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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화> 붉은 장미의 주인 (567/733)

<제50화> 붉은 장미의 주인2021.05.26.

데 마레 추기경 관저에 화려한 붉은 장미 꽃다발 하나가 배달되어 왔다. 드레스 한 벌과 함께였다. 드레스는 콜레지오니 의상실에서 보내온 것으로, 가봉이 되기 전인 상태로 도착했다. 받으실 분의 치수에 맞추어서 가봉해서 완성하면 된다고 적혀 있었다. 백 송이 붉은 장미를 발견한 이사벨라는 그것이 당연히 자기한테 온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이사벨라는 종종 익명의 신사들 및 이름을 밝힌 신사들로부터 선물을 받고는 했다. 오늘도 별다른 것이 없는 날이었고 데 마레 추기경 관저에 도착하는 신사의 선물은 으레 언제나 이사벨라를 위해 온 것이었으므로 합리적인 추측이었다. 이사벨라는 손에 든 부채를 살랑거리며 장미꽃을 들여다보았다.

16630317238035.jpg“어머, 너무 예쁘다! 취향도 고상하시지! 이건 어느 신사분이 보내주신 거야?”

당연하게 묻는 이사벨라에게 우편물 전담 하인은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답변을 했다.

1663031723804.jpg“체자레 데 코모 백작님께서 보내신 선물입니다.”

이사벨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16630317238035.jpg“체자레 백작님이? 어머, 그분이 나한테 선물을 왜 보내셨을까? 별다른 접점도 없었는데.”

1663031723804.jpg“그것이…….”

16630317238035.jpg“장미는 내 방에다가 올려놔. 드레스는 지금 입어봐야겠어. 콜레지오니에 가봉 날짜 예약을 잡아주지 않을래?”

기분이 좋아진 이사벨라는 오랜만에 하인에게 명령형이 아닌 청유형으로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그 좋은 기분은 금방 산산조각이 나서 무너지고 말았다. 우편물 수발 전담 하인이 눈을 질끈 감고 외친 것이다.

1663031723804.jpg“여쭙기 황송하오나, 큰 아가씨. 이건 둘째 아가씨께 온 선물입니다.”

16630317238035.jpg“뭐라고?!”

  - 뚝! 이사벨라는 손에 쥔 부채를 부러뜨리고 말았다. * * * 막상 이사벨라의 상쾌한 오전을 산산조각낸 장미꽃 선물의 실제 주인은 이 선물을 받고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

16630317238069.jpg“이걸 나한테 보냈다고?”

1663031723804.jpg“예, 둘째 아가씨.”

이사벨라의 패악질을 간신히 빠져나와 아리아드네에게 무사히 우편물 배달을 마친 우편물 수발 전담 하인이었다. 하지만 그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어렵게 전달된 선물은 전혀 아리아드네를 기쁘게 하지 못했다.

16630317238069.jpg“붉은 장미꽃, 아리아드네, 맞아?”

1663031723804.jpg“예, 둘째 아가씨. 여기에 보내신 분의 편지가 있습니다.”

은박으로 장식된 체자레 백작가의 편지지였다. 붉은 밀랍으로 봉인된 봉투를 열자 그 안에 아주 잘 쓴 필기체로 적힌 쪽지 한 장이 나왔다. 「당신의 데뷔탕트 파트너로부터. 당신 평생의 첫 왈츠를 함께 추게 되어 영광이었음. 붉은 장미를 닮은 미인에게 어울리는 물건을 동봉함. - 체자레 백작.」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16630317242339.jpg- “은방울꽃은 당신을 닮았어. 순종적이고 나만 아는 것이 당신 같아.”

산 카를로 외곽의 숲에서 은방울꽃을 꺾어 귀에 꽂아주면서 체자레가 했던 말이었다. 작고 하얀 꽃. 고개를 숙인 꽃. 벌판에 피는, 공짜로 꺾은 꽃. 사람을 그따위로 취급했던 게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한데, 처지가 좀 바뀌었다고 해서 대우도 이렇게 달라지나? 아리아드네는 화가 났다. 이번 생의 체자레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도외시한 분노였다. 붉은 장미꽃은 화원에서 애지중지 기른 최상등품이었다. 그걸 백송이나 모아서 여자가 혼자 힘으로 들기에 버거울 정도로 무거운 꽃다발을 만들었다. 꽃다발 하나에 50 플로린(약 50만 원)은 족히 하고도 남을 물건이었다.

16630317238069.jpg‘전생에 이거 반 만큼이라도 신경을 써 줬으면 난 평생 당신을 받들어 모시며 살았을 텐데.’

사실 체자레더러 투자를 너무 조금 했다고 비난하기도 뭐했다. 전생의 체자레가 준 것은 벌판에 핀 은방울꽃밖에 없었지만 저번 생의 아리아드네는 끝까지 충직하게 체자레를 모셨기 때문이다. 가치에 딱 맞는 수준의 투자를 한 건가, 라고 중얼거리며 아리아드네는 체자레 백작이 보내온 또 다른 선물을 보았다.

16630317238069.jpg“저건 또 뭔가?”

1663031723804.jpg“드레스입니다. 콜레지오네 의상실에서 보내온 물건이라고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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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편물 하인이 의상을 입힌 마네킹 위를 덮은 천을 벗겨냈다. 피처럼 붉은 진홍색 실크로 만든 연회용 드레스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과연 콜레지오니 의상실의 위명에 맞게 박음질 하나 허투루 한 것이 없었다. 움직일 때마다 레이스 하나하나의 무늬가 최대한 잘 보이게 머리를 써서 섬세하고 철저하게 작업한 명품이었다. 진홍색 실크 드레스의 가슴팍은 세 겹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맨 바깥쪽의 두터운 실크 한 겹과, 그 안에 튤립 봉오리처럼 겹쳐지도록 댄 얇은 실크 한 겹에, 그 안에 또 피부를 덮도록 배열된 반투명한 오간자 한 겹이 있었다. 이 디자인대로라면 설혹 옷의 박음질이 터지더라도 나머지 두 겹이 가려줄 것이었다. 절대로 가슴 노출 사고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세심하게 고려한 디자인이었다.

16630317238069.jpg“신경은 썼네.”

하지만 그것은 그것이고 이것은 이것이었다.

16630317238069.jpg“돌려보내라.”

1663031723804.jpg“예?”

우편물 하인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아리아드네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단호했다.

16630317238069.jpg“그분과 나는 아무도 사이도 아니야. 이렇게 비싼 물건은 받을 수 없어. 게다가 난 라지오네 양장점과 약속을 한 게 있어서 당분간은 다른 곳에서 만든 드레스는 입을 수 없어. 체자레 백작께 잘 설명드리고, 꽃과 드레스는 돌려보내.”

1663031723804.jpg“하지만 아가씨! 장미꽃은 생화라서 돌려보내면 다 시들어버릴 겁니다.”

하인은 황급하게 덧붙였다.

1663031723804.jpg“쓰레기를 보내는 것과 매한가지라굽쇼.”

하인은 그것이 왜 실례인지를 장황하게 설명했다. 겉으로는 예법 교육이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제발 저에게 데 코모 백작가로 꽃을 들고 돌아가게 하지 마세요’라는 애원이었다. 보낸 꽃이 거절당하는 것은 신사에게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는 짓이었고, 데 코모 백작은 성질머리가 더럽고 백작가의 하인들은 거칠기로 유명했으며, 보통 그 주인에게 해코지를 하지 못하면 사람들은 으레 그 심부름꾼인 하인에게 분풀이를 하고는 했다. 하인이 대놓고 말하지 못한 그의 실무적인 고충까지 고려해서 잠시 물건들의 처리를 고민한 아리아드네는 그래도 도리질을 쳤다.

16630317238069.jpg“그래, 그럼 드레스만 돌려보내. 드레스는 콜레지오네 의상실로 바로 보내면 될 테니까 자네도 한결 부담이 덜하겠지? 장미꽃은 바깥에다 두어라.”

1663031723804.jpg“아가씨 방이 아니고요?”

16630317238069.jpg“그래, 아무 데나 내 눈에 안 띄는 곳에 가져다 놔.”

그리고 아리아드네에게는 오늘 좀 더 중요한 볼일이 있었다. 체자레가 보낸 선물 따위에게 신경을 쓸 계제가 아니었다.

16630317238069.jpg“마차는 준비되었나.”

1663031723804.jpg“예, 아가씨. 마부에게 지금 내려가신다고 일러 놓을까요?”

16630317238069.jpg“좋아.”

오늘은 줄리아 데 발데사르가 초대한 영애들의 티파티가 있는 날이었다. 아세레토의 사도를 맞이하러 산 에르콜레 대성황당에 가던 날만큼이나 떨렸다. 아리아드네는 손바닥에 밴 땀을 몰래 드레스에 문질러 닦았다. * * *

1663031723804.jpg“발데사르 후작가를 방문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데 마레 영애.”

후작가의 일 도메스티코가 그녀에게 깍듯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아리아드네는 우아해 보이려고 노력한 미소로 그 인사를 받았다.

1663031723804.jpg“안쪽으로 들어가시지요, 데 마레 영애. 시뇨라 줄리아께서는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늘 아리아드네의 호칭은 ‘작은 데 마레 영애’가 아니었다. 이사벨라는 초대를 받지 못했으므로 데 마레 영애가 한 명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리아드네는 얌전한 연한 녹색의 외출용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는 새끼손톱 반만 한 녹색 토파즈가 알알이 박혀 있는 그물 머리 가리개를 쓴 채였다. 어디 가서 데 마레 가문의 유일한 참가자가 촌스럽다는 이야기는 듣지 않도록 신경을 쓴 단정한 룩이었다. 녹색 드레스를 입은 아리아드네가 발데사르 가의 응접실로 들어서자, 먼저 모여 있던 소녀들의 시선이 일제히 아리아드네에게로 쏠렸다. 몇몇은 호의적으로, 몇몇은 호기심 가득하게, 몇몇은 평가하듯이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이었다. 그 시선을 몸으로 막아주듯이, 오늘의 주최자인 줄리아 데 발데사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리아드네에게 다가왔다.

16630317252702.jpg“데 마레 영애!”

줄리아는 아리아드네의 손을 맞잡았다.

16630317252702.jpg“와 주셔서 기뻐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리아드네는 줄리아의 호의에 밝은 미소를 띠며 화답했다.

16630317238069.jpg“초대해주셔서 감사하지요.”

16630317252702.jpg“데 마레 영애께서는 익숙하지 않은 얼굴들도 좀 있으시지요? 제가 소개해 드릴게요.”

오늘 줄리아 데 발데사르의 티파티에는 네다섯 명의 아가씨들이 모여 있었다. 정의감이 넘치는 갈색 머리의 리날디 백작 영애, 에트루스칸 북부에 융성한 영지가 있는 델라토레 백작 영애, 아버지가 이름 있는 법률가인 엘바 자작 영애는 비교적 낯선 얼굴들이었다.

16630317238069.jpg“아니에요, 시뇨라 줄리아.”

아리아드네는 밝게 웃으며 줄리아의 호의에 답했다.

16630317238069.jpg“시뇨라 코르넬리아…….”

먼저 아리아드네는 리날디 백작 영애를 바라보며 악수를 청했다.

16630317238069.jpg“그리고 시뇨라 가브리엘레는 일전에 데뷔탕트 무도회에서 뵌 적이 있지요.”

두 번째로 인사한 것은 델라토레 백작 영애 가브리엘레였다. 두 영애는 단 한 번 마주쳤던, 최근 산 카를로 최고의 화젯거리인 아리아드네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뿌듯해하는 모습이었다. 마지막 한 명인 엘바 자작 영애와는 정말로 처음 보는 사이여서, 줄리아의 도움을 받아 통성명을 나눴다. 그 자리에는 조금 의외인 낯익은 얼굴도 끼어 있었다. 카멜리아 데 카스틸리오네였다.

1663031723804.jpg“다시 만나 뵈어 반갑습니다, 데 마레 영애.”

카멜리아는 굳이 따지자면 이사벨라의 친구였지만, 맞장구를 잘 치고 사교적이라 두루두루 발이 넓고, 무엇보다도 소문에 밝은 타입이라 다른 소녀들의 파티에도 꼬박꼬박 초대받는 편이었다. 줄리아도, 이사벨라와는 척을 졌지만 이사벨라와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전부 잘라낼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서운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당연히, 그럴 만하지. 나는 오늘 여기 처음 초대받은 것일 뿐인걸.

16630317238069.jpg“반갑습니다, 카스틸리오네 남작 영애.”

아리아드네는 싫은 티를 전혀 내지 않고 웃는 낯으로 카멜리아와 인사를 나눴다. 소녀들의 사교계는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 * * 10대 소녀들이 여럿 모인 자리에서 남자 이야기는 빠질 수가 없는 화제였다.

1663031723804.jpg“이번에 가브리엘레에게 혼담이 들어왔다면서요!”

델라토레 백작 영애는 웃으며 겸양의 말을 했다.

1663031723804.jpg“혼담은 무슨, 그냥 제의 정도죠. 될지 안 될지는 가봐야 알아요.”

1663031723804.jpg“그래도 남자분이 몬테펠트로 후작가의 장자라면서요.”

몬테펠트로 후작가는 에트루스칸 중부에 대영지를 가지고 있는 아주 오래된 명문 가문이자 구 귀족이었다. 장자상속이 원칙인 에트루스칸에서, 몬테펠트로 후작가의 장남과 결혼한다는 것은 별문제가 없다면 몬테펠트로 후작 부인이 된다는 이야기였다.

16630317252702.jpg“가브리엘레의 가문인 델라토레 백작가도 북부의 대귀족이니 구 귀족가 사이의 축복받는 결합이 되겠어요.”

아리아드네를 제외한 소녀들 사이에서는 가장 예리한 정치적 식견을 가진 줄리아가 성사 가능성의 정도를 짚었다. 가문 사이의 급과 이해관계가 맞으면 혼담은 보통 순조로이 결혼으로 이어지고는 했다.

1663031723804.jpg“너무 부러워요.”

엘바 자작 영애, 펠리시테가 가브리엘레에게 순진한 부러움을 던졌다. 그녀의 아버지는 물려받은 영지는 별 볼 일 없었으나 일신의 재주로 수도로 올라와 출세한 이로, 굳이 따지자면 봉건영주보다는 궁정 귀족에 더 가까웠다. 자연스럽게, 그녀는 구 귀족에 대해 동경을 가지고 있었다. 대영지를 가진 구 귀족과 혼인하여 기존 지배질서의 정점에 선 그 안주인이 되는 것은 신흥 귀족의 딸들 대부분이 가진 로망이었다. 하지만 가브리엘레 델라토레는 씁쓸하게 웃었다.

1663031723804.jpg“글쎄요. 으리으리한 영지를 다스리는 것도 행복의 일종이긴 하겠지만, 그것만 있다고 언제까지나 행복할까요.”

몬테펠트로 후작의 장남인 페트루치오에게는 사별한 아내가 있었다. 이미 30대에 들어선 그는 열 살이 좀 안 된 장자와 아직 어린 둘째 딸마저 있었다. 진중하고 사려 깊은 성격이라고 알려진 페트루치오 데 몬테펠트로는 혼처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남자였지만, 과연 10대 후반의 소녀가 꿈꾸는 행복에 꼭 맞아들어가는 선택이라기에는 조금 어폐가 있었다. 줄리아 데 발데사르로서는 십분 동감이 가는 이야기였다. 꼭 남자의 신분이 높아야 할까. 그냥 잘생기고 참한 상대와 잘 지내면 안 될까. 그러나 그녀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자신과 가브리엘레를 모두 다잡는 이야기를 했다.

16630317252702.jpg“사랑은 잠깐 흘러가는 덧없는 기쁨에 불과해요.”

10대 다운 단정적인 어조로 던지는 10대답지 않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다음 이야기를 하려던 줄리아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불타는 사랑의 열병 대신에 일상의 평온함과 단란한 가정에서 피어나는 행복을 이야기하고는 했는데, 아직 피가 끓는 나이의 줄리아에게는 그런 잔잔한 이야기들은 전혀 와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 뒷말은 펠리시테가 대신해 주었다.

1663031723804.jpg“그래도 후작 부인이 딱 되셔서 산 카를로의 무도회에 입장하게 되면 실감 날걸요? 만인이 다 영애만 바라볼 거에요. 좋겠다, 가브리엘레!”

1663031723804.jpg“그러게요. 순조로워서 너무 부러워요.”

이번에 한숨을 푹 쉰 것은 카멜리아였다.

1663031723804.jpg“왜요, 카멜리아. 카멜리아에게는 약혼자인 시뇨르 오타비오가 계시는데 뭐가 걱정인가요.”

1663031723804.jpg“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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