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화> 가면무도회와 발로아 대공녀2021.07.14.
발로아 대공녀 라리에사는 황금빛 이웃나라 왕자님의 다정함에 그만 기쁨에 겨워 언니를 잃은 슬픔을 까먹을 뻔했다. 그녀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흔들었다. 안 돼, 난 착하고 상냥한 라리에사야. 상냥한 이미지를 유지하면서, 뭐라도 좋으니 알폰소가 던진 화제에 관해서 이야기를 매끄럽게 이어나가야 해. 하지만 그녀는 정말로,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해 본 적이 없었다.
“정물화를 조금 그린달까요? 꽃이나 화병을 그리는 걸 좋아해요.”
잠시 주저하던 라리에사는 대담하게 덧붙였다.
“제 작품으로 몇 년 전에 프리 드 몽펠리에에서 입선하기도 했어요.”
프리 드 몽펠리에는 갈리코 왕국에서 열리는 유명한 신진 화가들의 등용문이었다. 이름을 가리고 작품을 출품한 후, 갤러리에 걸린 작품들을 보며 비평가들과 관객들이 점수를 매긴 후 한 달 뒤에 뚜껑을 열었다. 1등, 2등, 3등 외에도 입선하기만 하면 정식으로 갈리코 왕국의 예술가 협회에 등록할 수 있었다. 경쟁이 매우 치열했고 수준 높은 대회였다.
“프리 드 몽펠리에요? 그 대회의 참가 자격은 30세 이하의 기혼 남성 아니었나요?”
프리 드 몽펠리에에서 당선되기만 하면 부와 명예가 따라왔기 때문에 다툼과 견제도 심했다. 그 대회에는 몇 년간의 비방과 진통 끝에 서로 자기에게 유리하게 만든 타협의 산물인 기묘한 제한들이 점진적으로 걸렸다. 기성 화가가 익명으로 작품을 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30세 이하’의 제한이 걸렸고, 지나치게 뛰어난 젊은 신진 작가가 갑자기 나타나 판을 뒤흔드는 것을 막기 위해 ‘기혼자만 가능’하다는 제한을 걸었다. 최근에는 한정된 파이를 안전하게 나눠 먹기 위해 여류 화가 금지가 또 추가되었다. 가면 뒤에 숨겨진 라리에사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이는 최근에 생긴 제한들이어서 사실 회화 따위에 큰 관심이 없던 그녀는 잘 알지 못했다. 회화는 죽은 수잔느 언니가 좋아하던 거였고, 프리 드 몽펠리에에 입선한 것도 죽은 수잔느 대공녀였다. 여류 화가 금지는 수잔느 대공녀의 입선이 가져온 결과였다. 귀족의 작품 출품 금지를 주장하다가 막판에 저항이 심하자 여류 화가 금지로 방향을 틀었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전개였지만 사회와 회화 둘 다에 별 관심이 없던 라리에사로서는 그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했다. 그녀가 알고 동경했던 것은 그저 그녀의 죽은 언니의 높은 명성과 그녀가 받는 칭송뿐이었다. 하늘에 맹세코 악의는 없었다. 그저 알폰소 왕자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혀끝을 저절로 떠난 허언이었는데, 그게 이렇게 잘 보이고 싶던 대상에게 곧바로 딱 걸릴 줄은 몰랐다. 수치스럽다고 생각하니 절로 호흡이 가빠져 왔다. 알폰소 왕자는 이상한 기색을 느꼈는지 고개를 눈높이에 맞추고 라리에사에게 물었다.
“발로아 대공녀……?”
사실 ‘잘 보이고 싶어서 허세를 부려 보았다, 죄송하다’고 이야기를 했으면 마음씨 넓은 알폰소는 웃으며 넘겨주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치밀어오르는 창피함을 덮기 위해 신체화 증상을 택했다. ‘화가 난다’고 생각했더니 호흡이 점차 더 가빠 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숨을 헉헉대면서 알폰소에게 앙칼지게 소리를 질렀다.
“지금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건가요?!”
알폰소는 당황해서 라리에사를 에스코트하던 손을 놓았다.
“괜찮으십니까, 라리에사 대공녀?”
라리에사는 알폰소가 자신의 손을 놓자 그가 자기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오해를 하고는 수치심에 겨워 몸부림을 쳤다. 안 돼, 이럴 수는 없었다. 어떻게 만난 '황금의 왕자님'인데. 수잔느의 행운을 가지고 싶어서 매일 기도했다. 언니가 가진 모든 것을 나에게도 달라고. 수잔느의 아름다움과 수잔느의 명성이 라리에사에게도 생긴 것은 아니었지만 대신 수잔느가 죽었다. 그녀가 가졌던 모든 것들이 라리에사에게 물려져 내려 왔다. 드레스, 보석, 가장 예쁜 침실, 그리고 완벽한 왕자님과의 혼담까지. 라리에사는 내심 수잔느의 죽음은 천신께서 그녀에게 내려주신 선물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천신께서 그런 선물을 내려주셨는데, 자기가 서툴러서, 자기가 잘못해서 하늘에서 내려온 기회를 놓치게 되는 상황은 용납할 수 없었다. 라리에사는 잘못한 게 없었다. 그래야 했다.
“미혼 여성이 프리 드 몽펠리에를 통과한 사건은 분명히 있었던 일입니다! 어떻게 저한테 이렇게 무례하실 수가 있나요?”
라리에사가 잘못하지 않았다면 이 상황에서 잘못한 것은 필연코 알폰소일 것이었다. 미혼 여성인 수잔느가 프리 드 몽펠리에를 통과했던 것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인 만큼, 라리에사는 주어만 뭉갠 채 알폰소가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례하게 군다고 알폰소 왕자를 몰아붙였다. 화를 내면 낼 수록 아무것도 모르는 알폰소가 경솔하게 자기를 음해한 것이 틀림없다는 확신이 강해져 갔다. 알폰소는 멀쩡하던 라리에사가 온몸을 떨며 화를 내자 놀라서 어쩔 줄은 몰라했다.
“거기 누구 없느냐? 의사를 불러와라!”
라리에사는 에트루스칸 말이 짧아서 알폰소가 누군가를 부르고 있다는 사실은 알아챘지만, 그게 의사라는 사실은 알아듣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을 불러와서 그녀의 지금 상태를 만인이 보게 하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그녀는 과호흡에 괴로워하며 가면을 부여잡고 몸을 잠시 새우처럼 구부렸다. 알폰소는 그녀를 부축하기 위해 다가갔지만, 라리에사는 알폰소가 본인을 구속하기 위해 붙들려는 것으로 착각했다.
“이거 놔요!”
크게 흥분한 그녀는 알폰소를 뿌리쳤고 알폰소는 레이디가 거칠게 몸부림을 치자 그녀의 몸에 차마 손을 대지 못하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라리에사는 그 상태로 잠시 숨을 몰아쉬더니, 급작스레 컴컴한 정원 속으로 뛰어들어가 버렸다.
“라리에사 대공녀! 라리에사 대공녀!”
알폰소 왕자가 크게 불러 보았지만 그녀의 뒷모습은 사라져 갔다. 알폰소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른 채 둘이 같이 걷던 산 카를로 궁전의 회랑에 혼자 남았다. 그에게 약간의 유혹이 치밀어올랐다. 이 에스코트가 조기에 끝난 것과 관련해, 알폰소에게는 아무런 귀책사유가 없었다. 라리에사 대공녀가 이유 모르게 벌컥 화를 내며 정원 속으로 뛰어들어가 버렸던 거였다. 대공녀는 시종들을 시켜서 찾으라고 이르고, 나는 다른 사람을 만나서 시간을 보내면 안 될까⋯⋯? 하지만 알폰소 왕자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러기에는 그는 지나치게 정직했고 꼼수를 몰랐다. 라리에사 대공녀의 에스코트는 그에게 맡겨진 책무였고 그녀가 정원으로 뛰쳐들어갔다면 끝까지 찾는 것이 도리였다. 알폰소의 부름을 듣고 뒤늦게 시종이 달려왔다. 그는 시종에게 라리에사 대공녀가 정원 안으로 들어가셨는데 길을 잃으셨을 수도 있으니, 소문이 나지 않도록 조용히 사람을 풀어 그녀를 찾아보고, 라리에사 대공녀만을 위해 준비된 파우더룸에 의사를 대기시켜 놓으라고 일렀다. 그리고 라리에사 대공녀의 인상착의, 입은 옷, 가면을 자세하게 일러준 후, 대공녀를 찾기 위해 몇 명을 동원할 것인지를 확인한 다음, 본인도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그녀를 찾기 위해 라리에사 대공녀가 사라진 방향으로 들어갔다. * * * 대공녀가 사라진 일이 외교 문제로 비화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알폰소는 ‘발로아의 대공녀를 보신 적 있으십니까’ 대신에 “황금색 드레스를 입은 중키의 여자분을 보신 적이 있느냐”고 주변에 묻고 다녔다. 어차피 발로아의 대공녀는 산 카를로 귀족들에게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고, 얼굴 전체를 덮는 가면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이쪽이 더 효율적이기도 했다. 알폰소는 얼굴 전체를 가리는 마스크가 아니라 남자들이 흔히 쓰는 바우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콧날을 강조해서 눈매와 콧대까지를 가리고, 그 아래로는 술을 달아서 입매를 대충 가리되 먹고 마실 수 있게 만들어놓은 물건이었다. 그래서 그를 보는 사람들은 그가 왕자라는 사실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글쎄요, 좀 전에 정원으로 가신 분은 본 적이 없습니다만.”
만나는 사람들은 그가 가면을 쓰고 있으니만큼 왕자의 이름을 직접 호칭하지는 않았지만, 왕자를 대하는 예로 공경해 주었다.
“방금은 아닌데, 아까 저 안쪽으로 중키에 황금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분이 들어간 건 봤어요.”
“아 그래, 나도 봤어. 기품 있어 보이는 레이디였어.”
한참 전에 정원 안쪽으로 들어갔다면 발로아 대공녀는 아닐 것이었다.
“그래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계속 수소문을 하고 다녔으나 발로아 대공녀가 갔다는 방향에서 황금빛 드레스의 여인을 보았다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고, 알폰소 왕자는 결국 한참 전에 보였다던 황금빛 드레스의 여인이 갔다는 방향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관목들을 대칭적으로 배치하고 정원사의 손길로 깎아 만든 기하학적인 미로 사이를 헤매다 보니 어느덧 손님들이 주로 모여 있는 대무도회장과 그에 딸린 주정원이 아닌, 왕비의 궁으로 가는 길에 있는 정원 쪽에 이르게 되었다. 그가 발걸음을 멈춘 곳은 아이비 넝쿨이 만발한 작은 분수대 앞이었다. 정원사의 손이 닿지 않았는지 아이비 넝쿨은 미로를 구성하는 관목림과 낡은 분수대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모두 뒤덮은 상태였다. 그는 이 장소를 알고 있었다. 아리아드네와 함께 도망쳐서 놀러 왔었던, 왕비궁 뒤편의 버려진 분수대였다.
그리고 그가 알고 있는 사람 역시 그 장소에 있었다. 황금빛 드레스를 입은, 중키의 우아한 여성이었다. 얼굴 전체를 볼토 마스크로 가렸지만 알폰소는 그녀를 본 순간 그녀가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아리아드네?”
“알폰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