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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9화> 꼬리를 밟히다 (626/733)

<제109화> 꼬리를 밟히다2021.12.19.

산차는 랑부예 구휼원을 떠나는 아리아드네 옆에 바싹 붙어서 따라 나왔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다급하게 물었다. 눈을 크게 뜬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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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30321400502.jpg“아가씨, 정말로 말레타를 이폴리토 도련님의 정부인으로 만들어 주실 생각이세요?!”

아리아드네는 가볍게 웃었다.

16630321400507.jpg“내가 무슨 국왕 폐하도 아니고. 남자와 남자 부모가 모두 싫어하는 혼사를 무슨 수로 성사시키겠느냐?”

16630321400502.jpg“그렇지만 약속하셨잖아요…….”

16630321400507.jpg“내가 한 약속은 결혼시켜 주겠다는 약속이 아니야.”

아리아드네는 말레타에게 ‘집안에 네 자리를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정실부인이 될 것이라는 약속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 ‘자리’란 정부의 자리일 수도, 시골에 쫓겨가서 사생아를 키우는 잊힌 애인의 자리일 수도 있다. 아리아드네의 설명을 들은 산차는 입을 쩍 벌렸다.

16630321400502.jpg“일이 아주 잘 돼서 말레타를 애첩으로 들여앉혀 주게 되더라도 말레타는 노발대발하겠는걸요.”

16630321400507.jpg“자기가 노발대발해서 뭐 어쩌겠니? 계약을 위반했다고 나를 왕실에 고발이라도 하겠어?”

여기서 산차는 하나의 의문을 제시했다. 기왕 양아치 짓을 할 거, 끝까지 효율만 추구하면 어떻겠느냐 하는 질문이었다.

16630321400502.jpg“말레타가 약속을 지키라고 강제할 방법이 없다면 우리는 그냥 데 마레 추기경 예하께 결혼시키자고 말씀조차 드릴 필요도 없는 것 아닌가요? 증언은 고맙고, 넌 나가. 이래도 되잖아요!”

16630321400507.jpg“증언이 먼저고 자리 마련이 나중이니 그래도 되기는 되지.”

아리아드네는 빙긋 웃었다. 그 웃음에는 약간의 씁쓸함이 배어 있었다.

16630321400507.jpg“그렇지만 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구나.”

자기의 모든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버린 사람. 체자레 데 코모. 편한 대로 살다가는 인간이 아니게 된다.

16630321400507.jpg“약속했으니 아버지께 말씀은 드릴 거야. 하지만 아버지께서 받아들이실 것 같지는 않구나.”

16630321400502.jpg“그럼 말레타는 이폴리토 도련님의 첩이 되려나요?”

16630321400507.jpg“이폴리토가 한번 단물 빼 먹은 여자를 다시 곁에 두려고 할까? 내 생각엔 말레타는 잘 풀리면 베르가모 농장으로 내려가 거기에서 조용히 사생아를 키우며 살게 되지 않을까.”

아리아드네와 산차는 마차를 타고 조용히 데 마레 저택으로 귀가했다.

16630321400507.jpg“이런 추문은 수도에 사람이 많을 때 터트려야 제격이지.”

16630321400502.jpg“아무리 숨겨도 새어나갈 수밖에 없을 텐데……. 소문 도는 속도가 엄청나겠네요.”

16630321400507.jpg“맞아. 왕궁이 타란토에서 산 카를로로 복귀할 때 즈음에 아버지와 한 번 자리를 마련해 보자꾸나.”

  * * * 말레타와 산차는 같은 피를 이었다. 둘은 자매면서도 성격이 매우 달랐지만 하나의 공통점은 있었다. 몹시 진취적인 편이라는 점이다. 그들의 부모는 대기근이 들어 굶어 죽게 생기자 그 누구보다도 먼저 고향을 버리고 떨쳐 일어나 수도로 상경했다. 가만히 앉아서 최후를 기다리느니 뭐라도 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 모험의 결과는 좋지는 못했지만 그 모험심은 딸들이 이었다. 다만 산차에게는 모험심과 함께 인내력이 내려왔다. 말레타가 받은 건 모험심뿐이었다.

16630321404668.jpg“왜 연락이 없지?!”

아리아드네가 돌아간 지 3일째 되는 날부터 말레타는 조급증에 뒤집어지기 시작했다.

16630321404668.jpg“이폴리토 도련님이 날 잊으시기 전에 돌아가야 하는데!”

말레타의 머릿속은 아직까지도 꽃밭이었다. 그녀는 이폴리토가 자기를 팽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루크레치아 마님의 심술 때문이려니, 이폴리토 도련님은 자기를 기다리고 있으려니 믿었다. 하지만 이폴리토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한 말레타도 한 가지는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폴리토는 말레타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는 몹시 싫증을 잘 내는 위인이며, 말레타가 눈앞에서 오래 안 보이면 정말로 그녀에 대한 모든 흥미를 잃어버릴 것이다.

16630321404668.jpg“이대로 여기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어.”

말레타는 이를 악물었다. 데 마레 저택에서 쫓겨나면서 정말 아무것도 못 가지고 나왔다. 입고 있던 옷이 전부였다. 어차피 이 상태로는 오래 버틸 수 없다.

16630321404668.jpg“뭐라도 해야 해.”

아리아드네 아가씨는 대답은 날름 잘 해줬지만 행동이 없었다. 도대체 자기를 언제 부르겠다는 말인가! 게다가 집안에는 루크레치아 마님이 버티고 있으니 아리아드네 아가씨에게 다시 연락할 방도도 없었다.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면 차라리 이폴리토 도련님을 만나 애원을 해봤겠지.

16630321404668.jpg“……추기경 예하를 만나 뵙자.”

데 마레 추기경은 산 에르콜레 대성황당을 책임지고 있는 성직자였다. 성직자는—실질은 어떻든지 간에—백성의 영혼을 계도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가난한 자와도 이론상으로는 접견해야 한다. 게다가 최소한 매일 산 에르콜레 대성황당으로 출퇴근을 하지 않는가. 알현 요청이 거절당하거나 기약 없이 미뤄지더라도 출퇴근 길에 서서 마차 앞에 몸이라도 내던지면 만날 수 있다.

16630321404668.jpg“가자.”

말레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말이 나온 김에 오늘 당장 출발할 작정이었다. 산 에르콜레 대성황당은 어차피 걸어서 반 시간 정도 거리에 있었다. 말레타는 랑부예 구휼원에서 내어준 망토를 뒤집어썼다. * * *

16630321408893.jpg“마님! 마님!”

루크레치아는 자기 방으로 뛰어들어오는 로레타를 짜증스럽게 노려보았다.

16630321408897.jpg“무슨 일이길래 그렇게 호들갑이야. 시끄러워. 머리가 울린다고.”

16630321408893.jpg“그럴 때가 아닙니다 마님! 말레타를 봤다는 사람이 있어요!”

16630321408897.jpg“뭐?!”

루크레치아는 누워 있던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16630321408897.jpg“어디에서 봤대!”

16630321408893.jpg“산 에르콜레 대성황당에 나타났다고 합니다!”

16630321408897.jpg“뭣이!”

16630321408893.jpg“랑부예 구휼원의 인장이 찍힌 망토를 입고 돌아다니고 있었대요! 구휼원에 들어가 앉아 있었나 봐요!”

루크레치아의 눈이 커졌다. 세상에, 그 맹랑한 하녀 년이 이폴리토가 남의 씨라는 사실을 제 남편에게 고하려고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세상에나, 나랑 무슨 원수를 져서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16630321408897.jpg“막아야 해.”

죽여 없애야 한다. 저 고약한 하녀의 입을 막을 방법은 그것뿐이다. 루크레치아는 일어서서 정신없이 방안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16630321408897.jpg‘집사 니콜로가 나를 도와줄까?’

루크레치아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집사 니콜로는 기본적으로 데 마레 추기경의 사람이었다. 루크레치아가 실권을 짱짱하게 잡고 있던 시절에도 선을 넘는 요구는 들어주지 않았다. 루크레치아가 나쁜 짓을 할 때 쓰던, 로시 가에서 데려온 남자 하인들은 아리아드네 계집애가 실권을 잡자마자 귀신같이 다 내보내 버렸다.

16630321408897.jpg‘황금이라도 있었더라면……!’

집사 니콜로가 제아무리 선을 지킨다고 하더라도 단위가 백 두카토(억대)라면 거절하기엔 너무 많은 돈이 된다. 하지만 루크레치아의 재정상태는 지금 말이 아니었다. 얼마 전, 이사벨라의 핑크 사파이어 티아라를 전당포에 가져다 맡겼지만 70 두카토를 받는 데에 그쳤다. 지금 당장 백 두카토 대의 큰돈을 융통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16630321408897.jpg“이폴리토, 이폴리토를 불러와라!”

장남 좋다는 게 뭔가. 루크레치아는 혼자 고민하기보다는 아들을 데려와서 함께 고민하기로 했다. 로레타가 헐레벌떡 뛰어가 급하게 모셔온 이폴리토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16630321412993.jpg“엄마, 무슨 일이에요.”

루크레치아는 로레타를 물리자마자 이폴리토에게 부르짖었다.

16630321408897.jpg“말레타 그 계집애가 우리를 다 죽이려고 해!”

16630321412993.jpg“뭐라고요?”

16630321408897.jpg“산 에르콜레 대성황당에 얼씬거리는 게 보였단다! 네 출생의 비밀을 네 아버지에게 이르려는 게 틀림없어!”

엄밀히 말하면 이폴리토의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루크레치아는 이쯤 되니 그런 것쯤은 아무래도 좋았다.

16630321408897.jpg“네 아버지 귀에 들어가면 너도 나도 파멸이야!”

이폴리토는 그제야 현실감이 드는 것 같았다. 사실 그도 스테파노 삼촌이 실언한 것을 들었을 때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아라벨라의 아버지가 다른 게 틀림없다고 몰아갔을 뿐이다. ‘스테파노 삼촌이 돌아가기 전에 확실하게 물어보기라도 할걸’이라는 후회도 조금 했지만 지금 루크레치아의 쐐기를 박는 말을 들으니 안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싫은 소리 들을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영원히 어머니의 치마폭에 숨어서 모르는 척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슬슬 한계가 다가오고 있었다.

16630321412993.jpg“……엄마, 그게 들키면 난 어떻게 돼요?”

16630321408897.jpg“네 아버지 속을 누가 알겠니! 과연 그 양반이 키운 정으로 널 받아들여 줄까?”

루크레치아는 그 말을 뱉고는 이폴리토를 바라보았다. 이폴리토도 자기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모자가 눈빛 교환을 마쳤다.

16630321408897.jpg‘어림 반푼어치도 없지.’

시몬 데 마레는 어떤 면에서는 아주 여린 사람이었다. 하지만 ‘데 마레 가문’을 창시하는 것은 데 마레 추기경의 아주 오랜 꿈이었다. 그 꿈을 처음부터 함께해왔다고 생각했던 여자가 그 꿈의 최초부터 뻐꾸기 알을 둥지 속에 가지고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그 뻐꾸기 알에 대한 취급도 비슷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16630321408897.jpg“말레타 저것을 잡아 죽여야 해. 이폴리토, 너 방법이 있니?”

16630321412993.jpg“엄마가 부리시던 하인들 있잖아요.”

16630321408897.jpg“아리아드네 계집애가 모두 내쫓았어!”

루크레치아는 분통을 터트렸다.

16630321408897.jpg“니콜로도 못 쓴다. 니콜로를 부릴 만큼 돈이 없어.”

이폴리토 역시 흥청망청 놀아 젖힌 터라 당장 가용할 수 있는 목돈이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뒷골목 친구들이 있었다. 돈을 물 쓰듯 쓰다가 생긴 유일한 소득이었다.

16630321412993.jpg“엄마. 부랑자들은 어때?”

16630321408897.jpg“부랑자?”

16630321412993.jpg“유학할 때 만난 친구들 중에 담배 유통하던 애들 있잖아.”

16630321408897.jpg“너 그런 친구들이 있었어?!”

루크레치아가 깜짝 놀라 아들을 노려보았다. 열심히 공부하라고 보내놨더니 원!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16630321408897.jpg“계속 말해봐.”

16630321412993.jpg“걔들은 어깨랑 같이 일한단 말이에요. 수도 부랑자들이랑 안면이 있어. 부랑자들은 몇십 두카토 수준 푼돈만 줘도 사람 한둘 정도는 처리해 줘요.”

16630321408897.jpg“이 얘기를 왜 진작에 안 했어!”

내가 수도 부랑자랑 아는 사이라고 하면 엄마가 퍽이나 좋아했겠다, 라고 생각하며 이폴리토는 어머니를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16630321412993.jpg“부랑자들이 일 처리를 좀 대충대충 하기는 하는데. 말레타면 부모도 없겠다, 걔 죽은 다음에 조사하겠다고 날뛸 사람도 없잖아요. 대충 죽여서 티베리 강에 던져 버리면 될 듯요.”

16630321408897.jpg“그래, 그렇게 하자!”

16630321412993.jpg“말레타 계집애는 어디에 있대요?”

16630321408897.jpg“랑부예 구휼원에 있는 것 같다.”

16630321412993.jpg“그럼 지금 당장 애들 보내 놓을게요.”

  * * * 이폴리토는 담배 밀수를 하는 친구에게 부탁해 부랑자들과 접촉했다. - 붉은 머리의, 평민치고는 고급스러운 옷차림의 퉁퉁한 여자를 죽여 티베리 강에 던질 것. 루크레치아는 부랑자를 어떻게 믿냐며, 말레타가 죽었다는 증거를 자기 눈으로 반드시 봐야겠다고 주장했다. - 여자를 죽인 다음에는 머리를 잘라 상자에 담아서 캄포 데 스페지아 8번지에 있는 생선가게에 가져다 맡겨 주시오. 그 생선가게는 루크레치아의 단골 가게였다. 정확히는, 타란토에서 보내오는 절인 물고기의 출처를 세탁하는 가게였다. 말레타의 수급을 데 마레 저택으로 가지고 오라고 할 수는 없으니 생선가게에 맡겼다가 로레타를 시켜 몰래 들고 와서 확인할 요량이었다. 지시를 받은 부랑자들 한 무리가 품 안에 단도 하나씩을 숨긴 채 랑부예 구휼원 근처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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