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6화> 무도회의 막이 오르다2022.02.16.
라파엘과의 마차 라이드는 몹시 편안하고 유쾌했다. 라파엘은 아리아드네의 말에 깜짝 놀라며 답했다.
“네? 제가 여동생이랑 사이가 나쁜 줄 아셨다고요?”
“아니, 줄리아가 이야기한 내용대로라면 지금보다 훨씬 더 무서우신 분이셔서…….”
라파엘은 그 이야기를 듣자 명랑하게 웃었다.
“아니, 이런. 제 동생이 도대체 제 얘기를 어떻게 하고 다닌 건가요!”
아리아드네는 겸연쩍게 웃었다. 줄리아가 했던 악담들을 모두 옮기자니 고자질이 될 상황이었다. 다행히 라파엘이 어색한 분위기를 메워 주었다.
“죽도록 사이가 나쁘죠, 어릴 땐 더더욱 그랬고요. 머리끄덩이 잡아당기면서 싸우기도 했습니다. 줄리아가 손이 얼마나 매운 줄 아세요?”
“아뇨, 안 맞아봤어요…….”
“와, 내 동생 사람 됐네.”
그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려서는 작은 괴물 같았던 동생도, 타지에 오래 가서 가족과 떨어져 있으니 애틋하고 보고 싶고 또 그렇더군요. 가족의 정이란 참 신기한 것 같아요.”
아리아드네는 이번에야말로 부자연스럽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가족의 정이라니. 그녀와 아라벨라 사이의, 그녀와 산차 사이의 애정 같은 것일까.
“평소에는 죽도록 미운데 애가 어디 가서 당하고 오면 또 화가 나죠. 그래서 가까이 있기 싫어요.”
“예?”
“가까이 있으면 얘가 뭘 해도 화나니까 내 눈에 안 보이는 게 나아요.”
사이가 좋은지 나쁜지 알쏭달쏭한 남매였다. 초면인 남자와 의외로 즐거운 수다를 떨다 보니 마차는 어느새 팔라지오 카를로에 다 와가고 있었다.
“이런, 신학 이야기를 여쭤보고 싶었는데 한 마디도 못 꺼냈네요.”
아리아드네는 살짝 긴장했다.
“하지만 오늘 밤은 기니까요. 이야기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나요? 아리아드네.”
둘은 마차를 타고 가는 시간이 짧게 느껴질 정도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녀 역시 밝게 웃었다.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만 하다 보면 무도회도 금방 끝날지 몰라요.”
“일단 무도회장으로 가시죠, 시뇨라.”
그는 마차가 멈추는 것을 느끼고는 왼손을 올려 들었다. 아리아드네는 웃으면서 오른손을 그 위에 올렸다. 의외로,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 * * 귀족들의 마차는 팔라지오 카를로의 정해진 곳에서 승객을 내려 주고 대기해야 했다. 그 위치는 왕궁의 정문에서 퍽 멀리 떨어진 대분수대 앞이었다. 화강암으로 포장한 로터리가 대분수대를 감싸고 있었고, 귀족가의 마차는 한 대 한 대 줄을 서서 주인을 내려놓고는 왕궁 한 구석 주차장으로 떠났다. 자연히 그 앞은 인파로 북적이고 있었다. 대분수대로부터 오늘의 무도회장인 ‘백합의 방’까지는 도보로 걸어가기에는 힘든 거리였다. 국왕의 위엄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였다. 카를로 왕조의 사슴과 월계수 이파리 문장이 새겨진 뚜껑 열린 마차 수십 대가 2분 간격으로 와서 손님들을 태우고 궁전 안쪽으로 향했다. 귀족들은 대분수대 옆에 마련된 천막에서 삼삼오오 모여 저녁 무렵의 마지막 햇살을 피했다. 거기에는 줄리아 데 발데사르도 있었다.
“오빠!”
그녀는 깜짝 놀라 외치더니, 아리아드네를 보고는 반갑게 인사했다.
“아리아드네! 이쪽으로 와요!”
줄리아는 아리아드네와 라파엘을 만나 오빠의 옷깃을 잡고 둘을 천막 아래로 잡아당겼다.
“아직 햇살이 뜨거워, 그늘에 있어.”
“웬일이지? 내 여동생이 날 다 챙겨 주고.”
“또, 또, 말 밉게 한다. 아리아드네, 우리 오빠가 인성은 좀 나쁘지만 그래도 아주 나쁜 사람은 아녜요.”
아리아드네는 풉 웃었다.
“이런 관계였군요.”
“네?”
“둘이 서로 하도 험담만 해 대길래 사이가 나쁜 줄 알았어요.”
“뭐? 오빠, 나에 대해서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다닌 거야!”
“없는 소리는 안 했다.”
“오빠!”
줄리아의 파트너는 발데사르 후작가의 봉신인 카세리 남작이었다. 줄리아의 아버지인 현 발데사르 후작은 딸이 정식으로 약혼할 때까지는 추문이 일어날 가능성 자체를 차단코자 했다. 그래서 줄리아에게 들어오는 그 또래 귀족 영식들의 신청은 모조리 다 부모 선에서 거절하고, 자신의 휘하에 있는 믿음직한 카세리 남작을 딸의 파트너로 붙여주었다. 카세리 남작은 40대 초반에, 행복한 결혼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아이 둘의 아버지였다. 만삭인 카세리 남작 부인이 셋째의 출산 준비를 위해 친정에 머무르느라 아직 산 카를로로 복귀하지 않아서 남는 사람을 발데사르 후작이 딸의 파트너, 실질적으로는 샤프롱으로 잽싸게 잡아 온 것이다.
“소후작님.”
줄리아의 파트너인 카세리 남작이 웃으며 라파엘에게 깊숙이 허리를 숙여 예를 취했다.
“이러지 마세요, 신경 쓰이게.”
“아닙니다. 미래의 주군이신데요.”
“카세리 남작님!”
라파엘은 서글서글하게 웃던 게 언제 일이냐는 듯 정말 싫어하며 손사래를 쳤다.
“오빠, 이만 받아들여. 큰오빠가 없으니 이젠 오빠가 가문을 이어야지.”
“줄리아!”
라파엘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아리아드네는 험악해진 분위기를 풀기 위해 좌중을 돌아보았다. 다행히 딱 맞는 사람이 있었다.
“어머, 저기 보세요. 펠리시테예요!”
줄리아의 친구 무리에 속해 있는 펠리시테 데 엘바 자작 영애가 자신의 파트너와 함께 무도회장에 도착해 있었다. 줄리아가 반색을 하며 펠리시테에게 손인사를 했다.
“펠리시테!”
“줄리아!”
그들은 가까이 다가와 반갑게 손을 잡았고, 펠리시테의 옆에 있던 그녀의 파트너가 점잖게 예를 취해 보였다. 나머지 일행 역시 일제히 답례를 했다.
“이분은……?”
산 카를로의 또래들을 아직 잘 모르는 아리아드네가 펠리시테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녀가 전생에서 부대꼈던 사람들은 사교계의 젊은이들이 아니라 그들의 부모였고, 이번 생에서의 아리아드네는 젊은 사람들은 전부 다 새로 만나고 있었다. 펠리시테가 부끄러운 듯이 웃으며 소개해 주었다.
“지암바티스타 아텐돌로 소백작이세요.”
“아, 아텐돌로 백작가의 장남이신―.”
“지암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그는 웃음기를 띠었으나 동시에 정중히 청했다.
“산 카를로를 뒤흔드는 아리아드네 데 마레 양의 위명은 익히 들었습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아니, 제가 무슨요…….”
아리아드네는 면구스럽게 웃으며 과한 칭찬을 사양했다. 지암바티스타 아텐돌로라니, 재미있는 인선이었다. 아리아드네가 아는 ‘아텐돌로’는 한 명이었다. 이사벨라에게 다이아몬드 반지를 주며 끈질기게 추근대던, 이아코포 아텐돌로 경. 이아코포 아텐돌로는 지암바티스타 아텐돌로의 작위를 물려받지 못할 모자란 동생이었다. 줄리아도 아리아드네와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의미심장한 눈초리로 지금 막 도착한 커플을 쳐다보았다. 아리아드네 역시 줄리아의 시선을 따라 로터리에 정차된 마차에서 하차하는 한 쌍을 보았다.
“!”
마침 양반은 못 될 이아코포 아텐돌로가 마차에서 영애 하나를 에스코트하며 내리고 있었다. 연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아마빛 머리카락을 자연스럽게 옆으로 흘려 땋은, 산 카를로에서 제일 아름다운 소녀.
“이사벨라네요.”
줄리아의 속삭임에,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줄리아는 약간의 비웃음을 띄며 중얼거렸다.
“우리 펠리시테가 여러모로 훌륭하기는 하지만 신흥 자작가의 영애인 것은 부정할 수 없어요. 그런데도 펠리시테가 본인의 파트너로 아텐돌로 가의 후계자를 데리고 왔어요.”
아리아드네는 말없이 고개만 주억였다.
“그런데 ‘그’ 이사벨라가 데리고 온 사람이 고작 골칫덩이 이아코포 아텐돌로라니. 명성이 얼마나 손상된 건지. 정말 상전벽해가 따로 없네요.”
이사벨라는 남들과 눈을 마주치기 싫은 것인지, 아니면 새 콘셉트를 고수하는 중인지 다소곳하게 바닥으로 눈을 내리깔고 고분고분 이아코포 아텐돌로의 에스코트를 받아 조심조심 걸었다. 걸친 옷도, 평소에 선호하던 번쩍번쩍하는 비단 드레스가 아닌 실내복에 가까운 얇은 면화였고, 보석 장신구 대신에 생화로 꽃 화관을 만들어 썼다. 멀리서 보면 마치 천하에 둘도 없이 순진한 처녀 같았다. 아리아드네는 어이가 없어서 줄리아에게 속삭였다.
“사교계에서 이상한 소문 돌면 미리 약 좀 쳐 줘요. 저는 언니 생활비 깎은 적 없어요.”
이사벨라의 과도한 사치는 데 마레 추기경이 직접 내린 명으로 금지됐지만, 아리아드네는 루크레치아 생전에 이사벨라가 매달 받던 금액만큼은 유지시켜 주었다.
“와. 근데도 저러고 다녀요?”
줄리아는 혀를 내둘렀다. 아리아드네는 약간 포기한 말투로 대답했다.
“새로 고른 콘셉트인가 봐요. 불쌍한 시골 처녀.”
진짜 시골 처녀는 저렇게 곱게 화장을 하고 밝은색의 면 드레스를 입을 여유도 없다. 집안일이나 농장 허드렛일을 돕다 보면 드레스에 얼룩이 지기 때문이다. 정말로 시골 출신인 아리아드네는 가난마저 빼앗긴 느낌에 기분이 저조해졌다.
“가죠, 우리 이만.”
안 그래도 그들 차례인 왕궁 마차가 도착한 참이었다. 줄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섞여서 기분 잡칠 필요 없죠.”
먼저 도착한 세 커플은 뒤늦게 도착한 이사벨라 데 마레를 대기줄에 남겨놓고 ‘백합의 방’으로 떠났다. * * * 이사벨라 데 마레가 바닥을 내려다본 이유는 두 가지 모두였다. 신실한 시골 처녀 콘셉트를 유지하는 것이기도 했고, 남들과 눈이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루크레치아의 사망 이후 나이 지긋한 부인들 사이에서는 이사벨라가 가엾다는 여론이 조금 싹을 틔우기도 했고, 귀족 남성들 사이에서는 예쁘니까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부류가 항상 존재하긴 했지만 이사벨라를 대하는 산 카를로의 주류적인 태도는 ‘회피’였다. 그들은 이사벨라가 가까이 다가오면 못 볼 것이라도 본 듯이 시선을 홱 돌렸다. 이사벨라에 대한 본인 스스로의 의견이 어떻든 간에, 산 카를로 최대의 인간쓰레기로 소문난 남자의 내연녀와 어울리는 모습을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남이 나한테 시선을 마주치고 싶어 하지 않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내가 먼저 시선을 주지 않겠어.’
악만 남은 이사벨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천만다행으로, 남들이 뭐라고 하건 간에 그녀를 버리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사벨라.”
“오빠.”
데 마레 가의 마차를 타고 파트너를 데리러 갔다가 이제 왕궁에 도착한 이폴리토가 마차에서 내리며 이사벨라를 아는 체했다. 그의 옆에는 노란색 드레스를 귀엽게 차려입은 레티시아가 있었다.
“이사벨라!”
그녀는 기분이 좋은 나머지 이사벨라에게 큰 소리로 인사했다. 이폴리토는 결국에 같이 갈 여자를 구하지 못해서 이사벨라가 시킨 대로 레티시아 데 레오나티 자작 영애에게 무도회의 파트너 신청을 했다. 레티시아는 덕분에 막판에 파트너 없이 무도회에 가게 되는 상상도 못 할 수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레티시아의 높은 텐션에 이사벨라마저도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성에 안 차는 덜떨어진 친구지만, 없는 것보다는 백번 낫다. 그리고 그녀를 버릴 수 없는 사람도 있었다. 로터리에 호화로운 마차 한 대가 들어서며, 젊은 부인이 노귀족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땅을 디뎠다. 바톨리니 백작 내외였다.
“클레멘테 언니!”
이사벨라는 일부러 더 밝게 웃으며 큰 소리로 아는 체를 했다. 산 카를로 사교계에서는 신분이 더 낮은 사람이 자기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면 안 된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하지만 절친한 경우에는 예외였다. 지금, 추기경의 딸이지만 작위와는 거리가 먼 이사벨라가 한 점의 거리낌도 없이 당연하게 백작 부인인 클레멘테 데 바톨리니에게 먼저 인사를 하자 둘 사이는 몹시 친밀해 보였다. 사람들이 속속 고개를 돌리며 이 상황을 구경했다. 도착하자마자 이사벨라의 습격에 당한 바톨리니 백작 부인은 남편의 눈치를 쓱 살피고는 울며 겨자 먹기로 이사벨라의 인사를 받아줄 수밖에 없었다.
“응, 이사벨라……. 잘 지냈니?”
“언니도 오늘 무도회에 오셔서 너무 기뻐요. 이사벨라, 같이 다닐 사람이 없었는데 언니랑 같이 다니면 되겠어요!”
마른하늘에 날벼락에 바톨리니 백작 부인이 표정 관리를 하느라 애를 썼다.
“이, 이사벨라……. 나……. 나는 발조 백작 부인 내외와 선약이 있어…….”
“너무 잘됐다! 발조 백작 부인이 봉사활동을 그렇게 열심히 하신다죠! 존경스러워요! 저 그분과 꼭 안면을 트고 싶었어요. 제가 따라다녀도 괜찮죠, 바톨리니 백작님?”
노백작은 허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나이 지긋한 부인들인데, 젊은 피가 섞이면 생기에 찰 거요.”
옆에서 이사벨라의 파트너인 이아코포 아텐돌로도 거들었다.
“바톨리니 백작님! 저희 아버지와 포도주 양조 사업을 같이하시지 않습니까. 평소에도 혜안을 나눠 듣고 싶었습니다.”
바톨리니 백작 부인의 표정이 점차 일그러졌다. 하지만 어린 부인의 속도 모르고 바톨리니 노백작은 허허 웃으며 이아코포의 어깨를 쳤다.
“그래, 자네 아버지는 나와 오랜 친구지. 아텐돌로 집안이 상업에 뒤늦게 뛰어들어서 그렇지 오랜 기사의 전통을 지니고 있어. 오늘 함께 다니며 이야기를 합세.”
“감사합니다! 백작님.”
무도회 내내 함께 다닐 거라는 사실이 쐐기를 박다 못해 관짝에 못질까지 완료된 분위기였다. 클레멘테 데 바톨리니는 그저 예쁘게 웃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