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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2화> 너, 내 시녀가 돼라 (639/733)

<제122화> 너, 내 시녀가 돼라2022.02.02.

클레멘테 데 바톨리니는 이사벨라의 표정에 서린 비난의 기색을 기민하게 잡아냈다. 그녀의 순진한 이목구비에 금방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그녀의 남동생인 오타비오 데 콘타리니가 로트와일러 종의 개를 닮았다면, 클레멘테 데 바톨리니는 미니핀을 닮았다. 남매는 분명히 닮은 부분들이 있었지만 클레멘테는 오타비오와 달리 한 마리 작은 강아지처럼 무해하고 연약해 보였다.

16630322218183.jpg“이사벨라…….”

이사벨라는 울기 직전인 클레멘테를 보면서 눈을 똑바로 뜨고 말했다.

16630322218187.jpg“언니가 울긴 왜 울어요?”

그게 클레멘테 데 바톨리니의 눈물벨이었다. 그녀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큰 소리로 엉엉 울기 시작했다.

16630322218183.jpg“그게……. 그러려던 게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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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벨라는 펑펑 우는 미니핀을 보며 팔짱을 끼고 소파에 기댔다. 난 여기에 밀린 빚을 받으러 온 건데, 어쩌다가 상담사가 된 거지? 클레멘테가 울면서 털어놓은 사정은 이랬다. 바톨리니 백작은 참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어린 아내가 가여워서 클레멘테가 하고 싶다는 건 뭐든지 다 하게 해주었다. 클레멘테는 소심하고 우유부단했지만 사랑을 계속 재확인하고 싶어 하는 스타일의 사람이었다. 남편이 뭐든지 다 하라고 풀어주자 남편이 허락할 리가 없는 일에만 몰두했다. 약간은 ‘이래도 네가 날 계속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라는, 일그러진 자기 파괴적 욕구였다. 그녀의 첫 바람 상대는 고해성사를 들어준 성황당의 젊은 사제였다. 그저 조금 친밀해졌을 뿐인데 어느 순간 선을 넘었고 그 이후로는 걷잡을 수가 없었다. 그다음에는 젊은 몰락 귀족, 그다음에는 마부였다. 남편을 향해 외치는, ‘이래도 당신은 날 사랑해?’라는 무언의 고함이었다. 남편이 절대로 용납할 것 같지 않은 남자 리스트의 마지막이 캄파 후작이었다. 미술품 상인에게 들렀다가 상점에서 그를 만났고, 돈 많고 예의에 빠삭한 캄파 후작의 매너는 그녀를 홀렸다. 어느 정도는 인간쓰레기라고 소문이 났던 캄파 후작에 대한 순전한 호기심이었을 것이고, 어느 정도는 저 남자를 내가 갱생시킬 수 있다는 오기였을 것이며, 어느 정도는 저런 놈과 뒹굴어서 바닥까지 타락하고 싶다는 욕망이었을 것이다.

16630322218183.jpg“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16630322218187.jpg‘나야말로 네가 왜 그러는지 정말 모르겠다.’

이사벨라는 속으로 혀를 찼다. 바톨리니 백작 부인이 이사벨라에게 캄파 후작과 바람피운 걸 부정할 수 없게 들켰다손 치더라도, 그녀에게 사제와 마부와 젊은 귀족까지 줄줄이 다 불어버릴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이건 상대방에게 자기 목줄을 쥐여주는 자살 행위였다.

16630322218183.jpg“나는 정말 외로웠고……. 내가 뭐에 씐 것 같아……! 사제님도 나빴어……. 그는 성직자로서 신도를 잘 계도할 의무가 있는데 파렴치하게 자기 욕심만 채웠어……. 마부도 나빠……. 나는 자기의 마님인데 어떻게 감히 손을 댈 생각을 할 수가 있어……?”

클레멘테의 혓바닥이 길었다. 그녀는 이제껏 그녀의 바람 상대들에 대한 비난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입을 다무는 것이 나았을 자신의 치부까지 끌어올려서 주절주절 이야기하는 그녀의 속이 빤했다. 이사벨라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녀는 클레멘테가 정말로 듣고 싶어 하던 한마디를 해주었다.

16630322218187.jpg“……언니 잘못이 아니에요.”

16630322218183.jpg“역시 그렇지?”

클레멘테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넙죽 받아 대답하는 속도가 너무 빨라 이사벨라가 다 민망해질 지경이었다.

16630322218187.jpg“성직자는 신도에게 모범을 보여야지요. 설령 신도가 빈틈을 보였다손 할지라도…….”

‘성도가 빈틈을 보였다’라는 문장 선택에 클레멘테의 얼굴 근육이 다시 움찔했다. 이사벨라는 한쪽 눈썹을 치켜세운 채 얼른 단어를 다시 골랐다.

16630322218187.jpg“아니, 정숙한 신도에게 음심을 품다니 절대 안 되죠. 이건 전적으로 성직자가 잘못한 거예요.”

클레멘테 데 바톨리니의 표정이 다시 온화하게 풀어졌다. 이사벨라는 이렇게 마부와, 캄파 후작과, 심지어 바톨리니 백작의 욕까지 순차적으로 돌아가면서 하며 클레멘테의 책임이 없다는 점을 강조해 주었다. 클레멘테는 30분 가까이 이사벨라의 열정적인 자신의 옹호 연설을 듣게 되자 이제는 배시시 웃으며 홍차를 마실 마음의 여유까지 얻게 되었다.

16630322218183.jpg“이사벨라, 어린 시절 이후로 너와 이렇게 이야기해 본 게 정말 오랜만이네……. 차라리 너에게 이렇게 알려지게 돼서 다행이야……. 나 정말, 혼자서 외롭고 힘들었어…….”

만족한 클레멘테의 말은 이사벨라에게 가로막혔다.

16630322218187.jpg“그런데 언니.”

이사벨라는 아름다운 얼굴 가득히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본론을 꺼냈다.

16630322218187.jpg“언니가 잘못하신 게 딱 하나 있어요.”

16630322218183.jpg“뭐, 뭔데……?”

클레멘테는 소파에서 엉덩이 뒷걸음질로 도망칠 것만 같은 표정으로 이사벨라에게 마지못해 질문을 던졌다. 정말이지 세상에서 가장 듣기 싫은 대답이었다. 미니핀 같은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16630322218187.jpg“사교계에 캄파 후작의 내연녀는 이사벨라 데 마레라는 소문이 돌 때 어떻게 이야기 좀 잘 해주셨어야죠.”

다시금 클레멘테의 강아지 같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16630322218183.jpg“그, 그건……! 그때는……. 남편이 보는 눈도 있고…….”

물론 사교계를 강타한 밀월 사건에 다른 희생양이 한창 물어뜯기고 있는데 실제 당사자가 나서서 ‘내연녀는 나요.’라고 선언하는 것은 매우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가 큰 용기를 내야 하는 일이었다. 이사벨라는 그런 동화 같은 용기 따위 바라지도 않았다. 상대방이 클레멘테처럼 유약하며 회피적인 사람일 때뿐만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그랬다.

16630322218187.jpg‘나라도 안 나섰겠다.’

하지만 입으로는 다른 말을 했다.

16630322218187.jpg“언니, 불쌍한 이사벨라는 아무 잘못 없이 그렇게 된 거잖아요. 안 그래요……?”

클레멘테는 고개만 푹 숙이고 말이 없었다. 이사벨라는 여기서 더 압박을 넣다가는 목표물이 달아날 수도 있겠다는 직감을 했다. 참으로 연약한 위인이었다.

16630322218187.jpg“클레멘테 언니. 언니에게 인제 와서 나서라는 건 아니에요. 언니는 가정도 있는데 그렇게 큰 희생을 어떻게 강요할 수 있겠어요? 저 그렇게 매정한 사람 아닙니다.”

이사벨라는 목소리에서 꿀이 떨어지는 달래기용 모드로 전환했다. 이사벨라가 여자를 상대로 이렇게까지 공을 들이는 것은 일 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하는 일이었다.

16630322218187.jpg‘살다 살다 보니 진짜 별짓까지 다 하네.’

16630322218183.jpg“그, 그럼……?”

미니핀이 훈훈한 온기에 살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16630322218187.jpg“요사이 이사벨라의 처지는 아시지요?”

이사벨라는 고개를 떨구고 안타까운 체를 했다. 아니, 진짜로 안타까웠다. 천하를 울리던 이사벨레 데 마레가 이게 무슨 꼴이냐!

16630322218187.jpg“사교계에서도 아무도 안 불러 주고, 친구들도 이제 없어요. 이번 왕실 무도회도…….”

여기까지 이야기하자 정말로 감정이 북받쳐 올라와 이사벨라는 눈물이 왈칵 나고 말았다.

16630322218187.jpg“아무도……. 저와 함께 무도회에 가지 않겠다고…….”

이사벨라의 눈앞에 외면하는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 비어 있는 우편함, 대미사에서 마주치면 고개를 돌리는 사람들. 좋을 때는 그렇게 꼬리를 흔들며 쫓아다니더니 힘들어지자 손 내미는 사람 하나가 없었다.

16630322218187.jpg‘남자 따위……. 못 믿을 것들!’

이사벨라는 애초에 여자는 믿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제 인간을 총체적으로 믿지 않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그녀는 그렁그렁한 눈초리를 들어 클레멘테를 바라보았다.

16630322218187.jpg“언니한테 많이 바라는 게 아니에요. 사교계에서 저와 함께 다녀 주세요. 그 정도는 챙겨주실 수 있으시잖아요.”

생각보다 온건한 이사벨라의 요구에 클레멘테는 조금 놀라 고개를 끄덕였다.

16630322218183.jpg“그 정도쯤이야…….”

16630322218187.jpg“애초에 제 잘못이 아닌 일로 배척당하고 있는 걸요.”

이사벨라가 자기 탓을 하는 것 같자 클레멘테는 흠칫 놀랐다.

16630322218187.jpg“그러니까 언니가 저를 데리고 다니시면서 제 좋은 평판을 회복시켜 주세요. 봉사활동, 기도 모임, 어디든 다 좋아요.”

클레멘테 데 바톨리니 백작 부인은 정기적으로 성황당과 구휼원에 봉사를 다니는 것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녀와 그녀의 친구 무리인 ‘은십자 부녀회’는 노약자를 위해 침구 세탁, 음식 준비, 숙소 청소 등의 봉사활동을 다니고는 했다. 집에서는 가사노동에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는 부인들이 성황당에서 잡일을 하는 것은 조금 우스웠지만, 농장에서 짓는 대규모 밀 농사와 원예용 화초 가드닝이 다르듯이 그들의 노동은 또 달랐다.

16630322218183.jpg“그, 그런 거라면야…….”

클레멘테의 승낙에 이사벨라는 재빨리 눈을 반짝였다.

16630322218187.jpg“지금 당장 시작해요. 언니, 오늘 오후에도 약속 있죠?”

소규모 교우 관계를 다지기 제일 좋은 시간은 점심시간과 그에 따라오는 오후 시간이다. 큰 파티는 저녁에 열렸지만, 오찬 모임과 오후의 티타임이 귀부인들의 주된 모임 시간이었다. 클레멘테가 이사벨라를 오전 열한 시 같은 이상한 시간에 부른 이유는 틀림없이 오찬과 오후 티타임이 차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사벨라의 예상이 맞았는지, 클레멘테는 말을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16630322218183.jpg“그게, 있긴 있는데…….”

16630322218187.jpg“누구와의 약속이에요? 발조 백작 부인? 살바티 후작 부인? 아니, 로레단 남작 부인 정도만 돼도 괜찮아요!”

이사벨라는 클레멘테의 부인 인맥들을 줄줄이 읊었다. 클레멘테는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자세히 아는 이사벨라에게 약간의 거부감을 느끼면서, 이사벨라가 자신의 오후 모임에 관심이 없기를 빌며 부인했다.

16630322218183.jpg“아니……. 아니……. 여자 손님들이 아니고……. 가족과 만나기로 했어.”

점심부터 바톨리니 백작은 모처럼 외부 약속이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점심 계획이 비는 날에, 친정 식구가 와서 함께 오찬을 들기로 한 것이다.

16630322218183.jpg“오타비오가……. 친구를 데리고 온다고…….”

클레멘테는 사교계 귀부인들이 오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면 이사벨라가 관심이 떨어져서 집으로 돌아갈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 말에 5월의 작약처럼 흐드러지게 웃으며 손뼉을 쳤다. 이사벨라의 웃음은 무어 제국 깊숙한 곳에서 자란다는 식충 식물 같기도 했다.

16630322218187.jpg“어머, 시뇨르 오타비오가 오신다고요? 언니! 저도 꼭 초대해주세요!”

이사벨라의 자주색 눈에서 기쁨의 빛이 춤을 췄다. 그녀는 단단히 결심한 기색으로 클레멘테를 재차 밀어붙였다.

16630322218187.jpg“우리, 어려서 같이 놀기도 했었잖아요.”

이사벨라는 진하게 웃으며 클레멘테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그 눈빛을 받은 클레멘테는 움찔 몸을 떨었다. 달콤하기 짝이 없는 표정이었지만, 지금의 클레멘테는 이사벨라에게 거역할 수가 없었다. 그럴 바에야, 비위를 맞춰 주는 게 나을 것이다. 클레멘테는 유순하게 되물었다.

16630322218183.jpg“이사벨라, 메인 메뉴는 고기가 더 좋으니 생선이 더 좋으니? 양고기와 숭어구이가 있어.”

이사벨라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16630322218187.jpg“둘 다 싫어요. 전 어린 소고기로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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