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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화> 난봉꾼의 밀회 상대 (584/733)

<제67화> 난봉꾼의 밀회 상대2021.07.25.

어둠 속에서 빛나던 이사벨라의 눈이 포착한 것은 또 하나의 반짝반짝 빛나는 물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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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인공들이 모두 떠난 자리에, 반짝이는 붉은 루비와 녹색 토파즈의 플뢰르-드-리스 팔찌가 떨어져 있었다. 이사벨라는 주변을 살피고는 기민하게 뛰쳐나가서 팔찌를 주웠다. 그리고는 다시 정원 속에 몸을 숨겼다. 몹시 가지고 싶었던 물건이었는데, 이렇게 손에 들어올 줄 몰랐다. 나중에 이 팔찌를 네가 왜 가지고 있느냐고 추궁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일단 나중에 생각하자고 뒤로 미뤘다. 당장 눈앞에 갖고 싶던 보석이 떨어져 있는데 눈에 보일 게 무에 있단 말인가. 이사벨라는 그걸 두고 올 만큼 물욕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16630318298861.jpg‘이상한 운이네.’

이사벨라는 팔찌를 손으로 쓰다듬어 보았다. 역시, 주운 물건이 멀쩡할 리는 없었다. 떨어지면서 난집이 상했는지 정중앙의 붉은 루비를 꽉 잡아줘야 하는 여섯 개의 다리가 느슨하게 흔들렸다. 이사벨라는 본능적으로 엄지손가락을 들어 붉은 루비를 지그시 눌러보았다. 그러자 그만 루비는 이사벨라의 손가락 힘에 난집에서 튀어 나가버리고 말았다.

16630318298861.jpg“어머!”

이사벨라는 제풀에 깜짝 놀라 바닥에 떨어진 루비를 주워 팔찌와 함께 손가방 안에 주섬주섬 넣었다.

16630318298861.jpg“……짜증나.”

팔찌가 부서지고 나니 갑자기 기분이 더러워졌다. 이사벨라는 분명히 이때까지는 팔찌를 주운 것이 좋은 운이라고 생각하고 대무도회장으로 돌아가던 참이었는데, 외진 왕비궁을 떠나 정원을 홀로 걷고 있자니 벌컥 화가 치밀어올랐다.

16630318298861.jpg‘고작 멀쩡하지도 않은 팔찌 하나 주운 것 따위로 운이 좋다고 생각하다니! 이 이사벨라 데 마레가 언제부터 이렇게 비루해졌지?’

왕자님의 관심은 이사벨라가 꿈에도 그리던 것이었다. 이사벨라의 인생 최대 소원은 왕세자비가 되는 것이었다. 노력을 안 한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왕자님과 어떻게든 엮어 보려고 일전에 아리아드네를 통해 얻었던 알폰소 왕자의 손수건마저 항상 품에 지니고 다녔다. 그런데 이사벨라보다 나을 게 하나도 없는, 촌뜨기이고 예쁘지도 않은 이복 여동생이 다 가져가 버렸다. 왕자도, 심지어는 원래 당연히 그녀의 것이었던 체자레 백작의 관심마저도 다 움켜쥐었다! 운이 좋다고 하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 했다!

16630318298861.jpg‘저 체자레 백작의 청혼은 원래 내 거였는데!’

체자레 백작은 비록 이사벨라에게 공식 서한을 보낸 적은 없었지만 계속 그녀의 아버지인 데 마레 추기경에게 이사벨라와의 혼담을 떠보는 말들을 건넸다. 그 청혼의 의사는 비단 이사벨라의 정신 승리만은 아니었다. 그 이야기들이 점점 더 구체적으로 변했고 어조도 강경해졌기 때문에 데 마레 가문에서도 허겁지겁 베르가모 농장에서 아리아드네를 데리고 올라온 것이다. 체자레 백작의 구애가 뚝 끊긴 것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아리아드네의 데뷔탕트 무도회가 끝난 직후 내지는 그 언저리였다. 생각이 거기에까지 미치자 이사벨라는 가슴 속 깊숙한 곳에서 강렬한 분노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데뷔탕트 무도회에서 왕자님이 아리아드네에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을 때는 당황스러운 게 먼저였고 그다음에야 기분이 상했다. 그때는 지금처럼 본능의 영역에서부터 불타오르는 분노를 느끼지는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16630318298861.jpg‘내가……. 체자레 백작을 그렇게까지 좋아했었나?’

잠시 고민해본 이사벨라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것은 체자레 백작에 대한 호감이라기보다는 가졌던 것을 빼앗겼다는 기득권자의 상실감이었다. 왕자는 있으면 좋고 없으면 마는 것이었지만 있던 체자레 백작을 빼앗긴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들불처럼 들끓었다.

16630318298861.jpg‘망할 아리아드네 계집애……!’

나에게 원래 없던 것을 다른 사람이 획득하면 그저 조금 아쉽고 만다. 거기에서 좀 더 나아간다면 그 다른 사람을 동경하거나 질투하게 된다. 하지만 나의 것을 누군가가 빼앗아간다면, 그것은 전쟁의 선포였다. 인간이란 본디 자신의 소유물을 잃은 원한을 아버지의 죽음보다도 더 오래 잊지 않는 법이다. (Gli uomini dimenticano piuttosto la morte del padre che la perdita del patrimonio.)

16630318298861.jpg‘걔가 없었을 땐 다 괜찮았어! 자기가 도대체 뭐길래 이렇게나 나대?’

이사벨라는 결심했다. 체자레 백작을 돌려받겠다고. 그녀는 체자레 백작의 시선을 다시 빼앗아오겠다는 전의를 다졌다. 그녀는 남들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이 좋았다. 그래서 체자레보다 신분이 더 고귀한 알폰소 왕자를 원했다. 하지만 지금 갑자기 체자레의 조각같이 잘생긴 얼굴과 깊고 푸른 눈, 그의 가벼운 애티튜드와 주변 분위기를 들었다 놨다 하는 처세술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욕심났다.

16630318298861.jpg‘그래, 체자레 백작이 사실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없다뿐이지, 나머지는 어디 모자란 게 없잖아?’

그의 혈통 중 절반만큼은 반박의 여지 없이 고귀했고, 금전적으로도 대단히 부유했으며, 그 외로도 사교계에서의 존재감이랄지 파급력처럼 타인을 움직일 수 있는 간접적인 영향력은 차고도 넘치지 않는가. 이사벨라는 딱히 군대나 병권이나 징수권을 갖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저 남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기를, 방 안에 나보다 더 잘난 사람이 없기를, 마음 내킬 때 타인을 무시하며 기분풀이를 할 수 있기를 바랄 따름이었다.

16630318298861.jpg‘체자레 백작 정도면⋯⋯. 나한테 딱 맞잖아?’

할 수 있었다. 한 번 자기에게 있던 남자의 관심 따위 다시 끌어오면 되는 거였다. 그리고 저 주제를 모르는 배다른 여동생은 혼쭐이 나야 했다.

16630318298861.jpg‘아리아드네, 가만히 두지 않겠어!’

  * * * 아리아드네와 알폰소는 어색한 침묵 속에서 미로 같은 정원 내부를 걷고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빠른 걸음으로 앞서서 성큼성큼 걷고 있었지만 그녀에게는 목적지가 없었다. 미궁과도 같은 정원 안을 빙글빙글 돌고 있을 뿐이었다. 알폰소는 아리아드네가 딱히 어디로 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눈치챘지만 참을성 있게 아리아드네보다 세 발자국 뒤에서 그녀를 꾸준히 따라왔다.

16630318306456.jpg“아리⋯⋯!”

한참을 걷던 알폰소가 서먹한 정적을 견디지 못하고 먼저 고요함을 깼다.

16630318306456.jpg“라리에사는 발로아의 외드 대공의 차녀야. 체자레의 말대로, 정략결혼 과정의 일환으로 산 카를로를 방문했어.”

뒤돌아선 아리아드네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의 지옥 같은 침묵이 깔렸다. 하지만 알폰소는 굴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 다시 한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16630318306456.jpg“아리.”

등을 보인 아가씨는 미동조차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고요하게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아리아드네였지만, 속에서는 자제되지 않는 감정들이 풍랑 치는 바다처럼 휘돌고 있었다.

16630318306467.jpg‘‘라리에사’라니⋯⋯!’

아리아드네는 알폰소가 정략 결혼의 상대방을 ‘발로아 대공녀’도, 하다못해 ‘라리에사 대공녀’조차도 아닌 ‘라리에사’라고 불렀다는 사실에 강렬한 질투심을 느끼는 본인을 발견했다. 그녀는 당황해서 입술을 깨물었다. 그게 뭐라고. 충분히 그럴 수 있어.

16630318306467.jpg‘감정은 사치다, 감정은 사치다.’

아리아드네는 반복해서 되뇌었다. 그녀는 어느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것이었다. 지난 생, 체자레를 향해 바친 그녀의 사랑은 그녀의 인생을 삼켜 버린 족쇄가 되었다. 이번 생에서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알폰소 왕자는 도구에 불과했다. 그를 사랑한다던가, 그를 위해 헌신하는 일은 없어야 했다. 그녀에게는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 생존 외에는 모두 부차적인 일일 뿐이었다.

16630318306467.jpg“알폰소.”

아리아드네의 답에 알폰소는 자세를 바르게 세웠다.

16630318306456.jpg“응, 이야기해. 듣고 있어.”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러움에도 불구하고 한마디를 더했다.

16630318306456.jpg“내가 라리에사 대공녀의 이야기를 미리 하지 않아서 화났어⋯⋯?”

스스로의 행동이 타인의 불쾌를 유발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또 인정하는 것은 매우 큰 용기를 요하는 일이었다. 알폰소는 관계에 있어서 큰 한 발자국을 담대하게 앞으로 내딛는 셈이었다. 하지만 껍질을 뒤집어쓰고 자기를 보호하는 데에만 열중한 아리아드네는 그만 알폰소의 용기를 비겁한 허세로 받아 버렸다.

16630318306467.jpg“알폰소, 내가 왜 그런 일 때문에 화를 내겠어? 우리는 좋은 친구 사이 아니야?”

아리아드네는 뒤를 돌아봄과 동시에 알폰소를 마주 보게 되기는 했지만, 에나멜 가면 뒤로 숨어 표정을 완벽하게 감춰 버린 채였다. 그 상태에서 그녀는 본인이 낼 수 있는 가장 평이한 목소리를 가장하여 대답했다.

16630318306467.jpg“좋은 아가씨와 혼담이 오가는 것 축하해. 발로아 대공의 사위가 되겠구나.”

알폰소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말하고 싶었다. 라리에사 대공녀는 조금 이상한 사람이야, 그녀가 오늘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나는 글쎄, 그녀와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어. 라리에사 대공녀의 성격을 알게 되면 어마마마도 아바마마도 이 국혼을 물려 주시지 않을까? 하지만 그녀의 고슴도치 같은 단단한 가시는 강경하게 그를 밀어내고 있었다. 내 감정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을까? 우리가 함께 같은 곳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너는 나를 바라지 않는 걸까? 인생 최초로 특별하게 다가온 사람이 지금 당신은 나에게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알폰소는 항상 반대의 상황에만 처했었다. 준수한 외모, 젠틀한 성격, 뛰어난 성취와 고귀한 지위, 소위 ‘황금의 왕자님’. 그가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연호했고, 시선을 갈구했고, 애정을 원했다. 선을 넘는 사람들도 많았다. 반대로 그의 호의는 제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단 한 번도 거절당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알폰소는 이런 상황을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알폰소는 말을 잊고 그녀를 그저 바라만 보았다. 이럴 때의 미덕은 신사답게 물러나서 그녀의 의사를 존중하는 것일까, 아니면……. 알폰소는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 * * 이사벨라는 생각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 아리아드네가 사특한 수를 쓰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아리아드네가 저렇게 양손에 떡을 쥔 채 꿀을 빨고 있는데 자기는 고작 팔찌 하나 주운 거로 기뻐하고 있다니,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16630318298861.jpg“그 간사한 계집애가 여우 짓을 하는게 틀림없어!”

천박하게 육탄 공격을 했으려나?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아리아드네에게 내세울 것이라고는 몸매밖에 없었고, 이 비정상적인 상황은 육탄 공격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16630318298861.jpg‘이렇게 예쁘고 귀여운 나에게는 알폰소 왕자와 체자레 백작이 관심조차 없는데 못생긴 아리아드네에게 그들이 목을 매고 있다니!’

공정 경쟁 하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사벨라가 모르는 음모가 있음이 틀림없었다. 이사벨라는 아리아드네는 잃어버리고는 없어졌다고 자각도 하지 못할 정도로 하찮게 여기는 팔찌를 소중히 주워서 들고 온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이 팔찌, 부숴서 버릴까⋯⋯? 그때였다.

16630318310479.jpg- “아! 아!”

16630318310479.jpg- “으음, 그대로 있어.”

분노하던 이사벨라의 귀에 이상하게 끈적한 신음소리가 들렸다.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였다.

16630318298861.jpg‘이건 또 뭐야?’

이사벨라는 발걸음 소리를 죽이고 소리의 진원지로 다가갔다. 이상한 걸 많이 발견하는 날이었다. 풀숲 사이로 몰래 들여다본 공터에는 작은 벤치가 있었고, 그 위에는 옷이 흐트러진 남녀가 엉켜 있었다. 여자의 뽀얀 살갗이 보였고, 남자는 막 여자에게 지분거리려는 상태였다.

16630318298861.jpg‘헉!’

이사벨라는 입을 막았다. 비단 그 남녀가 남사스러운 포즈로 엉켜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여자는 가면을 쓴 데다 남자 아래로 가려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 술에 거나하게 취해 급하게 자기 옷을 끄르려고 하는 남자의 옆모습은 아무리 봐도 캄파 후작이었다.

16630318298861.jpg‘저 캄파 후작과 놀아나는 제정신 아닌 여자가 있다고?’

체자레 데 코모가 ‘나쁜 남자’로 산 카를로에서 유명했다면, 30대 후반인 캄파 후작은 ‘몹쓸 인간’으로 유명했다. 부유한 캄파 후작가의 유일한 후계자였던 그는 가문을 물려받자마자 참한 귀족 영애와 결혼을 했는데, 처녀 시절 양순하고 신실하다고 이름이 높던 캄파 후작 부인은 시집간 이후로 채 일 년을 채우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그녀의 사인에 대해서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계자도 없는 상태로 가문의 안주인 자리를 비워둘 수는 없으니 캄파 후작은 곧 후처 자리를 물색했다. 혼담이 한창 오가던 중, 캄파 후작이 대성황당에서 대예배를 보다가 옆자리에 앉은 귀족가 막내딸을 추행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데뷔탕트를 치르기도 전인 어린 소녀였다. 이 일로 아이의 아버지인 리날디 백작이 캄파 후작에게 결투 신청을 했다. 리날디 백작은 비록 이제는 이선으로 물러났지만 원체 검술에 조예가 깊은 무예가 출신이었다. 캄파 후작은 리날디 백작에게 산 카를로 시내에 호화저택을 살 수 있을 정도의 거금을 위로조로 챙겨주고 싹싹 빈 끝에야 간신히 결투를 면했다. 결국 캄파 후작의 당시 혼담은 깨지고 거의 평민이나 다름없는 몰락 귀족의 딸과 혼인을 했다. 이번에는 열여섯 살 연하의 어린 아내였다. 캄파 후작의 두 번째 부인은 열다섯 살 생일을 맞이하기 이틀 전에 아이를 낳다가 산욕열로 죽었다. 이번에는 캄파 후작이 ‘카람판 출입을 줄곧 하다가 매독을 옮겨서 어린 아내를 죽였다더라’ 하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의 신빙성은 매우 높았다. 그도 그럴 것이, 두 번째 캄파 후작 부인이 사망한 지 며칠 안 돼서 캄파 후작이 카람판에서 코르티잔을 두들겨 팬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진상을 부리다 폭력을 쓴 것이 현장에서 딱 걸린 경우라 발뺌할 처지도 아니었다. 그는 이번에도 역시 매음굴 포주에게 거액의 위로금을 챙겨주고 이 일을 막았다. 그 뒤로는 그 누구도 캄파 후작을 그 어떤 사교계 행사에도 초대하지 않았다. 귀족 부인들의 티 파티에는 물론이고 신사들의 살롱에서도 그는 배제되었다. 당연히 왕실에서도 캄파 후작을 부르지 않았다. 캄파 후작은 왕실 무도회에도 참가하지 못했는데, 오늘은 규모가 큰 가면무도회라서 용케 정체를 숨기고 인파에 섞여 들어온 모양이었다. 이사벨라는 다시 눈을 비비고 엉겨 붙은 남녀를 보았다. 이게 강간이라면 아무리 인성 파탄인 이사벨라라도 소리를 질러서 여자를 구해줄 의향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여자의 달뜬 음성과 교태 어린 몸짓으로 미루어 볼 때 이건 여자 측이 더더욱 즐기고 있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체구나 몸의 라인으로 볼 때 속아서 꼬임에 빠진 미성년자도 아니고 완연한 성인 여자였다.

16630318298861.jpg‘아니, 도대체 저 정신 나간 여자는 누구지?’

이사벨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여자의 얼굴을 보려고 노력했다. 여자는 검은 ‘모레타 무토’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부푼 교성을 내뱉다가 그만 입에 물고 있던 죔쇠를 놓쳤고, 얼굴이 드러나고 말았다.

16630318298861.jpg‘미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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