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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3화> 악마의 유혹 (650/733)

<제133화> 악마의 유혹2022.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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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까지나 상식인인 르비엥 백작은 타국 고위 성직자의 자녀를 죽여버리라는 라리에사 대공녀의 명령에 깜짝 놀랐다.  

16630323460698.jpg“대공녀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가 있어요!”

16630323460704.jpg“그 세이렌 같은 계집이!”

  라리에사는 분에 겨워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는 윙체어를 구둣발로 거세게 찼다.  

16630323460704.jpg“얌전한 척하더니만 알폰소 왕자를 채갔단 말이야!”

  라리에사는 형식상으로나마 유지하던 반존대마저 내던지고 고성을 질렀다.  

16630323460704.jpg“썩을 데 카를로 왕실은 지금 대 갈리코 왕국과 결혼 협상을 진행하면서 에트루스칸 출신의, 성직자의 더러운 사생아 따위와 놀아나고 있다고!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요?!”

16630323460698.jpg“아이고…….”

  르비엥 백작은 그제야 라리에사 대공녀가 이렇게 분노해서 온 방 안을 초토화시킨 이유를 깨달았다. 이 이야기는 그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전혀 특이하지 않은 이야기이기도 했다. 정략결혼을 하는 일국의 군주가 원래 만나던 자국인 연인이나 정부가 있는 상황은 사실 없는 편이 이상한 것이었고 있는 편이 보통이었다. 그는 침착하게 라리에사 대공녀를 달랬다.  

16630323460698.jpg“대공녀님, 침착, 침착하십시오. 낙담하신 것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대국에는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한낱 정부 따위, 정실부인이신 왕세자비가 되실 대공녀님이 신경 쓰실 상대가 전혀 아닙니다.”

16630323460704.jpg“나와 결혼을 안 하겠다 하오!”

16630323460698.jpg“예?”

16630323460704.jpg“왕자가, 나와의 국혼을 물리겠대!”

  라리에사는 반쯤은 분노해서, 반쯤은 답답해서 자기의 가슴을 쿵쿵 쳤다.  

16630323460698.jpg“예에?”

  이번에는 르비엥 백작 역시 놀랐다.  

16630323460698.jpg“하오나 대공녀님, 그것은 알폰소 왕자가 단독으로 내릴 수 없는 결정입니다.”

16630323460704.jpg“그래, 알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어! 레오 3세 폐하께서 내리시는 결정, 국가 간의 대사, 그들은 우리의 제의를 거절하지 못할 것!”

  라리에사는 울부짖었다.  

16630323460704.jpg“우리가 이 썩을 땅에 온 지 거의 반년이 다 되어 가오! 그동안 자네가 호언장담한 것 중에 뭐가 이루어졌지?! 아무것도 없잖아!”

  르비엥 백작으로서는 매우 억울한 말이었다. 계약의 세부 내용에 대해서는 상당히 큰 진전이 있었고, 대부분의 디테일은 다 협상이 완료된 상태였고, 딱 한 가지에 대해서만 교착상태를 유지하는 중이었다. 화약의 배합식. 그러나 그래서 ‘혼인 동맹 계약서에 사인이 완료되었나’를 묻는다면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요’ 외에는 없기는 했다.  

16630323460704.jpg“그년을 없애야겠어. 알폰소 왕자가 고작 여자에 눈이 뒤집어져서 국혼을 물리겠다고 왈왈 짖는데, 그 여자가 없어져 버리면 나와의 국혼을 피할 이유도 사라지는 것 아니오?”

16630323460698.jpg“대공녀님! 통촉하여 주십시오!”

  르비엥 백작은 간절하게 매달려 그녀를 말렸다.  

16630323460698.jpg“데 마레 추기경의 차녀는 물론 대공녀님에 비하면 먼지 같은 신분이기는 합니다만 성황청 내부 소장파의 수장인 데 마레 추기경의 친딸입니다! 함부로 그녀를 죽여 없애면 그 후환을 감당할 길이 없습니다!”

  라리에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16630323460704.jpg“대 갈리코 왕국이라며? 나의 아버지와 나의 사촌오빠이신 국왕께선 나의 어려움을 도외시하지 않으실 것이라며?”

  라리에사 대공녀는 창백해진 얼굴로 부들부들 떨며 말을 이었다.  

16630323460704.jpg“한낱 성직자의 사생아 따위에게 이 내가 수치를 당하고 있는데 자네가 좋아하는 그 ‘대 갈리코 왕국’은 곧 공주 자리에 오를 대공녀를 위하여 그 망할 년의 목숨 하나 거둘 수 없단 말이오?”

16630323460698.jpg“송구합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대공녀님!”

  필사적으로 라리에사 대공녀를 말리는 르비엥 백작의 대치를 깨뜨린 것은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이었다.  

16630323460698.jpg“쯧쯧쯧……. 모시는 주군의 소원조차 들어드리지 못하다니, 자네는 참 무능한 수하일세.”

  르비엥 백작은 기겁해서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홱 돌아보았다.  

16630323460698.jpg“미레이유 공작 각하!”

  갈리코 사절단의 공식적인 총 책임자, 미레이유 공작이 라리에사 대공녀 숙소 문간에서 느릿하게 걸어 들어왔다. 초대도 없이 다 큰 처녀, 그것도 자신보다 위의 직급인 대공의 딸 방에 들어오는 것은 엄청난 무례였지만 라리에사는 굳이 미레이유 공작을 저지하지 않았다. 대신 펄쩍 뛴 사람은 르비엥 백작이었다.  

16630323460698.jpg“미레이유 공작 각하! 어찌 이곳으로 오셨습니까! 각하께서 여기에 들어오시는 것은 예법에 어긋납니다!”

16630323460698.jpg“사절단의 대표로서, 우리의 에스코트 대상인 대공녀께서 몹시 침울해져 계신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번개같이 달려왔지.”

  그는 느물느물한 미소를 지었다.  

16630323460698.jpg“처소의 주인께서 허락을 해 주신다면 결례도 아니지 않나, 안 그렇습니까 라리에사 대공녀?”

  라리에사는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이라면 르비엥 백작을 굴복시키고 그녀가 원하는 대로 아리아드네 데 마레의 목숨을 거둬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미레이유 공작은 나름의 계산법이 다 서 있었다. 미레이유 공작가는 대대로 내려오는 갈리코 왕국에서 제일가는 명문이었으나, 선왕의 친동생인 외드 드 브리앙이 왕좌의 상속을 포기하며 대신 발로아 대공위를 수여 받은 것을 계기로 영향력이 줄고 있었다. 자꾸만 의전이든, 영향력이든, 권력이든, 귀족 사회의 이인자로 밀려나고 있는 것이다.

16630323460698.jpg‘외드의 딸이 멍청하기 짝이 없어서 참 다행이야.’

발로아 대공가에서 에트루스칸의 카를로 왕가와 사돈을 맺게 된다면 그들의 영향력은 더욱더 커질 것이다.

16630323460698.jpg‘국왕 폐하께서 주시하고 계시는 혼사를 그르칠 수는 없지.’

미레이유 공작은 반드시 이 약혼을 성사시키라는 필리프 4세의 신신당부를 받고 에트루스칸으로 왔다. 그는 수상해 보이지 않도록 최대한 시간을 끌며 버티되, 반드시 필요하다면 화약의 배합식까지도 허락할 수 있다는 비밀 지령을 받고 파견된 터였다. 만약 라리에사가 알폰소 왕자와 약혼하는 데에 실패하고 갈리코로 돌아가게 된다면 그 역시도 무사하지 못하리라.

16630323460698.jpg‘하지만 혼사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발로아 대공가 측의 명명백백한 잘못으로 어그러진다면?’

예를 들어, 라리에사 대공녀의 카를로 왕가에 대한 결정적인 잘못이라던가.

16630323460698.jpg‘하다못해 라리에사 데 발로아의 약점이라도 제대로 틀어쥐고 있는 셈이 된다면, 나중에 외드 대공의 양보를 받아낼 패가 될 수 있다.’

미레이유 공작은 라리에사 대공녀의 난동이 너무나도 반가웠다. 고마워서 발등에 키스라도 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는 그 고마운 마음을 담뿍 담아, 외드 대공의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이제 단 하나 남은 고명딸에게 제의했다.  

16630323460698.jpg“대공녀님께서 누구의 목숨을 원하신다고요?”

  라리에사의 얼굴에 대번에 화색이 돌았다. 그녀는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증오해 마지않는 이름을 외쳤다.  

16630323460704.jpg“아리아드네 데 마레!”

16630323460698.jpg“대공녀님! 안 됩니다!”

  르비엥 백작의 자지러지는 비명이 방 안을 메웠다.  

16630323460698.jpg“심대한 외교 문제로 비화할 수 있습니다, 대공녀님! 이건 에트루스칸 왕국뿐만이 아니라 성황청마저 적으로 돌리게 되는 일입니다!”

  미레이유 공작은 빙글빙글 웃었다.  

16630323460698.jpg“남자를 뺏었다고 살해까지 당하다니. 제가 보기에도 지은 죄에 비해서 받을 벌이 조금 큰 것 아닌가 싶습니다.”

  라리에사의 눈에서 분노가 튀겼다. 이놈 저놈 다 똑같아! 말이 통하는 사람이 없어! 하지만 미레이유 공작은 라리에사를 올바른 길로 계도하려고 오늘 이 자리에 선 것이 아니다.  

16630323460698.jpg“차라리 남자가 자기 발로 그 여자를 떠나게 하면 어떻습니까?”

  라리에사가 분통을 터트렸다.  

16630323460704.jpg“그게 말처럼 쉬운 줄 아오?”

16630323460698.jpg“왜요. 어려울 게 무어 있습니까. 남자는 어떤 때 여자를 떠나지요?”

16630323460704.jpg“……여자의 외모가 추할 때?”

  라리에사는 스스로의 콤플렉스대로 대답했다. 미레이유 공작이 생각한 것은 정확하게 그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크게 웃으며 박수를 쳤다.  

16630323460698.jpg“우리 대공녀님은 참으로 영민하십니다. 그래요, 남자는 여자가 여성으로서 상품 가치가 떨어졌을 때 그 여자를 떠나지요.”

  라리에사는 눈을 번득였다.  

16630323460704.jpg“그래, 그게 좋겠군. 그 계집애 얼굴에 칼자국을 내시오! 예사크에서 십 년은 구르다 온 용병처럼 흉측하게! 얼굴 전체를 가로지르는 긴 흉터!”

  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난장판이 된 방 안을 빙글빙글 돌았다.  

16630323460704.jpg“알폰소 왕자의 잘난 사랑이 추녀를 상대로 얼마나 가나 지켜보겠어! 내가 예쁘지 않아서 싫다고 했지? 나보다 더 흉한 여자를 상대로 당신의 사랑이 얼마나 갈지 두고 보겠어!”

  알폰소는 라리에사의 외모에 대해 언급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라리에사는 이를 기정사실이라고 생각했다. 미레이유 공작은 흥분한 라리에사 대공녀를 보며 입가에 긴 웃음을 띄웠다.  

16630323460698.jpg“자, 대공녀.”

  그는 엉망이 된 라리에사 대공녀의 처소에 있는 책상 위에서, 대충 양피지 한 장과 깃펜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는 깃펜에 잉크를 묻힌 후 양피지에 무언가를 휘갈겨 썼다.  

16630323460698.jpg“이걸 보세요.”

  그는 완성된 종이를 라리에사 대공녀에게 건넸다. 라리에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 양피지를 읽었다.  

16630323460704.jpg“이게 뭐지?”

  미레이유 공작의 미소가 더더욱 진해졌다.  

16630323460698.jpg“무엇이긴요, 이 미레이유를 대공녀님의 수족처럼 부리실 수 있는 계약서이지요.”

  심상치 않은 기색에 르비엥이 달려들었다. 그는 라리에사 대공녀의 손에서 양피지를 빼앗다시피 해서 내용을 읽어보았다. 「에트루스칸 국, 산 카를로 교구의 데 마레 추기경의 사생아인 아리아드네 데 마레를 죽이거나, 그에 준하게 해쳐 주십시오. 1123년 3월 18일, 라리에사 드 발로아.」 계약서치고는 지나치게 단출했다. 그 말인즉슨, 미레이유 공작에게 그 의무 이행에서 빠져나갈 방도가 많다는 뜻이다. 게다가 아래의 서명란에는 미레이유 공작의 이름은 없었고 라리에사 대공녀의 사인을 할 공간만이 있었다.  

16630323460698.jpg“이 무슨!”

  르비엥 백작은 미레이유 공작의 내심을 읽고는 분기탱천해서 외쳤다.  

16630323460698.jpg“공작 각하! 이게 무슨 짓입니까! 이게 무슨 계약서입니까! 절대로, 절대로 허용할 수 없습니다!”

16630323460698.jpg“어허, 주군께서 하시는 일에 어딜 아랫사람이 말을 얹는단 말인가. 발로아 대공가의 기강은 이렇게나 엉망인가?”

  르비엥 백작은 라리에사 대공녀를 향해 호소하기 시작했다.  

16630323460698.jpg“대공녀님, 지금 미레이유 공작께서는 대공녀님의 부친 되시는 발로아 대공 외드 각하의 약점을 잡으시려는 것입니다! 절대로 대공녀님께서 이런 일에 연루되었다는 서면 증거를 넘겨서는 안 됩니다!”

16630323460698.jpg“‘이런 일’이라니.”

  미레이유 공작은 야비하게 웃으며 르비엥 백작을 바라보았다.  

16630323460698.jpg“이 미레이유가 중간에 발을 뺄 거라고 생각하는 겐가? 나는 명예를 아는 사나이일세. 사람을 뭐로 보고!”

  그는 라리에사 대공녀를 바라본 채 그녀를 설득했다.  

16630323460698.jpg“이 계약서 내용대로의 이행은, 내 부하를 쓰지 않고 이 미레이유가 직접 내 손으로 이행하도록 하겠소이다.”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라리에사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미레이유 공작을 마주 바라보았다. 미레이유는 속으로 혀를 차면서, 라리에사를 위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16630323460698.jpg“내가 친히 공범이 되겠다는 말이오, 발로아 대공녀. 나쁜 짓을 함께 저지르면 그 공범끼리는 친구가 되는 법이라오. 배신이 불가능하거든.”

  라리에사는 미레이유에게 ‘그래서 당신이 얻는 것이 뭔가요?’라고 물으려고 했다. 대공녀의 표정을 읽은 미레이유 공작은 선수를 쳤다.  

16630323460698.jpg“내 딸 같아서 그래.”

16630323460704.jpg“네?”

16630323460698.jpg“약혼자에게서 배신당한 처절한 아픔에도 불구하고 도움이 되지 않는 무능한 수하, 챙겨주지 않는 아버지.”

  미레이유 공작은 라리에사 대공녀의 아픈 곳을 찔러왔다.  

16630323460698.jpg“대체 어떤 아비가 자식을, 그것도 다 큰딸을 외국에 보낸 채로 이리 오래 내돌린단 말이오?”

  라리에사 대공녀는 수치심에 붉어진 얼굴을 고개를 숙여 숨겼다. 아니, 숨기려고 들었다. 하지만 미레이유 공작은 한 번 포착한 그녀의 약점을 쉽게 놔주지 않았다.  

16630323460698.jpg“내 딸한테는 도저히 그런 짓 못 해. 나라면 내 딸을 외국에 내보낸 상태라면 뭐라도 상관없으니 다 퍼주더라도 반드시 결혼 계약을 성사시켰을 거요. 내 사촌 여동생이 그 입장에 처해 있어도 똑같지.”

  라리에사는 입술을 깨문 채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16630323460698.jpg“그런데 우리의 존경하옵는 외드 대공께서 위대하신 필리프 4세께 그런 압력을 넣은 적이 있소? 손 놓고 있잖아?”

  외드 대공이 손을 놓고 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필리프 4세가 혼인 동맹 사절단의 총 책임자를 외드 대공이 아닌 미레이유 공작으로 정해 보낸 이유 역시 거기에 있었다. 필리프 4세는 외드 대공을 책임자로 보내게 되면 그가 딸의 안위에 눈이 먼 나머지 갈리코 왕국에 불리한 안에 서명해버릴까 봐 책임자 후보군에서 제외해 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이 사실을 라리에사 대공녀가 알 필요는 없다.  

16630323460698.jpg“여기 와 있는 게 수잔느 대공녀였다면 과연 외드 대공이, 필리프 4세가 지금처럼 굴었을까?”

  라리에사의 얼굴에 새파란 분노가 떠올랐다. 미레이유 공작은 히죽히죽 웃으면서 덧붙였다.  

16630323460698.jpg“아버지와 사촌오빠가 돌봐주지 않는다면 대공녀는 자력구제 할 수밖에 없잖소. 이 사실이 갈리코에 알려진다손 치더라도 아무도 대공녀를 비난하지 않을 거요. 먼저 버림받았는걸.”

  미레이유 공작은 계약서를 다시 한번 라리에게 대공녀에게 내밀었다.  

16630323460698.jpg“자, 어서.”

  라리에사 대공녀는 홀린 듯이 깃펜을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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