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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화> 정이 떨어지는 순간 (599/733)

<제82화> 정이 떨어지는 순간2021.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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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아드네는 루크레치아가 ‘아리아드네의 방에 있던 것을 치워주려다가 내가 얽혀든 것이다’ 같은 변명을 시도할까 봐 긴장했다. 바깥은 이단심판관의 발고와 칼날이 횡행하는 시대였다. 그리고 이 집은 성황청의 최고위 성직자 중 하나인, 성 에르콜레 대성황당과 산 카를로 교구를 총괄하는 추기경의 관저다. 어떻게라도, 눈곱만큼이라도 얽힌다면 좋은 꼴을 보지 못한다. 하지만 바보 같은 루크레치아는 그 어떤 변명도 대지 못했다. 엄밀히 따지자면 루크레치아가 변명을 하지 못하는 것은 루크레치아가 순발력이 떨어지는 바보여서만은 아니었다. 루크레치아는 변명의 여지조차 없을 정도로 지나치게 딱 걸렸다.

16630319219917.jpg“니콜로가 나한테 귀띔을 했을 때 난 니콜로가 질 나쁜 농담을 하는 줄 알았어!”

루크레치아의 심복인 하녀장 지아다는 자기가 루크레치아를 부추겼으면서도 막상 루크레치아가 정말로 흑마술을 집 안에서 시행하려고 하자 두려워졌다. 그래서 그녀는 고민 상담을 빙자해 자기 여동생의 남편인 집사 니콜로를 찾아갔다. 그녀는 몇 번 변죽만 울리다가, 루크레치아의 주술 시행 날짜가 다가오자 그만 다 불어 버렸다. 루크레치아가 흑마술을 부리기 직전에 자기가 잘못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니콜로에게 모두 털어놓았던 것이다. 자초지종을 들은 집사 니콜로는 자기 혼자서 알고 있을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는 자기가 들은 바를 곧바로 데 마레 추기경에게 알렸다. 데 마레 추기경이 흑마술이 실제로 시행되기 전에 루크레치아의 처소에서 관련된 물품을 압수하고 이 모든 일을 멈췄으면 모두가 평화로웠을 것이다. 루크레치아의 검은 주술 사용은 미수로 그쳤을 것이고, 개구리의 피는 플라스크 안에 든 채로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아가씨 방의 상아색 카펫이 썩은 피로 더럽혀질 일도 없었고, 어쩌면 터무니없는 해프닝으로 치부하고 묻고 넘어갔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하녀장 지아다의 결심이 너무 늦었다. 데 마레 추기경이 허겁지겁 루크레치아를 찾아 달려갔을 때 루크레치아는 이미 실행에 착수한 다음이었다. 데 마레 추기경이 발견한 것은 추기경 관저 바닥에 그어진 무모하고, 멍청하고, 믿기지 않는 오망성과 그 옆에 쭈그려 앉아 있는 그의 아내였다.

16630319219917.jpg“당신이라는 사람은 도대체 생각이라는 게 있나?”

데 마레 추기경으로서는 너무나 어이가 없는 일이라 목격 직후에는 화도 나지 않았다. 그를 지배하는 주된 감정은 놀라움이었다.

16630319219917.jpg“여기는 추기경의 집이야. 천신님을 모시는 최고위 성직자라고. 나는 에트루스칸 제일 교구인 산 카를로의 영적 지도자이며 법황 성하 바로 다음 가는 열세 명의 사도들 중 하나야.”

그는 바닥에 그려진 핏빛 오망성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16630319219917.jpg“그런데 내 집에서 저런 게 나온다고? 당신은 우리 가족이 전부 다 이단 심판관 앞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불에 타는 꼴을 보고 싶소?”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됐는지 드디어 실감이 나기 시작한 루크레치아가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이 덜덜 떨기 시작했다.

16630319219936.jpg“그러려던 것은 아니었어요, 예하⋯⋯.”

루크레치아도 할 말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루크레치아가 이렇게 허술하게 집 마룻바닥에 거대한 오망성을 그리다 잡힌 것은 집시 점성술사가 제대로 된, 상세한 설명을 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집시 점성술사는 루크레치아에게 ‘정화 의식을 요하는 물건을 오망성의 정 가운데에 놓고, 개구리의 피로 오망성을 그린 후 오망성의 각 꼭짓점에 버너를 놓고 유향과 몰약을 태우면 악한 기운이 사라질 것이다’라고 알려 주었다. 집시 점성술사는 당연히, 루크레치아가 오망성을 아주 크게 ‘그려’서 오망성의 각 꼭짓점을 건물 바깥에 찍으리라 생각했다. 버너 한 개는 마구간 앞에, 두 번째 버너는 후원의 정원 구석에, 세 번째 버너는 하인들의 텃밭 한 쪽에 놓는 식으로 배치를 하면 들킬 염려도 적었다. 점과 점은 피로 물리적으로 연결될 필요가 없었다. 이건 흑주술을 사용하는 자들 사이의 상식 같은 거였다. 게다가, 애초에 ‘저주를 받은 귀보석’이라는 물건에는 저주 따위가 있었던 적이 없었다. 오망성이 정밀하게 그려져야 할 필요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삐뚤어지든 기울어지든 오망성이 아니라 육망성이 되든 별 상관이 없는 것은 당연했고, 그러므로 도면을 그리는 방법에 대해서 자세하고 신중하게 알려줄 필요조차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흑마술에 문외한인 루크레치아는 금고를 중심으로 피로 그린 조그만 오망성을 배치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루크레치아는 아리아드네의 방이 비는 기회를 호시탐탐 엿봤지만 마땅한 기회를 포착하지 못했다. 오늘은 ‘뱀주인자리’ 별자리가 끝나는 날이었다. 그래서 아리아드네의 서재가 잠깐 빈 틈을 타서 무리하게 일을 실행하다가 이 꼴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거대한 커뮤니케이션 미스로 인해 빚어진 사태였지만 이 사정을 데 마레 추기경에게 제대로 설명할 수도 없었을뿐더러, 설명을 한다고 해서 그의 분노가 가라앉을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불붙기 시작한 데 마레 추기경의 분노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16630319219917.jpg“죽는 거야 죽는 거지, 그러고 나면 내 명예는 뭐가 돼!”

데 마레 추기경은 바닷가 마을의 고아 소년이었던 시절로부터 지난한 세월을 계급구조의 사다리를 타오르는 데에 바쳤다. 비쩍 마른 작은 체구의 열두어 살 소년이 눈가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머리숱도 듬성듬성해진 중년의 남자가 되기에 족한 시간이었다.

16630319219917.jpg“신학자로 이름 높던 시몬 데 마레는 도대체 뭐가 돼⋯⋯!”

데 마레 추기경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이 이 세상을 두 손으로 헤쳐 나왔다. 그의 명성을 가장 강하게 추동해주었던 것은 학자이자 연구자로서의 평판이었다. 나이가 들어서 무뎌지기는 했지마는 젊은 시절 그의 펜 끝은 날카로웠고, 이성으로 받아들이는 주신과 신학 이론을 주창했으며, 마녀사냥, 흑마술, 주술, 이단심판 같은 것은 감성이 미혹되는 것이며 논리와 합리를 통해 천신께 닿자고 교단을 설득했다. 그런데 시몬 데 마레 추기경의 집에서 악마의 오망성이 나왔다.

16630319219917.jpg“내가 쓴 저술, 저작,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이지 않소!”

가장 드높은 지성을 가졌다고 알려진 자가 사실은 내밀한 곳에서 악마 숭배자라니.

16630319219917.jpg“사람들이 말하겠지. 이제껏 시몬 데 마레 추기경이 이단 심판관들에게 반대했던 것은 자기가 끌려가기 싫어서라고 말이야!”

그는 자신의 아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16630319219917.jpg“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딴 짓거리를 하는 거야!”

눈물을 줄줄 흘리기 시작한 루크레치아는 더듬더듬 웅얼거렸다.

16630319219936.jpg“⋯⋯어요.”

16630319219917.jpg“뭐?”

16630319219936.jpg“우리 가족⋯⋯. 다 잘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그랬어요⋯⋯.”

루크레치아의 ‘가족’ 안에는 아리아드네는 없었지만 데 마레 추기경도 그 부분을 굳이 책망하지는 않았다. 루크레치아는 줄줄 울면서 말을 이었다.

16630319219936.jpg“점성술사가⋯⋯. 이사벨라가 이렇게 된 건 사악한 기운이 깃들어서 그렇다며⋯⋯. 정화 의식을 하면 모두 다 잘 될 거라고⋯⋯.”

16630319219917.jpg“그 말을 믿나 이 여편네야!”

데 마레 추기경은 반쯤은 어이가 없어서, 반쯤은 울화통이 터져서 소리를 질렀다. 도저히, 뇌가 없는 사람과 대화를 한다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그게 합리적이지 않다는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해야 루크레치아를 설득할 수 있을지 그는 도통 감조차도 잡히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그가 20년이 넘도록 살을 맞대고 살아온 이 여자가 정말이지 절망적으로 멍청하다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 그에게 엄습해왔다.

16630319219917.jpg“이렇게 될 줄 몰랐어? 이걸 이단 심판관이 발견하면 어떻게 될지 몰랐냐고!”

16630319219936.jpg“죄송해요⋯⋯. 죄송해요⋯⋯.”

데 마레 추기경의 뇌리에 혼자서 고군분투하며 집안을 이끌어 온 지난 20여 년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그는 그동안 루크레치아가 그의 등 뒤에 든든하게 서서 가족을 보살피고 그를 내조했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이 여자는 사실 거대한 짐 덩어리였다. 그녀는 그의 등에 업혀서 거머리처럼 피를 쪽쪽 빨았다. 그뿐이랴, 처가 식구들은 루크레치아에게 딸려오는 세트였다. 그는 루크레치아가 자신에게 충실하다고 생각했지만 루크레치아에게는 언제나 친정 식구들이 먼저였다. 자노비 놈의 사태 때에도 한 번 느낀 바 있었다. 그에게는 덜떨어진 처조카보다는 자신의 피를 이은 서출 딸이 훨씬 중요했다. 그리고 그의 충실한 반쪽인 그의 아내도 마땅히 그랬어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루크레치아는 선택의 시간이 다가오자 매정하게 아리아드네를 내치고 자노비를 택했었다. 데 마레 추기경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듯했다.

16630319219917.jpg“이봐, 루크레치아. 나는 자네에게 충분히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해.”

데 마레 추기경이 루크레치아를 지칭하는 호칭은 미묘하게 변해 있었다. 그는 항상 그녀를 ‘당신’이나 ‘여보’라고 불렀지만 지금은 그녀를 ‘자네’라고 부르고 있었다.

16630319219917.jpg“자네는 데 마레 가문에 마이너스야. 기여하는 게 없어.”

루크레치아의 보라색 눈이 크게 홉떠졌다. 그녀는 그녀의 남편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16630319219936.jpg“안 됩니다, 안 됩니다⋯⋯.”

16630319219917.jpg“여기까지인가 보오.”

  - 쨍그랑! 도자기가 산산이 깨지는 소리가 아리아드네의 처소 안을 요란하게 울렸다. 몰래 따라 올라와 아리아드네의 서재 입구에 숨어 있던 아라벨라가 손에 들고 있던 도자기 인형을 대리석 바닥 위에 떨어뜨리는 소리였다. 어린 아라벨라를 발견한 루크레치아는 생명줄을 찾은 듯이 허겁지겁 무릎으로 아라벨라에게 기어갔다. 그녀는 막내딸에게 매달리다시피 해서 아라벨라를 껴안았다. 아라벨라는 썩은 개구리 피를 뒤집어쓴 어머니의 막무가내 포옹에 놀라서 흠칫 한 걸음 옆으로 피했지만 루크레치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라벨라를 품속에 더욱 깊이 가뒀다.

16630319219936.jpg“예하, 예하! 저는 예하의 자식들을 바로 이 배로 낳은 어머니입니다!”

데 마레 추기경의 본성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루크레치아가 혼신의 힘을 다해 부르짖었다. 그녀의 남편은 오늘 그녀를 내치기로 결심했다. 여기서 쫓겨나면 끝장이다.

16630319219936.jpg“내 배로 자식 셋⋯⋯! 셋을 낳았어요! 예하와 함께 22년을 살았습니다! 저를 이렇게 내치실 수는 없습니다! 자식들을 생각하세요!”

데 마레 추기경은 한 점의 흔들림조차 없었다.

16630319219917.jpg“자식들을 생각해서 이러는 거요.”

그는 무기질처럼 반들거리는 진녹색 눈동자로 루크레치아를 바라보았다. 그는 더없이 매혹적이라고 생각했지만 단 한 번도 이해한 적은 없었던 여자의 보라색 눈동자를 오래오래 쳐다보았다.

16630319219917.jpg“자네처럼 컨트롤 안 되는 여자가 어미랍시고 집안에 앉아 있는 것보다는 그냥 아무도 없는 게 낫겠어. 이사벨라? 시집? 그 애가 흑마술에 심취한 어미를 두고 퍽이나 시집을 잘 갈 수 있겠소!”

그는 루크레치아를 빤히 바라보며 심중에 있는 말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16630319219917.jpg“이폴리토가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출세했으면 좋겠다고? 퍽이나! 이렇게 판단력 없는 어미를 두고 명석한 관료가 되겠소, 명성 높은 군인이 되겠소, 신실한 성직자가 되겠소?”

팽팽하게 기 싸움을 하는 양부모 사이에 쿠션처럼 끼어 있는 아라벨라가 루크레치아의 품을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다. 하지만 데 마레 추기경도, 루크레치아도 딸의 안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16630319219917.jpg“자네 같은 엄마는. 없는 게 나아.”

데 마레 추기경은 몸을 일으켜 아리아드네와 함께 구석에서 몸 둘 바를 모르고 조아리고 있는 집사 니콜로를 쳐다보았다.

16630319219917.jpg“여봐라. 이 여자를 당장 베르가모 영지로 보내라. 베르가모 영지의 작은 방에 두고 아무도 만나지 못하게 해.”

집사 니콜로가 허리를 깊게 숙였다.

16630319231976.jpg“명을 받들겠습니다, 예하!”

그 소리를 들은 루크레치아는 비명을 지르며 아라벨라를 껴안고 흔들었다.

16630319219936.jpg“너희 아버지에게 뭐라고 말 좀 해 봐!”

하얗게 질린 아라벨라는 굳어서 한마디도 못 하고 부들부들 떨고 있을 뿐이었다.

16630319219936.jpg“넌 내 딸이잖아! 내 배로 낳은 자식이잖아! 뭐라고 엄마 편 좀 들어봐!”

루크레치아의 고성이 하늘을 찔렀고, 데 마레 추기경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루크레치아에게 다가갔다.

16630319219917.jpg“마지막 가는 길에 애한테 추태 좀 그만 보여.”

그는 루크레치아의 왼손을 잡아 들었다. 아라벨라는 데 마레 추기경이 루크레치아의 손을 잡은 틈을 타서 허겁지겁 루크레치아의 옥죄이는 품 안을 탈출했다. 데 마레 추기경은 루크레치아의 왼손에서 강제로 거대한 황금 반지를 하나 잡아 뽑았다. 데 마레 추기경이 빼앗은 반지는 안주인의 인장으로 사용하는, 데 마레 가문의 반지였다. 그가 성이 없는 고아 소년 시몬에서 수사가 되고, 사제가 되고, 점차 직분이 높아져 주교가 되던 때 바다에서 왔다는 ‘데 마레’를 성으로 삼으며 팠던 안주인의 반지였다. 이 반지는 만들어진 이후로부터 죽 루크레치아의 손에만 끼워져 있었다. 그는 반지를 회수한 다음에 집사 니콜로에게 명령했다.

16630319219917.jpg“끌고 가라.”

집사 니콜로는 루크레치아에게 영 찜찜한 듯 목례하며 그녀를 인도했다.

16630319231976.jpg“가시지요, 가셔야 합니다.”

루크레치아는 남편을 보며 울부짖었다.

16630319219936.jpg“나는 못 가!”

하지만 데 마레 추기경은 루크레치아를 아예 기억에서 지워버린 듯했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그녀를 못 본 척하며 고의적으로 루크레치아를 회피했다. 애먼 아랫사람만 애가 탔다. 집사 니콜로는 그가 존대를 하는 것이 데 마레 추기경의 귀에 잘 들리지 않도록 발을 동동 구르며 루크레치아를 달랬다.

16630319231976.jpg“마님, 추기경 예하의 성격 잘 아시지 않습니까! 지금은 거스르는 게 상책이 아닙니다. 일단 예하께서 한 번 가라앉으신 다음에 다시 생각해보실 겝니다. 지금은 가셔야 해요.”

집사 니콜로가 끌어당기다시피 루크레치아를 방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루크레치아는 뒤를 자꾸 돌아보며 니콜로에게 끌려나갔다. 데 마레 추기경은 안주인의 인장을 사제복의 옷자락으로 슥슥 닦은 다음에 그것을 아리아드네에게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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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30319219917.jpg“자. 받거라.”

아리아드네는 눈을 크게 뜨고 빛나는 황금색의 인장을 받았다. 이것이 데 마레 가문의 모든 금전 출납을 하기 위해 필요한 안주인의 반지였다.

16630319219917.jpg“난 이걸 언젠가 며느리에게 물려줄 줄 알았지, 딸에게 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해 봤다.”

데 마레 추기경의 얼굴 표정은 경직되어 있었다. 사실 그조차도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차였다. 그는 그의 서출 딸과 똑같이 일이 터졌을 때 이성의 인도를 따라 일 처리를 하는 자였고, 감성은 뒤늦게 그를 따라와 함락시키고는 했다.

16630319219917.jpg“네 일 처리를 보니 이건 당분간 네 손에 있는 것이 합당해 보인다.”

아리아드네에게 안주인의 인장을 맡긴 데 마레 추기경은, 갑자기 피로가 몰려오는 듯했다. 그는 휘청이며 아리아드네의 서재를 나갔다.

16630319219917.jpg“이 망할 사태의 뒤처리는 네가 좀 알아서 해라. 난 잠시 쉬어야겠다.”

아리아드네는 방을 떠나는 아버지에 뒷모습에 대고 충직한 체 고개를 숙여 보였다.

16630319238293.jpg“예, 아버지.”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살아남은 자가 강한 자다, 라는 말을 아리아드네는 오늘 피부가 시리도록 체감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루크레치아가 제 발로 무덤을 팠다.

16630319238293.jpg“…….”

아리아드네는 황금빛 인장을 왼손 검지에 끼웠다. 싯누렇고 커다란 금덩어리가 번쩍번쩍 빛났다. 루크레치아는 약지에 끼고 있던 반지지만 어린 손가락은 가늘어서 검지에 끼워야 반지가 간신히 손가락 위에서 버텼다.

16630319238293.jpg“아라벨라.”

아리아드네는 방 한 쪽 구석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여동생을 불러 그녀의 이마에 입맞춤을 해 주었다.

16630319238293.jpg“일단 네 방으로 가 있어. 오늘 본 건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고. 언니가 조금 있다가 네 방으로 갈게.”

아라벨라를 보낸 다음에는 지아다였다.

16630319238293.jpg“지아다. 지금 이 방에 난 난리는 아무래도 자네가 혼자 치워야겠군.”

구석에서 몸 둘 바를 모르고 있던 지아다가 드디어 자신에게 쓸모가 생기자 반색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죽은 짐승의 피로 그린 오망성이 있는 추기경의 저택 꼬라지를 아무 하녀에게나 보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기왕 목격한 지아다가 뒤처리까지 하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지아다를 그렇게 쉽게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16630319238293.jpg“그리고 방 정리가 모두 끝나면 자네는 나와 이야기 좀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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