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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화> 천생연분 (604/733)

<제87화> 천생연분2021.10.03.

16630319521927.jpg“추기경 예하! 이폴리토 도련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장남의 귀환에 잠자리에 들었던 데 마레 추기경은 다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다음 날 아침의 왕국 전체 신년 미사를 주관해야 했으므로 컨디션 보전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장남이 돌아왔다는데! 그는 잠옷 바람으로 일 층으로 내려와 아들을 맞이했다.

16630319521933.jpg“이폴리토!”

16630319521938.jpg“아버지!”

이폴리토는 요란스럽게 데 마레 추기경을 껴안았다. 아버지가 으스러질 지경이었다. 키가 4 피에디 2 디토(약 182cm)나 되는 이폴리토는 조그만 데 마레 추기경을 손쉽게 품 안에 안았다. 키가 4 피에디(약 170cm)가 채 안 되는 데 마레 추기경은 아들의 가슴팍에 코가 눌려 숨이 막히는 바람에 팔을 허우적댔다. 아버지가 질식 중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이폴리토가 포옹을 풀자 데 마레 추기경은 근엄함을 되찾기 위해 헛기침을 했다.

16630319521933.jpg“그래, 이폴리토. 잘 돌아왔다. 파두아에서 공부는 잘 마치고 돌아왔느냐.”

이폴리토의 얼굴에 낭패한 기색이 아주 잠깐 떠올랐지만 이내 사라졌다.

16630319521938.jpg“당연하죠, 아버지. 공부하면 아버지 아들 이폴리토 아니겠어요? 온 동네 친구들이 다 저한테 과제 좀 보여달라고 졸졸 따라다녔습니다.”

확실히 친구들이 따라다니긴 했다. 공짜로 담배 좀 나눠 피우자고 달라붙은 것이긴 하지만. 이폴리토는 그래도 난 거짓말은 안 했다고 생각했다. 이폴리토가 일 층에서 소란을 피우자 다른 집안 식구들도 잠에서 깨 버렸다. 가족들이 하나둘씩 내려오기 시작했다. 아라벨라가 잠옷을 입고 커다란 곰돌이 인형을 안은 채 중앙 계단 위에 서서 큰오빠를 맞이했다. 이폴리토와 아라벨라는 나이 터울이 많이 져서 그런지 데면데면했다. 그는 아라벨라에게는 대충 눈인사 정도만 한 다음에 그다음 사람에게 시선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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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단 같이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가 풍성한 잠옷을 입고, 검지에 안주인의 황금 인장을 끼고 계단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16630319521938.jpg‘어머니의 편지에 나왔던 그 사생아 계집이렷다.’

아리아드네를 발견한 이폴리토가 미간을 구겼다. 그는 아리아드네에게 따로 인사하지 않았다.

16630319521938.jpg“아버지! 먼 길 왔더니 피곤하네요.”

루크레치아와 이사벨라가 나와서 맞이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한마디 할 법도 했으나, 이폴리토는 거기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16630319521938.jpg“이제 다들 슬슬 자야죠. 제 방은 잘 있지요?”

데 마레 추기경은 헛기침을 했다.

16630319521933.jpg“그것이…….”

16630319528363.jpg“오라버니의 방은 서쪽 날개의, 어머니께서 원래 쓰시던 방 옆 방입니다.”

침착한 목소리의 아리아드네가 대신 답했다. 밤이라 그런지 착 가라앉은 낮은 톤이었다. 그녀는 약간의 미소를 띠고 말을 이었다.

16630319528363.jpg“어머니의 방이 비어 있으니 사람 손을 탈 일이 없어서요. 오라버니께서 간혹 들여다봐 주십사 어머니 방 옆 방을 깨끗하게 치워 놓았습니다.”

속이 빤히 보이는 핑계였다. 이폴리토가 하녀도 아니고 루크레치아의 방을 직접 관리할 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거양득의 공격이었다.

16630319528363.jpg“사람이 가꾸지 않으면 망가지는 것이 공간 아니겠습니까.”

지금 이폴리토의 방은 아리아드네가 차지한 상태였다. 자기 방을 내놓으라는 둥, 아버지께 실망이라는 둥 불평불만이 나오지 않도록 아예 막아 버린 것이다. 게다가, 루크레치아의 이름이 강제로 화제에 오르자 데 마레 추기경과 이폴리토 사이에는 대번에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이폴리토가 어머니의 안부조차 묻지 않으며 애써 조성했던 평화였다. 아리아드네는 저 장남이 데 마레 추기경과 각별한 사이가 되도록 내버려 둘 마음이 전혀 없었다.

16630319528363.jpg“말레타.”

마침 이폴리토의 새로운 전담 하녀로 배정받은 말레타가 뛰어 내려왔다. 3층 하녀 방에서 허겁지겁 내려오는 차였다. 그녀는 도련님이 오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황급히 몸단장을 하고 뛰쳐나오느라 남들보다 조금 늦었다.

16630319528363.jpg“도련님께 인사드려라.”

말레타는 안 그래도 깊숙이 가슴 앞섶을 판 하녀복을 아래로 더 당겼다. 가슴골이 제대로 보이도록 옷을 매만지며 말레타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각고의 노력을 하며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서 이폴리토에게 인사를 올렸다.

16630319528384.jpg“이폴리토 도련님. 이번에 새로 도련님의 시중을 들게 된 말레타라고 합니다.”

아리아드네는 웃는 낯으로 말레타의 소개를 해 주었다.

16630319528363.jpg“원래 이사벨라 언니의 전담 하녀였던 터라 예의범절에도 밝고 일 처리가 빠릿빠릿합니다. 똘똘하기에 오라버니의 전담 하녀로 삼았어요. 혹시나 말레타의 시중이 불편하신 점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저한테 이야기해 주세요.”

말레타가 재빠르게 말을 받았다.

16630319528384.jpg“불편하실 일 없도록 성심성의껏 잘 모시겠습니다.”

이폴리토는 말레타의 똘똘함이나 재빠름보다는 다른 데에 더 관심이 있었다. 말레타의 머릿수건은 조신하지 못하게 뒤로 넘어가 있었고, 말레타의 불타는 붉은 머리카락이 몇 가닥 삐져나와 목덜미를 타고 흘러 내려온 상태였다. 그 머리카락을 따라 시선을 내리면 풍만한 가슴골이었다. 이폴리토는 말레타의 뽀얀 속살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는 루크레치아와 이사벨라의 이야기를 꺼내려던 마음 따위는 까맣게 잊었다.

16630319521938.jpg‘급한 일부터 좀 처리하고, 이거저거 알아본 다음에 아버지와 이야기해 보지 뭐.’

16630319521938.jpg“좋아, 좋아. 알았어.”

이폴리토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손가락을 까딱까딱해서 말레타를 가까이로 불렀다.

16630319521938.jpg“그래 너, 내 짐을 들고 올라가서 내 방에 풀어놔. 아버지, 저는 그럼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

16630319521933.jpg“오냐.”

16630319521938.jpg“푹 주무세요.”

사람 좋은 척 미소를 실실 흘리며 이폴리토는 그의 무거운 보퉁이를 낑낑대며 끌고 2층으로 올라가는 말레타의 엉덩이 뒤를 졸졸 따라 올라갔다. 하녀 또한 도련님의 마음을 안다는 듯이 과장되게 커다란 궁둥이를 오른쪽 왼쪽으로 양껏 흔들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산 카를로는 역시 참 좋은 곳이었다. * * * 이폴리토와 말레타는 과연 눈 한 번 깜박할 사이에 눈이 맞았다. 그 둘은 방에서 잘 나오지 않았고, 방 밖에서 주종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할 때에도 사람들의 눈을 피해 장난질을 쳤다. 그들은 실실 웃으며 손가락 장난을 친다던가, 서로 발끝으로 상대방의 다리를 훑는 짓거리를 해댔다. 숨긴다고 숨겼지만 온 집안 식솔들 전체가, 아니, 식솔뿐만이 아니라 집안 비품들까지 그들의 연애 행각을 알았다. 데 마레 추기경 관저의 식탁이나 마차를 끄는 말한테 이폴리토와 말레타의 관계를 물어봐도 둘이 눈 맞은 사실을 잘 안다고 대답할 것이다. 둘은 하나가 없어지면 죽을 것처럼 착 붙어 다녔다. 하지만 그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동상이몽이 있는 듯했다.

16630319528384.jpg“도련니임.”

말레타의 콧소리에 이폴리토는 흥겹게 대답했다.

16630319521938.jpg“그래, 그래, 우리 예쁜이.”

16630319528384.jpg“말레타 반지 사주세요.”

16630319521938.jpg“응? 무슨 반지?”

16630319528384.jpg“반짝반짝하고, 큰—거요. 기왕이면 투명한 보석이면 좋겠어요.”

다이아몬드 반지를 사달라는 거였다. 이폴리토는 옆으로 쭉 찢어진 눈을 최대한 위아래로 크게 떠서 양순한 척 말레타를 바라보았다. 못 알아듣는 시늉을 한 것이다. 결국 수차례의 보챔에 질려버린 그가 사 온 것은 혼약의 의미가 담긴 다이아몬드 반지가 아닌 단순 장식품인 남양 진주 목걸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레타는 자신이 차기 데 마레 부인이 될 거라고 믿어 마지않았다. 이는 이폴리토가 말레타에게 금화를 정말 아낌없이 쏟아붓고 있다는 점에 기인했다. 말레타는 점차 대담해졌다. 이폴리토도 엄밀히 따지자면 사생아로, 아버지의 직위가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그것을 이을 수 없었다. 결국 평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어차피 귀족도 아닌데 역시 평민인 자기와 결혼을 못 할 게 무엇이냐, 라는 논리로 말레타는 이폴리토의 옆자리를 노리게 되었다. 말레타는 도련님의 총애를 받자마자 몹시 거만해져서, 거들먹거리며 온 집안 식구들과 트러블을 일으켰다. 그 최대 피해자는 산차였다.

16630319528384.jpg“이걸 왜 내가 해야 해?”

말레타는 풍만한 가슴을 앞으로 내밀고 팔짱을 낀 채 산차를 위아래로 훑었다. 임시 하녀장 대리인 산차는 말레타의 반말 항명에 심호흡을 했다. 산차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말레타를 혼냈다.

1663031953251.jpg“말레타. 말투가 그게 뭐야?”

16630319528384.jpg“왜, 임시 하녀장 딱지 다니까 네가 진짜 윗사람 같냐?”

말레타는 산차를 위아래로 꼬나보았다. 산차는 임시 하녀장 직위로 승진하면서 데 마레 저택의 하녀들이 모두 같이 입는 회갈색 유니폼을 벗고 하녀장과 보직 하녀들만 입을 수 있는 검은 벨벳 조끼와 붉은 겉옷을 입고 다녔다.

16630319528384.jpg“그래 봤자 하녀는 하녀야. 너 언제까지 그러고 살래?”

말레타는 여전히 회갈색 유니폼을 걸치고 있긴 했지만, 자기 마음대로 옷을 다 개조한 상태였다. 하녀복에 비단을 써서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1663031953251.jpg“내가 하녀인 건 사실이지만 너도 여전히 하녀야, 말레타.”

산차는 입술을 앙다물고 하녀복인지 하녀복이 아닌지 헷갈리는 물건을 걸친 말레타를 노려보았다.

1663031953251.jpg“그리고 하녀인 네 업무는 이폴리토 도련님의 식사를 챙기고 방 청소를 하는 거야. 거기에는 먹고 남은 식기를 스컬러리*에 갖다 주는 것도 포함이야. 왜 네가 해야 할 일을 다른 애들을 시켜?”

말레타는 빙글빙글 웃으며 대충 쓴 머릿수건 밑으로 드러낸 붉은 머리카락을 뱅글뱅글 꼬았다.

16630319528384.jpg“한 명이 바쁘면 누구든지 그 일을 대신해 줄 수도 있는 거지. 뭘 그렇게 빡빡하게 굴어?”

말레타는 요즈음 본인이 하녀가 아니라 애첩이라도 되는 양 머릿수건을 제대로 쓰지 않고 머리카락을 다 드러내고 다녔다.

16630319528384.jpg“설거지하는 애들이 그릇도 찾으러 좀 다닐 수 있는 거지. 난 도련님을 모신다는 훨씬 중요한 일을 한다고.”

말레타는 자랑하듯이 앞으로 내민 가슴을 흔들었다.

16630319528384.jpg“도련님이 놓아 주시지 않는 걸 어떻게 하니?”

산차는 남녀 간의 일은 잘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저 역겨운 뉘앙스를 깨닫고 얼굴을 제대로 구겼다. 말레타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산차를 가르치려 들기까지 했다.

16630319528384.jpg“산차. 너도 생각 똑바로 해. 아리아드네 아가씨의 위세가 천년만년 가실 것 같아? 이 집안은 결국 이폴리토 도련님 거야.”

산차는 말레타의 우쭐거림에 화를 이기지 못하고 손에 들고 있던 열쇠 꾸러미를 탁상에 내리치고 말았다.

1663031953251.jpg“너! 그 불경한 입 다물어! 아가씨한테 일러서 업무 태만으로 내쫓아 버리겠어!”

16630319528384.jpg“할 수 있으면 해 보시지.”

말레타는 예의 그 는질는질한 미소를 던지고는 엉덩이를 흔들며 산차를 뒤에 세워 놓은 채로 가 버렸다. 산차는 분에 겨워 바들바들 떨었지만 지금 산차가 할 수 있는 일은 아가씨에게 억울함을 토로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아리아드네 아가씨는 ‘지금은 때가 아니’라며 조금만 더 참으라고 산차를 달랬을 뿐이다.

1663031953251.jpg“아오, 화나!”

확실히, 이폴리토가 말레타를 애지중지 싸고돌았기 때문에 아리아드네도 당장 말레타를 내쫓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말레타의 미래 계획에 이폴리토도 동의하는지 여부는 불투명했다. 그는 말레타에게 호화로운 비단이며, 추위를 막기 위한 모피며, 심지어는 하녀의 분수에는 절대로 어울리지 않는 진주 목걸이까지 선물해 주었지만 미래를 속삭이지는 않았다. 그저 말레타가 칭얼거릴 때마다 선물 세례를 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선물 세례를 할 돈은 아버지의 주머니로부터 나왔다. 지금은 아리아드네가 움켜쥐고 있는 그 주머니였다.

16630319521938.jpg“아리아, 대체 왜 이번 달엔 15 두카토(약 1500만 원)밖에 안 보낸 거지?”

이폴리토는 다짜고짜 아리아드네의 서재로 밀고 들어왔다. 그는 아리아드네의 책상 앞에 우뚝 서서 배다른 여동생을 내려다보았다. 아리아드네를 부르는 호칭도 제멋대로였다.

16630319528363.jpg“오라버니.”

아리아드네는 들여다보고 있던 장부를 탁 소리 내어 덮으며 이폴리토를 마주 바라보았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서재 안을 가득 메우며 노르스름한 빛을 비췄고, 아리아드네의 오른손 검지에 끼워진 안주인의 황금 인장이 빛을 받아 이폴리토의 눈을 찔렀다. 이폴리토는 저 물건이 매우 거슬린다고 생각했다. 역광인 탓에 이폴리토에게 아리아드네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16630319528363.jpg“얼마를 더 받으셔야 한다고 생각하신 거죠?”

냉담한 목소리가 차분하게 서재 안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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