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화> 어른의 사정2021.06.02.
국왕배 사냥대회는 매해 가을 열리는 정례 행사였다. 사냥대회 참가자들은 산 카를로 북쪽에 있는 왕궁 사냥터인 오르테 숲으로 이동해, 천막을 쳐 놓고 하루 종일 사냥을 했다. 지체 높은 귀족들과 귀부인 및 귀족 영애들은 숲의 초입에 마련한 천막에서 담소를 나누고, 젊은이들은 활과 화살통을 차고 사냥개를 이끌고 숲속 깊은 곳으로 사냥감을 잡으러 떠났다. 그날의 하이라이트는 사냥대회 우승자를 가리는 시상식이었다. 아침 일찍 일정을 시작해 오후 늦게 그날의 사냥감을 개인별로 집계한 후, 가장 좋은 사냥감을 가장 많이 잡아 오는 청년에게는 상을 주었다. 상은 국왕 폐하께서 내리는 약간의 금화와 마르그리트 왕비가 손수 씌워주는 월계관이었다. 그 외에도 볼만한 것은 영애들이 각기 건네주는 리본이나 손수건이었다. 손수건을 내주는 것은 내밀한 밀회의 증표로 여겨져서 아주 대담한 영애가 아니라면 본인의 손수건을 함부로 내돌리지 않았지만, 이날만큼은 사냥대회의 우승자에게 보내는 찬사의 의미로 손수건을 건네주는 것이 너그럽게 용인되었다.
“이번엔 누가 우승을 할까?”
아라벨라가 두 눈을 반짝이며 아리아드네에게 물었다. 아라벨라는 요사이 항상 아리아드네의 응접실에 놀러 와서 죽치고 있었다. 아직 어린 아라벨라에게 사교계의 일들이나 언니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 남자들에게서 오는 편지와 쪽지, 꽃다발, 선물은 다른 세상 이야기 같았다. 들어도 들어도 모자라고 더 듣고 싶었다.
“글쎄?”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저었다. 산 카를로에 자리를 잡은 궁정 귀족들은 사실 사냥이나 검술보다는 체스와 문학에 더 능통한 편이었다. 그래서 사냥대회의 우승자는 수도 귀족에게 익숙한 이름보다는 처음 보는 사람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다 커서 사냥대회에 참가하는 해에는 꼭 잘생긴 기사님이 우승을 했으면 좋겠다!”
아라벨라가 별렀다. 아리아드네가 웃으며 답했다.
“잘생긴 기사님을 원하는 거라면 우승하지 않으셔도 손수건을 드릴 수 있는걸?”
꼭 우승자에게 건네주는 것이 아니더라도 아쉽게 우승을 놓쳤다거나, 아니면 그저 그 영애 눈에 용맹해 보였다거나 하면 수줍게 손수건을 건네거나 말 안장에 리본을 묶어두고 사라지는 일이 왕왕 있었다. 사냥대회는 선남선녀 사이에 눈이 맞는 일이 자주 일어나는 행사였다. 그런 속사정까지는 모르고 있던 아라벨라가 두 눈을 빛냈다.
“난 잘생긴 신랑이랑 결혼할 거야!”
“그러려무나.”
아리아드네가 웃었다.
‘그렇게 되도록, 그때까지 네가 무사히 자라고 살아 있을 수 있도록 내가 도와줄게. 네 운명을 바꿔줄게.’
아라벨라가 자기 말마따나 잘생긴 기사님의 손을 잡고 집에 인사 오는 상상을 하자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아라벨라가 배다른 언니의 다짐을 알게 될 날이 올는지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사냥대회에는 수도 귀족들은 대부분 초대되었고, 야외 행사인 만큼 입장할 수 있는 사람의 수에 제한이 없어 꼭 귀족이 아니더라도 귀족의 친척이라던가, 관리 중 공을 세운 사람 등 올 만한 사람들에게는 초대장이 너그럽게 돌았다. 아내감을 찾으려는, 신분은 낮지만 용맹하고 야심 있는 남성이 참석하고 싶어 하는 행사 1위였다. 루크레치아가 자노비를 데뷔탕트 무도회가 끝난 이후로도 타란토로 돌려보내지 않은 이유도 자노비를 여기에 참가시키고자 함이었다. 루크레치아는 제발 조카인 자노비가 여기에서 번듯한 아가씨를 꼬셔서 수도에 눌러앉기를, 아니 사실 자노비의 얼굴을 고려하면 그것은 쉽지 않아 보였기에 자노비가 신사들과 안면이라도 터서 수도에 적당한 일자리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랐다.
“너, 이번에는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여기저기서 사람을 많이 만나봐야 해.”
루크레치아는 자노비를 앉혀놓고 신신당부했다.
“제가 어련히 알아서 잘하려고요, 루크레치아 고모!”
* * * 콜레지오네의 드레스 선물이 퇴짜를 맞은 이후로도 체자레는 꾸준히 선물을 보내왔다. 사냥대회를 목전에 두고 도착한 것은 여전히 똑같은 붉은 장미 꽃다발과 사슴 가죽으로 특별히 세공한 정교한 말 안장이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아가씨의 철통같은 냉정함에 가로막혔다.
“장미는 아무 데나 내 눈에 안 띄는 곳에 치우고, 말 안장은 돌려보내라.”
아리아드네의 지시에 익숙해진 우편물 전담 하인이 두말하지 않고 큰 선물 상자를 들고 되돌아 나갔다. 어찌나 익숙해졌는지, 체자레의 하인이 돌아가지 못하게 붙잡아 놓고 둘째 아가씨의 지시를 받은 다음에 체자레의 하인이 돌아가는 길에 다시 들고 돌아가게 할 정도였다. 이사벨라는 이제 붉은 장미만 보면 노이로제가 걸릴 것 같았다. 하지만 붉은 장미를 보았을 때 마음이 즐겁지 않은 것은 아리아드네도 마찬가지였다. 그간 아리아드네가 주로 받던 우편물은 금박으로 장식된 알폰소 왕자의 편지지였다. 알폰소 왕자는 금으로 장식된 편지지에 항상 굵은 촉과 푸른 잉크로 글을 썼다. 그러나 데뷔탕트 무도회가 끝나고 돌아간 이후로는 직후에 도착한, 궁에 잘 들어갔음을 알리는 편지 단 한 통을 제외하고는 알폰소로부터 그 어떠한 연락도 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아니면, 그냥 내가 싫어진 걸까. 아리아드네는 혼자 남겨질 때마다 알폰소와 있었던 일들을 되새김질했다. 치보 후작가의 경매에서 <비토리아 니케>가 위작이라고 미리 귀띔해주지 않은 것에 마음이 상했을까? 소원권을 달라고 했던 게 너무 주제넘었을까? 아니면 역시 데뷔탕트 무도회에서 내 몸이 크고 흉한 걸 보고 마음이 상한 걸까? 그 생각만 하면 걷잡을 수 없이 우울해졌다. 아리아드네는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아가씨, 편지도 있습니다요.”
멍한 얼굴의 아리아드네를 우편물 전담 하인이 재촉했다. 항상, ‘우편물이 도착했다’는 기별을 받고 왕자의 편지를 기대하면서 우편물 전담 하인을 쳐다보면 그가 내미는 것은 금박 편지지가 아닌 거대한 붉은 장미와 데 코모 백작가의 은박으로 장식된 편지봉투였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하인이 내민, 붉은 밀랍으로 봉해지고 은박으로 장식된 편지봉투 안에는 체자레의 아름다운 필기체로 쓰인, 쪽지에 가까운 편지가 들어있었다. 「당신의 데뷔탕트 파트너로부터, 이번 사냥대회에서는 우승을 해볼 작정이오. 내가 황금 사슴을 잡은 우승자가 된다면 그대의 손수건을 주시지 않겠소? - 체자레 백작. 」 아리아드네는 그간 체자레 백작의 모든 쪽지에 무대응으로 대응하고 있었다. 즉, 답장을 단 한 번도 보내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쪽지를 보고는 짜증이 확 나서 그만 닥치라는 내용의 답장을 쓸 뻔했다. 양피지를 놓고 펜까지 들었던 아리아드네는 첫 마디를 써 내려가기 직전에 간신히 스스로를 자제하고는 탁 소리를 내며 펜촉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뻔뻔하기 짝이 없는 인간.”
그러고는 체자레 백작의 편지를 들어 박박 찢어 쓰레기통에 버려버렸다. 아무리 궁해도 그렇지 음식이 아닌 걸 먹을 수는 없었다. 수도의 영애들이 단 한 번이라도 받아보기를 꿈에서도 그린다는 체자레 백작의 친필 편지가 쓰레기가 되어 내쳐지는 순간이었다. * * * 사냥대회 당일은 새파란 가을 하늘이 청명한 날씨였다. 각자의 기대감을 안고 참여한 초대 손님들은 오르테 숲 초입에 거대하게 세워진 흰 천막에 삼삼오오 모여서 오늘의 사냥대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 “올해의 우승자는 누가 될까요?”
- “갈리코 왕국의 외교 사절들이 왔다고 하는데, 그 수행원 중 한 명 아니려나요?”
- “아무래도 산 카를로 귀족들은 무예에는 좀 약하긴 하죠.”
- “그래도 에트루스칸 사람이 우승했으면 좋겠어요.”
- “그러게요.”
알폰소 왕자는 검술과 마상 창 시합, 사냥 등에 뛰어나기로 이름이 높았다. 그러나 작년까지는 완연히 소년이었기 때문에, 아들을 금쪽같이 아끼는 마르그리트 왕비가 일체의 위험한 활동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막아 왕자는 사냥대회에 참가한 적이 없었다. 올해에 드디어 데뷔를 하려나 했는데, 갈리코 왕국의 외교사절단이 도착하는 바람에 왕자는 외국 사신들과의 자리가 줄줄이 잡혀 올해의 사냥대회에도 불참하게 되었다. 오늘 알폰소 왕자의 자리는 사냥터가 아닌 귀빈들이 모여 있는 천막이었다.
“빈집은 털어줘야 제맛이지.”
유력한 우승 후보가 떠난 자리를 체자레 데 코모 백작이 노리고 있었다. 그는 마상 창 시합같이 신체적 힘을 요구하는 기예에는 약했으나 근력보다는 기교가 중요한 궁술이나 승마술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활로 승부가 가려지는 사냥대회야말로 체자레가 빛날 수 있는 시합장이었다.
“그거 호랑이 없는 숲에는 여우가 왕이다, 이런 건가?”
“시끄러워, 누가 여우라는 건가?”
옆에서 깔짝거리는 오타비오에게 짜증을 낸 체자레는 말고삐를 한 차례 흔들어 혼자서 앞으로 훌쩍 치고 나갔다. 오타비오가 신경을 긁지 않았더라도 오늘은 혼자 다닐 생각이었다. 다른 귀족 자제와 동행을 하면 사냥감을 발견했을 때 나누어야 했다. 체자레는 몰이꾼을 해 줄 수하들과 사냥개만을 대동하고 오늘은 깊은 숲에 들어가 멧돼지, 곰, 아니면 전설의 ‘황금 사슴‘을 잡아 올 생각이었다.
“어이, 너희들. ‘황금 사슴’을 다치게 하지 않도록 조심해.”
“에이, 백작 나으리. 설마 ‘황금 사슴’이 정말로 있겠습니까. 곰을 노리는 게 현실적이죠.”
야유하는 부하들에게 체자레가 유쾌하게 외쳤다.
“내가 예전에 진짜로 봤다니까! 인생은 한방, ‘황금 사슴’만 찾으면 우승은 떼놓은 당상이다. 눈 크게 뜨고 찾도록!”
“예!”
* * * 아리아드네는 루크레치아와 이사벨라, 그리고 자노비와 함께 사냥대회 장소인 오르테 숲 외곽으로 도착했다. 오늘은 마차가 아닌 말을 탄 채였다. 신사들뿐만이 아니라 숙녀들도 멋들어진 승마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아리아드네도 라지오네 양장점에서 새로 맞춘 사냥 모자를 쓰고, 움직이기가 편안하도록 치마폭은 좁고 목선이 턱 끝까지 올라오는 초록색 세로줄 무늬 승마용 복장을 갖춰 입고 다갈색 말을 타고 오르테 숲 외곽에 진입했다. 화사한 백마 위에 앉아 더러워질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는지 역시 화려한 순백색의 승마복을 차려입은 이사벨라와, 승마복인데도 불구하고 이브닝드레스처럼 목둘레선을 깊게 판 루크레치아, 그리고 그의 생계를 책임져 줄 어느 귀족 영애를 낚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치장한 자노비도 함께였다. 이사벨라는 오늘 다른 친구들과 함께 있고 싶었지만 사교계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어머니와 동무를 해줘야 하는 현실이 못내 짜증이 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이사벨라 친구의 숫자가 많이 줄었기 때문에 도리어 어머니를 챙겨야 한다는 핑계가 있는 쪽이 나을 수도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줄리아 데 발데사르와 그 친구들은 오늘 대부분 오지 않았다. 이미 정혼 상대가 있는 영애들은 사냥대회에 참석하지 않았고, 반대로 신분이 너무 높아 가문에서 지어주는 짝을 만날 것이 틀림없는 영애들도 참석하지 않았다. 사냥대회에 참가하는 남자 형제가 있는 경우 응원차 와 보는 경우는 있었지만, 줄리아의 오빠는 유학 차 파도바에 체류하는 중이었고 코르넬리아는 여동생만 있었으며 가브리엘레의 남동생은 사냥대회에 참가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아주 멀리 알폰소 왕자가 보였다. 알폰소 왕자는 레오 3세와 마르그리트 왕비 및 갈리코 사절단과 함께 천막의 정중앙 쪽, 가장 높은 귀빈석에 서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알폰소 왕자 쪽을 쳐다보았다. 왕자도 아리아드네 방향을 바라보았다. 둘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알폰소 왕자는 아리아드네와 마주치자 당황하며 고개를 숙였다. 정식으로 예를 취하거나 따로 아는 척을 하지는 않았다. 아리아드네는 기분이 확 저조해졌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알폰소 왕자와 그녀는 그저 친구 사이일 뿐이었고, 알폰소 왕자에 대한 설렘은 그녀 혼자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알폰소 왕자는 지금 공식 일정을 수행 중이고 그저 친구에게 내줄 시간은 없다. 하지만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은 따라오지 않았다. 왜인지 모를 상실감에,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말에 박차를 가해서 앞으로 달려나갔다. * * * 알폰소가 아리아드네에게 따로 인사를 하지 않은 이유는 모친의 당부도 당부려니와, 지금 그가 처한 상황 때문이었다. 지금 알폰소 쪽은 개인적인 연애사업에 집중할 상황이 아니었다. 국가 차원의 연애사업이 알선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딱히 진행이 원만하지 않았다. 갈리코의 사절들은 공작 하나와 백작 하나, 그리고 여러 명의 실무자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모두 에트루스칸 왕국과의 사이에서 여러 번 외교 사절로 오간 적이 있던 자들이었다. 당연히 그들은 에트루스칸어를 아주 잘 할 수 있었다. 지난번에 미레이유 공작이 에트루스칸에 외교 사절로 왔을 때만 해도 그는 유창한 에트루스칸어로 에트루스칸 귀부인들과 담소를 나누고는 했다. 하지만 오늘 그들은 모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입을 꼭 다물고 갈리코 어로만 이야기했다. 명목상 붙어 있던 통역도 실제로 본인이 일을 하게 되자 몹시 당황한 기색이었다.
“It's a fine day, isn’t it.” (날씨가 참 좋습니다.)
레오 3세도 물론 알아들을 수 있는 간단한 갈리코어였지만 국왕이 외국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라 모여 있는 수뇌부들은 모두 당황하고 있었다. 그나마 갈리코 어가 모국어이고, 왕족이지만 갈리코 어로 말하는 것이 흠이 되지 않는 갈리코 출신의 마르그리트 왕비가 사절들의 한담에 반응해주고 있을 따름이었다. 결국 보다 못한 마르케즈 백작이 통역을 통해 갈리코 사절들에게 한마디를 했다.
“에트루스칸에 오셨으면 에트루스칸 법을 따르셔야지요. 우리 피차 편안한 언어로 대화를 나눕시다.”
그러자 갈리코 사절, 미레이유 공작이 비릿하게 웃으며 한마디를 했다.
“What makes a country great? Its’ language, I’d say.” (어디 강대국이 작은 나라의 방식을 따르는 것을 보셨소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