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1화> 악당의 귀환2021.11.21.
- 덜컹! 휴게실의 꽉 닫힌 떡갈나무 문짝 너머로,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사람들이 들어오는 소리였다. 아리아드네와 알폰소는 화들짝 놀라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거기, 누구 없느냐?”
소란스럽게 구는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는 점점 더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어서 나가봐야겠다. 너는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아리아드네의 말에, 알폰소도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가 산 카를로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상당한 파문이 일 것이 틀림없었다. 왕자가 산 카를로에서 발견된 곳이 데 마레 추기경의 자택이면 더더욱 그랬다.
“설마 바로 타란토로 돌아가는 건 아니지?”
왕자는 삼일 밤낮을 말을 달려 산 카를로로 올라온 차였다. 아리아드네는 알폰소가 곧바로 다시 먼 길을 떠나는 것이 못내 걱정이 되어 애틋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알폰소는 웃으며 아리아드네를 안심시켰다.
“걱정 마. 팔라지오 카를로의 내 궁으로 가서 한두 가지 일 처리를 하고 돌아갈 거야. ……그렇지만 늦어도 내일 아침에는 산 카를로에서 출발해야 하긴 해.”
그는 아쉬움에 아리아드네를 한번 꽉 품 안에 안았다가 마지못해 놓아주었다.
“아리, 일단 3월 말에 ‘봄의 축제’를 치르기 위해 궁정 전체가 산 카를로로 돌아오기 전에는 다시 만나기 힘들 거야. 그동안 얌전히 잘 기다릴 수 있지?”
아리아드네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삶은 그저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 오랜 세월도 버텼는데 한두 달쯤이야. 희망이 있는 한 그 어떤 상황에서도 버틸 수 있었다.
“밥 잘 먹고.”
그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다녀와서 검사할 거야.”
아리아드네는 알폰소를 째려보았다.
“어떻게 검사할 건데?”
삐죽 내민 입술로 알폰소를 노려본 그녀는 추궁을 이어나갔다.
“설마 검사 방법으로 야한 생각 하는 건 아니지?”
“아냐! 날 뭐로 보고!”
알폰소는 거세게 부인했지만, 뒤늦게 얼굴이 약간 발개진 것이 영 결백하지만은 않아 보였다. 아리아드네가 조금 웃으려던 찰나 대회랑 쪽에서 다시 ‘쿵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얼굴을 굳혔다.
“알폰소, 이쪽으로.”
아리아드네는 겨울 후드를 눌러 쓴 알폰소의 소매를 잡아끌어 주방으로 연결된 뒷문으로 나갔다. 그녀는 다람쥐처럼 잽싸게 주방 뒤에 붙어 있는 창고들 중 하나로 알폰소를 인도하더니 걸치고 있던 망토 주머니에서 큰 열쇠 꾸러미를 꺼냈다. 안주인의 열쇠였다. 아리아드네는 안주인의 열쇠로 창고에 붙어 있는, 외부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여기로 나가면 후원이야. 보이는 담장을 따라 나가다 보면 쪽문이 나올 텐데 지금 시간에는 항상 잠금장치를 풀어놔.”
여기까지 이야기한 아리아드네는 잠시 멈춰서 고민했다. 해가 뜨고 지는 것을 제외한다면 세상에 ‘항상’ 변동 없이 일어나는 일이 그저 어디 있겠는가.
“아니다. 이거 가져가.”
그녀는 열쇠 꾸러미에서 중간 사이즈의 열쇠를 하나 찾아서 꾸러미에서 빼낸 다음 알폰소에게 건넸다.
“잠겨 있으면 이걸로 열고 가. 난 여유분이 있으니까 네가 가져가도 돼.”
아리아드네는 창고 문을 열고 알폰소를 재촉했다.
“자, 얼른.”
알폰소는 고개를 돌려, 못내 아쉽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훅 다가와 그녀의 입술에 마지막 입맞춤을 했다. 짧지만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키스였다. 그는 입을 맞추고는 바로 창고를 떠났다. 아리아드네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자신의 입술을 만졌다. - 벌컥! 대회랑에 딸린 휴게실의 문을 열어젖히는 소리가 났다. 아리아드네는 이폴리토가 돌아온 것이 아닐까 생각하며 서둘러 손님맞이를 위해 대회랑으로 나갔다. 하지만 대회랑에 서 있는 것은 처음 보는 중년 남자였다.
“대저 누구신…….”
“내 조카의 마지막을 보러 왔는데 내가 내 이름까지 대야 해? 아가씨는 누구야? 루크레치아는 어디 있나?”
로시 가문의 사람이 틀림없었다. 하는 말의 내용도 내용이었지만 무식하고 거만한 태도가 딱 자노비와 루크레치아를 닮았다. 아리아드네는 자기소개를 했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 이름을 가급적이면 밝히고 싶지 않았지만 상주로서 손님을 맞는 와중이니 정체를 숨길 도리가 없었다.
“데 마레 추기경 예하의 둘째 여식인 아리아드네 데 마레입니다. 어머님께서는 지금 몸이 좋지 않아 쉬고 계세요. 손님이 오셨다고 알려드릴까요?”
“아아, 너냐?”
중년 남자는 아리아드네의 자기소개를 듣더니 데 마레 추기경의 딸에게 말을 높이거나 태도를 고치기는커녕 몹시 호전적인 태도로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루크레치아가 집에 보내는 편지에 아리아드네에 대해 뭐라고 썼는지 안 봐도 알법했다. 그러나 중년 남자가 아리아드네에게 화가 난 것은 그 이유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네가 우리 불쌍한 자노비에게 누명을 씌운 막돼먹은 계집애로구나! 가치 없는 업둥이 주제에! 난 자노비의 애비인 스테파노다!”
아리아드네는 짜증이 치밀어올랐고 할 말도 많았지만, 스테파노 데 로시에게는 천만다행으로 오늘의 그녀는 여러 가지 이유로 평소보다 너그러웠다. 무엇보다, 아리아드네는 아라벨라의 마지막 가는 길에서 큰소리를 내며 싸우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목소리를 높여 하인을 불렀다.
“거기 누구 없느냐!”
홀 너머에서 원래 손님을 접대했어야 했을 일 도메스티코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어디서 농땡이를 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소란이 일자 그의 뒤를 따라서 마부, 아니 이제는 저택 경비책임자인 주세페도 달려왔다.
“손님을 1층 응접실로 모시고, 루크레치아 마님께 오라버니분이 오셨다고 기별을 넣어라.”
“예, 아가씨.”
일 도메스티코는 스테파노를 안으로 안내하려고 했지만, 스테파노는 자리에 버티고 서서 아리아드네에게 소리를 질렀다.
“너, 네가 앞길이 창창했던 내 아들을 망쳤어! 우리 애는 그럴 애가 아니야! ”
싸우고 싶지 않았던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돌리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그는 숫제 고성을 질렀다.
“너 지금 나 무시하는 거야? 고고하신 데 마레는 처갓집 어른 따위는 대접 안 하겠다는 거냐?”
“‘외삼촌.’”
외삼촌 소리에 스테파노 데 로시의 표정이 약간 펴졌다. 이거, 나를 웃어른으로 인정하긴 하는 건가?
“고인의 영면을 비는 자리입니다. 오늘은 다른 이야기보다는 불쌍한 아라벨라가 영혼만은 편안할 수 있도록 안식을 빌어 주세요.”
아리아드네가 표한 타협의 제스처에도 불구하고 스테파노 데 로시는 자노비의 아버지답게 끝 간 데 모르고 더더욱 바랬다. 고분고분하지 못한 태도가 거슬렸던 것이다.
“너 지금 친척 어르신한테 훈계하는 거야? 이 집은 가정교육이 뭐 이따위야! 안 되겠다, 당장 몽둥이를 가져와라. 오늘 네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고 자노비의 억울한 누명도 값을 받아내고야 말겠다!”
몽둥이를 가져오라고 날뛰는 스테파노를 주세페와 일 도메스티코가 어이없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일단 스테파노는 집안의 친척이었다. 아리아드네의 명령 없이는 스테파노를 이 두 사람이 건드릴 수가 없었다. 그런 스테파노를 아리아드네는 차갑게 바라보았다.
“‘외삼촌’, 그 일은 다른 분도 아니고 영명하신 국왕, 레오 3세 폐하께서 직접 자노비 데 로시가 사촌 누이인 저를 공격한 것이라고 사실관계를 확정하신 일입니다.”
그녀는 반쯤은 진심으로 이야기했다.
“‘외삼촌’을 위해 말씀드리는 건데, 다른 데서 자노비가 누명을 쓴 거라고 떠들고 다니시면 국왕 모독죄로 끌려가실 수 있으니, 부디 그런 말씀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이 썩을 년이……!”
그러나 아리아드네의 진심은 그녀보다 연배가 위이지만 지위는 낮은 남자들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스테파노는 대로하여 아리아드네를 위협하려 성큼성큼 다가왔다. 하지만 건장한 덩치의 주세페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러시면 재미없습니다.”
그는 위협적인 말투로 스테파노에게 경고했다.
“손님 대접받고 싶으시면 손님답게 구시죠.”
20대 청년 앞에서 힘으로 막힌 그는 수치심에 얼굴이 시뻘게졌다. 하지만 아리아드네 앞에서 기세등등했던 것과 다르게 덩치 좋은 남자 앞에서 스테파노는 곧바로 수그러들었다.
“저분 응접실로 안내해 드려라.”
새끼 토끼처럼 양순해진 스테파노를 본 아리아드네는 혀를 차며 돌아서서 저 로시 집안의 화상을 두고 나왔다. 그녀는 조만간 루크레치아를 쳐낼 예정이었다. 루크레치아만 없어지면 더 이상 데 로시 가문의 친척들이 데 마레 대저택에서 활개 치는 꼴은 보지 않아도 되리라. * * * 로시 가문의 일원은 아니었지만 로시의 피를 짙게 이은 또 하나의 화상은 진짜 로시보다도 늦게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바로 이폴리토였다. 상주 노릇을 해야 했을 이폴리토는 13일 늦은 오후, 즉 발인과 추도 미사 바로 전날이 되어서야 데 마레 대저택에 당도했다. 손님만도 못했다. 심지어 이폴리토의 귀환을 알린 것은 그의 애인이었다.
“거기 아무도 없어요?”
말레타는 검은 ‘상복’을 차려입고 의기양양하게 집 현관문을 떨치고 들어왔다. 그녀가 걸친 두꺼운 공단의 겨울용 드레스는 색깔은 까맸으나 색상 외의 다른 모든 부분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애도를 표하는 상복으로 입기에 부적절했다. 눈이 부시게 광택이 나는 검은 드레스는 지나치게 호화로웠고, 말도 안 되게 낮은 목둘레선은 검은 망사로 눈 가리고 아웅 하듯이 가려놓았을 뿐이었다. 게다가 말레타는 그 위에 2 피에디(약 86cm)는 족히 되어 보이는 진주 목걸이마저 둘둘 감고 있었다. 오후에 1층에 나와 있던 모든 식구들의 시선이 한순간에 말레타에게로 쏠렸다.
“어머니! 제가 왔습니다!”
그 뒤로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폴리토가 검은색인지 짙은 자주색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겉옷 위로 사치스러운 흰 사향뒤쥐 모피를 두르고 따라 들어왔다. 아들이라면 뭐든지 다 오냐오냐해주는 루크레치아조차도 인상을 찌푸릴 정도의 등장이었다. 루크레치아가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며 아들을 꾸짖었다.
“넌 정신이 있어, 없어! 옷차림이 그게 뭐냐, 그 흰 털가죽부터 벗어!”
다행히도 이 순간 1층 대회랑을 지키고 있던 사람은 루크레치아와 스테파노가 전부였다. 하인들은 모두 교대할 타이밍이었고, 데 마레 추기경은 두통이 있다며 방으로 쉬러 올라갔으며, 아리아드네는 내일 있을 추도 미사 후 일가친척들이 집에서 먹을 점심 만찬을 준비하러 나간 덕이었다. 루크레치아는 연달아 아들을 혼냈다.
“동생이 죽었다는데 만사 제쳐놓고 빨리 올라와야 할 것 아니냐! 네가 그러고도 이 집 장손이고 손위 형제야?”
스테파노가 옆에서 혀를 끌끌 차며 루크레치아에게 핀잔을 주었다.
“루크레치아. 너 자식 농사를 영 망쳤구나. 애들이 우애가 안 좋아. ―가 달라서 그런가?”
루크레치아의 얼굴이 시뻘게지며 구두 굽으로 스테파노의 오금을 찼다.
“아야!”
그는 여동생에게 얻어맞자 성을 냈다.
“내가 없는 말 했어?”
- “닥쳐!”
루크레치아는 주변 눈치를 살폈지만 다행히 이폴리토와 말레타 커플은 추운 바깥에서 실내로 들어와서 겉옷을 벗느라 그 말을 못 들은 듯했다. 이폴리토는 자신의 시중을 들어줄 사람이 재깍재깍 나타나지 않자 시원스럽게 짜증을 부리는 중이었다.
“일 도메스티코는 어디 있어! 니콜로! 니콜로!”
말레타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제일 먼저 마주친 사람이 자신의 천적인 루크레치아 마님인 것을 보고 놀라서 눈치를 보며 이폴리토 뒤로 슬슬 숨은 상태였다. 루크레치아는 저 둘이 정신없는 틈을 타서 이를 악물고 자신의 둘째 오빠에게 내뱉었다.
- “오빠. 여기 있는 동안 아가리 단속 제대로 해. 로시들이 누구 덕에 먹고 사는지 몰라? 다 죽일 셈이야?”
“요새 돈도 제대로 안 나오는 주머니지 않니.”
- “목소리 낮춰!”
루크레치아는 아들과 그 옆의 꼴 보기 싫은 하녀를 곁눈으로 살피며 자기 오빠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 “허튼소리하고 다니면 죽여버릴 거야.”
스테파노는 루크레치아의 기색이 심상치 않자 두 손을 들어 올려 항복 표시를 해 보였다. 루크레치아는 이쯤 되자 일이 일단락되었다고 여기고 아들을 재촉했다.
“너, 얼른 올라가서 옷부터 갈아입어! 갈아입고 나면 아버지께 돌아왔다고 당장 인사부터 드리고!”
“예, 예, 알았어요 엄마. 오랜만에 본 아들 반갑지도 않아요?”
투덜대며 이 층으로 올라가는 이폴리토를 보며 루크레치아는 안심했다. 별말이 없는 것을 보니 저 둘은 아무것도 못 들은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루크레치아의 믿음과 다르게, 말레타는 고개를 숙이며 이폴리토를 따라가면서도 고민에 빠져 있는 상태였다.
‘―가 뭐지?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