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93화> 타란토의 겨울 사교계 (610/733)

<제93화> 타란토의 겨울 사교계2021.10.24.

남쪽 끝 타란토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열흘간 좌우 양옆으로 끊임없이 흔들리는 것은 객관적으로는 매우 고된 여행이었지만 말레타는 매 순간을 즐겼다. 구박할 루크레치아 마님도, 지적할 아리아드네 아가씨도 없는 이곳에서 말레타는 작은 여왕이었다. 말레타는 일단 도련님이 사 주셨던 장신구들을 모두 모아 주렁주렁 달았다. 그 아래에는 추기경 관저에서는 남의 눈이 무서워서 입지 못했던 뇌쇄적인 네글리제를 걸쳤다. 그 위에는 모피 한 겹만 걸쳤다. 말레타가 새로 꺼내 입은 네글리제는 이폴리토가 금방 찢어서 마차 바닥으로 밀어 던지고는 했다. 어차피 산 카를로에선 입을 수도 없는 옷이었다. 말레타는 네글리제며 가운을 하루에 두세 장씩 바꿔가며 입었다. 둘은 그러고도 남는 시간에는 대낮부터 술을 마셨고, 숙취가 심해지면 차가운 물을 마셨다. 아세레토에서 수입해 온, 라임을 탄 물이었다. 호화롭기 그지없었다. 좀 좁고, 흔들리고, 비위생적이라는 것만 빼면 이 마차 안은 타락한 자들의 천국이나 매한가지였다. 이폴리토는 기분에 취해 되는대로 지껄였다.

16630319895126.jpg“말레타, 타란토가 얼마나 아름다운 도시인 줄 아느냐?”

타란토는 한겨울에도 날씨가 온화한 백중해(白中海)에 면한 도시로, 소금기가 촘촘히 들어찬 따스한 공기가 황토색 벽돌 건물이 가득한 시가지를 꽉 채우고 있는, 에트루스칸 왕국이 자랑하는 최고의 미항(美港)이었다.

16630319895126.jpg“이 출중한 항구와 거기에 딸린 왕국, 온 타란토 지방의 영지까지, 모두 죽은 타란토 공작의 외동딸인 ‘타란토의 비앙카’ 것이지.”

16630319895136.jpg“아, 타란토의 비앙카 이야기는 저도 들어봤어요. 에트루스칸 왕국, 아니, 중앙 대륙 전체에서 제일가는 신붓감이라면서요?”

타란토의 비앙카는 타란토 공작의 무남독녀 외동딸로, 이미 양친이 모두 돌아가신 상태였다. 레오 3세가 그녀의 공식적인 후견인이었고 타란토를 다스리는 실무는 가신들이 나눠 담당하고 있었다. 그녀와 결혼하는 남자는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될 것이었다. 그녀가 물려받을 재산목록 중에는 에트루스칸 왕국 제2의 항구도시이자 각종 물류의 중심지인 타란토 시(市)가 있었다. 그 배후지는 에트루스칸 서남쪽을 대부분 차지하고 있는 비옥한 타란토 영지 전체였다. 비앙카의 상속분에는 타란토 영지 전체의 통치권과 징수권, 사병 양성 권한이 자연히 따라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친가 쪽으로 에트루스칸 왕국의 전전대 왕인 스테파노 1세의 후손으로, 레오 3세의 5촌 조카였다. 그 말인즉슨, 비앙카는 알폰소 왕자 바로 다음 순위의 왕위계승권자였다. 만에 하나 직계 왕족에게 무슨 변고가 생긴다면 그녀는 곧바로 에트루스칸의 여왕으로 즉위할 수도 있는 신분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아내를 위한 섭정공이 되리라.

16630319895136.jpg“설마, 도련님도 타란토의 비앙카에게 관심이 있으신 건 아니겠지요?”

말레타가 샐쭉한 표정을 짓고 이폴리토를 쳐다보았다. 이폴리토는 크게 손사래 질을 치며 부정했다.

16630319895126.jpg“아아니! 타란토의 비앙카가 나이가 몇인 줄 아느냐?”

16630319895136.jpg“몰라요?”

16630319895126.jpg“올해 열두 살이다, 열두 살!”

아라벨라보다 겨우 두 살 위였다. 제아무리 에트루스칸 왕국의 귀족 영애들이 10대 중후반에 결혼하는 경향이 있다지만 열두 살은 어려도 너무 어렸다.

16630319895126.jpg“그런 어린애를 어딜 봐서 여자로 보겠느냐! 여자라면 모름지기 너처럼, 응? 부들부들해야지.”

이폴리토는 말레타의 볼에 코를 묻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가 완숙한 연상의 여인을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16630319895126.jpg“음, 이 살 내음! 이래야 여자지!”

16630319895136.jpg“아이, 몰라요 도련님. 꺅!”

말레타는 퍽 만족스러운 듯이 그녀의 도련님에게 반항하는 시늉을 하다가 이내 도련님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이폴리토 도련님은 나에게 형편없이 반한 것이 틀림없어, 라고 말레타는 흡족하게 자평했다. * * * 타란토에 도착해서 최고급 호텔에 여장을 푼 이폴리토는 말레타의 진을 빼놓고는 바로 타란토에 흩어져 있는 그의 골칫덩이 친구들을 호출했다. 그중에는 체자레 데 코모 백작도 끼어 있었다.

16630319895126.jpg“체자레!”

16630319908031.jpg“이폴리토.”

만면에 웃음을 띠고 크게 팔을 벌리며 다가간 이폴리토를 체자레는 쓱 몸을 돌려 피했다. 그는 포옹 대신 간단하게 주먹을 쥔 채 앞으로 내밀었다. 체자레를 껴안으려다가 주먹 인사만 하게 된 이폴리토는 마치 원래 주먹 인사를 하려던 것처럼 재빠르게 태세를 전환하며 비굴하게 웃었다.

16630319895126.jpg“잘 지냈나, 친우!”

16630319908031.jpg“뭐, 그럭저럭.”

16630319895126.jpg“타란토는 어때?”

16630319908031.jpg“평소와 똑같지, 느리고, 조용하고, 복작복작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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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 안에는 오타비오 데 콘타리니를 위시한 그 무리들이 잔뜩 뭉쳐 있었다. 입에는 연초를 물고, 손에는 얼음을 탄 증류주 잔과 카드를 들고 아주 신나게 시간을 죽이는 중이었다. 이폴리토는 주변을 곁눈질하며 체자레에게 은근히 운을 띄워 보았다.

16630319895126.jpg“자네, 요새 타란토의 비앙카 이야기 좀 들은 것 있나? 겨울 사교계에 좀 나온다거나, 그런 거 말이야.”

체자레는 증류주가 아니라 포도주잔을 들고 있었는데, 그는 이폴리토에게는 일체의 관심을 주지 않고 그 포도주잔 안에 있는 적포도주의 색상을 음미하고 있었다. 최상등급의 포도주에서만 나오는, 그의 어머니인 루비나 백작 부인의 눈동자 색과 꼭 같은 짙은 적색이었다.

16630319895126.jpg“이봐, 체자레.”

이폴리토가 나름 뭉근하게 다시 운을 띄워 보았다. 체자레는 피식 웃었다. 이 위인의 속은 지나치게 얄팍했다.

16630319908031.jpg“친애하는 이폴리토. 내가 우리 귀한 공작 영애의 안부를 어찌 알겠나?”

징징대는 사람에게는 똑같은 약한 척으로 답해 주는 게 최고였다.

16630319908031.jpg“우리 귀하신 공작 영애께서는 올해에도 역시 대저택 문을 걸어 잠그시고는 아무와도 만나시지 않는다네. 아, 육촌 오빠인 알폰소 왕자 전하와는 종종 보시는 것 같다만. 나 같은 반쪽짜리 친척, 백작 나부랭이에게 주실 관심이 남아 있으실 리 없지 않은가.”

16630319895126.jpg“아……. 자네에게도?”

이폴리토는 실망한 어투를 숨기지 못했다. 체자레 데 코모는 이폴리토가 가지고 있는 왕가에 가장 가까운 끈이었다. 체자레조차도 타란토의 비앙카를 만날 수 없다면 그 역시도 비앙카를 만날 수 없었다. 체자레는 그린 듯한 이폴리토의 반응에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일부는 표정에서도 티가 난 것 같다. 그는 왼쪽 눈썹과 왼쪽 입꼬리를 올려 삐딱하게 웃으며 이폴리토에게 답했다.

16630319908031.jpg“그렇고말고. 내 타란토의 비앙카가 사교 모임에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자네에게 꼭 가장 먼저 이야기함세.”

16630319895126.jpg“역시, 내 친구지!”

체자레는 과하게 기뻐하는 이폴리토와 어울려 함께 웃어 주었다. 부자 여자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는 사내놈들의 꼬락서니는 생각보다도 더 추했고, 내심을 숨긴 팬서비스는 참 힘든 일이었다. 체자레는 그날 조찬을 타란토의 비앙카 및 나머지 왕궁 식구들과 함께하고 돌아온 참이었다.

16630319908031.jpg‘제아무리 타란토의 비앙카가 조실부모해서 만만해 보여도 그렇지.’

체자레는 이폴리토를 흘긋 훑었다.

16630319908031.jpg‘너 같은 놈에게 가당키나 하냐?’

그러고는 바보같이 웃고 있는 이폴리토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주며 함께 웃었다. * * * 무뢰배 같은 친구들이 타란토 겨울 궁전의 한 구획에 처박혀서 다 같이 카드 놀음을 하는 와중에, 반듯한 왕자님은 그의 정혼 상대가 될 여자와 함께 장미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16630319912124.jpg“왕자님, 한겨울인데도 붉은 장미가 너무나도 탐스러워요!”

16630319912129.jpg“아름답군요.”

  알폰소는 라리에사의 눈을 맞추고 성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 두근!  

16630319912124.jpg‘저 아름답다는 말은 나를 향한 것이었을까? 꽃을 향한 건 아니겠지? 내가 꽃 같아 보였나?’

알폰소와의 교류 없이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가는 예민한 대공녀의 촉에 무엇인가가 걸렸다.

16630319912124.jpg‘그런데 나에 대한 칭찬이라면, 왜 이렇게 짧아? 좀 성의가 없는 것 아니야?’

그녀는 알폰소 왕자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준다는 기분으로, 대화의 다음 미끼를 던져 보았다.  

16630319912124.jpg“어느 부분이 가장 아름다운가요?”

  코? 입술? 역시 반짝이는 두 눈?

16630319912129.jpg“……꽃송이의 크기와 모양?”

알폰소는 아무 생각 없이 장미 정원을 바라보고 있다가, 라리에사 대공녀의 질문에 퍼뜩 놀랐다. 그는 성심성의껏 대답하기 위해 그제야 가는 눈을 뜨고 붉은 장미를 유심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아무 감흥을 주지 못했던 붉은 장미를 바라보며 어느 부위가 가장 아름다운지 골똘히 생각하던 바람에, 알폰소 왕자는 무심결에 갈리코 어가 아니라 에트루스칸 어로 라리에사 대공녀에게 대답해 버렸다. 라리에사 대공녀의 표정에 대번에 언짢은 기색이 스쳤다.

16630319912124.jpg‘뭐야, 왜 이렇게 건성이야? 갈리코 어로 이야기할 생각도 안 들어? 성의가 없잖아!’

하지만 라리에사는 알폰소에게 나를 바라봐주지 않는 거냐고 감히 따질 배짱까지는 없었다. 그는 언니의 죽음 덕에 분수에 걸맞지 않게 약혼 상대로 굴러들어온 황금의 왕자님이다. 게다가, 엄밀히 따지자면 그녀는 아직 약혼녀조차도 아니었다. 갈리코 왕국과 에트루스칸 왕국은 입으로는 지금이라도 당장 약혼 문서에 사인을 할 것처럼 굴면서도 차일피일 서로 조건을 하나씩 더 내놓으며 교착 상태를 이어가고 있었다. 지금 패악을 부리면 국혼이 성사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일말의 위기감이 라리에사를 멈춰 세웠다.  

16630319912124.jpg“역시 왕자님의 안목은 대단하세요! 몽펠리에의 장미 온실은 주변국에까지 유명할 만큼 대단한데, 거기에 피어 있는 푸른 장미를 보여드리고 싶어요.”

  그녀는 최대한 알폰소의 비위를 맞추기로 했다. 그의 마음에 드는 것이 최우선이다. 그리고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해 그녀가 얼마나 대단한 뒷배를 가졌는지를 꽁지깃을 뽐내는 공작새처럼 휘둘렀다. 어려서부터 잘난 부분이라고는 없었던 라리에사는 관심을 받고 싶으면 집안의 후광이나 아름다운 언니의 애정을 자랑했다.  

16630319912124.jpg“몽펠리에에 한 번 방문해 주세요.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16630319912129.jpg“기회가 닿는다면, 그러겠습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필리프 4세의 누이인 오귀스트 공주가 그녀에게 했던 당부를 상기했다. 오귀스트 공주는 반드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알폰소 왕자를 몽펠리에로 데리고 와 달라고 라리에사 대공녀에게 부탁한 바 있었다. 오귀스트 공주는 콧대가 높았다. 나이도 어리고 신분도 낮은 먼 친척 여동생에게 부탁 따위는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라리에사는 오귀스트 공주의 청을 꼭 들어주고 싶었다. 공주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반, 잘난 척을 해 보고 싶은 마음이 반이다. 라리에사는 알폰소 왕자와 애써 눈을 맞추며 그녀가 제일 착해 보이는 미소를 지어냈다. 그녀는 ‘갈리코의 대공녀, 필리프 4세의 양녀 라리에사 드 발로아’가 얼마나 훌륭한 여성인지, 얼마나 훌륭한 혼처인지 그에게 보여줄 작정이었다. 그녀는 알폰소 왕자가 만날 수 있는 가장 강한 나라의 레이디이다. 동시에 성격도 사근사근하고 상냥하며 인기도 많다. 그녀는 이 사실을 알폰소 왕자에게 빨리 각인을 시키기로 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수단은 수도 없이 많았다. * * * 라리에사 대공녀의 강권으로, 그녀와 알폰소 왕자는 짧은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알폰소 왕자님께, 너무나도 아름다운 아침이에요. 애정과 헌신을 담아, 라리에사.」 알폰소 왕자는 정중하고 예법에 어긋나지 않는 답장을 보내왔다. 「좋은 오전입니다, 발로아 대공녀. 오늘 오후에는 일전에 가고 싶어 하셨던 타란토 시내 구경 일정을 잡아 놓았습니다. 오찬을 드셨을 시간 이후로 에스코트하러 가겠습니다. - 알폰소 왕자 드림.」 편지를 받아본 라리에사는 편지를 거칠게 소파 위로 던졌다. 맞은 편에 앉아 있던 르비엥 백작이 깜짝 놀라 그녀를 쳐다보았다. 르비엥 백작은 갈리코 왕국 측의 사절단 중 실무진의 총 책임자를 맡은 자였는데, 라리에사의 아버지인 외드 대공의 왼팔 같은 측근이었다. 그는 라리에사 대공녀의 샤프롱 역할도 겸하고 있었다. 본국에서 라리에사 대공녀에게 오는 지령 등을 챙겨주기 위해 자연스럽게 그녀와 자주 만나야 했기 때문이다.  

16630319912124.jpg“르비엥 백작, 이 편지 좀 보세요! 화가 나요!”

16630319916362.jpg“예?”

  그는 깜짝 놀라 편지를 건네받았다. 허울뿐인 샤프롱 역할이라고 가볍게 생각했지만 르비앵 백작은 요사이 이 업무가 실무협상보다 더 부담스럽다고 느끼고 있었다. 라리에사 대공녀는 정말, 매우, 몹시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알폰소 왕자가 라리에사 대공녀에게 무례하게 굴었다면 이는 외교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아니, 갈리코 왕국은 이를 반드시 외교 문제로 만들 것이었다. 르비엥 백작은 놀라서 얼른 편지를 일독했다. 그리고 그는 가는 눈으로 편지를 한 번 더 읽은 뒤에, 그는 자기가 읽은 부분 외에 라리에사 대공녀의 심기를 거스른 다른 내용이 있나 싶어 편지를 뒤집어 보기까지 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16630319916362.jpg“대공녀님, 제가 놓친 부분이 혹시 있는지요? 혹시 알폰소 왕자님께서 제가 모르는 사이에 결례를 범해 대공녀님을 불편하게 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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