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23화> 빼앗긴 과거의 서사 (640/733)

<제123화> 빼앗긴 과거의 서사2022.02.06.

166303222683.jpg“시뇨르 오타비오!”

16630322268305.jpg“이사벨라 양!”

바톨리니 백작가의 다이닝 룸에서 만난 이사벨라와 오타비오는 거의 얼싸안기라도 할 기세였다. 누가 본다면 석 달간 만나지 못했던 연인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16630322268305.jpg“아니, 정말로 오랜만입니다! 여기에서 이렇게 만날 줄이야!”

166303222683.jpg“오타비오의 누나께서 절 초대해 주셨어요. 클레멘테 언니와는 그간 격조했는데 그만 연락이 닿아서……. 어려울 때 챙겨주시는 진짜 친구지요.”

이사벨라는 클레멘테를 흘깃 바라보며 눈웃음을 쳤다. 그녀는 최근 ‘친구들’이 대거 배신하는 사태를 바라보며 나름의 깨달음을 얻었다. 콩고물을 하나도 나눠주지 않으면 자기 옆에 붙어있을 동성 친구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전에는 산 카를로 최고의 재원, 아름다운 이사벨라 데 마레의 친구라는 타이틀을 얻기 위해 영애들이 구름같이 달려들었다. 지금은……. 치사하고 더럽지만 자기 입으로라도 치하와, 인정과, 노고를 추켜올려줘야 할 때다. 생각도 안 한 칭찬을 들은 클레멘테가 조금은 좋아진 기분으로 오타비오에게 말했다.

16630322268316.jpg“오타비오, 어서 앉으렴. 왜 혼자 왔어. 같이 온다는 친구는 어디 있고.”

16630322268305.jpg“아, 그 친구. 항상 제시간에 다니질 않아. 우리 먼저 먹고 있으면 천천히 올 거야.”

그 말을 들은 이사벨라의 보라색 눈이 반짝 빛났다. 혹시……. 하지만 이사벨라는 본인의 조급함을 티 내지는 않기로 했다. 고고했던 시절에는 감정을 드러내도 좋았다. 지금은……. 살얼음판에서 줄타기하는 중이었다. 위엄과 우아함은 태도에서만 나온다. 그녀가 묵묵히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손을 씻는 볼에 손가락 끝을 담갔을 때, 다이닝 룸에 노크 소리가 울렸다. - 똑똑.  

16630322268316.jpg“손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바톨리니 백작가의 일 도메스티코가 손님을 모시고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손님은 다름 아닌 벨벳 모자를 물총새 꽁지깃으로 장식하고, 멋들어진 최신 유행 의복에 사슴 가죽 장갑을 낀 체자레 백작이었다. 그는 모자를 벗어 무릎을 굽히며 가슴에 가져다 대며 우아하게 인사를 올렸다.

16630322268329.jpg“바톨리니 백작 부인. 초대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16630322268332.jpg

  * * * 이 자리에 앉은 사람 그 누구도 모르는 사실이었지만, 사실 이날의 만남은 체자레 백작과 바톨리니 백작 부인이 이후 내연 관계로 발전하게 되는 최초의 계기였다.

16630322268329.jpg“처음 뵙습니다. 체자레 백작입니다.”

체자레는 여주인에게 깍듯하게 인사했고, 클레멘테 데 바톨리니는 겁먹은 미니핀처럼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받았다.

16630322268316.jpg“제 동생과 친하시다고 들었어요…….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체자레와 오타비오가 이렇게 죽마고우처럼 붙어 다니기 시작한 것은 채 3년이 되지 않은 일이었고, 클레멘테 데 콘타리니는 4년 전에 바톨리니 백작에게 시집을 간 이후 계속 바톨리니 백작의 영지에서 지냈다. 그녀가 레오 3세의 궁정 소환령에 의해 산 카를로로 올라오게 된 것은 바로 얼마 전이었다.

16630322268329.jpg“이제야 인사를 올리다니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지요. 말씀 들었던 것보다 훨씬 미인이시군요.”

16630322268316.jpg“어머, 과찬도…….”

16630322268305.jpg“하하하, 체자레, 너무 그렇게 띄워주지 말게. 우리 누나는 그러면 자기가 정말로 예쁜 줄 알아.”

16630322268316.jpg“오타비오……!”

이사벨라로서는 드물게 투명인간이 되는 경험이었다. 아무도 솔선해서 그녀를 대화에 끼워주지 않았다. 클레멘테는 자신의 이기심 때문에 그런 것이고, 오타비오는 그런 걸 챙길 눈치가 없었다. 체자레 백작의 태도는 애매했다. 일부러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기도 했고, 초대받은 집의 여주인에 대한 예의를 다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성질머리 같았으면 바톨리니 백작 부인을 뒷방에 끌고 가 박박 뜯어놨을 테였지만 이사벨라는 심호흡을 하며 참았다.

166303222683.jpg‘나는 새로운 이사벨라다. 가련하고 불쌍한, 모친을 잃은 이사벨라다.’

이사벨라는 웃으며 클레멘테를 거들었다.

166303222683.jpg“오타비오! 그런 말씀 마세요. 클레멘테 언니는 참 예쁜걸요.”

이사벨라가 자신의 긴 아마빛 속눈썹을 내리깔며 클레멘테를 향해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사벨라의 도자기 인형처럼 완벽한 이목구비가 창밖에서 들어오는 햇볕을 받아 찬란하게 빛났다. 그녀는 오늘 약식 상복을 입고 있었다. 머리에 쓴 흰색 미사포와 옷깃을 장식한 흰색 레이스, 그리고 손목에 단 백합 한 송이는 약식 상복을 입은 사람에게 허여되는 장식이었다. 그 아래에는 빛나는 검은 새틴의 드레스를 입었다. 흑백으로 치장한 이사벨라는 더할 나위 없이 청순하고 고상해 보였고, 그런 이사벨라가 누가 봐도 자기보다 떨어지는 클레멘테의 미모를 칭찬하는 것은 기묘한 분위기를 불러일으켰다. 그 사실을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클레멘테였다. 그녀는 기분을 잡쳤지만, 이사벨라에게 목줄이 쥔 상태였다. 그녀는 입안에 도는 쓴맛을 무시하고 상냥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16630322268316.jpg“……그런 소리 하지 마……. 내가 얼마나 우스워 보이겠어…….”

166303222683.jpg“어머, 진심인걸요.”

탈출할 수 없는 수렁으로 빨려 들어가는 바톨리니 백작 부인을 위해 체자레 백작이 둘 사이의 대화를 끊어 주었다.

16630322268329.jpg“큰 데 마레 영애.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사벨라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반응이었다. 산 카를로 사교계에서는 신분이 더 높은 사람이, 신분이 같다면 신사가 먼저 상대방에게 말을 걸지 않으면 레이디는 먼저 대화를 시작할 수 없다. 그녀는 장미처럼 화사하게 웃으며 체자레에게 화답했다. 하지만 숨겨진 가시는 제거하지 못했다.

166303222683.jpg“체자레 백작님! 절 잊어버리신 줄 알았어요.”

체자레는 미끈하게 입에 발린 공치사로 그녀의 말을 받았다.

16630322268329.jpg“이런 미모를 어찌 잊는단 말씀입니까.”

그 이후로는 이사벨라의 독무대였다. 그녀는 세련된 화술로 오타비오의 혼을 빼놓았고 클레멘테를 짓눌렀다. 하지만 그 끼부림의 향연에 체자레 백작이 감흥을 느꼈는지는 다른 문제였다. 그는 물빛 눈에 조금 흥미롭다는 관심 외에는 아무것도 담지 않고 관조적인 시선으로 오찬을 관찰했다. 이사벨라는 이제 슬슬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오찬은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사벨라는 오늘의 모임이 끝나고 나면 다시 체자레나 오타비오를 만날 기약이 없다는 점에 절망감마저 느끼는 중이었다.

16630322268329.jpg“오타비오, 내 잠시 실례하겠네.”

체자레 백작이 식사 중에 잠시 자리를 비웠다. 화장실에 가려는 것이다. 독대의 기회다. 이사벨라는 체자레 백작이 다이닝 룸을 일어서서 나가자마자 부끄러움도 잊고 외쳤다.

166303222683.jpg“언니! 저 잠시 파우더룸 좀 빌릴게요!”

다이닝 룸을 나선 이사벨라는 체통도 잊고 허겁지겁 달려 복도 중간쯤에서 체자레 백작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166303222683.jpg“체자레 백작님!”

체자레는 느리게 뒤를 돌아보았다.

16630322268329.jpg“큰 데 마레 영애. 어디 가시는 길입니까?”

166303222683.jpg“어디긴요. 저도 화장실에 가려고요.”

체자레는 씩 웃었다.

16630322268329.jpg“저도 이 집의 구조에 익숙한 것은 아닙니다만.”

그는 이사벨라가 뛰어온 복도의 반대쪽 끝을 흘끗 바라보았다.

16630322268329.jpg“일 도메스티코가 말하길 여자 손님용 화장실은 복도 반대편 끝에 있다고 하더군요.”

체자레 백작은 소녀의 얼굴이 확 붉어질 것을 기대했다. 그는 빙글빙글 웃으며 이사벨라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이사벨라 데 마레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166303222683.jpg“그렇군요. 핑계는 집어치우죠. 우리 잠깐 단둘이 얘기 좀 해요.”

이사벨라의 당돌한 청에 체자레 백작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이건, 흥미로웠다.

16630322268329.jpg“무슨 일이신지요, 데 마레 영애?”

그는 짐짓 시간을 보는 척을 해 보였다.

16630322268329.jpg“누구와 다르게 저는 정말로 화장실에 가던 길이라서, 대화는 짧게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이번에는 그 신경줄 굵은 이사벨라라도 버티지 못하고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그녀가 좀 더 노회했더라면 화장실 먼저 다녀오시라고 선수를 쳤겠지만, 이사벨라 데 마레는 아직 17세의 애송이에 불과했다. 전생의 그녀가 산 카를로 사교계를 주름잡고 불사조처럼 화려한 부활을 해냈던 것은 남편이 죽고 미망인이 되고 난 후, 갖은 고생을 다 겪은 이십 대 중후반의 완숙한 여인이 되고 나서다. 아직 서투른 이사벨라는 다짜고짜 본론부터 꺼냈다.

166303222683.jpg“길게 이야기하지 않을게요. 제 동생에게 이번 왕궁 무도회의 파트너 신청을 거절당하셨다고 들었어요.”

체자레 백작의 눈가가 미세하게 찡그려졌다.

16630322268329.jpg“그런데요?”

166303222683.jpg“역사에 남은 저술가인 빈시토레 예레미타는 저서 <유혹자의 일기>에서 ‘여자를 유혹하는 완벽한 방법’을 설파했지요.”

16630322268329.jpg“호? 그 분야는 제 전문분야인 줄 알았는데 데 마레 영애께서는 남녀상열지사에 매우 학식이 깊으시군요?”

부끄러우라고 한 말이지만 이사벨라는 동요하지 않고 바로 받아쳤다.

166303222683.jpg“책에서 배운 죽은 지식에 불과해요. 하지만 체자레 백작님의 실전 지식은 아카데미아에서 마련한 근거들로 보완될 필요가 있어 보이는군요.”

체자레는 속으로 웃으며 자매가 입담만은 똑같다고 생각했다.

16630322268329.jpg“제가 어떻게 해 드리면 좋겠습니까?”

이사벨라는 도전적으로 체자레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완벽한 아랫입술을 조금 앞으로 툭 내민 채 말했다.

166303222683.jpg“빈시토레 예레미타는 ‘난공불락인 여자를 유혹하고 싶으면 그 자매를 유혹하라’라고 했어요.”

16630322268329.jpg“호오?”

점점 더 재미있어지고 있었다. 체자레는 자신이 예측하지 못한 대사가 줄줄이 나오는 이 자매와 옥신각신하는 게 진심으로 즐거워졌다.

166303222683.jpg“저와 왕궁 무도회에 가시죠, 체자레 백작님.”

이사벨라는 의기양양하게 그를 바라보며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동의하는 뜻으로 내 손등에 키스하라는 뜻이다.

16630322282298.jpg

  체자레가 바로 이사벨라의 손등에 키스하지 않자 그녀는 짜증스럽게 왼손을 흔들었다.

166303222683.jpg“체자레 백작님. 저 그냥 직설적으로 말할게요. 당신이 제 손을 잡고 왕궁 무도회에 들어가는 순간 제 동생은 관심이 없더라도 당신 방향을 돌아보게 될 겁니다.”

16630322268329.jpg“그건 아무래도 그렇겠죠.”

166303222683.jpg“물건의 가치를 높이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은 경쟁을 붙이는 거예요.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그걸 가져갈지도 모른다면 금상첨화죠.”

16630322268329.jpg“제가 이사벨라 양을 무도회에 데려간다면 그런 상황이 발생할 수밖에 없겠군요.”

166303222683.jpg“그 초록색 눈이 질투와 탐욕에 불타서 당신을 훑는 걸 보고 싶지 않으세요?”

보고 싶었다. 그리고 솔직히, 그가 아는 아리아드네의 성품이라면—경쟁을 마다하지 않고, 승부욕 있는—이사벨라가 말하는 구도가 그대로 펼쳐질 것 같았다. 체자레는 순순히 긍정했다.

16630322268329.jpg“보고 싶군요, 그 장면.”

166303222683.jpg“그러면.”

이사벨라 데 마레는 짙게 웃었다. 17세 소녀답지 않은 농염한 미소였다.

166303222683.jpg“키스하세요, 내 손등에.”

유화로라도 그려둬야 할 것 같은 장면이었다. 따듯하고 온화한 산 카를로의 날씨에, 눈 부신 햇살이 바톨리니 백작저의 대리석 복도를 가득 메웠다. 금발의 요정같이 아름다운 아가씨가 손등 키스를 하라고 왼손을 내밀고 있었고, 그 앞의 적갈색 머리카락의 미청년이 그녀의 손등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 그가 허리를 숙여서 그 손등에 입을 맞추면 완성되는, 완벽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체자레는 오른손을 내밀어 이사벨라의 왼손을 옆으로 치워 버렸다.

16630322268329.jpg“누구 좋으라고.”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