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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4화> 왕궁 마차 (651/733)

<제134화> 왕궁 마차2022.03.16.

16630323521355.jpg“안 됩니다, 라리에사 대공녀님!”

  르비엥 백작이 몸을 던져 드레스 위로 라리에사의 다리를 껴안았다.  

16630323521355.jpg“절대로 사인하시면 안 됩니다!”

16630323521369.jpg“이거 놔!”

  라리에사 대공녀는 거칠게 발길질을 했다. 르비엥 백작은 라리에사의 구둣발에 이마를 정통으로 맞고 바닥을 굴렀다. 르비엥 백작의 고통스러운 듯한 신음에도 불구하고 라리에사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르비엥 백작에게 자신의 분노를 퍼부었다.  

16630323521369.jpg“닥쳐 르비엥!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 이제까지 자네 말을 들어서 나한테 이득 된 게 뭐가 있어!”

  라리에사 대공녀는 타란토 별궁 복도에서 알폰소 왕자와 최초로 싸웠던 날 르비엥 백작이 했던 조언을 되새기며 이를 갈았다.  

16630323521369.jpg“르비엥, 내가 뭐랬어! 그날 ‘알폰소 왕자님께 혹여 다른 여자가 있어서 나에게 차갑게 구시는 것 아닐까’라고 했더니, 알폰소 왕자의 성품상 그럴 일은 절대로 없으니 나더러 왕자의 환심을 사는 데 주력하라고 했잖아!”

  지난 수치심마저 자극당한 라리에사의 분노는 활활 타올랐다.  

16630323521369.jpg“자네 말을 듣고 난 머저리처럼 알폰소 왕자 앞에서 알랑방귀를 뀌었어! ‘절 만나주세요, 저를 바라봐 주세요, 저와 함께 산책을 나가 주세요 알폰소 왕자님!’ 얼마나……. 얼마나…….”

  라리에사는 숫제 오열하기 시작했다.  

16630323521369.jpg“내가 얼마나 우스워 보였을까……. 얼마나 바보 같고……. 멍청하고…….”

  라리에사 대공녀는 언니, 수잔느의 그늘에 가려 열등생으로 지내야 했던 어린 시절의 상처부터 다 되짚어가며 스스로를 흠집 내고 있었다. 수잔느보다 떨어지는 여동생, 조금 모자라지만 착한 아이. 유모와 궁정 부인들이 어머니에게 던지는, 수잔느는 빠르지만 라리에사는 조금 느리네요, 둘째라서 그렇겠죠, 같은 말들과 시선들이 생생하게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르비엥 백작은 바닥에 구른 채로 머리를 감싸 안고 신음을 내고 있었다. 라리에사 대공녀의 말을 듣고 있는지도 불분명했다. 미레이유 공작은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눈물로 엉망이 된 라리에사 대공녀의 손에 잉크를 찍은 깃펜을 들려주었다.  

16630323521355.jpg“자아. 대공녀. 어서. 복수할 기회야.”

  라리에사 대공녀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미레이유 공작이 내민 계약서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미레이유 공작은 진하게 웃으며 잉크를 후후 불어 말렸다. 그는 책상 위에서 대공녀의 인장까지 찾아 밀랍을 녹여 부은 후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16630323521355.jpg“이것도.”

  기왕 서명한 것, 이판사판이었다. 라리에사는 자신의 인장마저 미레이유 공작이 내민 ‘계약서’에 꾹 눌러 찍었다. 공작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라리에사의 서명이 있는 계약서를 둘둘 말아 품속에 넣었다.  

16630323521355.jpg“약속은 지키지.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그 계집애가 궁전 안에 있는 오늘이 어떻소?”

  라리에사는 떨리는 입술을 악물고 말했다.  

16630323521369.jpg“빠르면 빠를수록 좋아요.”

16630323521355.jpg“좋아. 시원시원한 아가씨야.”

16630323521369.jpg“약속은 지켜요.”

16630323521355.jpg“말해 무엇하리. 내 세 시간 내에 대공녀에게 낭보를 전해 드리리다.”

  미레이유 공작은 라리에사 대공녀와 바닥을 구르는 르비엥 백작을 남겨 두고 유유하게 대공녀의 처소를 떠났다. 그는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에 대한 복안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16630323521355.jpg“공작 각하. 이야기는 잘 되셨습니까.”

  대공녀의 처소에서 나온 미레이유 공작에게 그의 심복이 따라붙었다.

16630323521355.jpg“잘 되다마다.”

16630323521355.jpg“이제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라리에사 대공녀의 약점을 확보하셨으니 그냥 이대로 퇴각……?”

16630323521355.jpg“아니. 데 마레 추기경의 차녀에게 실제로 문제가 생겨야 이게 진짜로 라리에사 대공녀의 추문이 되지.”

  미레이유 공작은 음험하게 웃으며 입맛을 다셨다.  

16630323521355.jpg“왜, 우리가 미레이유 공작저에서 종종 하던 짓 있었지? 이번 일에 똑같이 한다. 왕궁 마차 하나를 구해와. 마부의 제복과 같이.”

  수하는 익숙한 일이라는 듯이 미레이유 공작에게 물었다.  

16630323521355.jpg“일 처리 담당자로는 누구를 보내시겠습니까?”

16630323521355.jpg“나는 신사야. 숙녀에게 한 약속은 지켜야겠지. 내 손으로 직접 하겠다.”

  수하는 약간 긴장한 모양이었다. 그는 조심스레 미레이유 공작을 말렸다.  

16630323521355.jpg“각하……. 저희가 원래 하던 것은 아주 기초적인……. 일종의 유희 같은 거였습니다. 여기는 타국의 왕궁이고 이렇게 마구 덤비기에는 상대가 지나치게 거물입니다. 자칫 실수라도 한다면 파문이 크게 일 겁니다.”

  아리아드네는 데 마레 추기경의 딸이기도 했지만, 산 카를로 사교계의 꽃이기도 했고 한때 성녀 소리를 들을 정도로 그 신실함 역시 명성이 높았다. 게다가 팔라지오 카를로 내에서 물의를 일으켰다 걸리면 외교 문제로 비화할 것이다. 하지만 미레이유 공작은 수하의 신중함에 되레 짜증을 냈다.  

16630323521355.jpg“안 걸리면 되지! 조막만 한 여자애가 무슨 반항을 할 수 있다고 그렇게 전전긍긍을 하나! 그래 가지고 큰일 하겠어?”

  찔끔 주눅이 들어 고개를 수그린 수하에게 미레이유는 야비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16630323521355.jpg“그리고, 이런 일을 당하면 여자는 입을 열 수가 없어.”

16630323521355.jpg“예? 칼로 공격하기로 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16630323521355.jpg“쯧쯧. 순진하기는. 계약서를 잘 읽어봐. 나는 ‘죽이거나 해친다’고 했지 뭘 어떻게 해칠지는 전혀 명시해놓지 않았다.”

16630323521355.jpg“……!”

16630323521355.jpg“결혼 시장에서 상품 가치를 떨어뜨리면 되는 거 아닌가. 방법은 내 맘대로지. 안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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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무도회의 나머지는 물처럼 매끄럽게 흘러갔다. 아리아드네와의 꿀처럼 달콤한 밀회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온 알폰소는 라리에사 대공녀가 무도회에서 떠났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몸이 좋지 않아서’ 일찍 쉬러 갔다는 전언이었다.

16630323528434.jpg‘두 번째 왈츠에서 했던 이야기가 그렇게 충격이었나.’

약간의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었다. 곧, 라리에사 대공녀와 영영 작별을 고할 수 있을 것이다. 알폰소는 죄책감에도 불구하고 라리에사가 옆에 없다는 사실에 기분이 깃털처럼 자유로워지는 해방감을 느꼈다. 아리아드네 역시 알폰소와의 만남을 끝낸 후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리로 돌아왔다.

16630323531129.jpg“아리아드네!”

줄리아와 왈츠를 추고 돌아온 라파엘은 아리아드네가 한참 자리를 비운 것을 알고는 좌불안석으로 불안해하다가, 그녀가 돌아오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16630323531129.jpg“놀랐습니다, 아리아드네. 어디를 다녀오신 겁니까!”

16630323531143.jpg“잠시, 정령과 바람을 쐬고 왔지요.”

아리아드네는 웃음을 머금고 답했다. 오늘의 무도회에서 수선화의 정령을 뽑는다면 단연코 알폰소일 것이다. 그녀의 남자는 정말, 너무 멋졌고 동시에 잔망스러웠다. 아리아드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까맣게 모르는 라파엘은 그녀의 장난기에 당황한 모양이었다.

16630323531129.jpg“제가 없는 동안에 무려 체자레 백작과 왈츠를 추고 오셨다면서요. 이런 사고뭉치 아가씨를 봤나.”

16630323531143.jpg“어머, 제가 못 할 짓 했나요.”

기분이 좋아진 아리아드네는 방글방글 웃으며 라파엘을 놀렸다. 당혹스러워진 라파엘은 아리아드네에게 자신의 의무를 상기시켰다.

16630323531129.jpg“아리아드네, 당신의 ‘친구’가 체자레 백작과의 왈츠를 막지 못한 절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아리아드네는 눈웃음으로 응답했다.

16630323531143.jpg“그게 문제라면, 잘 이야기되었어요. 정령님께서도 자기가 잘못한 일도 있으니 넘어가시겠다고 하셨다네요.”

그제야 아리아드네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있는 것인지 깨달은 라파엘은 머쓱하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16630323531129.jpg“이거 참, 파트너로서 낙제점을 받은 것 같군요.”

16630323531143.jpg“대학 학점은 좋으셨으니 괜찮아요.”

라파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16630323531129.jpg“그건 어떻게 아셨죠? 전 자랑한 적 없는데.”

16630323531143.jpg“왜인지 그럴 것 같았어요.”

아리아드네는 깔깔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16630323531143.jpg“그래서 말인데요…….”

  * * *

16630323531129.jpg“벌써 헤어질 시간이라니 아쉬운데요?”

16630323531143.jpg“그러게요. 오늘 너무 재미있었어요, 발데사르 소후작님.”

16630323531129.jpg“라파엘.”

아리아드네는 자신의 호칭 실수를 깨닫고 혀를 내밀며 웃었다. 보통 무도회가 열리면 귀족들은 삼삼오오 같은 날 열리는 여러 무도회를 옮겨 다니며 파티를 즐겼으나, 왕궁 무도회만은 예외였다. 초대 손님들은 카를로 왕가에 대한 예의로 대부분 끝까지 자리를 지켰고, 그 이후에 일정을 잡는다면 새로운 무도회가 아니라 아주 가까운 사람들끼리 모여서 한 잔씩 더 하는 정도로 그쳤다. 대개 신사들끼리 모여 살롱에서 알코올 한 잔 정도를 나누거나 귀부인들 사이에 가벼운 발포주를 조금 마시고 헤어지는 정도였다. 라파엘와 아리아드네는 왕궁 무도회가 끝난 후 사석에서 술을 함께할 정도로 친근한 사이는 아니었기 때문에, 무도회가 끝나는 것과 동시에 따로따로 흩어져야 맞았다.

16630323531129.jpg“그래도 댁까지 에스코트해 드릴 수는 있으니까요.”

16630323531143.jpg“저 마차를 따로 안 가지고 와서요. 안 데려다주시면 집에 못 가요.”

16630323531129.jpg“하하하. 왕궁 마차로 로터리까지 갔는데 제 마차도 없어진 상태이면 어떡하죠?”

16630323531143.jpg“집에 걸어갈까요?”

16630323531129.jpg“저야 좋습니다. 아름다운 시뇨라와 밤을 새워서 집까지 걷는다니, 로맨틱하네요.”

16630323531143.jpg“그건 싫어요. 구두란 말이에요.”

둘은 시답잖은 잡담을 나누며 ‘백합의 방’ 앞에서 월계수와 사슴 문양의 왕궁 마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왕궁 마차는 5분 간격으로 규칙적으로 손님들을 실어 날랐다. 이미 손님들은 상당수 빠져나간 뒤라 무도회장 앞은 썰렁했다. 그들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한 커플이 왕궁 마차를 타고 각 가문의 마차들이 도열해서 대기 중인 로터리 쪽으로 향했다. 주변에는 거의 아무도 남지 않았다.

16630323531129.jpg“저기, 우리 마차가 오는 것 같습니다.”

16630323531143.jpg“아? 금방 오네요?”

바로 앞의 커플이 왕궁 마차를 타고 떠난 직후였다. 왕궁 마차들이 질서정연하게 지키던 5분 간격이 깨진 점에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16630323531129.jpg“빨리 와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16630323531143.jpg“뭐, 그건 그래요.”

연착은 싫지만 이른 도착은 환영이다. 월계수와 사슴 문양의 왕궁 마차는 라파엘과 아리아드네 앞에서 멈췄다. 라파엘은 아리아드네를 먼저 에스코트해 마차에 태웠다. 라파엘이 자기도 올라타려고 했을 때, 퉁퉁한 체격의 왕궁 마차의 마부가 라파엘을 제지했다.

16630323521355.jpg“여자분만 모시고 오라는 전언입니다.”

16630323531129.jpg“예?”

라파엘은 당황해서 반문했다.

16630323531129.jpg“누가 보낸 전언인가요?”

제복을 차려입은 왕궁 마차의 나이든 마부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16630323521355.jpg“산 카를로의 작은 태양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16630323531129.jpg“아.”

라파엘은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16630323531129.jpg“이거, 그대의 정령이 그대를 부르는 모양인데요?”

그는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16630323531129.jpg“샘물의 요정께선 수선화의 정령을 만나러 가실 거지요?”

아리아드네는 간지러운 호칭에 그만 웃어 버렸다.

16630323531143.jpg“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그렇지만 그녀는 알폰소의 초대를 거절하고 라파엘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겠다고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라파엘은 입가에 아쉬움의 미소를 띠고 말했다.

16630323531129.jpg“그럼 오늘 밤 대리 파트너의 역할은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라파엘 데 발데사르는 품속에 지니고 있던 작은 선물 상자를 꺼냈다.

16630323531129.jpg“제 ‘시뇨라 오페르타’입니다. 집에 가서 열어 보세요.”

아리아드네는 웃으며 선물상자를 받았다.

16630323531143.jpg“고마워요. 덕분에 아름다운 무도회였어요.”

라파엘은 자신보다는 ‘수선화의 정령’ 덕에 아름다운 무도회였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뚜껑 없는 마차에 올라탄 아리아드네의 장갑 낀 손등에 이별의 키스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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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30323531129.jpg“언제든지, 임시 파트너가 필요하시면 또 불러 주세요.”

16630323531143.jpg“폐를 여러 번 끼칠 수는 없지요.”

16630323531129.jpg“폐라니요.”

그는 강하게 부정했다.

16630323531129.jpg“당신의 호출에 응하는 것은 제 기쁨일 것입니다.”

아리아드네는 웃으며 답했다.

16630323531143.jpg“고민해보고 연락드릴게요.”

라파엘은 지금이 헤어짐을 고해야 할 때라는 사실을 알았다.

16630323531129.jpg“그럼, 안녕히.”

푸른 드레스의 여인만을 태운 왕궁 마차가 그녀의 파트너를 무도회장에 남겨 둔 채 달가닥달가닥 화강암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늙은 마부가 뒷좌석을 흘긋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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