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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353화 (656/733)

<제353화> 새로운 물결

이사벨라는 낮잠을 자다 집안이 소란스러운 통에 눈을 떴다.

“비키쇼! 비키쇼!”

그녀는 짜증스럽게 물었다.

“이게 무슨 일이니?”

평소대로 고고하고 거만하게 상대방을 하대하는 말투였다. 이러면 콘타리니 가의 하녀들은 바닥에 납작 엎드리며 ‘백작부인!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해야 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말은 제대로 들은 건지 이사벨라가 자기 귀를 의심하게 했다.

“아줌마! 거추장스럽게 하지 말고 비키라니까!”

“악!”

옆으로 떠밀려진 이사벨라는 자기 집안에서 당한 이 끔찍한 취급에 몹시 화가 났다.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된 것이다.

“야! 너 누구야! 누구길래 내 집에서 이렇게 오만불손하게 굴어!”

남자는 종교재판소 측에서 파견한 관리였다.

“내 집?”

그는 썩어서 시커먼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예쁜 아줌마, 여긴 이제 당신 집 아니야.”

그는 빨간 딱지를 꺼내 이사벨라가 사용하고 있던 마호가니 침대 위에 척 붙였다.

“아베르루체 수도원 거지.”

“뭐라고?”

연보라색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놀란 토끼처럼 쳐다보는 이사벨라를 보며, 인부는 히죽 웃었다.

“꺼지라고.”

* * *

카루소 대표가 찾아낸—찾아냈다고 알려진—‘대귀족에게 떼인 돈 받아내기’ 수법은 부르주아지 사이에 술렁임을 일으켰다.

다들 못 받은 외상값이 많았다. 그간 자기 얼굴에 침 뱉기라, 그리고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기엔 부적절한지라 나누지 못했을 뿐이다.

판이 깔린 판에 사건사고와 외상액을 한 자리에 펼쳐놓고 보니 대귀족들은 의외로 상인 길들이기를 위해서만이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많은 양의 외상을 쓰고 있었다.

애교로 넘어갈 액수가 아니었다.

- “이걸 카루소 대표가 정말로 받아냈단 말이요?”

- “아직 집행에 성공해서 현금이 들어온 건 아닌데, 재판소에서 승소까지는 했답니다!”

- “아니아니, 승소로 충분하잖소. 카루소 대표는 어차피 그 채권을 아베르루체 수도원에 팔아치웠을 거 아뇨? 그럼 실제로 콘타리니 대저택을 팔아넘겨서 황금을 확보하는 건 아베르루체 수도원이 알아서 할 일이지 카루소 대표는 현금 받고 끝냈단 소리 아닙니까?”

기실 카루소 대표는 오로지 자신의 어린 아내에게 상처를 준 그녀의 전 약혼남과 그 부인에게 복수하기 위해 헐값에 채권을 넘겨 버렸다.

8000 두카토를 받을 권리를 일단 80 두카토에 넘기고, 돈이 들어오면 카루소 대표가 거기서 2000 두카토만 받기로 하는 계약이었다.

카멜리아의 받아낼 돈은 제값에 파는 게 불가능하기도 했다.

수도에 상당한 파문을 일으킬 이런 미친 짓거리에 동참해 줄 수도원을 찾으려면 수도원 측에 큰 이득을 약속해줘야 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80 두카토를 투자해서 1만 두카토를 벌게 되었으니 아베르루체 수도원 측에서도 대성공이었다.

카루소 대표가 실지로 큰 현금을 손에 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 상인들은 조금 실망했지만 그게 그들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 “우리가 체면이 없지 돈이 없소?”

- “본때를 보여줘야 이 귀족 놈들이 앞으로는 똑같은 짓을 못할 것 아니여!”

- “카루소 대표가 물길을 열었소. 앞에서 집중포화 다 받아내고 있는데 우리가 뒤를 받쳐줘야 할 거 아뇨? 보카네그로 상회 놈들이 장사 X같이 하는 놈들인 건 맞지만 이럴 땐 우리가 다 같이 뭉쳐야지!”

분위기는 점점 상인계급 대 귀족계급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 “천신의 은총을 받은 훌륭한 영혼이 높은 신분으로 태어난다는 그놈들 프로파간다가 말이나 됩니까?”

- “그러게요. 전생에서 착한 일을 많이 해서 이번 생에서 잘 먹고 잘사는 거라면 귀족 놈들은 전생 초반에는 착하게 살다가 늘그막에 나라라도 팔아먹은 거요?”

- “요새 잘 먹고 잘사는 건 우리지!”

부르주아지 계급 내에서도 과열되는 분위기를 우려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정치적 방파제를 지니지 못한 채로 극단적인 행동을 저지르면 그 뒷감당은 맨몸으로 고스란히 다 얻어맞아야 한다.

산전수전 다 겪은 나이 지긋한 상인들은 동료들을 자제시키려고 했지만 최근 국경무역으로 부를 쌓기 시작한 혈기방장한 젊은이들은 노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간 쌓인 것이 많았던 중장년층까지 젊은 축에 가세해, 그만 교회를 통한 변칙적인 대여금 청구 소송 사태는 급물살을 타고 말았다.

- “아텐돌로 백작가는 마나세로 수도원에 200 두카토를 반환하라!”

- “다피아니 자작가는 산페르치니 수도원에 1300 두카토를 반환하라!”

- “조르디니 남작가는 아베르루체 수도원에 580 두카토를 반환하라!”

아베르루체 수도원이 큰돈 벌었다는 이야기가 들리자 다른 수도원들도 대세에 동참했다.

사건 수가 늘어나자 채권자도, 채무자도 늘었다. 채무자 목록은 그 자체로도 이슈였다.

채무자로 만방에 알려진 집안 중에는 빠지면 서러울 정도로 그럴법한 이름도 있었다.

- “캄파 후작이 2300 두카토를 꾸고 안 갚았다고?”

- “돈도 많은 사람이 왜 그랬대⋯⋯.”

- “도박 빚 아니야?”

- “도박 빚이건 여자 뒤꽁무니 쫓아다니다 쓴 돈이건, 놀랍지는 않네요.”

그리고 정말로 안 그럴법한 이름들도 나왔다.

- “엘바 자작가는 파디니 수도원에 720 두카토를 반환하라!”

엘바 자작가는 아리아드네의 친구인 펠리시테의 집안이었다.

딸의 지참금을 마련하지 못해서 펠리시테를 수녀원에 보내 버렸으니만큼 상회에 채무가 있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은 상황이었으나, 엘바 자작은 도덕적인 법률가로 이름이 높았으므로 사교계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 “그렇게 법조문 들먹이며 고고한 척하더니 막상 자기는 빌린 돈을 안 갚았대요?”

그리고 엘바 자작가 내부도 발칵 뒤집어졌다. 실제로 선비 기질이 있는 엘바 자작은 집안 살림을 일체 아내에게 맡기고는 자신은 들여다보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불미스러운 일로 수도에서 이름이 오르락내리락하니 엘바 자작으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엘바 자작부인도 할 말이 많았다.

남편이 지방에 영지도 없는 자작 작위를 가진 주제에 돈 안 되는 일만 찾아다니고 그렇다고 딸 혼사에 적극적인 것도 아니어서 안쓰러운 장녀를 수녀원으로 보내야 했다.

꾼 돈도 사치하느라 진 빚이 아니라 집안을 꾸려나가느라 꼭 필요했던 돈이었다.

남편은 식량이 떨어지든 피복이 떨어지든 나 몰라라, 남의 일이었다.

엘바 자작가에서는 채권자가 도착하기도 전에 지붕이 뜯겨 나갈 걸 걱정하게 될 만큼 엄청난 부부싸움이 벌어졌다.

그리고 이런 집들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결국 산 카를로의 귀족들은 폭발하고 말았다.

그 화살은 에트루스칸 교계의 수장, 시몬 데 마레 추기경에게 향했다.

- “도대체 교계는 무슨 생각을 한 겁니까! 이게 성황청 전체의 입장이라고 생각해도 됩니까?!”

데 마레 추기경은 그 주장을 단호하게 일축했다.

“개별 수도원의 일탈이오. ⋯⋯나야말로, 이 사태를 엄중하게 받아들이는 바요.”

그리고 데 마레 추기경은 누가 봐도 이번 사태의 최대 희생자 중 한 명이었다.

어쨌거나 어제까지는 사교계의 총아였다가 하루아침에 길바닥에 나앉게 생긴 콘타리니 백작부인은 데 마레 추기경의 친딸이었다.

단일 인물로 최대 피해자라고 할만한 사람으로는 이사벨라 본인을 꼽을 수 있겠다.

그녀는 어떻게든 손해를 경감시켜보려는 자신의 몸부림이 순차적으로 좌절하는 걸 두 눈 뜨고 목도해야 했다.

“뭐라고요?! 폐하께서 제 알현 신청을 거절하셨다고요?!”

이사벨라는 자기에게 닥친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레오 3세와의 일련의 만남에서 그가 자신에게 여성으로서 매력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보통 이 단계까지 오면 남자들이란 집안 땅문서며 어머니의 결혼반지까지 훔쳐다 줄 기세가 되기 마련이다.

여자의 호감을 확신했으되 아직 그녀의 확답을 받기 직전의 상태, 이게 남자가 가장 안달 내는 시점이었다.

그리고 이사벨라는 이 단계에서 남자의 뼛골을 빨아먹는 데에서는 타인의 추종을 불허하는 장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것도 통하지 않았다.

“고자 새끼인가?!”

그녀는 분통을 터트렸다. 남자가 아닌 게 아닌 이상 지금 이렇게 자신에게 선을 긋는 건 도무지 해석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다만 레오 3세의 입장에서는 이러는 게 당연했다.

국왕이 상인들의 집단행동을 기꺼워하지 않은 것은 당연했지만 그들은 세수의 상당 부분을 책임지는 납세자였다.

어느 시점에서는 상인들의 단체행동을 제약해야 했지만 국왕의 그런 제스처는 필연적으로 부르주아지의 반발을 불러올 것이다.

그 카드는 좀 더 유익한 곳에 써야지 콘타리니 백작부인 개인을 구명해주는 데에 쓸 수는 없었다.

레오 3세가 여자를 처음 알아가는 십 대 후반인 것도 아니고, 이건 이사벨라가 아무리 예쁘고 말고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늙어서 이젠 안 서나?!”

그런데 이렇게 어느 정도 진실에 맞닿은 통찰로 레오 3세의 욕을 해대면서도, 이사벨라는 갖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움이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제껏 이사벨라에게는 노렸다가 정복하지 못한 남자라고는 없었다. 체자레 공작마저도 일종의 일그러진 관계로나마 굴복은 시켰다.

이렇게 깨끗하게 손 털고 나간 남자는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레오 3세는 본의 아니게 밀당을 하고 만 것이었다.

레오 3세에게도 외면당한 이사벨라를 구해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결국엔 그토록 사이가 나빴던 가족이었다.

데 마레 추기경은 이번 일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한 아베르루체, 마나세로, 산페르치니, 파디니 수도원장을 산 카를로로 즉각 소환하고 전국의 에트루스칸 왕국 지부 산하 교회에 엄중하게 경고했다.

“수도자들은 속세의 삿된 분쟁에 일절 관여하지 말 것! 대가나 수수료를 받고 자신의 것이 아닌 채무를 소구하는 수도원장은 율법에 따라 무겁게 처리하겠다!”

속세의 분쟁에 참여하지 말라고 근엄하게 발표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닌 데 마레 추기경인 것은 분명히 웃음을 참기 어려운 지점이었지만 말 자체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수도원이 경제적 이익을 대가로 남의 소송을 대신 해주는 것은 수도자다운 행동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도대체, 종교재판소는 무슨 생각인 거야! 왜 남의 마당에 쳐들어가서 칼춤을 추고 앉았어?!”

일단 새로운 소송의 제기를 자기 선에서 틀어막은 데 마레 추기경은 이 아사리판이 일어나게 된 원인인 종교재판소의 종교재판관을 제일 원망했다.

그냥 적당히 속세의 다툼이라며 재판을 안 받아버리면 될 걸 그걸 또 꾸역꾸역 받아와서 판결까지 내려 주면 어쩌자는 건가!

마음 같아서는 잡아다가 직위해제 시키고 산 에르콜레 대성황당 외벽에 거꾸로 매달고 싶었다.

그러나 종교재판관은 천년 고도 트레베로에서 파견해 중앙대륙 전체를 순회하는 자로, 루도비코 법황의 직속이었다.

지방 조직의 수장인 데 마레 추기경이 마음대로 건들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일단 빨간 딱지 붙인 물건을 뺏어가거나 팔아치우지는 못하게 하고.”

종교재판관 덕에 콘타리니 대저택을 비롯해 수도의 각양각색의 귀족저에 빨간 딱지가 붙어 있었다.

현관 문짝에도 붙어 있고 침대에도 붙어 있고 도자기에도 붙어 있고 아주 적색으로 번쩍번쩍했다.

수도에 세워진 저택은 그 가문의 유산의 총체였다.

수 세기를 내려온 건축물 그 자체로도 예술품이었을뿐더러, 집 안 구석구석에 어떤 금은보화가 숨겨져 있을지 집주인조차도 잘 몰랐다.

대수선을 하다 백 년 전의 금화가 나오거나 골동품이 나오기 일쑤였다.

무엇보다 수도의 대저택은 금싸라기 땅을 점유하고 있었다.

왕궁 바로 옆에 있는 저택 부지 같은 것은 돈이 있다고 맘대로 살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그걸 진짜로 채무자가 강제로 뺏어갈 수 있게 한다면 대귀족들이 뒤집어질 게 불 보듯 보였다.

데 마레 추기경은 재빠르게 국왕에게 비밀 상소를 올렸다.

수도원 측에서 강제로 뺏으러 가진 않을 테니 레오 3세의 관리들도 적극적으로 집행을 진행하지 말라는 언질이었다.

종교재판소 측에는 결사 항전하는 대귀족 집안에 강제집행이 가능할 만큼의 인원은 없었으니 국왕만 손을 들어주지 않으면 충분히 집행을 막을 수 있었다.

이사벨라 개인의 읍소는 들어주지 않은 레오 3세도 이 건의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데 마레 추기경은 어떻게 보면 이사벨라를 도왔지만, 어떻게 보면 이사벨라를 돕지 않았다.

이사벨라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정국은 조성했지만 딸에게 직접적으로 손을 내밀지는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 정국의 조성은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결국엔 이사벨라 입장에서는 아버지가 자신을 위한 것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직접적인 도움의 손길은 그녀가 그토록 하찮게 내려다봤던 시누, 바톨리니 백작부인으로부터 왔다.

“다, 당분간⋯⋯. 우리 집 벼, 별채에서 지내⋯⋯.”

집에서 내쫓긴 콘타리니 백작 부부를 집에 들인 것은 바톨리니 백작부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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