 내가 말을 안 해. 난 다른 건 몰라도 금전적으로 당신을 서럽게 한 적은 전혀 없소. 그랬으면 내 믿음에 보답을 했었어야지! 이번 일에 대해서는 반론은 받지 않겠소.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요! 나가 봐!”
차갑긴 하지만 루크레치아에게는 항상 한 발자국씩 양보하던 그녀의 남편은 어디에도 없었다. 누구에게나 예민하지만 데 마레 추기경에게는 더욱 예민한 황금의 문제와, 그간 루크레치아의 친정 식구 때문에 쌓인 불신이 모여 루크레치아는 아리아드네의 코앞에서 있는 쪽 없는 쪽을 모두 다 팔고 남편에 의해 쫓겨나고 말았다. 데 마레 추기경은 루크레치아를 쫓아낸 후 기분이 나빠져서 손수건으로 이마를 훔쳤다.
“흠. 흠. 어쨌거나. 이번 무도회 장부는 참 잘 꾸렸다. 그러고 보니 무도회에서 사건이 하나 있었다고?”
아리아드네의 의상이 터진 일을 이르는 말이었다.
“네, 아버지. 큰일은 아니었습니다.”
아리아드네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데 마레 추기경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그 일 관련해서 내 사교계 사람들에게 수소문을 해보니 네 평판에는 별 타격이 없이 넘어갔다고 하더구나.”
사실 데 마레 추기경이 수소문해서 들은 내용 중에는 어린 딸에게는 차마 전하지 못할 내용도 있었다. 주로 신사들 사이에서 데 마레 가문은 큰딸보다 작은딸이 어떤 점에서는 낫더라고 소문이 퍼진 것이다. 보통의 아버지 같았으면 진노를 할 일이었지만 데 마레 추기경은 참 특이한 사람이었다. 뭐 어떤 면이건 인기가 많으면 좋은 거지, 라고 생각하고 넘겨 버린 것이다. 총합해서 신사들 사이에서는 평가가 올라갔고, 숙녀들 사이에서는 마르케즈 백작 부인 덕에 주 여론 주도자인 부인들 사이에서 특히나 아리아드네가 가엾다는 이야기만 나오고 있으니 그의 둘째 상품이 잃은 것은 없었다. 데 마레 추기경은 그것으로 만족했다. 하지만 사고 한 번은 요행으로 덮었으나 똑같은 일이 두 번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게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는 보았느냐? 양장점 문제였어?”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버지. 알아보니 드레스는 집 안에 들어온 다음에 문제가 생겼더군요. 좀 더 잘 알아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아랫사람 다스리는 것도 중요한 자질 중에 하나다. 재발하지 않도록 신경 쓰고.”
“예, 아버지.”
데 마레 추기경은 앞으로는 아리아드네에게 월 10 두카토(약 1000만 원)를 직접 지급하겠다고 이르고 아리아드네의 서재를 나갔다. 데 마레 추기경이 아리아드네의 서재를 나가자, 바깥 응접실에서 대기하며 새어 나오는 서재 안의 이야기를 귀동냥한 산차가 울상을 하고는 아리아드네에게 외쳤다.
“아가씨, 왜 드레스가 이사벨라 아가씨 소행이라고 밝히지 않으셨어요!”
“아직 확실한 증거가 없어서.”
물증이 없는 상태에서 붙는 싸움은 결국에는 이사벨라의 말과 대 아리아드네의 말로 승부가 갈렸다. 아리아드네는 자기가 회귀 후에 쌓은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아직 아버지가 자기의 말을 더 믿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하물며 이런 싸움에서의 ‘승리’란 아버지가 자기 말에 더 신뢰성이 있다고 믿어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자기의 말만으로 이사벨라를 내치기까지 해야 얻어지는 것이었다.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승부를 걸 때가 아니었다. 무도회가 끝난 후 아리아드네는 산차와 함께 찢어진 첫 번째 데뷔탕트 드레스를 면밀하게 살펴보았다. 마리아가 가져온 ‘후크’라는 물건은 요새 많이들 쓰는 물건이 정말로 맞았다. 다만 보통의 후크는 철제로 되어 있는데, 마리아가 가져온 후크는 납과 은을 섞어서 만들어 몹시 무른 물건이라는 차이점이 있었다. 보통 철에다가 납을 섞는데, 사치스럽게 은에 섞었다는 점이 유독 특이했다. 철보다도 더 무른 은에 납까지 섞었으니 아리아드네가 사용한 후크는 시간이 지나면 풀어질 수밖에 없게 만들어져 있었다. 게다가 드레스의 앞섶을 누가 칼로 스무 땀마다 한 땀씩을 뜯어놓은 것을 발견했다. 라지오네 양장점에서는 꼼꼼하고 단단하게 손바느질해서 물건을 보냈는데, 날카로운 물건으로 실이 잘린 인위적인 흔적이 있었다. 뜯어지라고 누가 함정을 파둔 것이었다. 산차는 이사벨라의 소행이 틀림없다고 울분을 토했고, 아리아드네도 십분 동의하는 바였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없었다. 후크도, 재질은 비범했지만 모양은 여느 후크나 마찬가지여서 어디서 만들었는지 도무지 알아낼 도리가 없었다. 옷 정리를 담당했던 마리아가 말레타와 친하게 지낸다는 점이 또 하나의 심증이 되었지만, 그 정도의 심증만으로는 이 집 큰 아가씨인 이사벨라가 아리아드네의 옷에 손을 썼다는 큰 사건을 추궁해 들어갈 수는 없었다.
“아유 속 터져!”
아리아드네는 산차를 달랬다.
“기다려보자. 결국에는 다 순리대로 풀린단다.”
“아가씨는 뭐 도라도 닦으세요?!”
답답해하는 산차에게 아리아드네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이 정도는 기다리는 것도 아니란다. 증거를 차곡차곡 모아 두자. 증거는 폭탄 같은 거야. 상대방이 약해졌을 때 한꺼번에 터트려야지 피해를 줄 수 있어. 지금 찔끔찔끔 터트려봤자 살가죽만 상하지 중요한 부분은 다치게 할 수 없단다.”
하지만 마리아를 처리해버리는 데에는 아리아드네 역시 동의했다. 아리아드네는 이번 기회에 안면을 트게 된 집사 니콜로에게 50 플로린(약 50만 원)을 추가로 찔러 주고, 마리아의 보직을 바꿔 버렸다. 대우가 좋은 아가씨의 측근 하녀로 팔자 좋게 지내던 마리아는 삽시간에 부엌의 설거지 하녀로 발령이 나게 되었다.
“허드렛일 하녀로 전락할 위험부담만큼은 마리아가 말레타에게 충분히 받아먹었겠지. 안 받고 맨입으로 해줬다면 마리아가 멍청한 거고.”
“좀 멍청한 애 같기는 해요.”
“우리야 멍청한 친구를 치우고 새로운 사람을 똘똘한 아이로 데려왔으니 잘 된 것 아니냐.”
마리아를 내보내고 데려온 사람은 산차가 3층 하녀 시절부터 눈여겨보던 비센타였다. 야무지고 똘똘해서 쓸만한 아이라고 산차가 하도 칭찬을 해서 데려왔는데, 과연 적응이 빨랐다. 산차의 투덜거림은 끝이 없었다.
“추기경 예하께 12 두카토를 곧이곧대로 상납한 것 너무 아까워요! 비자금으로 쏠쏠하게 잘 쓸 수 있었을 텐데.”
“대신 매월 10 두카토씩 받게 되었잖느냐. 한 달 반이면 전부 다 메꿔지는 돈이야.”
아리아드네는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난 남은 돈 전부를 아버지께 드린 게 아니란다.”
“예에?!”
“의복비가 애초 계획보다 좀 많이 나간 것 같지 않니?”
과연, 아리아드네가 애초에 생각했던 의류비는 5 두카토(약 500만 원)에 불과했다. 그것이 최종 장부에는 20 두카토(약 2000만 원)으로 불어나 있었다.
“마리니 부인과 입을 맞췄어. 앞으로 두 시즌 동안 내 의복류 일체를 라지오네 양장점에서 맞추는 대신에 약간 부풀려서 청구하기로 했어.”
산차가 입을 떡 벌렸다.
“그러니까 15 두카토(약 1500만 원)는 우리 비상금이야. 알았지?”
산차는 귀신같은 아가씨의 솜씨에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데 마레 추기경은 여기서도 떼이고 저기서도 떼였다. 그저 모르는 게 약이었다. * * * 데 마레 추기경은 아리아드네와 단둘이 있을 때는 자초지종을 물어보는 선에서 아리아드네의 데뷔탕트 무도회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에 대한 추궁을 그쳤지만, 그날 저녁 이사벨라와 아리아드네가 함께 있을 때 딸 둘을 모두 엄히 혼냈다.
“집안 내의 일은 집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되는 거야. 집 안에서는 개 같이 싸워도 집 밖에 나가면 너희는 한 편이야!”
언성을 높이는 일이 잘 없는 아버지가 목청을 높여 혼을 내자 이사벨라는 눈물이 찔끔 차올랐다. 데 마레 추기경이 소리를 잘 지르지 않는 것은 루크레치아 상대로도 사실이었지만 이사벨라를 상대로는 특히 더 그랬다.
“아리아드네. 네 언니가 설령 잘못했다손 치더라도 넌 남들 앞에서 그걸 지적하면 안 됐다. 앞에서는 넘어가 주고 집 안에서 시시비비를 가려야지!”
아리아드네는 그간 쌓아왔던 아버지에 대한 호감 포인트를 다시 0으로 내렸다.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살았던 내 전생이 어떠했지? 당신이 퍽이나 공정한 판관이 되어 주겠소! 하지만 겉으로는 언제나 항상 유지하는, 공손하고 정중하며 신뢰감 있는 껍질을 뒤집어쓰고 아버지에게 고개를 숙였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재발하지 않도록 유의하겠습니다.”
아리아드네의 군더더기 없는 사죄에 만족한 데 마레 추기경은 이번에는 이사벨라를 향해 질타의 방향을 틀었다.
“너는 동생의 몸매가 어쩌고저쩌고해? 생각이 있느냐, 없느냐? 다 큰 처자가 어딜 입에 담을 말과 못 담을 말을 구별을 못 해? 그리고 하필이면 그 상대가 친동생이야? 네게는 우애라는 개념이 있기는 하느냐?”
이사벨라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오늘날까지를 모두 통틀어 아버지가 자기를 콕 집어 화를 내는 것을 본 것이 처음이었다. 아까는 데 마레 추기경의 힐책은 아리아드네를 향한 것이지 나를 향한 게 아니라고 정신승리라도 할 수 있었다. 지금은 그 대상과 내용이 특정되어 있으니 어디를 보아도 이사벨라 그녀에게 한 소리가 맞았다.
“으아아앙!”
꽃 같은 장녀가 눈물보를 터트리자 데 마레 추기경은 당황해 버렸다. 이사벨라는 개의치 않고 아기처럼 펑펑 울었다.
“⋯⋯내가, 내가 그런 게 아니라고요!”
이사벨라는 정말로 자기가 결백하다고 믿었다. 믿어야만 했다. 사람들이 이렇게 한목소리로 본인이 잘못했다고 말을 하고 있는데, 그 말을 긍정하면 ‘이사벨라’라는 사람은 영영 무가치하고 쓸모없는 쓰레기가 될 것 같았다. 감정적 미성숙함 앞에 사실관계는 머릿속에서 표백이 되어 꽃밭이 되었다.
“일부러 가슴을 깐 거 아니냐는 말은 카멜리아가 먼저 한 말이에요! 나는 옆에서 말리지 않은 잘못 밖에 없단 말이에요!”
“네가 한 게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