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92화> 탈출 (609/733)

<제92화> 탈출2021.10.20.

데 마레 대저택으로 돌아온 루크레치아는 냉담해진 남편 대신에 아들에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16630319831197.jpg“아들. 엄마랑 산 카를로 시내에 쇼핑 갈까?”

16630319831202.jpg“쇼핑은 무슨 쇼핑이에요. 날도 추운데.”

16630319831197.jpg“아드―을. 먹고 싶은 거 없니?”

16630319831202.jpg“점심 먹은 지 몇 분이나 됐다고.”

16630319831197.jpg“아들―.”

16630319831202.jpg“아 엄마 됐어요, 나중에!”

이는 루크레치아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루크레치아는 어디에서든 이유를 찾아야 했다. 그녀는 착한 아들인 이폴리토가 자신을 멀리할 사유는 하녀 말레타에게 푹 빠졌기 때문, 단 하나라고 단정 지었다. 루크레치아 마님은 하녀 말레타에게 가혹한 시집살이를 시키기 시작했다.

16630319831197.jpg“점심은 먹었니?”

말레타는 루크레치아의 질문에 공손히 대답했다. 저번에 지적당했던 호화로운 장신구들은 거의 다 뺀 수수한 차림이었다.

16630319831228.jpg“예, 먹었습니다.”

16630319831197.jpg“너 말고, 우리 아들 말이야.”

루크레치아는 소파에 편하게 누운 채 곱게 손질된 손톱을 들여다보았다.

16630319831197.jpg“내가 네가 먹은 게 궁금할 리가 있겠니? 넌 머리가 있니 없니? 무식하게 살만 뒤룩뒤룩 쪄서는. 생긴 거랑 꼭 같이 노네. ”

말레타는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했다. 농장에서 갓 올라온 아리아드네에게 덤비던 기백은 어디로 갔는지, 루크레치아 앞에서는 오돌오돌 떠는 한 마리의 생쥐 같았다. 하지만 루크레치아는 불쌍해 보인다고 봐주지 않았다. 그녀는 반격할 꿈조차 없어 보이는 사냥감을 앞에 놓고도 앞발로 때릴 수 있는 사나운 고양이었다.

16630319831197.jpg“대답 안 해? 바보야? 네가 담당 하녀면서, 벌써 우리 아들 점심 뭐 먹었는지 까먹었어?”

16630319831228.jpg“그, 프로슈토와 치즈, 말린 버찌를 얹은 타르트, 익힌 렌틸콩과 과일을 조금 드셨습니다.”

루크레치아는 이폴리토가 먹었다는 빈약한 메뉴에 크게 화를 냈다.

16630319831197.jpg“따듯한 음식이 렌틸콩이 전부라니! 너 도대체 도련님 시중을 어떻게 드는 거니?!”

이폴리토가 먹은 따듯한 것은 사실 더 있었다. 생략된 것은 ‘데운 포도주’였다. 이폴리토는 오전 내내 술잔을 홀짝이며 말레타와 뒹구느라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않았다. 이를 곧이곧대로 전할 수 없었던 말레타는 땀을 뻘뻘 흘리며 어떻게든 마님을 달래려고 했다.

16630319831228.jpg“그게, 저, 도련님도 좋아하셨고…….”

16630319831197.jpg“애가 입맛이 어린애 같은 걸 너까지 오냐오냐 받아주면 어떡해! 네가 알아서 몸에 좋은 걸 잘 대령해서 챙겨 먹여야 할 것 아니냐!”

어린애 입맛이라기보다는 술주정뱅이의 안주 목록이었지만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루크레치아는 말레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트집거리를 찾아내기 시작했다.

16630319831197.jpg“너, 내가 복장 단정히 하라고 말했어 안 했어?”

16630319831228.jpg“자, 장신구는 다 뺐습니다 마님…….”

16630319831197.jpg“이게 어디서 말대답이야!”

  - 철썩! 루크레치아가 말레타의 따귀를 날리려고 했으나, 말레타가 재빠르게 몸을 움츠리며 피한 나머지 루크레치아는 대신 말레타의 어깨를 때리고 말았다.

16630319831228.jpg“아야!”

16630319831197.jpg“아야? 이게 어디서 큰 소리야!”

루크레치아가 말레타를 제대로 두들겨 패려고 떡갈나무 몽둥이를 찾아 집어 드는 순간, 말레타의 구원자가 나타났다. - 벌컥!  

16630319831228.jpg“도련님!”

16630319831202.jpg“말레타?”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방 안으로 들어온 것은 이폴리토였다. 루크레치아는 갑자기 아들이 들어오자 깜짝 놀라 떡갈나무 몽둥이를 바로 내려놓았다. 그녀는 떡갈나무 몽둥이를 발끝으로 툭 쳐서 소파 밑으로 밀어 넣어 버렸다.

16630319831197.jpg“이폴리토, 여기서 뭐 하는 거니?”

16630319831202.jpg“목이 마르는데 전담 하녀가 안 보이잖아요. 엄마는 얘를 왜 붙들고 계세요? 엄마 시중드느라고 내 옆이 비잖아요.”

엄밀히 따져서 시중을 들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루크레치아 입장에서는 아들이 그렇게 생각해주면 좋았다.

16630319831197.jpg“그, 그래. 이폴리토. 얼른 데려가라. 우리 아들 허드렛일 하녀가 없으면 안 되지.”

16630319831202.jpg“네, 어머니.”

루크레치아는 다 잡은 먹잇감을 이번에는 내보내 주었다. 하지만 기가 살아서 이폴리토를 따라 나가려는 하녀를 창공에서 먹이를 노리는 독수리가 눈을 빛내듯이 노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말레타는 나가기 직전에 루크레치아와 눈이 마주치고 다시 한번 깨갱, 어깨를 움츠렸다. 그녀는 생명줄인 도련님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 나갔다. * * *

16630319831228.jpg“도련님! 보셨지요!”

16630319831202.jpg“물.”

목이 말라서 하녀를 찾으러 나왔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었는지, 이폴리토는 말레타의 말을 끊고 마실 것을 요구했다. 아침의 숙취가 뒤늦게 올라오는 듯했다. 말레타는 어쩔 수 없이 부엌으로 가 찬물을 대령했다. 이폴리토와 대화하려면 그의 모든 욕구를 다 채워 준 다음에야 가능했다. 하지만 이폴리토는 말레타가 건네준 물을 다 마시고 난 뒤에도 대충 물잔을 그녀에게 돌려주고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어머니에 대해서 가타부타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조급증이 올라온 말레타는 이폴리토의 기분은 고려하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

16630319831228.jpg“도련님! 저 좀 살려주세요!”

정말로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16630319831228.jpg“마님이 저를 말려 죽이시려고 해요!”

16630319831202.jpg“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16630319831228.jpg“아까 절 때리시기까지 했어요!”

16630319831202.jpg“설마.”

16630319831228.jpg“어깨를 철썩! 하고 때리셨다니까요!”

16630319831202.jpg“……귀여워서 도닥여 주신 정도겠지.”

16630319831228.jpg“도련님!”

아아. 귀가 울린다. 이폴리토는 지금 정신이 멍했다. 아침 식사 때는 아버지인 데 마레 추기경에게 눈도장을 찍어야 하니 가족 식당에 앉아 있어야 한다. 이른 기상은 질색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침 식사 시간에는 어머니인 루크레치아가 내내 이폴리토에게 말을 붙였다. ‘이것 좀 먹어보련, 이건 입맛에 좀 어떠니?’ ‘세상에 그것밖에 안 먹다니 다음 접시를 가져와라’, ‘아니 그렇게 싹싹 비워 먹다니 맛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같은 것으로 더 가져와라’ 등등. 위장과 고막이 동시에 터질 것 같았다. 방으로 기어들어 가서 좀 쉬는 줄 알았더니 이번에는 얌전하게 품에 안겨 있어야 할 하녀가 어디서 무슨 헛바람이 들었는지 그의 귀에다 대고 앵앵대며 잔소리를 해 댄다. 아아 여자란 도대체 왜 이렇게 생겨 먹은 생물일까. 나는 도대체 왜 여자를 좋아하는 것인가.

16630319831202.jpg‘안 보면 되잖아.’

갑자기 천재적인 발상이 이폴리토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16630319831202.jpg‘맞다. 안 보면 돼.’

성적 취향을 바꾼다던가, 금욕 생활을 하자는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이폴리토는 그러기에는 너무 여자를 좋아했다.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으면 된다! 그러면 안 볼 수 있다. 이폴리토는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16630319831202.jpg“가자, 타란토로.”

16630319831228.jpg“네?”

옆에 있던 말레타가 어안이 벙벙해서 반문했다. 이폴리토는 기분이 좋아진 나머지 진지하게 지킬 생각까지는 없었던 공수표를 남발해댔다.

16630319831202.jpg“내 너를 데리고 타란토로 가 주마. 거기에는 지금 온 궁정이 내려가 있고 이 이폴리토 도련님의 친구들이 잔뜩 있지.”

16630319831228.jpg“와아, 정말요?”

16630319850586.jpg

  이폴리토 도련님이 루크레치아 마님의 박해를 피해 자기를 데리고 도망치려고 타란토 행을 택했다고 착각한 말레타는, 조그만 두 검은 눈을 반짝이면서 이폴리토를 영웅처럼 올려다보았다.

16630319831202.jpg“겨울 사교계는 정식 사교계는 아니지만 충분히 파티가 많다. 내 너를 데려가 주지!”

16630319831228.jpg“이폴리토 도련님! 저 너무 좋아서 쓰러질 거 같아요!”

세상에, 파티라니! 사교계라니! 랑부예 구휼원 국에서 쓰레기 건더기를 건져 먹던 말레타가 겨울 궁정의 사교계라니! 말레타는 얼굴이 발개진 채로 이폴리토에게 자기가 먼저 몸을 던졌다.

16630319831228.jpg“너무 좋아요! 도련님이 최고예요!”

말레타의 키스 세례에 정신이 혼미해진 이폴리토는 체중을 실은 말레타를 껴안은 채 침대로 벌러덩 뒤로 넘어갔다. 세상에, 이렇게 적극적인 여자는 처음이야. 역시 귀족 처녀가 아니라 하녀라서 그런가?

16630319831202.jpg“말레타, 말레타, 살살!”

16630319831228.jpg“아잉, 도련님!”

말레타의 정신없는 키스 세례에 이폴리토는 지키기 어려운 허망한 약속 몇 가지를 더해 버렸고, 원래 어머니와 말레타 둘 모두로부터 도망가고자 했던 타란토 행은 어머니로부터만 도망가는 여행으로 변모해 버렸다. 이폴리토의 머릿속에 ‘네 어머니를 네가 책임지고 챙길 것’ 같은 데 마레 추기경의 당부 따위는 흔적조차도 남아 있지 않았다. * * *

16630319831197.jpg“뭐? 타란토로 떠난다고?”

루크레치아는 이폴리토의 선언을 듣고는, 남편에게 배신당한 아내처럼 다리를 바들바들 떨다가 뒤에 있는 푹신한 소파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폴리토는 달변으로 어머니를 녹였다.

16630319831202.jpg“아이, 엄마. 외가댁 식구들 못 본 지도 오래되지 않았습니까. 그, 왜, 자노비도 들여다봐야 되고요.”

아리아드네 때문에 데 마레 추기경의 손아귀에 걸려 팔다리의 힘줄이 모두 끊긴 루크레치아의 오촌 조카였다. 이폴리토는 그 이름을 떠올리는데 조금 오래 걸렸다.

16630319831202.jpg“아아, 불쌍한 자노비…….”

언제든지 루크레치아의 관심을 끄는 주제였다.

16630319831202.jpg“우리 집 식구들 중에 직접 들여다본 사람이 없지 않았습니까. 제가 가서 문병이라도 하고 올게요.”

16630319831197.jpg“그래, 가볼 필요가 있기는 하지…….”

16630319831202.jpg“그리고 엄마, 지금 산 카를로의 궁정은 전부 다 타란토로 내려가 있다고요. 제가 가서 응? 인맥도 좀 쌓고, 이후에 무슨 일을 할지 각도 좀 보고요. 아들이 큰일 하려면 큰 친구들이 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루크레치아는 아들의 미래 이야기에 몹시 약했다. 이폴리토가 용돈을 타내는 마법의 버튼이기도 했다. 이번에도 어김없었다.

16630319831197.jpg“우리 아들, 노잣돈은 넉넉히 있니?”

16630319831202.jpg“엄마, 안 그래도 좀 모자라긴 했는데……. 괜찮아요. 개인 마차를 안 타고 역전 마차에 합승해서 가면 돼요.”

루크레치아가 절대로 자신을 빈손으로 보내지 않을 것을 알고 있는 자식의 겸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루크레치아는 크게 놀라 손사래를 쳤다.

16630319831197.jpg“아이고, 안 된다! 합승 마차라니! 우리 아들한테 그런 고생을 어떻게 시켜!”

루크레치아는 남편에 의해 베르가모 농장으로 쫓겨가면서 지갑 사정에 크게 출혈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빈궁한 쌈짓돈에서 10 두카토(약 1000만 원)를 꺼내서 아들 손에 쥐여주었다. 아들은 모양 빠지게끔 어머니가 얼마를 건네주는지를 눈으로 확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손대중으로 두카토 금화의 무게를 가늠해 본 후 표정이 일그러졌다.

16630319831202.jpg“엄마, 이게 다예요?”

루크레치아는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였다.

16630319831197.jpg“그게, 엄마가 요새 좀 쪼들려서……. 네가 다녀올 때까지는 어떻게든 융통해 놓도록 하마.”

16630319831202.jpg“휴. 아니에요, 엄마. 어쩔 수 없지.”

이폴리토는 며칠 전 아버지와 그라파를 마시며 나눴던 독대에서 비상금 조로 금화를 넉넉하게 건네받은 차였다. 애당초 지금 용돈이 크게 모자란 상태가 아니었다. 괜히 돈이 모자란다는 소리를 했다가 ‘며칠 기다려라, 엄마가 가진 걸 돈으로 바꿔서 10 두카토 더 얹어 줄게’ 같은 소리가 나오면 큰일이다. 그는 어머니를 더 몰아붙이지 않은 채 두카토 금화를 호주머니에 집어넣고는 루크레치아의 양 볼에 키스를 했다.

16630319831202.jpg“엄마, 그럼 다녀올게요.”

현관문에는 이폴리토의 짐을 모두 싸서 양손에 가득 들고 있는 말레타가 기다리고 있었다. 외출용 털망토를 두르고 있는 말레타를 본 루크레치아의 눈이 대번에 샐쭉해졌다.

16630319831197.jpg“아니, 쟤도 데려가는 거냐?”

16630319831202.jpg“아유 엄마. 타지에서 아들 보살펴 줄 사람은 하나 있어야지.”

16630319831197.jpg“왜 하필 저 여우 같은 년이야!”

16630319831202.jpg“쟤가 일은 설렁설렁 잘해요.”

이폴리토는 말레타를 쳐다보며 한 마디 덧붙였다.

16630319831202.jpg“밥도 맛있게 하고.”

밥이라는 이야기에 루크레치아의 화가 좀 누그러졌다.

16630319831197.jpg“그래, 입맛에 맞는 음식은 중요하지. 타지 가서는 잘 챙겨 먹고 다녀야지.”

16630319831202.jpg“다녀와서 봬요!”

이폴리토는 마차에 타고 어머니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폴리토를 따라 마차에 탄 말레타는 고개를 수그리고 최대한 루크레치아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 이랴! 마부가 경쾌한 채찍질을 하자, 마차는 눈 쌓인 겨울 길을 또각또각 떠났다.

16630319831197.jpg‘어머, 데 로시 가에 보낼 편지와 선물을 좀 챙겨가 달라고 하는 걸 잊었네.’

이 시대에 안전한 장거리 우편이나 소포를 보낼 방법은 전혀 없다시피 했다. 그 때문에 장거리 여행을 가는 사람이 있으면 꼭 인편으로 편지 등을 부탁하고는 했다. 장거리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먼저 주변에 ‘가져다줄 물건 없느냐’고 물어보는 것이 예의였다.

16630319831197.jpg‘아유 참, 남자애들이란. 덤벙대서 까먹는다니까.’

아들이 데 로시 가에 바리바리 들고 갈 선물들이나 편지들이 거추장스러워서 일부러 어머니에게 미리 말하지 않고 당일 아침에 통보 후 서둘러 떠났다는 사실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루크레치아였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데 마레 추기경에게 ‘아들이 당신한테는 이야기조차도 없이 타란토로 떠났소’라고 말을 전달해야 하는 사람이 자기라는 사실 역시 그녀는 뒤늦게야 깨달았다.

16630319858652.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