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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화> 운명을 바꾸는 여러 가지 방법 (595/733)

<제78화> 운명을 바꾸는 여러 가지 방법2021.09.01.

16630318997781.jpg“마님께서 뭐라고 하실지는 뻔하지 않습니까!”

지아다의 호통을 쳤지만 아리아드네는 지아다의 반대를 냉담하게 일축했다. 그녀는 그저 지아다를 흘긋 쳐다보더니, 지루하다는 듯이 자기 손톱을 내려다보았다.

16630318997787.jpg“지아다. 나는 지난 데뷔탕트 무도회 때 쓰고 남은 자재들을 보관할 곳이 필요하다네. 물건은 아껴 써야지. 자네도 알다시피, 이 집에는 남는 물건이 참 많아.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이번 달에도 새 물건들을 많이 사들이셨지.”

16630318997781.jpg“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16630318997787.jpg“다음 주에도 타란토에서 절인 물고기가 올라올 예정인 것을 알고 있네.”

루크레치아는 로시 가문에 돈을 보내는 것이 막히자 그 우회로로 타란토에서 현지 특산품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루크레치아는 보나마나 절인 생선을 비롯한 타란토 특산품들을 시세보다 높게 쳐서 사들이고 있을 것이었다.

16630318997787.jpg“생선은 기왕이면 신선한 게 더 맛있지. 추기경 예하께서도 절인 생선보다는 활어를 더 좋아하실 거야. 안 그런가?”

반항하면 루크레치아의 헛짓거리를 폭로해 버리겠다는 협박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지아다를 지긋이 쳐다보았다.

16630318997787.jpg“어머니께 가서 부엌 뒷방을 나에게 내주지 않는 것이 정녕 어머니의 뜻인지 여쭙고 와.”

그녀는 슬며시 힘을 줘서 지아다를 노려보았다. 루크레치아가 변칙적으로 타란토에 송금한 것이 들킬 경우, 다 너 때문에 들킨 거라고 할 텐데 감당할 수 있겠냐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지아다의 지능을 크게 높이 평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친절하게 구두로도 설명해 주었다.

16630318997787.jpg“그리고 이게 어머니의 뜻이 아닐 경우, 자네는 더 이상 나한테 이런 잡스러운 일로 왈가왈부하지 않았으면 좋겠네. 괜히 충성심을 증빙한다고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다가 모시는 주인께 귀찮은 일이 생기면 도리어 폐만 끼치는 게 아니겠는가?”

하녀장 지아다는 아리아드네가 이렇게 공격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는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시선을 어디로 둘지 모르고 어지러이 허공을 보다가 그만 허겁지겁 달아나고 말았다. 그 뒤로는 루크레치아가 뭐라고 했는지, 더는 루크레치아 휘하에 있는 하녀들이 아리아드네를 귀찮게 하는 일이 없었다. 산차는 부엌 뒷방에 그녀들만 열쇠를 가지고 있는 거대한 자물쇠를 달며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16630318997781.jpg“옛날에는 어르고 달래고 빌었어야 했는데 참 격세지감이네요. 아가씨, 엄청 손쉽게 하녀장 지아다 아주머니를 쫓아내 버리셨어요.”

16630318997787.jpg“이 정도로 만족해서야 되겠니? 우리 산차, 꿈이 작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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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달라진 아리아드네의 위상에 반색하는 것은 산차뿐이 아니었다. 아라벨라도 이사벨라의 감금 이후로 아리아드네의 방에 와서 숫제 살다시피 했다.

1663031900203.jpg“아리, 대단해!”

아직 아리아드네를 단독으로 지칭할 때는 언니라고 불러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라벨라는 어느새 아리아드네를 애칭으로 불렀다.

1663031900203.jpg“나도 공부 많이 하고 사교계 유행에도 익숙해져서 아리처럼 엄마, 아빠한테 인정받고 싶어!”

아리아드네는 본인에게 패션 감각이 없는 것과는 별개로, 미래에서 보고 들은 것 덕에 본의 아니게 산 카를로의 유행을 선도하고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데뷔탕트 무도회 때 입었던 심플한 공단 드레스, 사냥대회 때 입었던 세로줄 무늬 승마복을 연타로 히트시켰다. 의류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올 가을의 산 카를로 사교계에 둥근 눈화장까지 성행시켜 버렸다. 너도나도 눈 아래 삼각존을 채우고 다니는 것이 유행이었다. 산 카를로의 풍습상 데뷔탕트 무도회를 치르지 않은 어린이는 화장을 하면 안 됐지만 오늘도 아라벨라는 재주도 좋게 언니들의 화장품을 훔쳐서 눈 아래 삼각존을 자랑스레 메우고 있었다.

1663031900203.jpg“그런 건 다 어디서 생각해내는 거야?”

16630318997787.jpg“신학 공부를 잘하는 비결은 왜 안 물어보는 거니?”

아리아드네의 질문에 아라벨라는 콧잔등을 찌푸렸다. 아라벨라는 공부에는 젬병이었다.

1663031900203.jpg“하기…… 싫으니까?”

매우 솔직한 대답에 아리아드네는 그만 웃어버렸다. 그녀는 아라벨라의 찌푸린 콧잔등을 손가락으로 톡 치며 꾸짖었다.

16630318997787.jpg“하고 싶은 것만 해서야 어떻게 자기가 되고 싶은 훌륭한 사람이 되겠니?”

아라벨라는 입술을 내밀고 꿍얼거렸다. 하지만 아리아드네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라벨라에게 신학이나 예법을 공부시킬 생각은 없었다. 뛰어나게 잘 하는게 따로 있는데 뭣 하러 남들처럼 고루한 공부를 한단 말인가.

16630318997787.jpg“작곡이나 연주 공부를 좀 더 해 보는 건 어때?”

아라벨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가 이내 시무룩해졌다.

1663031900203.jpg“그렇지만……. 만치니 양은 연주는 그럭저럭하시지만 작곡은 전공이 아닌걸. 산 카를로에 작곡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여자 가정교사는 없다고.”

아리아드네는 여상스럽게 대답했다.

16630318997787.jpg“파두아로 유학을 가면 되지.”

파두아는 이폴리토 오빠가 유학하고 있는 대학의 도시였다. 아라벨라는 지금 자기가 제대로 들은 건지 귀를 후볐고, 그 파두아가 맞다는 것을 확인하자 아라벨라의 조그만 얼굴에서 그야말로 빛이 났다.

1663031900203.jpg“근데 아리, 파두아의 대학에서 여자도 받아줘?”

아라벨라의 걱정은 근거가 있었다. 파두아 대학은 주로 신학, 법학, 회계, 그리고 간혹 군사학을 가르쳤고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여학생의 입학을 받지 않았다.

16630318997787.jpg“음악대학은 다르지. 이번에 파두아에서 수녀원과 협업해서 새로 음악대학을 만든다고 하더라.”

음악은 여성도 함양해야 할 덕성으로 여겨져, 귀족 영애와 부인들도 악기 한두 개 정도는 다룰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장려되었다. 게다가 성황청에서는 음악을 숫제 제례의 한 부분으로 수용했기 때문에, 성직에 투신한 귀족 출신의 수녀 중에는 음악에 정통한 사람들이 많았다. 이번에 신설되는 음악대학도 성황청과 그 부설 수녀원의 후원을 받아 세워지는 것이었다.

16630318997787.jpg“네 재능이면 거기에서 충분히 공부할 수 있어. 우리, 음악대학에 보낼 포트폴리오를 한번 만들어 보자.”

아라벨라는 1123년의 흑사병으로 죽었다. 그해의 흑사병은 에트루스칸 왕국의 남단을 초토화시켰다. 왕국 정중앙에 위치한 산 카를로가 그 북방한계선이었다. 파두아는 에트루스칸 왕국의 최북단, 거의 포르토 공화국에 바싹 붙어있을 정도로 높은 위도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과거에도 역병의 갈퀴로부터 안전했었고, 별다른 일이 없는 한 이번에도 안전할 것이다. 아라벨라는 아리아드네의 날개 아래로 들어온 그녀의 가족이었다. 그녀를 믿었고, 그녀의 보살핌을 필요로 했고, 그녀의 관할 아래에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아라벨라를 운명에서 건져내기 위해 아예 죽을 일이 없는 곳으로 보내 버릴 작정이었다.

1663031900203.jpg“응!”

아라벨라는 언니의 속도 모르고, 그저 넓은 세상에서 신기한 것을 보고 수준 높은 공부를 할 생각에 밝은 얼굴로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16630319009933.jpg“뭐? 파두아의 음악대학? 안 돼! 거기가 어디라고 네가 거기를 가!”

아라벨라의 미래에 대해 모두가 다 같은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것은 아니었다. 데 마레 가문의 저녁 식탁에서 유학 이야기를 꺼낸 아라벨라는 본전도 못 찾을 정도로 루크레치아에게 크게 혼났다.

1663031900203.jpg“이폴리토 오빠도 가 있잖아요⋯⋯.”

16630319009933.jpg“이폴리토가 어디 너랑 같아?!”

아리아드네는 아라벨라가 이 이야기를 루크레치아에게 꺼내는 것을 딱히 말리지는 않았다. 이렇게 경을 칠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언젠가는 한 번 나와야 하는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라벨라 본인은 어머니의 격한 반응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1663031900203.jpg“이폴리토 오빠도 공부하는 거고 나도 공부하는 건데 뭐가 달라요! 나 연주도 잘하고 작곡도 잘하잖아요.”

16630319009933.jpg“이폴리토는 우리 집 장남이고! 장차 가주가 될 거고! 너는⋯⋯.”

계집애일 뿐인 데다가 잘난 것도 없는 막내라고 말하려던 루크레치아는 뒷말을 삼켰다. 이성을 잃을 정도로 화가 나지 않은 루크레치아가 자기 배로 낳은 자식한테 지키는 최소한의 선이었다.

16630319009933.jpg“그리고 그 끔찍한 작곡 타령 좀 그만해라. 저번에 네가 친 사고를 생각하면 엄마는 머리가 다 아파.”

루크레치아는 아라벨라의 곡을 이사벨라가 훔치려고 했던 사건을 언급하며 시근덕거렸다. 아라벨라는 자기가 잘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이렇게까지 화를 내자 움츠러들었다. 그때 아리아드네가 아라벨라의 편을 들어주기 위해 나섰다.

16630318997787.jpg“아버지. 파두아의 음악대학은 수녀원 부설이라고 해요. 여자아이가 어린 시절에 일이 년 가 있기에는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

아리아드네는 아라벨라를 어떻게 해서든지 1123년 흑사병 대 창궐 전에 북쪽으로 보낼 생각이었다.

16630319012919.jpg“음.”

하지만 데 마레 추기경은 음악대학 아이디어에 그렇게까지 감흥을 느끼지 못한 듯했다.

16630319012919.jpg“근데 아라벨라가 작곡을 그렇게까지 열심히 공부해야 할 필요가 있느냐?”

어쨌거나, 산 카를로의 귀한 여자아이의 미덕은 결국에는 순결하다는 명성과, 예쁜 얼굴과, 순종적인 성격이었다. 연주나 노래 실력 같은 잔재주는 잠깐 남자의 흥미를 돋울 수는 있더라도 결국엔 모두 부수적인 것들이었다. 게다가 하다못해 여성스러운 연주도 아니고 남자다운 작곡이라니, 어느 모로 보아도 가성비가 떨어지는 투자라고 아니할 수 없었다. 아라벨라가 간절하게 외쳤다.

1663031900203.jpg“작곡 공부 너무 하고 싶어요!”

아라벨라의 소원은 루크레치아의 타박에 가로막혔다.

16630319009933.jpg“어떻게 사람이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아! 안 돼!”

아리아드네는 위와는 다른 방면에서 어필을 해 보기로 했다.

16630318997787.jpg“어려서 음악대학 부설 수녀원에서 자라는 건 아라벨라의 명성에도 좋을 거예요. 신실하고 검소한 생활이 몸에 밴 영애라는 평가를 받을 것 아닙니까.”

아라벨라가 기겁을 한 눈초리로 아리아드네를 쳐다보았다. 수녀원이라니! 이 언니가 못 하는 소리가 없네! 반대로 데 마레 추기경은 이제야 관심이 좀 생긴 듯한 표정이었다.

16630319012919.jpg“생각을 좀 해 보자꾸나.”

사실 데 마레 추기경에게는 딸들이 너무 많았다. 데 마레 추기경에게 힘이 있는 동안에는 딸들을 정략결혼의 무기로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데 마레 추기경이 끈이 떨어지는 순간 딸들은 악성 재고로 전락할 위험이 농후했다. 신부가 명성이 드높다거나 외모가 몹시 아름다운 경우에는 신부대를 받고 결혼하지만, 신랑감과 신붓감이 서로 조건이 대동소이할 때는 신부만 지참금을 가지고 가는 것이 중앙 대륙의 결혼 풍습이었기 때문이다. 지참금은 보통 집안의 기둥뿌리를 뒤흔들 정도로 컸다. 자식이 여럿이면 그중 좋은 결혼 상대를 찾지 못한 딸들은 약간의 기부금과 함께 수녀원으로 보내졌다. 데 마레 추기경도 에트루스칸 결혼 시장의 법칙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재고 관리를 해야 했다. 급해지면 딸을 수녀원에 보내야 하는 거고, 예행연습 삼아 딸과 수녀원이 서로 친숙하게 해 두는 것은 나쁠 것이 전혀 없었다.

16630319012919.jpg“나쁜 생각은 아닌 것 같구나.”

16630318997787.jpg“감사합니다, 아버지.”

아리아드네는 순종적인 체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라벨라 본인은 뭐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객관적으로 나쁘지 않은 시작이었다. 일단 허락은 떨어졌다. 아리아드네는 일단 아라벨라의 입학원서를 작성시켜 음악대학에 보내놓기로 했다. 음악대학에서 아라벨라의 입학 허가 통지서까지 도착하면 그때 저번에 실질적으로 허락하신 것 아니냐고, 입학 허가까지 받은 김에 보내버리자고 강력하게 주장할 생각이었다. * * * 미래가 창창한 아라벨라가 새로운 진로를 모색해서 돌파구를 찾으려고 했다면, 이미 나이를 먹어 남아 있는 가능성이 얼마 없는 루크레치아는 좀 더 전통적인 방법으로 답답한 현실을 해소해 보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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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크레치아는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조심스레 산 카를로 뒷골목에 발을 디뎠다. 타고 온 마차와 마부는 골목길 어귀에 세워 놓은 채였다. 주변을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재빨리 훑은 그녀는 아주 오래된 낡은 단독주택 안으로 쏜살같이 몸을 던졌다. 단독주택의 실내는 어두컴컴했고 좁은 복도에는 거미줄이 구석구석 자리를 잡고 있었다. 루크레치아는 조심스럽게 한발 한발을 내디뎠지만, 오래된 마룻바닥은 루크레치아의 조심스러운 걸음걸이에도 불구하고 미친 듯이 삐걱댔다.

16630319009933.jpg“⋯⋯거기, 누구 없소?”

혼자서 걷는 것이 무서워진 루크레치아는 개미 소리만 한 목소리로 사람을 불러 보았다. 크게 말소리를 내자니 이곳에 온 사실이 들킬까 봐 두려웠지만 계속 혼자 걷자니 그것 또한 무서워서 어쩔 수 없었다. 하인의 대답은 없었지만 안에서 어떤 목소리가 대답했다. 아주 이국적인 억양을 쓰는, 40대쯤 된 여자의 목소리였다.

16630318997781.jpg“그대로 더 안으로, 맨 안쪽 방으로. 옳지.”

목소리를 따라간 루크레치아가 복도 끝의 문을 열어젖히자, 앞에 아기 머리통만 한 수정구슬을 앞에 둔 집시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싸구려 돼지기름 촛불을 여러 개 밝혀둔 채로 점을 보고 있었다. 루크레치아가 방 안에 들어서자, 그녀는 검은 이빨을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16630318997781.jpg“귀한 객이 오셨구려.”

집시 여인은 들고 있던 타로 카드를 책상 위에 드르륵 내려놓으며 루크레치아를 맞이했다.

16630319009933.jpg“내, 내가 누군지 아나요?”

루크레치아의 반문에 집시 여인은 더더욱 크게 웃었다.

16630318997781.jpg“천기를 훔쳐보는 미천한 점성술사의 집에 높으신 성직자의 부인께서 오셨으니 이 어찌 귀한 객이 아니오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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