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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화>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637/733)

<제120화>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2022.01.26.

편지는 정체를 밝히지 않은 전령이 정문 경비들에게 던지고 간 것이라고 했다. 하인도 발신인을 몰랐다. 이사벨라는 이제는 혼자 쓰게 된 소녀들의 응접실에 앉아 편지봉투를 북 뜯어보았다. - 팔랑. 그 안에서 나온 것은 편지지라기보다는 메모지에 가까운 쪽지 한 장이었다. 내용도 몹시 짧았다. 일부러 필체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왼손으로 삐뚤빼뚤하게 쓴 글씨였다.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이사벨라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16630322094022.jpg‘이쯤이면 발신인이 누구라고 종이가 소리를 지르는 수준인데.’

이사벨라는 답신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했지만, 이렇게 정직한 답변이 올 거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나 불안에 떠는 편지라니, 잭팟이다. 편지를 보낸 사람은 이제 이사벨라의 거미줄에 걸린 나비나 진배없었다. 그녀는 편지지를 들어 유쾌한 기분으로 답장을 써나갔다. 「애정하는 클레멘테 언니께, 이사벨라는 정말 원하는 것이 없답니다. 제 희생으로 언니가 행복하시다면 그걸로 됐어요. 그렇지만 요새 이사벨라가 조금 곤경에 처해 있기는 해요. 제 잘못이 아닌 일로, 요새 사교계에서 제 처지가 말이 아니랍니다. 그냥 저와 친구가 되어 주세요. 그 정도는 해주실 수 있잖아요. 조만간 오후의 홍차를 함께하면 어떨까요? 초대 주세요. - 이사벨라 데 마레 드림.」 이사벨라는 편지봉투를 밀봉해서 우편물 수발 하인에게 넘겨주었다.

16630322094022.jpg“바톨리니 백작가로 보내렴. 수신인은 바톨리니 백작 부인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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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산 카를로 사교계는 서로서로 왕궁 무도회의 파트너를 누구로 할지, 옆 사람은 어떤 사람과 파트너를 하는지 치열한 눈치싸움을 전개하는 중이었다. 무도회가 약 2주 남은 지금은 그간 이루어진 파트너십의 중간 평가 기간이었다.

16630322094043.jpg- “네? 체자레 백작이 데 마레 가문 차녀에게 거절당했다고요?”

16630322094043.jpg- “데 마레 영애는 체자레 백작을 거절하고 누구와 무도회에 참석한대요? ……설마, 알폰소 왕자님과 관련한 소문이 사실이었던 걸까요?”

16630322094043.jpg- “뭐 모르는 소리 하지 마세요. 알폰소 왕자님은 라리에사 대공녀님과 함께 참석하시잖아요. 왕궁에서 이미 식순 발표 때 공지했어요. 정식 공지예요.”

16630322094043.jpg- “아유, 그런 게 아니고. 줄리아 데 발데사르의 친오빠와 함께 참석한답니다.”

16630322094043.jpg- “아……. 발데사르 가에 장남이 있었지. 그런데 발데사르 소후작 때문에 체자레 백작을 거절해요? 그게 수지타산이 맞는 일인가?”

16630322094043.jpg- “왜요. 발데사르 후작가면 전통 명문이고, 작위 자체만 보면 백작가보다 더 높은걸요.”

16630322094043.jpg- “데 코모 백작가가 어디 그냥 백작가예요? 국왕 폐하께서 그렇게 싸고도시는데 조만간 뭐 하나 더 내려주시겠지요.”

열띤 의견교환 와중에도 발데사르 후작가의 인맥들이 여론의 향방을 거들었다.

16630322094043.jpg- “어휴. 여러분. 그런 거 아니에요. 줄리아 데 발데사르 양이 데 마레 양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오빠를 데리고 가라고 한 거랍니다.”

16630322094043.jpg- “저도 들었어요. 그 오빠가 사교계에 나오는 걸 쑥스러워해서 친구한테 부탁한 거지 별 관계는 아니래요.”

발데사르 후작가는 수도 귀족 중 레오 3세의 신임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축이었고, 그 덕에 우호적인 인물들 및 관련 있는 가문들이 발데사르 후작가를 위해 나서 주었다.

16630322094043.jpg- “그냥 줄리아 양과의 우정이랍니다. 경쟁 관계니 애정 관계니 뭐니 그렇게 몰아가지 마세요.”

아리아드네와 라파엘 데 발데사르가 아무 관계도 아니라고 적극적으로 항변하고 다닌 자 중 일부는 다른 속셈이 있었다. 다름 아닌 자기 자녀의 혼인 상대로 발데사르 후작가의 후계자를 노리던 가문들이었다.

16630322094043.jpg- ‘내 딸을 위해 침을 발라 놨는데, 어이없이 눈앞에서 뺏기면 안 되지!’

16630322094043.jpg- ‘다른 여자보다 차라리 데 마레 차녀랑 나타나는 게 낫긴 해. 누가 발데사르 후계자를 데려가도 배가 아플 바에야 만인의 연인 옆에 있는 게 낫지.’

16630322094043.jpg- ‘체자레 백작과 알폰소 왕자가 붙었는데 발데사르 소후작이 눈에 차겠어?’

무도회 날짜가 점차 다가오는 와중에 아리아드네 데 마레가 체자레 백작의 파트너 신청을 거절했다는 이야기는 단연코 장안에서 가장 뜨거운 화제였다. 이 이야기가 얼마나 파다했냐 하면, 이제는 사교계 소문들을 들을 창구가 거의 없게 된 이사벨라에게까지도 들어갔다.

16630322094022.jpg‘뭐? 아리아드네가 체자레 백작의 에스코트 신청을 거절했다고?’

이사벨라는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16630322094022.jpg‘아리아드네 이 배부른 년, 호강에 겨운 년, 나쁜 년!’

그녀의 눈에 형형한 분노의 불빛이 어렸다.

16630322094022.jpg‘왜 쟤한테는 모든 게 저렇게 다 쉬운 거야?’

정말, 세상은 불공평했다. 이사벨라는 미모, 재능, 사교성, 전부 다 있었지만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냉정하고 못생긴 여동생보다 후순위로 밀려 있었다. 이전의 위세를 생각해보면, 현재 이사벨라의 사교계에서의 위치는 처참했다. 심지어 오빠 이폴리토만도 못했다. 「이사벨라 양, 오랜만입니다…….」 그녀의 책상 위에는 이전 같은 편지는 딱 한 통 놓여 있었다. 예전에 이사벨라에게 길 안내의 보답으로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했던, 이아코포 아텐돌로 경이 보낸 편지였다.

16630322094022.jpg‘이아코포 아텐돌로조차도 간을 보는게 지금 내 신세라니!’

아텐돌로 경은 빙빙 돌아가는 편지를 보냈다. 요새 어떻게 지내시냐, 무도회가 3월 17일인 것에 빗대 3월 중순 즈음에는 일정이 어떻게 되시냐를 물어보는 편지였다. 그는 이사벨라와 무도회에 가고 싶은 마음이 있기는 있지만, 그녀에게 거절당하는 수모를 감수하기는 싫어서 이따위 편지를 보낸 것이다!

16630322094022.jpg“용기도 없는 새끼!”

이사벨라는 책상을 치며 화를 냈다. 하지만 이는 명백히 부당한 분노였다. 이아코포 아텐돌로는 지금 산 카를로에 있는 그 어떤 기사보다도 더 용기를 냈다. 이사벨라는 자신의 평판이 어디까지 고꾸라졌는지 객관화를 못 하고 있었다. 혹은 어렴풋이 알고 있지만 인정하기 싫은 것일지도 모른다. - 똑똑. 소녀들의 응접실 문을 노크한 것은 우편물 수발 하인이었다.

16630322094043.jpg“아가씨. 아가씨께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기분이 한창 저조했던 이사벨라의 얼굴이 대번에 화색이 떠올랐다. 이아코포 아텐돌로 말고, 좀 더 멀쩡한 신사가 파트너 신청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16630322094022.jpg“어느 신사분께서 보내신 편지야?”

우편물 수발 하인은 이사벨라의 눈치를 보며 쭈뼛쭈뼛 봉투를 내밀었다.

16630322094043.jpg“그게……. 신사분이 아니라 숙녀분 같은데요…….”

여자가 보낸 편지라는 소리에 이사벨라는 기분이 확 상해버렸다. 레티시아인가, 쓸모도 없는 게 말은 더럽게 많아, 라고 중얼거리며 그녀는 편지봉투를 건네받았다. 은박으로 장식된 봉투에는 아래와 같이 쓰여 있었다. 「이사벨라 데 마레 양 친전. 바톨리니 백작가 배상.」  

16630322094022.jpg“뭐야, 이거 왜 이렇게 으리으리해.”

이사벨라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바톨리니 백작가 배상’이라니, 설마 백작 부인이 아니라 백작 본인이 보낸 편지인가? 혹시 아내의 부정을 눈치채고 자신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싶어서 보냈나? 바톨리니 백작 부인이 이미 남편에게 들켰다면, 이사벨라로서는 잃을 것이 없었다. 백작 부인의 불륜 내지는 이혼이 소문나면서 캄파 후작의 내연녀가 누구였는지가 자연스럽게 밝혀지게 될 것이다. 사람을 모으는 일과 소문내는 일을 바톨리니 백작, 오쟁이 진 남편이 담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사벨라가 굳이 의심을 받으며 옛일을 들추어낼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이 지긋지긋한 오명은 바로 벗게 되겠지. 하지만 봉투를 뜯고 안에서 나온 것은 백작이 아닌 백작 부인의 초대장이었다. 「이사벨라 데 마레 양에게, 그간 연락이 뜸했는데 먼저 연락을 해주었군요. 5일 늦은 오전에 시간이 된다면 만나지 않겠어요? - 클레멘테 데 바톨리니 드림.」 뭐, 이 또한 좋았다. 이사벨라의 미소가 점점 더 진해졌다. 바톨리니 백작 부인이 제시한 날짜는 고작 이틀 뒤였다. 이는 차를 마시자고 초대하기에는 지나치게 촉박한 날짜다. 게다가 그녀가 제시한 시간대는 통상적으로 손님을 초대하지 않는 시간대다.

16630322094022.jpg‘내 편지를 받고 시간을 찾아본 모양이네. 날짜가 비는 날 중 제일 빠른 게 이 시간뿐이었던거야.’

바톨리니 백작 부인은 몹시 애가 타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16630322094022.jpg‘그래, 내가 무슨 소리 할지 무섭겠지.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니까 말야.’

이사벨라는 웃으며 하인을 바라보았다.

16630322094022.jpg“편지 쓸 것도 없다. 사람을 보내 말씀하신 그날에 찾아뵙겠다고 전해라.”

서면으로 답장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구두로 확인하는 것은 상대방이 자신과의 약속을 잊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는 사람만이 사용하는 회신 방법이었다. 몹시 절친한 사이이거나, 또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이사벨라는 기지개를 켰다.

16630322094022.jpg‘일이 왼쪽으로 풀려도 좋고 오른쪽으로 풀려도 좋으니 이게 꽃놀이패가 아니라면 뭐가 꽃놀이패겠어.’

  * * * 아리아드네는 집에서 장부를 들여다보고 있다가 급작스러운 전갈을 맞이했다.

16630322094043.jpg“아가씨, 지금 막 달려온 전령이 이 쪽지를 아가씨께 드리라고 했습니다.”

하인은 덧붙였다.

16630322094043.jpg“제가 어중이떠중이라면 제 선에서 막았을 텐데, 누군지는 안 밝히지만 입고 있는 옷이 고급스럽고 기도가 훤칠해서 혹시나 해서 들고 왔습니다.”

아리아드네는 하인이 건넨 쪽지를 펼쳤다. 「갑자기 외부 일정이 잡혔음. 한 시간 후까지 와줄 수 있어? 위치는 센트로 아니마. - A. P.S. 보낸 전령은 호위기사 중 한 명인 엘코 경이라고 해. 그의 호위를 받아서 오면 돼.」 아리아드네는 확 밝아진 표정으로 하인을 치하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16630322107742.jpg“가져오길 잘했다. 난 잠시 외출할 테니, 아래층에 있는 전령에게 돌아가지 말고 기다리라고 해라.”

16630322094043.jpg“마차를 대령시킬까요?”

아리아드네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16630322107742.jpg“그래. 검은색 눈에 잘 띄지 않는 마차로 하자. 마부는……. 주세페를 데려와.”

그녀는 수행 인원에 까다롭지 않은 편이었다. 마부까지 콕 집어 지정하는 일은 드물어서 하인은 아리아드네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하인을 재촉했다.

16630322107742.jpg“전령이 가 버리면 안 되잖아. 어서!”

하인의 뒤꽁무니를 차서 내보낸 이후에는 자신의 몸단장이었다.

16630322107742.jpg“산차와 안나를 데려와. 빨리!”

아리아드네의 의복을 담당하는 산차와 화장을 담당하는 안나였다. 이미 시간을 좀 까먹었다. 데 마레 추기경 관저에서 센트로 아니마까지 가는 시간을 감안하면 준비할 시간은 35분 남짓이었다. 아리아드네는 그녀들을 재촉해서 서둘러 채비를 갖췄다. 안나가 화장을 해주는 동안 산차와 무엇을 입을지 논의하는 식이었다.

16630322107767.jpg“아가씨, 상복…… 입으실 거지요?”

어차피 정체를 숨기고 나가는 길인데 굳이 상복을 입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아리아드네는 잠시 유혹을 느꼈으나 한 번 참기로 했다. ‘들키지 않을 것’을 상정해서 모든 계획을 짜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 어떤 일이라도 실패할 확률은 있다. 알폰소 왕자와 밀회 중이라는 게 들켜서는 결코 안 되고 들키면 대참사지만, 인간이 어쩔 수 있는 부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밀회 중에 상복도 입지 않고 있었다는 입방아는 노력하면 피할 수 있다.

16630322107742.jpg“그래. 최대한 산뜻한 것으로.”

아리아드네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면서 답했다. 단시간 내에 우아하게 성장(盛裝)한 아리아드네는 얼굴을 가리는 베일과 머리카락 전체를 숨기는 프렌치 후드를 쓰고 데 마레 대저택의 정문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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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곳에는 검은 마차 한 대가 기다리고 있었고, 잿빛 머리카락의 처음 보는 젊은 남자가 검은 옷을 입고 옆에 대기하고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16630322107742.jpg“당신이 엘코 경이로군요. 그대의 주군은 그대의 성을 알려주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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