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화> 입술과 접촉2021.06.16.
“안 잡아요?”
아리아드네는 체자레에게 속삭였다. - ‘황금 사슴’을 잡는 자는 왕좌에 다가간다. 국왕의 핏줄인 체자레 데 코모 백작이 ‘황금 사슴’을 잡았다. 체자레가 아주 좋아할 법한 이야기였다. 오늘 체자레가 ‘황금 사슴’을 잡아 천막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이는 단연코 사냥대회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사건으로 꼽힐 것이다. 아리아드네는 체자레의 말에서 조용히 내릴 준비를 했다. 체자레가 가지고 온 것은 두 손으로 쏘는 강궁이어서 한쪽 팔을 쓸 수 없는 지금은 무용지물이었다. 그나마 말을 타고 쇄도하며 표창을 던지는 것이 가능성이 높았다. 말을 넘겨줘야 ‘황금 사슴’을 잡을 수 있었다. 그녀는 체자레가 얼마나 관심의 중심이 되는 것을 좋아하는지 익히 알고 있었다. 게다가 체자레의 ‘황금 사슴’ 타령을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던 차였다. 그래서 아리아드네는 당연히 체자레가 ‘황금 사슴’을 잡으러 그녀를 두고 달려갈 거로 생각했다.
“말 내줄게요. 왼쪽으로 내릴 테니 당신이 오른쪽에서 바로 뛰어올라요.”
속삭이는 그녀에게 체자레가 평이하게 말했다.
“아냐. 안 잡을 거야.”
“네?”
아리아드네의 반문에 체자레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저거 잡으려면 아가씨를 두고 숲속으로 뛰어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그러냐?”
그는 변명 조로 굳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숲속에서 아가씨를 잃어버리면 골치 아파. 그냥 가자.”
아리아드네는 의외의 상황에 놀라 잠시 말을 잊었다. 그녀는 바보 같은 말이지만 이렇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많이 잡고 싶어 하던 거 아니었어요? 편지에다가도 ‘황금 사슴’ 타령만 했잖아요.”
“잡고 싶었던 건 맞는데⋯⋯.”
그는 아리아드네를 흘긋 바라보았다. ‘황금 사슴’도 잡고 싶었지만 그거보다 더 큰 사냥감, 갈구하던 처녀가 그의 눈앞에 있었다. 그녀의 심장을 얻는 것이 ‘황금 사슴’의 가죽보다 나은 장사일 것 같았다.
“오늘만 날은 아니잖아?”
인간들의 기척을 느낀 ‘황금 사슴’이 귀를 쫑긋 세우더니 사람들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잠깐 눈싸움을 하던 ‘황금 사슴’은 이내 몸을 한 차례 푸르르 떨고는 그만 풀숲 속으로 뛰어들어가고 말았다.
“이런, 오늘은 공쳤네.”
체자레는 반쯤은 아쉬운 마음, 반쯤은 시원한 마음으로 등허리를 쭉 폈다. 입으로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약간의 내적 갈등이 있던 차였는데 아예 ‘황금 사슴’이 달아나 버리자 더 이상 고민할 거리가 없었다. 그는 개운해진 기분으로 유쾌하게 ‘황금 사슴’이 물을 마시던 개울가로 말을 몰았다.
“‘황금 사슴’은 못 잡았지만 ‘황금 사슴’이 마시던 물이니 이 개울물이 ‘영생의 샘물’인 것으로 치자고.”
그는 아리아드네에게 내리라고 몸짓했다. 그 말을 들은 아리아드네가 말에서 내리려고 하자, 그는 한쪽 팔로 아리아드네가 말에서 내리는 것을 도와주며 덧붙였다.
“여기서 목이나 축이고, 세수라도 하고 가자. 네 못생긴 얼굴도 ‘영생의 샘물’로 닦으면 예뻐질지 누가 알아?”
아리아드네는 체자레에게 눈을 흘기며 말에서 내렸다. 수통의 물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마침 몹시 목이 마르던 차였다. 아리아드네는 개울물을 두 손으로 떠서 한 모금 마셨다. 정신이 번쩍 들도록 매섭게 차가운 물이었다.
“근데 아가씨, 그래도 내 편지는 꼬박꼬박 읽나 봐?”
“네?”
“답장이 한 번도 없길래, 다 읽지도 않고 찢어서 버린 줄 알았어! 와 신난다, 앞으로도 많이 보낼게?”
찢어서 버린 건 맞는데⋯⋯. 아리아드네는 겸연쩍게 고개를 돌렸다. 아리아드네가 별말이 없자 체자레는 개울물을 떠서 자기의 왼쪽 얼굴을 닦아냈다. 상처가 길게 나 있었다. 아까 바닥에 구를 때 바닥에 쓸려 찰과상을 입은 모양이었다. 흙과 피가 함께 차가운 개울물에 닦여 나갔다.
“으, 아프겠다.”
“응. 아파.”
“잘 모르시나 본데, 이럴 땐 ‘괜찮아’라고 하는 편이 훨씬 멋있어요.”
“난 뭘 해도 멋있으니까 괜찮아.”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체자레를 보다가, 체자레의 몰골이 엉망인 것을 보고 문득 깨달았다. 흙바닥에는 같이 뒹굴었으니, 그녀의 얼굴도 흙먼지로 더러워졌을 것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아침에 산차가 해 준 눈화장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개울물로 같이 얼굴을 씻었다. 그녀가 얼굴 씻기에 열중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마 쪽에 따듯한 사람의 체온이 느껴졌다. - 쪽.
체자레가 아리아드네의 이마에 입맞춤한 것이었다. 아리아드네는 화들짝 놀라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뭐 하는 거예요!”
체자레가 부러진 왼손은 밑으로 내린 채 오른손만 항복 자세로 들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미안미안, ‘영생의 샘물’로 세수를 하니 갑자기 예뻐 보이길래!”
“진짜, 이러지 말라고요 정말!”
“아니, 무너지는 말에서 구해 준 기사님에게 이 정도도 허락 못 하나?”
둘은 티격태격하면서 개울을 따라 걸어 내려갔다. 말은 체자레가 끌고 나란히 서서 걷는 채였다. 늦은 오후의 해가 천천히 지고 있었다. * * * 레오 3세와 미레이유 공작 간의 의미 없는 신변잡기 잡담은 아주 길었고, 상당 부분 부적절했다. 마르그리트 왕비를 앉혀놓고 그 앞에서 음담패설을 하기도 하고, 미래의 신부를 대변하러 온 주제에 나이든 귀족들의 성적인 풍속에 관해 구구절절이 읊기도 했다. 완전히 질려 버린 알폰소는 하릴없이 눈으로 천막 바깥쪽을 계속 훑었다. 그가 있는 곳은 천막의 정중앙에 높게 세워진 귀빈석이라 천막 안쪽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대부분 보였는데, 아리아드네는 오전에 한 번 먼발치에서 스쳐 지나간 것을 제외하고는 계속 보이지 않았다.
‘설마 직접 사냥을 나갔나? 그렇게까지 운동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대부분의 숙녀들은 천막 안에서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눴다. 유독 특이한 몇몇만 직접 사냥을 하러 나섰다.
‘혹시 다른 남자와 산책이라도 하러 나갔나?’
사냥대회는 유독 선남선녀들이 눈이 잘 맞는 행사였다. 매해 사냥대회에서는 ‘사냥’을 하러 간다며 숲속으로 함께 들어가 몇 시간씩 ‘사냥감을 찾다가’ 빈손으로 돌아오는 커플들이 왕왕 생겼다. 알폰소의 주먹 쥔 손에 무의식중에 힘이 들어갔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흔들어 불길한 생각을 떨쳐냈다. 아리아드네는 딱히 친밀하게 지내는 남자가 없었다.
‘그럴 리가 없지. 얼마나 까탈스러운 아이인데.’
그녀의 웃음, 그녀의 장난, 부풀려진 센 척과 그 사이로 엿보이는 유리 세공품 같은 연약함은 자신만 알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저녁이 늦어지고 사냥꾼들이 삼삼오오 돌아오고 있었다. 다섯 시가 되자 숫제 시상까지 시작했다. 가장 큰 멧돼지를 잡아 온 어딘가의 기사가 레오 3세의 치하를 받고, 미레이유 공작 앞에서 에트루스칸 인의 용맹함을 뽐내고, 마르그리트 왕비가 하사하는 월계관을 받았다. 그 모든 과정이 일어나는 와중에 검은 머리의 소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집에 일찍 돌아간 건가?’
아닐 거라는 예감이 들었지만 그는 못내 스스로를 설득했다. 아리아드네의 고약한 계모와 독살스러운 배다른 언니가 여전히 천막 안에 있긴 했으나, 아리아드네는 그들과 별로 친하지 않았으니 충분히 먼저 돌아갔을 수도 있었다.
- “국왕 폐하, 아직 체자레 백작이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마르그리트 왕비와 갈리코 왕국 사절단의 눈을 피해 레오 3세의 비서관이 레오 3세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하지만 레오 3세는 비서관의 노력이 허무하게, 간이 옥좌를 떨치고 일어나며 큰소리로 외쳤다.
“체자레가?”
그 친근한 호칭에 마르그리트 왕비와 갈리코 사절단의 얼굴이 동시에 굳었다. 마르그리트 왕비는 친정에서 보내온 사람들에게 남편에게 받는 푸대접을 들킨 것이 면구스러워서, 갈리코 사절단은 지금 왕자비를 보낼 협상을 하러 왔는데 에트루스칸으로 보내지게 될 왕자비의 미래가 마르그리트 왕비처럼 될까 봐 의심스러워서였다. 시집보낸 가문의 여자가 좋지 못한 취급을 받는 것은 그녀가 알아서 할 문제였다. 하지만 후계가 그녀가 낳은 아이가 아니라 오염된 피로 바뀌는 것은 손익 득실의 문제였다. 하지만 레오 3세는 아내와, 처가댁이자 이웃 나라의 사절단 앞에서 이런 정도의 위세로 부리지 못하면 체면이 서지 않는다는 듯, 평소에 본인이 체자레를 챙기던 것보다도 더 요란하게 굴었다. 레오 3세의 비서관은 앞이마를 짚었다.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숲으로 사람을 보내! 어서 찾아! 해가 다 떨어져 가고 있지 않으냐!”
“앗, 국왕 폐하! 저기 숲속에서 누가 나오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목소리에 사람들은 일제히 그가 가리킨 방향을 쳐다보았다. 관목이 버석버석 흔들리며 체자레가 사냥용 칼을 휘둘러 그 사이를 헤치고 나왔고, 그 뒤를 말 고삐를 잡은 아리아드네가 따라서 걸어 나오는 중이었다. 둘 다 나뭇가지에 긁힌 자잘한 상처와 낙마의 여파로 꼴이 엉망이었다.
“데 코모 백작!”
레오 3세가 체자레를 발견하고 소리 높여 불렀다. 다행히 갈리코 사절단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쳐다보는 와중에 다정하게 체자레를 바라보며 본인을 이름으로 부르는 사고를 치지는 않았다. 레오 3세의 비서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는 레오 3세가 스스로 그어놓은 선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과 루비나 백작 부인을 꼭 빼닮은 체자레를 귀여워하고 예뻐했지만 절대 체자레에게 왕위계승권을 줄 생각은 없었다. 공식적인 장소에서 체자레의 작위는 여전히 ‘백작’, 제대로 된 세습 영지조차 없는 궁정 귀족에 불과했다. 레오 3세의 부름을 들은 체자레는 비틀대면서도 레오 3세 앞에 한쪽 무릎을 세운 채로 무릎을 꿇어 왕족에 대한 예를 표해 보였다.
“폐하의 충신이 왕국의 태양이신 레오 3세 폐하를 뵙습니다.”
충직한 신하인 양 빈틈없는 인사를 올린 것도 잠시였다. 체자레는 해죽 웃으며 왼쪽 팔을 들어 보였다.
“낙마해서 팔이 부러져서 그러는데 인사할 때 팔을 무릎에 대는 부분은 면제 좀 해 주십시오.”
레오 3세는 놀라 물었다.
“데 코모 백작, 이 어떻게 된 일이냐? 네가 말에서 떨어지는 일이 다 있어?”
“그것이, 위험에 처한 아가씨를 구해 주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사내 된 도리로서 그냥 지나칠 수는 없지요, 암, 이라고 그는 작은 소리로 덧붙였다.
“위험에 처해? 누가?”
레오 3세의 눈길은 대번에 옆에 함께 나온 아리아드네에게로 향했다.
“어떤 고얀 인간이 사냥용 석궁으로 데 마레 영애를 공격해서 곤경에 처하시지 않았습니까. 제가 제시간에 만나지 못했다면 아주 큰 일이 날 뻔했습니다.”
체자레는 일부러 국왕이 보는 앞에서 일을 키워주고 있었다.
“뭐라? 누가 신성한 사냥대회에서 그런 발칙한 짓을 해?”
“데 마레 추기경의 정부인 루크레치아의 조카라고 들었습니다. 기사의 종자라고 하더군요. 기사 서임을 받으려고 스스로를 갈고 닦아야 하는 자일 텐데 기사도의 기자도 모르는 것 같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루크레치아의 조카라니, 사교계에서는 아주 낯선 이름이었다. 하지만 간간이 자노비의 이전 추태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었다.
- “아, 왜 그, 데 마레 가문의 데뷔탕트 무도회에서 휘파람을 불었다던!”
- “그때 그 무뢰배?”
- “촌뜨기지, 무뢰배는 무슨.”
웅성거리는 인파에 무슨 일인가 구경을 나온 루크레치아가 돌아다니는 이야기를 듣고는 새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자노비, 자노비 이놈 새끼 어디 있어.”
패닉 상태가 된 루크레치아가 주변을 돌아보다가 자노비를 발견한 것과 레오 3세가 노호성을 지른 것은 거의 동시였다.
“그 괘씸한 자를 당장 내 앞에 끌어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