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2화> 카루소 대표의 복수
“뭐? 카멜리아가 쓰러졌다고?”
아리아드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산차가 조심스레 말했다.
“그냥 쓰러지신 것도 아니고, 유산이래요⋯⋯.”
아리아드네는 아무 말 없이 앞이마를 짚었다. 관자놀이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이사벨라가 또 업을 지었다.
막아야 할 의무가 자신에게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진작에 손을 쓸걸.
그녀는 전생에 카멜리아의 인생이 어떻게 풀렸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오타비오와 결혼해서 콘타리니 백작부인이 되고⋯⋯. 자식은 있었던가? 그 아이들은 다 건강히 자랐던가?
그러나 옛날 생각을 하며 걱정해봤자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는 법이다. 아리아드네는 현재의 질문을 했다.
“카멜리아는 좀 괜찮대?”
여기엔 많은 내용이 들어가 있었다. 산차는 이제 아리아드네와는 영혼의 단짝에 가까웠다. 그녀는 아리아드네가 뭘 묻는지 단번에 다 알아챘다.
“건강 자체는 좋지 않으시지만, 다음 임신에는 문제가 없으신가 봐요. 생각보다 차분하시대요.”
카멜리아도 나름 야망이 이글이글 끓어오르는 여자였다. 잃어버린 아기를 생각하며 울기보단 다음 아기를 기다리며 체력을 쌓을 애다.
“그나마 다행이네.”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아기가 가능하다니 카루소 대표도 크게 상심하지는 않았으리라. 그녀는 가볍게 물었다.
“카루소 대표도 별일 없지?”
아내 간호는 잘 하고 있냐는 뜻으로 물은 질문이었다. 그런데 산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어⋯⋯. 되려 카루소 대표께서 이성을 잃으셨다고 해요. 그분답지 않게⋯⋯. 비텔리 가문이 뒤집어졌었다고⋯⋯.”
카루소 대표에겐 카멜리아 배 속에 있던 아이가 첫아기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전처에게서 얻은 장녀 페트루치아가 있었다.
그러나 아리아드네가 생각지 못한 부분은 카루소 대표가 항상 카멜리아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에게 자신의 어린 아내는 남부러울 것 없이 살다가 자기 때문에 많은 것을 포기한 여자였다.
그런데 이사벨라 무리는 무려 그 카루소 대표 앞에서 카멜리아에게 ‘너는 귀족이 아니니 우리 무리에 낄 수 없다’는 선고를 내려 그의 버튼을 정확하게 눌렀다.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문병 차 비텔리 가를 방문한 아리아드네에게 카루소 대표는 원한에 차 울부짖었다.
“내 자식을 죽인 인간들, 내 아내 눈에서 피눈물 나게 한 여자들을 가만 안 두겠습니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여러 번 했는지 그의 입술은 팅팅 부어 있었다.
“영혼을 팔아서라도 복수할 겁니다!”
위로하러 들렀다가 뜻밖의 복수 의지를 맞닥뜨린 아리아드네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잠깐만요.”
그녀는 카루소 대표를 제지했다.
“정말로 복수하고 싶으신가요?”
“예!”
“사업에 지장이 좀 가게 되더라도요?”
“무엇이 됐건 상관 없습니다!”
나중에 카멜리아와 페트루치아 명의로 재산을 좀 빼놓으라고 조언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아리아드네는 손사래질을 했다.
“영혼은 넣어두세요.”
멀게는 지옥, 가깝게는 이단심판관과 척지지 않더라도 카루소 대표가 귀족님네들에게 복수할 방도는 얼마든지 있었다.
“대표께서 콘타리니 백작가에 복수하기 위해 파시는 건 채권으로 족해요.”
“예? 채권을 팔라니요?”
카루소 대표는 아리아드네의 행간을 절반만 이해했다.
“⋯⋯제 복수를 대리해 줄 사람에게 카멜리아가 콘타리니 가로부터 받아야 할 돈을 넘기라는 겁니까?”
일반 백성들에게 돈을 빌려준 사채업자들은 도저히 받아내기 어려워진 악성 채권을 자기들보다 더 악질인 업자들에게 팔았다. 그들은 주로 폭력배였다.
폭력배들은 싸게 산 채권을 빌미로 변제할 능력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겁박했다.
가서 몸을 팔아라, 팔 몸뚱이가 없으면 자식이라도 팔라며 으름장을 놓아 마지막 밀 한 알까지 강취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난한 사람 대상이었지, 콘타리니 백작가 같은 대귀족에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었다.
폭력배를 보내봤자 콘타리니 백작가 문 앞에서 백작가의 사병에게, 사병이 없더라도 국왕의 치안유지대에게 쫓겨날 것 아닌가!
“그렇지요.”
“악성 채권 사입(仕入)하는 사람들에게요⋯⋯?”
“아니요, 아니요.”
아리아드네는 웃었다.
”나중에는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 말에 카루소 대표의 귀가 쫑긋 섰다.
”일단 카루소 대표께서는 채권이 있다는 걸 법정에서 확인부터 받으셔야 하지 않습니까?”
카루소 대표는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그 법정의 왕은 오타비오 데 콘타리니, 그 자식인데 제가 무슨 수로 채권을 법정에서 확인받겠습니까.”
카루소 대표에게 이제까지 오타비오는 복덩이 같은 카멜리아를 버리고 쓰레기 같은 이사벨라 데 콘타리니를 거둔 이해 안 갈 녀석에 불과했다.
큰 악감정은 없었다. 그놈이 그렇게 바보 같은 선택을 해 주지 않았다면 카루소 대표가 카멜리아와 만날 일 자체가 없었을 테니까.
그러나 이번에는 오타비오의 행동, 정확히는 오타비오의 무작위 덕에 날뛰는 이사벨라의 손속에 카멜리아가 다쳤다.
그는 오타비오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카루소 대표는 분노를 숨기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그 머저리 놈을 가만두지 않겠습니다!”
“채권을 팔아요.”
이건 아리아드네가 대신 채권을 사서 재판을 진행해 콘타리니 가문에서 돈을 받아내겠다는 의지인가? 카루소 대표는 어리둥절해졌다.
하지만 오타비오 본인이 판사인데 그 누구를 앉힌들 그게 가능할까?
카루소 대표는 이게 혹시 체자레 공작이나 루비나 공작부인, 혹은 알폰소 왕자께 채권을 팔아 대리 추심을 부탁하라는 소리인지 고민했다.
저 셋이라면야 오타비오의 팔목을 비틀어 돈을 다져다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카루소 대표는 저 중 아무와도 인연이 없었고, 그건 카멜리아의 친정인 카스틸리오네 가문도 마찬가지였다.
저 셋이 그를 위해 그렇게 해줄 리 역시 없었다.
이건 카루소 대표 및 카스틸리오네 가문을 위해 콘타리니 가문과 완전히 척을 지겠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누구에게요? 대체 누가 이걸 사주겠습니까?”
그래, 이건 오타비오가 버티고 앉아 있는 한 현금화가 불가능한 채권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씩 웃으며 말했다.
“예삽교 교단에 파세요.”
“!”
카루소 대표의 입이 망치에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떡 벌어졌다.
“아, 백작님!”
그리고 이내 그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당신은 천재입니다!”
중앙대륙에서의 예삽교는 왕이 관장하는 세속 재판과 별개인 종교재판소를 운영했다.
원래는 혼인, 출생, 사망 등의 기록을 관리하고 그 기록의 진위를 다투기 위해 만들어진 재판소였다가, 이단심판소 기능이 추가되었다.
그랬다가 루도비코 법황 대에 와서 수도원 등 민사소송의 일방이 성직자일 때도 종교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대륙법이 변경되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아버지의 것은 아버지에게’라는 격언에 충실하겠다는 미명 하였지만 이 권한은 결국엔 루도비코 법황이 세속 군주들을 상대해 거둔 승리였다.
정확히는, 모든 군주는 아니고 루도비코 법황이 십자군을 결성해 보내며 십자군에 종군을 포함해 일체의 기여를 거부한 레오 3세 및 비슷한 군주들의 손목을 비틀어 얻어낸 쾌거였다.
“수도에 있는 교단 지부에 팔면 이해관계가 이거저거 얽혀 있으니 안 사려 들 수도 있어요.”
멀리 갈 것도 없이 데 마레 추기경의 딸이 콘타리니 가문의 안주인이다.
“그 채권은 지방에 있는 교단이나, 아니면 아예 해외에 위치한 교단으로 넘겨요.”
“추천하실 만한 교단이 있으십니까?”
“글쎄요. 우리 아버지가 계신 산 카를로 교구는 피하시는 게 좋을 것 같다, 정도?”
알아서 찾아보라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백작님!”
* * *
그리고 카루소 대표의 손속은 재빨랐다.
“왕궁 상설 재판소의 재판관인 내가 왜 종교재판소에 출석해야 하느냔 말이야!”
- “교회 돈을 떼먹으려고 들지만 않으면 아무 문제 없으실 거요.”
“그게 왜 교회 돈이냐고!”
- “카스틸리오네 남작가에서 콘타리니 가문에 대한 채권을 아베르루체 수도원에 팔아버렸소. 그럼 이제 그 돈은 교회에 갚아야 할 빚이지.”
종교 재판소에서 파견 나온 건장한 수사 여러 명이 위압적으로 오타비오를 둘러싸고 마차에 태웠다.
“안 간다고!”
- “파문당해도 괜찮소?”
오타비오는 그 말을 듣고서야 조용해졌다.
종교재판소는 허름한 마차를 개조한 순회 법원이었다.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마차 안에 진귀한 장식의 교회법전과 이제까지의 판결문 양피지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건장한 흰옷의 수사들이 보초를 서고, 수많은 사람이 뚱그렇게 큰 원을 그려 구경하는 가운데 종교재판관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베르루체 수도원의 수도원장에게 물었다.
“이것은 어떻게 된 일인고?”
“존경하옵는 재판장님.”
아베르루체 수도원장은 80이 다 된 꼬부랑 노인이었다.
시골 할아버지처럼 생긴 수도원장은 옛날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찬찬히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옛날에 천하에 나쁜 놈이 있었답니다. 자기의 잘생긴 얼굴과 높은 신분으로 젊은 아가씨를 결혼할 것처럼 속였고, 그 아가씨의 아버지 되는 남작님은 딸이 좋은 남자를 만난 기쁨에 예비 사돈댁에 큰돈을 빌려줬지요. 어차피 지참금으로 딸이 가져갈 돈이라고 생각하고 말입니다.”
종교재판관은 외알 안경을 쓴 깡마르고 꼬장꼬장하게 생긴 50대 남자였다.
그는 이 옛날이야기 같은 스토리텔링에 아무런 감흥을 보이지 않은 채 이야기를 들었다.
“그 천하의 나쁜 놈은 더 젊고 자기에게 알랑거리는 여자를 만나 혼기가 꽉 찬 아가씨를 뻥 찼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파혼한 거지요. 그러나 그럴 때를 대비해서 이 약혼계약서에는 위약금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여자의 아버지가 현명하셨던 게지요.”
종교재판관은 자신의 손에 들린 양피지를 읽어나가며 그 부분을 발견했다.
“음. 정말이군. 위약금 액수가 꽤 있는데.”
여기서 오타비오가 섭외한 법률가가 아무런 감이 없는 오타비오를 대신해 큰소리로 항의했다.
“현명하신 재판장님! 약혼 파기 시 저렇게 큰 금액의 위약금을 거는 것은 듣도 보도 못한 관행입니다. 4000 두카토라뇨, 말도 안 되는 계약서예요. 관례는 400 두카토 정도가 끽입니다! 저 큰 액수는 반대로 제 의뢰인은 애초에 약혼을 깰 의사가 전혀 없었던 것을 증명합니다! 얼마나 사랑했으면 저런 걸 써 줬겠습니까?”
“음.”
“존경하는 재판장님.”
아베르루체의 수도원장이 발언권을 구했다. 그는 오타비오의 변호사를 쳐다보며 물었다.
“자네는 저게 이상한 계약서라고 굳이 강변하는데, 결혼도 안 한 여자한테서 거액의 지참금을 빌려 가는 건 말이 되구?”
오타비오의 변호사는 순간 당황해 말을 잃었다.
확실히 혼인빙자 사기꾼이나 할 만한 짓이긴 했기 때문이었다. 수도원장이 그 틈을 타 한마디 보탰다.
“8000 두카토야, 자그마치 8000 두카토!”
그 금액에 구경꾼들이 웅성웅성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시작했다.
- “8000 두카토래요, 8000 두카토!”
- “그걸로 삼대가 놀고먹겠는걸?”
- “저 돈을 안 돌려주겠다고? 미쳤나봐!”
정신을 차린 변호사는 저 노친네와 더 실랑이를 해 봤자 손해만 난다고 생각했는지 노인도 구경꾼도 싹 무시하고 종교재판관을 바라보며 호소했다.
“배상금 4000 두카토는 말이 안 되는 액수입니다! 게다가 원금 중 4000 두카토는 이미 갚았습니다! 재판장 직권으로 배상금을 합리적인 선인 400 두카토로 감액하여 주십시오! 총 금액은 4500 두카토입니다!”
“그쪽이 갚은 건 배상금 4000 두카토지 원금은 한 푼도 못 건드렸어! 8000 두카토를 돌려줘야지 어딜 약을 팔아!”
“흐음.”
이 모든 것을 듣는 오타비오는 어질어질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4500 두카토? 8000 두카토? 어느 쪽이건 망하는 건 기정사실이다! 내 멍청한 변호사는 왜 고작 액수를 깎으려 드는 거지! 내가 부담할 수 있는 한계는 1200 두카토로 끝이라고!
그는 앞줄에 나가 있는 변호사를 손짓으로 불렀다.
하지만 변호사는 자기 변론에 취해 오타비오의 목소리를 못 들었다. 한참을 시도하던 오타비오는 결국 지르기로 했다.
“무죄! 무죄라고요!”
그 소리를 대부분 구경꾼들은 못 알아들었다. 하지만 글자깨나 읽었다 하는 사람들은 경악한 표정으로 오타비오를 바라보았다.
- “이거 민사 아니에요?”
- “그렇죠? 손해배상금 달라고 하는 거니까.”
- “민사에 무슨 무죄가 있어! 무죄는 형사지!”
- “콘타리니 백작이 왕궁 법정 재판관이라며? 어쩜 저렇게 하나도 몰라?”
- “저렇게 무식한 인간한테 우리가 우리 사건을 맡길 뻔했단 말이야?”
- “국왕 폐하 용인술이 아주 그냥 땅에 떨어졌구먼!”
아리아드네도 소문을 듣고 이 재판을 구경하려고 와 있었다. 그녀는 휘장을 내린 평범한 검은 마차에 탄 채로 혀를 쯧쯧 찼다.
‘바보 멍청이⋯⋯.’
오타비오도 멍청이였고 오타비오의 변호사도 멍청이였다.
‘변호사는⋯⋯. 액수를 줄이는 것보다 변제 날짜를 길게 잡는 편이 백번 나았을 텐데.’
8천을 4500으로 줄여달라는 것보다 8천을 1년에 500씩 16년간 갚겠다고 하는 편이 모두를 위해 좋았을 것이다.
오타비오도 부담할 수 있고, 수도원도 전액을 받아내니 좋고, 법관도 자신의 현명함을 떨칠 수 있으니 편안하게 수긍할 수 있는 타협안이었다.
하지만 오타비오의 변호사는 그렇게 머리가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오타비오 본인보단 훨씬 머리가 좋았지만 이 사안을 해결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선고를 내리겠다!”
광장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높으신 분이 추락하는 진귀한 구경거리를 기대하는 날것의 흥분과, 에이 설마 저런 대귀족에게 불리한 판결이 나오겠어 하는 절망 섞인 체념이 있었다.
“콘타리니 백작가는 아베르루체 수도원에 금 12000 두카토를 반환하라!”
“?!”
오타비오도 놀랐고, 그의 변호사도 놀랐고, 아베르루체 수도원장도 놀랐다.
“아, 아니, 제가 청구한 건 8000 두카토인데⋯⋯.”
“불만 있나?”
“불만 없습니다!”
오타비오가 울부짖었다.
“항소, 항소하겠소!”
“교회법원은 단심제요.”
오타비오가 다시 한번 울부짖었다.
“그럼 재심, 재심을 청구하겠소!”
이쯤 되자 오타비오가 아는 건 아무것도 없고 어디서 한 번 들어본 내용을 전부 다 갖다붙여 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종교재판관은 검은 옷의 수사들에게 턱짓했다.
“저 사람 끌어내.”
건장한 수사들이 덤벼들었고 오타비오는 사지가 번쩍 잡혀 들려나갔다.
“으아아아아아-!!!”
도대체 12000 두카토가 어디에서 나온 계산법인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콘타리니 백작가는 파산했다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