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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5화> 위기 (652/733)

<제135화> 위기2022.03.20.

알폰소는 중앙 궁전 맨 앞에 높이 솟아 위용을 뽐내고 있는 쌍둥이 탑 중 동쪽 탑에 올라 떠나가는 무도회 손님들을 바라보았다. 애달픈 그의 연인과 직접 인사를 나눌 수 없어, 떠나가는 뒷모습이라도 보고픈 마음이었다. 저 멀리, 푸른 드레스를 입은 검은 머리카락의 소녀와 붉은 망토를 걸친 은발의 청년이 마차를 기다리는 모습이 보였다.

16630323582623.jpg“라파엘 녀석.”

지나치게 아리아드네에게 가까이 붙어 서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알폰소는 친구마저 견제하는 스스로에게 약간 어이가 없었다.

16630323582623.jpg‘잘 지키면 됐지.’

그는 마음을 좀 넓게 갖기로 했다. 붉은 망토의 남자는 푸른 드레스의 여인을 마차에 태웠다. 여인은 마차에 올라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마차는 그 상태로 잠시 정차해있다가, 여인만 태운 채 출발해 버렸다.

16630323582623.jpg‘……?’

알폰소는 미간을 찌푸린 채 유심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라파엘은 천천히 마차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16630323582623.jpg‘왜 따로 출발한 거지?’

마차도 조금 이상했다. 알폰소는 아리아드네에게 자신의 ‘시뇨라 오페르타’를 전해주고 싶었기 때문에 아리아드네와 라파엘을 데리러 갈 마차의 마부에게 미리 전달을 귀띔해 놓았다. 그의 계획대로라면 마부가 라파엘이 보는 앞에서 아리아드네에게 ‘시뇨라 오페르타’를 전달해야 했다. 하지만 마부는 선물 같은 것을 꺼내지 않았다. 의구심 어린 알폰소의 눈길에 마차의 수상한 움직임이 잡혔다.

16630323582623.jpg“!”

마차는 로터리로 향하는 정남쪽이 아니라, 중간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맹렬한 기세로 달리기 시작했다.

16630323582623.jpg“이 무슨!”

사태를 파악한 알폰소는 쌍둥이 탑에서 전속력으로 뛰쳐나갔다. 저건 내가 보낸 마차가 아니다. 아리아드네에게 문제가 생겼다. * * * 아리아드네는 마차의 속도가 보통 왕궁 마차의 속도보다 빠른 것을 느꼈다.

16630323582651.jpg“저기, 속도 좀 줄여주시겠어요?”

말을 속보로 모는 대신 최대 마력으로 내달리기 직전까지 속력을 올리자 뚜껑 없는 마차의 차체가 좌우로 몹시 흔들렸다. 아리아드네는 마차 밖으로 튕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안쪽 손잡이를 꽉 잡았다.

16630323582651.jpg“저기요?”

하지만 마부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리아드네는 이때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아까부터 느껴지던 위화감이 착착 자리를 잡아갔다. 이상할 정도로 일찍 도착한 왕궁 마차, 왕궁에서 의전에 사용하는 시종은 모두 젊은 사람에 날렵한 체구인데 유독 나이가 많고 과체중이었던 마부, 얼굴이 드러나지 않도록 푹 숙이고 있던 고개! 이건 진짜 왕궁 마차가 아니다. 그녀는 정신없이 마차 안을 둘러보았다. 무기로 쓸만한 물건이 있으면 좋을 텐데……!

16630323582651.jpg‘저 마부의 뒤통수를 빡! 갈기면…….’

마부를 공격할 수 있다면 마차는 자연히 멈출 것이다. 하지만 왕궁 손님용 마차의 내부는 깨끗했고, 푸른 벨벳 쿠션 외에는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았다. 아리아드네는 푸른 쿠션을 집어 들어 망설임 없이 마차 밖으로 던졌다.

16630323582651.jpg‘누군가 제발 저 쿠션을 발견해라……!’

다음으로 그녀는 자신의 소지품을 점검했다. 날카로운 보석 빗이라도 머리에 꽂고 왔으면 좋았을 터였다. 머리에 꽂는 장식용 빗은 꼬리가 뾰족해서 송곳 비슷하게 쓸 수 있었다. 하지만 하필이면 그녀는 반묶음 머리를 하고 왔고, 머리에는 장식 빗 대신에 하늘하늘한 머리망을 쓰고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갑자기 문득 생각이 나 라파엘이 건네준 ‘시뇨라 오페르타’ 상자를 뜯어보았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푸른 공단에 다이아몬드를 박아넣은, 두껍고 튼튼한 장식용 리본 끈이었다.

16630323582651.jpg‘이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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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끈 공단은 상당히 강도가 있었다. 그녀는 두꺼운 리본 끈을 양손에 적당한 넓이로 말아 쥐었다. 아리아드네는 덜컥이며 흔들리는 마차 뒷자리에서 양다리를 무릎 넓이로 벌려 자세를 잡은 후, 젖먹던 힘까지 다해 뒤에서 끈으로 마부의 목을 졸랐다.

16630323582651.jpg“에잇!”

16630323586762.jpg“으헉!”

  마부는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목을 조르는 끈을 오른손으로 당겼다. 그는 그만 양손으로 쥐고 있던 말고삐 중 한쪽을 놓쳐 버렸다. 갑자기 기수를 잃은 오른쪽 말이 앞다리를 크게 들어 올리며 몸부림을 쳤다. - 덜컹!  

16630323582651.jpg“하……!”

마차가 크게 흔들리며 아리아드네는 마차 벽에 부딪혔고, 그녀는 참지 못하고 약간의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체중을 전부 실어 늙은 마부의 목에 매달리다시피 조이고 있는 공단끈은 절대로 놓지 않았다.  

16630323586762.jpg“으으윽!”

  마부는 신음소리를 내며 몸부림을 쳤다. 오른쪽 말은 자유를 찾아 대각선으로 뛰쳐나갔고, 여전히 고삐를 꽉 잡힌 왼쪽 말만 앞으로 똑바로 들리는 중이었다. 마차가 지독하게 흔들렸다. 기습을 당해서 목을 내주기는 했지만, 마부는 아리아드네보다 덩치가 두 배는 더 컸다. 그는 중키에 불과했지만 체중은 보통 남자치고도 몹시 많이 나가는 편이었다. 비대한 만큼 느렸지만, 무거운 만큼 힘이 강했다.  

16630323586762.jpg“이익!”

  그는 한 손으로 공단끈을 잡아당겨 풀려고 했다. 아리아드네는 죽을힘을 다해 매달렸다.

16630323582651.jpg“죽어!”

16630323586762.jpg“썩을 계집애가!”

  마부가 뱉는 의성어에서도 희미한 갈리코 악센트가 느껴졌지만, 말을 하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은 에트루스칸 사람이 아니다.

16630323582651.jpg‘외국인? 갈리코 사람? 갈리코 사람이 왕궁 안에서 이런 사고를 친다고?’

성황청쯤에서 갈리코와 에트루스칸 왕국, 양국을 이간질하기 위해 보낸 첩자가 아니라 정말 갈리코 사람이라면 이건 정치적 자살 시도다.

16630323582651.jpg‘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하지만 아리아드네의 생각은 마부의 반격에 중간에서 끊기고 말았다.  

16630323586762.jpg“에잇!”

  한 손으로는 온몸의 체중을 실은 아리아드네를 떼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그는 아예 왼손의 고삐마저 던져 버리고 양손으로 공단끈을 당겼다. 덩치 좋은 남자가 전력으로 당기는 힘에는 버틸 수가 없었다.

16630323582651.jpg“아악!”

  - 덜컹! 아예 자유로워진 말 두 필이 사방으로 날뛰었다. 뚜껑이 열린 마차는 뒤뚱뒤뚱 흔들리며 금방이라도 엎어지기 직전이었다. 마차가 크게 요동치는 것과 동시에, 마부는 아리아드네의 손에서 공단 끈을 뺏는 데에 성공했다.

16630323582651.jpg“악!”

두 번 감아서 꽉 쥐었던 손에서 공단끈이 빠져나가며 보석 자수가 피부를 북, 할퀴었다. 손목도 삔 것 같았다. 끊어질 듯이 아팠다.

16630323582651.jpg‘이대로라면……. 안 돼!’

아리아드네는 마차의 속도를 가늠했다. 말들이 직선으로 달리는 대신에 사방 천지로 뛰쳐나가는 바람에 마차의 속도 그 자체는 상당히 줄어 있는 상태였다. 그녀는 대충 주변을 가늠해 보았다.

16630323582651.jpg‘지금이다!’

그녀는 마부가 뒷좌석으로 그녀를 잡으러 오기 전에 마차에서 몸을 던졌다.  

16630323586762.jpg“저 망할 계집이!”

  관성으로 달려나가는 마차에서 갈리코 어로 욕설이 들렸다. 다 잡은 먹잇감이 탈출하자 약이 오른 모양이었다. - 쿵! 아리아드네는 섬세하게 조경이 되어 있는 왕궁의 정원에 몸을 던졌다. 관목이 쿠션 역할을 해서 받아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뭇가지가 일부 충격을 완화해 준 것은 맞았다. 하지만 나뭇가지에 온몸이 쓸리고 찔렸다.

16630323582651.jpg‘저놈이 돌아오기 전에 도망가야…….’

관목숲에 쓰러진 아리아드네는 정신을 차릴 겨를도 없이 간신히 사지를 추슬러 벌떡 일어났다. 한시라도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풀숲 속으로 달아나는 대신 포장된 오솔길을 따라 왔던 길로 일직선으로 달렸다. 왕궁의 정원에는 어차피 몸을 숨길만 한 공간도 없다. 게다가,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어차피 끝장이다. 숨는 것보다는 사람을 만날만한 장소로 달리는 게 맞았다. 왕궁은 통행량이 많은 곳이다. 시종이건 시녀건 누군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16630323582651.jpg“아윽!”

정신없이 달리던 아리아드네는 왼발을 삐끗했다. 무도회 성장(盛裝)을 위해 챙겨 신은 높은 굽의 구두가 범인이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신발을 벗어 던졌다. 반대쪽 신발도 벗은 그녀는 구두 한 짝을 손에 쥔 채 절뚝절뚝 걸었다.

16630323582651.jpg‘안 돼, 속도가 느려지면 따라잡힐 텐데……!’

풀숲 속으로 달아났어야 했나, 새삼 후회가 드는 그녀였다. 하지만 사람은 할 수 있는 것을 일단 끝까지 다 해봐야 한다. 아리아드네는 다리를 절면서도 묵묵히 앞으로 걸었다. 이건 따라잡히거나, 누군가를 만나거나, 시간 싸움이다! 그러나 하늘은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다.  

16630323586762.jpg“이 망할 년, 잡았다!”

  어느새 한달음에 달려와 거리를 좁혀버린 마부, 아니 갈리코인이 아리아드네의 머리채를 잡아챘다.

16630323582651.jpg“악!”

그녀는 두피가 뽑혀나가는 듯한 통증에 비명을 질렀다.  

16630323586762.jpg“이 몸을 이렇게까지 고생하게 한 계집은 네가 처음이야.”

  갈리코인은 아리아드네의 머리채를 오른손에 그러쥔 채 그녀의 등 뒤에서부터 그녀를 을렀다.  

16630323586762.jpg“그 대가로 좋은 구경시켜주마.”

16630323582651.jpg“미친 새끼……. 대 에트루스칸 왕국은 이런 도발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16630323586762.jpg“암, 그래야지. 그래야 보람이 있지.”

  아리아드네는 갈리코인의 언사에 의구심을 느꼈다. 그는 외교분쟁을 거리끼기는커녕 도리어 기꺼워하고 있었다.

16630323582651.jpg“당신이 바라는 게 뭐야?”

16630323586762.jpg“오늘 약간의 재미를 보고 나면 알게 될 텐데 무에 그리 급하다고. 난 아가씨의 예쁜 두 눈에서 눈물을 뽑고, 그대의 아버지가 길길이 날뛰는 모양이 보고 싶다네.”

  둘은 각자의 모국어로 대화하고 있었지만 서로 완벽하게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상대방도 에트루스칸어를 능통하게 하는 자다. 그는 아리아드네의 머리채를 잡은 채로 그녀가 걸치고 있던 망토를 쭉 잡아 찢었다. 망토가 찢겨 나가며 망토와 연결되어 있던 파틀렛*도 찢어져 그녀의 흰 목덜미와 하얀 어깨가 드러났다.  

16630323586762.jpg“이건 숲속에 던져놓을 거야. 누군가가 찾으면 재미있는 상상을 하지 않을까?”

16630323582651.jpg“뭐라고?”

점점 더 불길해져 가고 있었다.

16630323582651.jpg“당신 설마……?”

갈리코인은 아리아드네의 걱정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16630323586762.jpg“흐흐흐, 걱정하지 마시게나, 이 몸은 아쉽게도 그런 짓을 하기에는 이미 너무 늙어서, 야외는 무리야.”

16630323582651.jpg“미친 새끼가!”

16630323586762.jpg“숙녀가 고운 말을 써야지, 곧 얼굴 쳐들고 사교계에 돌아다닐 수는 없겠지만!”

  그는 아리아드네의 오금을 무릎으로 강하게 쳤다. 그녀는 신음을 흘리며 무릎을 꿇고 말았다.  

16630323586762.jpg“건드리면 안 될 남자를 도대체 왜 건드려. 분수에 안 맞는 물건을 탐하면 화를 입는 법이야.”

  갈리코인은 아리아드네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며 을렀다.  

16630323586762.jpg“고귀하신 분이 너 때문에 화가 많이 나셨어. 분수에 맞지 않게 나댄 벌을 받아야지.”

  그는 오늘의 사건이 라리에사 대공녀 때문이라는 힌트를 넌지시 흘렸다. 저쪽에서 감을 잡고 노발대발해 주어야 한다. 그때 그가 손에 쥔 계약서로 협박하면 외드 대공은 뭐든지 미레이유 공작에게 양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단기로는 카를로 왕가와의 혼담, 장기로는 딸의 인생이 날아갈 테니.  

16630323586762.jpg“자, 뭐부터 시작해 볼까? 일단 당한 대로는 갚아 주어야겠지?”

  그는 아까 그녀가 갈리코인의 목을 졸랐던 것과 같은 자리에 솥뚜껑만 한 손을 얹었다. 갈리코인은 그녀를 꽉 옥죈 손에 힘을 주었다.

16630323582651.jpg“하윽!”

숨이 막혀왔다. 이러다가 진짜 죽을 수도 있겠다……! 아리아드네는 공포로 전신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갈리코인은 그녀를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는지 잠시 있다가 손아귀에 쥔 힘을 뺐다.  

16630323586762.jpg“뭘 어떻게 해야 네 아버지가 가장 분노할까?”

  그녀는 대꾸하고 싶었다. 당신이 나에게 무슨 짓을 하든 간에 내 아버지를 진심으로 화나게 할 수는 없다고. 하지만 공포에 잠겨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16630323598079.jpg“그만둬!”

그녀가 하고 싶었던 말이 명료하게 공기를 뚫고 울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 후웅! 허공을 가르는 금속의 소리가 났다. - 퍽! 아리아드네의 목을 죄고 있던 남자의 인영이 허수아비 쓰러지듯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급작스레 자유의 몸이 된 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 훙! 금속 휘두르는 소리가 한 번 더 났다. - 빡! 이번에는 두개골 깨지는 소리가 났다. 바닥에 쓰러진 갈리코인은 미동조차 하지 못했다. 그제야 제식용 검을 휘두른 남자, 알폰소 왕자는 바닥에 쓰러진 그의 여인에게 뛰어들었다.

16630323582623.jpg“아리아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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