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화> 이사벨라의 억울함2021.06.23.
채찍형 마흔 대는 건장한 성인 남성이 죽을 만큼 가혹한 형벌은 아니었지만, 제 발로 걸어서 집에 돌아갈 수 있을 정도의 형벌 또한 아니었다. 웃통을 까고 채찍을 맞다가 상체가 모두 터져나가자 엉덩이를 까고 채찍을 마저 맞은 바람에 앉지도 눕지도 못하게 된 자노비는 그 난리를 치고서 새벽녘에 들것에 엎드린 채 데 마레 추기경 관저로 실려 왔다. 그 집에는 실신한 후 이른 저녁에 일찌감치 실려 온 루크레치아도 있었다. 격무 후 뒤늦게 퇴청한 데 마레 추기경이 집에 도착해서 마주하게 된 미치고 팔짝 뛰겠는 저녁 풍경이었다. 데 마레 추기경은 온 집안 식구들을 1층 거실에 소환했다. 끙끙 앓고 있는 자노비도 포함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자노비에게 물었다.
“나는 너에게 지난 22년 동안 주거와 옷과 먹을 것을 대 왔다. 그런데 너는 오늘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내 딸에게 해코지를 한 게냐?”
채찍으로 마흔 번 맞는 동안 술이 말끔히 깬 자노비는 아까 레오 3세 앞에서와는 다르게 그래도 사람의 말 같은 자기변명을 했다.
“이사벨라가 부탁해서 그랬습니다!”
그의 꿍꿍이는 추기경이 큰딸을 가장 아끼는 것 같으니, 이사벨라를 우산 삼아 비바람을 좀 피해 보자는 것이었다. 반면에 이사벨라의 아름다운 두 눈은 경악으로 화등잔만 해졌다. 저게 미쳤나!
“내가 언제 그랬어!”
이사벨라는 자노비 따위를 도와주기 위해 아버지 앞에서 동티가 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새빨간 거짓말이에요 아빠! 자노비 너, 국왕 폐하 앞에서도 아리아드네를 쏜 적이 없다고 거짓말하더니 집에 와서는 감히 내 핑계를 대?”
이사벨라는 꿀 바른 목소리로 연신 ‘오라버니’ 소리를 해가며 자노비 앞에서 살랑댔던 과거는 깨끗하게 잊고 숫제 아랫사람 대하듯이 강압적으로 호통을 치며 꼬리를 잘랐다. 자노비는 상상했던 것과 다른 전개에 황당해하며 이사벨라에게 따졌다.
“니가 ‘저 계집애 혼쭐을 내 달라’고 했잖아!”
이것은 자노비의 뇌 내 보정이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저 계집애 아주 혼쭐을 내주겠다’라고 먼저 제의한 것은 자노비였다. 이사벨라는 아주 기뻐하긴 했지만 어쨌건 수동적으로 긍정을 했을 뿐이었다. 영리한 이사벨라는 대번에 이 부분을 지적했다.
“네가 먼저 ‘혼쭐을 내주겠다’라고 그랬지 언제 내가 먼저 시켰어!”
이사벨라는 억울해서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이번에는 이사벨라가 억울해할 만한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
“아니, 그리고, 혼쭐을 낸다고 해 봤자 집에서 한소리 하거나 골탕이나 좀 먹이고 말 줄 알았지 누가 사냥터에서 사람한테 석궁을 쏠 줄 알았냐고!”
“말한테 쏜 거거든?”
사람한테 맞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발사한 석궁이었지만 역시, 자노비는 이 부분에 있어서도 자체적인 합리화를 끝마친 상태였다. 이사벨라는 이 화상과는 말이 안 통한다고 판단했는지, 데 마레 추기경에게 돌아서서 아버지에게 사정을 했다.
“아빠, 아빠, 전 맹세코 먼저 시키지 않았어요. 말리지 못한 잘못은 있을 수도 있지만 저 석궁 같은 거 쏘라고 사주하는 미친 애는 아니에요.”
데 마레 추기경은 조금 다른 종류의 의문이 있었다.
“이사벨라. 도대체 너는 아리아드네가 뭘 했다고 그렇게 미워하는 거냐? 배다른 동생이라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아니에요!”
이사벨라는 ‘우애 없는’ 아이로 몰릴까 봐 이를 황급하게 부정했다. 어머니가 다르다고 형제 중 하나를 따돌리는 것은 에트루스칸 왕국에서 천박하게 여겨지는 행동 중 하나였다. 그리고 사실 이사벨라가 아리아드네를 미워하는 것은 아리아드네가 자신의 영광을 위협하기 때문이었지 어머니가 달라서가 아니었다. 친동생이었더라도 똑같이 굴었을 거였다.
“아리아드네가 사사건건 오만불손하게 굴잖아요!”
“오만불손해? 둘째가?”
“오만불손하죠! 되바라졌고! 사촌오빠 무서운 줄 모르고!”
낄 데 안 낄 데 구분을 못 하는 자노비가 거들었다. 토사구팽하는 이사벨라도 미웠지만 그보다도 자신을 무시하는 아리아드네가 더 미웠다. 이사벨라는 전형적으로 아름다웠고, 그 아름다움으로 이름이 높았고, 부자 고모의 딸이자 교육을 잘 받은 수도 영애였으므로 자노비가 생각하기에 본인보다 ‘우월’했다. 우월한 상대방에게서 푸대접을 받는 것은 자노비가 수인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하녀의 배에서 나와 자기랑 별다를 것도 없이 시골 농장에서 자랐고, 최근에야 예뻐진 아리아드네는 자노비가 생각하기에 자기보다 분명히 아래여야 할 애였다. 자기보다 아래인 애가 자기에게 대드는 것을 자노비는 크게 원망했다. 이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데 마레 추기경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아리아드네를 한 번 바라보더니, 자노비와 이사벨라를 번갈아서 쳐다보았다.
“둘째가 도대체 얼마나 오만불손했길래, 대체 얼마나 큰 잘못을 했길래 오르테 숲속에서 외간 남자한테 구출이 되게 만들어! 숲속에서 밤이라도 지새웠어 봐, 평판에 치명타이다! 태도가 얼마나 큰 잘못이길래 네 친동생한테, 아니 내 자식한테 그런 짓을 해!”
데 마레 추기경의 언성이 슬슬 높아지고 있었다. 분노의 방향이 조금 이상하기는 했지만 어쨌건 분노는 분노였다. 성 에르콜레 대성황당을 관리하면서도 언성 한 번 높이지 않고 모든 일 처리를 하는 그인데 요사이 집 안에서 목에 핏대를 세우는 일이 점점 잦아지고 있었다.
“둘째는 맨날 집에 틀어박혀서 책이나 읽는 아이인데 무슨 어마어마하게 나쁜 짓을 할 수가 있다고!”
“아빠! 쟤가 나한테 ‘X 같은 XX야, 담가 버린다!’고 했단 말이에요!”
“뭐?”
데 마레 추기경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넌 그런 상스러운 소리 어디서 배웠어!”
“아리아드네가 한 말이라고요! 제가 아니라!”
데 마레 추기경은 관자놀이를 손으로 짚었다.
“이사벨라. 이제는 거짓말까지 하면서 동생을 헐뜯으려 하느냐?”
이번야말로 이사벨라는 정말로 억울했으나 그녀가 이제까지 해왔던 수많은 거짓말들이 모여 그녀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데 마레 추기경은 이사벨라가 자노비에게 먼저 ‘아리아드네를 혼쭐내 달라’고 부탁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이전에도 이사벨라가 데뷔탕트 무도회에서 아리아드네를 헐뜯으려고 시도했던 전적이 있기 때문에 생긴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데 마레 추기경은 내심 결론을 내리고, 이사벨라에게 선고를 내렸다.
“이제까지 나는 네가 밖에서 마음대로 하고 다니는 건 건드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넌 무엇이 중하고 무엇이 중하지 않은지 분별할 수 있는 애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아니꼽고 미워도 네 여동생은 우리 가문의 일원이고, 함께 힘든 일을 헤쳐나가야 하는 동지야!”
데 마레 추기경의 뉘앙스를 읽은 이사벨라가 새파랗게 질렸다. 데 마레 추기경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어딜 밖에서, 아무리 외사촌한테라도 그렇지, 친여동생 험담을 하고 다녀! 네 아비가 너를 그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기회를 한두 번 준 게 아니다. 그런데 오늘! 넌 정말 나를 실망하게 했다.”
그는 이사벨라를 엄격하게 바라보며 선고를 내렸다.
“너는 당분간 집 안에서 자숙하며 외출을 삼가거라. ‘숙녀들의 도시 이야기’를 다 읽고 나한테 독후감을 써서 내기 전까지는 밖에 나가지 못한다.”
아라벨라가 걸핏하면 자기 방에 갇혀서 마른 빵과 물만 먹으며 강제 절식에 시달리는 것을 감안하면 대단히 관대한 처분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이사벨라가 태어나서 데 마레 추기경으로부터 받은 최초의 훈육이자 징계였다.
“아빠!”
데 마레 추기경의 너그럽기 짝이 없는 처분에도 불구하고 이사벨라는 억울함의 눈물을 방울방울 흘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데 마레 추기경은 한 번 내린 결정을 되돌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울고 있는 이사벨라로부터 고개를 돌린 그는 자노비를 바라본 채 엄중하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너. 나는 처음부터 네놈을 인간쓰레기로 여겼어.”
관대한 고모부인 줄로만 알고 있었던 데 마레 추기경의 입에서 저런 적나라한 말이 나오자 자노비는 깜짝 놀랐다. 이럴 수는 없었다. 기사 서임은 자노비의 미래였지만 고모부의 너그러움은 자노비의, 그리고 자노비 가족들의 유일한 현재 수입원이었다.
“루크레치아가 너에게 투자하는 것을 보면서 멍청한 짓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으로 그녀의 마음이 편하다면 뭐 상관없다고 여겼어. 그런데 너는 무익할 뿐만이 아니라 유해한 놈이로구나.”
데 마레 추기경은 벌레를 보는 것만 같은 눈초리로 자노비를 훑었다. 자노비는 그 냉혹한 시선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가 ‘자기와 동급’ 내지 ‘교류할 만큼 훌륭’하다고 생각하던 높은 지위의 사람이 자신을 일별하는 혐오하는 눈초리는 아까 맞던 채찍만큼 아팠다.
“네가 내 딸의 등판에다 대고 활을 쐈대며? 나는 네가 말을 노렸다는 말 안 믿는다. 최소한 아리아드네에게 맞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쐈겠지.”
자노비는 몸을 움찔 떨었다. 아니, 어떻게 알았지?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았나?
“너 같이 연습을 게을리하고 실력도 형편없는 놈이 말을 맞출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활을 쐈을 리가 없지.”
아리아드네의 친아버지다운 통찰력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데 마레 추기경은 이내 추상같은 목소리로 서릿발 같은 처분을 내렸다.
“저놈을 끌고 가서 양팔의 힘줄을 끊어 버려라. 내 딸한테 석궁을 쏜 대가다. 양팔의 힘줄을 다 끊거들랑, 양 발목의 힘줄을 끊어 버려라. 내 딸에게 석궁을 쏘고 내 집까지 부끄러움도 없이 기어들어 온 대가다. 로시 가문에서 불만이 있거들랑 핏값에 더해 그간의 생활비까지 토해내기 전에는 입도 뻥끗하지 말라고 이르거라!”
사지의 힘줄이 끊기게 되면 자노비는 앞으로 석궁 따위 영원히 잡을 수 없는 몸이 될 것이었다. 제대로 걸을 수도 없고 일을 할 수도 없었다. 새파랗게 질려 있는 자노비에게 집사 니콜로를 위시한 집안의 장정들이 달려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국왕의 벌도 다 받았겠다, 모진 비바람을 잘 피해 갔다고 여기고는 뻣뻣했던 자노비의 태도가 너무나 비굴하게 바뀌었다.
“고모부! 고모부! 살려 주세요!”
“누가 네 고모부야! 무엄하기 짝이 없는 놈!”
데 마레 추기경의 호통에 집사 니콜로가 주인 나으리 보시라고 자노비를 무자비하게 곤봉으로 한 대 때렸다.
“억!”
새우처럼 몸을 웅크리는 자노비를 뒤로 한 채 데 마레 추기경은 지시를 하나 더 내렸다.
“끌고 나가기 전에 잠깐! 저놈에게 이것까지 듣고 나가라고 해라.”
“예! 추기경 예하!”
그는 마지막으로 루크레치아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의 목소리는 자못 다정했다.
“여보. 당신은 이제껏 내가 당신을 얼마나 봐주고 있었는지 알아야 하오.”
자노비가 사지의 힘줄이 끊기게 생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던 루크레치아가 데 마레 추기경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항변할 기운조차 없는 듯했다. 하지만 데 마레 추기경은 연민의 기색이 없어 보였다.
“나는 성직자야. 가정을 만들 수가 없지. 당신에게도 당당한 정실부인 자리를 줄 수가 없어. 내가 그게 미안해서 대신 당신에게 잘하려고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모르오.”
다정하고 조곤조곤하게 이야기해서 더 무서웠다.
“정식 부인이 아니지만 내 가족을 이끌어주고 꾸려나가 줘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 난 당신이 우리 가족을 최우선으로 여긴다고 생각했어. 오늘까지는.”
데 마레 추기경의 진녹색 두 눈이 냉혹하게 루크레치아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