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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358화 (661/733)

<제358화> 속살 내보이기

‘황금의 왕자님’의 등장에 리날디 가의 파티장은 웅성웅성, 소요로 가득해졌다.

제아무리 귀족이라고는 해도 대귀족이 아닌 이상 왕족과 가까이할 기회는 적었다.

리날디 가문은 견실하긴 했지만 대영주와는 거리가 멀었고 교우하는 집안들도 처지가 비슷했다.

오늘의 시 낭송회에 초대된 하객은 적당한 수도의 중견 귀족 가문이 절반, 부유한 하급 귀족이 절반이었다.

그래서 아리아드네 데 마레 백작이 초대객 중 최고 명사였던 행사에 참석한 손님들은 이 뜻밖의 횡재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 “꺅! 나 친구한테 왕자님 봤다고 자랑할 거야!”

- “쉿! 체통 머리 없게! 저쪽 쳐다보지 마! 고개 숙여!”

- “아 엄마, 아파요! 꼬집지 마세요!”

알폰소는 이런 소란에는 익숙했는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는 입가에 햇살 같은 미소를 띤 채 아리아드네에게 커다란 손을 내밀었다.

“골치 아픈 일이 있어서. 내 여자 얼굴 보고 싶어서 왔지.”

아리아드네는 알폰소가 자신이 어떤 수군거림에 시달리는지 알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배려에 미소지으며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아리아드네는 작게 속삭였다.

“고마워.”

알폰소는 크게 고개를 저으며 마주 속삭였다.

“이게 뭐가 고마울 일이야.”

그는 옆에 있던 코르넬리아 데 리날디 양에게도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리날디 영애.”

코르넬리아는 깜짝 놀라 황급히 무릎을 굽혀 예를 취했다.

“왕국의 작은 해를 뵙습니다!”

“아니요, 아니요.”

그는 웃으며 손을 들어 코르넬리아를 제지했다.

“예는 넣어두세요. 제 여자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만 초대장도 없이 남의 파티에 난입해 버렸습니다.”

서글서글한 미소와 함께한 부드러운 저음이었다. 코르넬리아는 혼미해지는 정신을 다잡았다.

훈훈함이 지나친 나머지 욕심이 난다거나 친구가 부럽다거나 같은 유의 생각까지는 가지도 못했다.

일단 새빨개지는 본인의 낯빛부터 단속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알폰소는 깍듯한 사과로 불에 기름을 부었다.

“제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아니아니, 괜찮⋯⋯. 무, 무례라뇨.”

코르넬리아가 말을 더듬자 누군가가 큰소리로 외치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닙니다!”

끼어든 사람은 코르넬리아의 아버지, 리날디 백작이었다.

“왕자 전하께서 저희 리날디 가문의 행사를 빛내 주셔서 무한한 영광입니다!”

리날디 백작은 깍듯하게 예를 취해 보였다. 각 잡힌 몸짓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허둥지둥하는 기색이 물씬 풍겼다.

알폰소는 말없이 웃음으로만 답했다.

그가 코르넬리아 데 리날디에게 깍듯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그녀가 아리아드네의 친구였기 때문이었다.

리날디 백작이라면 수도의 권력 관계를 좌지우지까진 못 하더라도 말석에 이름쯤은 올릴 수 있는 자였다.

왕자는 여기에까지 끼어들고 싶지는 않았다.

알폰소가 리날디 백작에게 특별히 살가운 티를 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리날디 가문은 급작스러운 왕자의 방문에 전반적으로 매우 기쁜 얼굴이었다.

귀한 손님이 오셔 집안 잔치를 빛내주는 건 언제나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단 한 명만은 예외였다. 코르넬리아의 여동생인 베델리아 양이었다. 그녀는 얼굴을 싹 굳힌 채 입구 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그 반응이 신기해 베델리아 양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베델리아의 시선은 왕자의 호위로 나타난 만프레디 경에게 닿고서야 끝났다.

그 눈길을 받는 만프레디 경도 기색이 별로 좋지 않았다.

문제는 그 시선이 시선으로만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베델리아 양은 뚜벅뚜벅 걸어가 만프레디 경 앞에 꼿꼿히 섰다.

만프레디 경이 뭐라고 말을 하려던 차에, 그녀는 호쾌하게 따귀를 갈겼다.

- 짝!

만프레디 경이 뺨을 얻어맞고는 완전히 놀란 표정으로 베델리아 양을 바라보았다.

만프레디 경에게 입을 열 기회도 주지 않은 베델리아 양은 크게 소리쳤다.

“이 바람둥이!”

* * *

알폰소와 아리아드네는 리날디 가의 후원을 산책하면서 조금 전에 본 놀라운 상황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만프레디 경이 이야기하던 약혼녀가 코르넬리아의 동생이었다니! 전혀 몰랐어.”

알폰소가 반문했다.

“그래?”

“응. 베델리아 양은 언니랑 성격이 안 맞아서 우리 만나는 데에 낀 적이 별로 없거든. 만프레디 경이 자기 옛 약혼녀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아리아드네는 말끝을 흐렸다.

만프레디 경이 자기 전 약혼녀에 대해 하는 묘사는 하늘에서 갓 떨어진 완벽한 천사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미사여구가 많았다.

만프레디 경의 말만 들으면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자가 똑똑하고 상냥하고 착하기까지 하다고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다만 그 묘사는 직설적이고 다혈질인 데다 몸치장에도 별 관심이 없는 베델리아 양과는 어느 하나 비슷한 구석도 없었다.

아리아드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한 알폰소는 픽 웃었다.

“만프레디 그 친구가 과장이 좀 심하긴 하지.”

만프레디 경이 말하길, 예사크에서 보낸 편지가 중간에 다 유실되는 바람에 자기가 죽은 줄 안 약혼녀의 가문으로부터 파혼당했다고 했다. 오

늘 베델리아 양의 분노에서 유추한 바에 따르면, 리날디 가는 몰라도 최소한 베델리아 양은 만프레디 경이 편지를 보낼 수 있는데 안 보낸 거라고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 “나랑 결혼하기 싫었으면 그냥 그렇다고 말했으면 됐잖아요!”

- “⋯⋯그게 정말 아니라니까요? 저는 분명히 보냈는데 그 편지가 중간에서 없어졌고⋯⋯.”

베델리아 양이 만프레디 경의 말을 끊었다.

- “그럼 왜 귀국하고 나서 안 찾아왔어요!”

그 말에 만프레디 경은 졸지에 할 말을 모두 잃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베델리아 양의 말이 맞았다.

편지가 없어졌더라도 만프레디 경은 살아 돌아온 후에 충분히 리날디 가를 찾아 해명할 수가 있었다. 그러지 않은 것은 만프레디 경이었다.

단숨에 만프레디 경을 닥치게 만든 베델리아 양은 만프레디 경의 침묵에 기뻐하지 않았다.

호전적으로 보였지만 사실 그녀는 말싸움에서 이기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그저 만프레디 경의 해명을 듣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남자의 묵묵부답을 그녀는 보고 싶지 않았다는 말의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베델리아 양은 눈물을 터트리고는 낭송회장에서 뛰쳐나가 버렸다.

만프레디 경은 우두커니 서서 베델리아 양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왜 안 따라간 거지?”

아리아드네가 안타까워했다.

“그때 뒤따라갔으면 모든 게 다 봉합되었을 텐데. 만프레디 경도 전 약혼녀를 되게 보고 싶어 했었잖아.”

“그게⋯⋯.”

알폰소가 잠시 고민하다 뒷얘기를 전해주었다. 만프레디는 최근에 자신이 에스코트 중인 귀족 영애가 따로 있었다.

최근, 한 달에 한 번씩 있는 대예배에서 새로운 여자와 눈이 맞았다고 했다.

눈이 마주친 순간 불꽃이 튀었고 만프레디 경은 뒷일 생각할 것도 없이 직진했다.

격이 안 맞는 집안 출신이어도 감수할 생각이었는데, 알고 나니 심지어 좋은 집안의 귀한 아가씨였다고.

이제는 슬슬 여성분의 가문과도 이야기가 오가기 시작하는 단계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아리아드네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이런.”

아리아드네는 최근에 코르넬리아에게 여동생이 적극적으로 남편감을 찾기로 다짐한 계기를 들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전 약혼자가 다른 여자와 시시덕거리는 꼴을 베델리아 양이 목격하고선 자기도 이제 결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는 것이다.

“베델리아 양이 봤던 게 만프레디 경과 그 새로운 여자분인가 봐⋯⋯.”

이 내막—만프레디 경이 새로운 교제를 아주 최근에야 시작했다는—을 자세히 모르는 베델리아 양 입장에서는 배신감을 느끼고도 남을 상황이었다.

“상황이 고약하게 됐네⋯⋯.”

아리아드네는 혀를 찼다.

“베델리아 양은 만프레디 경이 그 여자분과 잘 되고 싶어서 자기랑 의도적으로 파혼했다고 오해하는 거 같은데……?”

여자친구의 걱정에 알폰소는 평이하게 답했다.

“괜찮아. 만프레디는 잘할 거야.”

마치 ‘만프레디는 좀 당해도 돼’ 같은 말투였다. 큰 고민 없이 대답한 알폰소는 아리아드네의 허리를 덥석 안았다.

“그나저나 남의 얘기 말고 우리 얘기나 하자.”

예전에 치보 후작부인의 정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는 아리아드네를 높이 들어 올렸다.

“꺅!”

당황한 아리아드네가 짧은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자기를 내려놓으란 뜻으로 알폰소를 재촉했다.

“사람들이 보잖아!”

“뭐 어때.”

그는 ‘내가 데려갈 건데’라는 말은 생략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자신과의 교제가 아리아드네에게 누가 되게끔은 절대로 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그렇지만 그 방법론에서 알폰소는 고민이 많았다.

내면에서 그녀의 명성에 흠을 내지 않겠다는 생각과, 이 여자가 자신의 것이라고 만방에 외치고 싶은 마음이 항상 충돌했다. 지금은 후자가 이겼다.

하늘 높이 들어 올려졌다가 다시 땅에 닿은 아리아드네가 눈을 흘겼다. 알폰소는 부러 모르는 척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아리. 너 표정이 왜 그래?”

“응?”

“뭔가 고민 있는 얼굴인데?”

아리아드네는 자신의 미미한 기색을 알아챈 알폰소에게 놀랐다.

“어떻게 알았어?”

이는 곧 실토나 다름없었다. 알폰소는 활짝 웃으며 그녀를 다시 들어 올리려 들었다. 그는 그녀를 껴안으며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냥 말해본 건데?”

“아잇! 간지러워, 간지러워, 그렇게 만지지 마!”

한참을 깔깔거리고 난 뒤에야 알폰소는 아리아드네를 들고 리날디 가의 후원을 한 바퀴 돌겠다는 야심을 포기했다.

아리아드네는 진정한 알폰소를 상대로 고민을 꺼냈다. 약간의 한숨을 동반한 채였다.

“이거 말하면 나 나쁜 사람이라고 할 거야?”

“네가 어딜 봐서 나빠.”

알폰소는 햇살이 가득 쏟아지는 리날디 가의 소박한 정원에서 여름의 푸르름을 꼭 닮은 아리아드네의 녹색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깨끗하고, 깊고, 물기 어린 시선이 그 어떤 보석보다도 반짝였다. 이런 투명한 눈동자가 나쁠 수 있을 리가 없다.

알폰소의 심경도 모르고 아리아드네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너처럼 선량한 사람이 날 이해할 수 있을까?”

‘선량’이라는 단어에 알폰소는 미소를 지었다. 선량하다니. 지금의 자신은 선량함과는 백중해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었다.

전쟁터에서 몇 명을 죽였는지, 무슨 짓을 했는지 알면 아리아드네는 선량의 선자도 꺼내지 않을 거라고 그는 확신했다.

“네가 무슨 짓을 해도 너는 안 나빠.”

그가 선량한 사람이 아닌 이유는 더 있었다.

야외에서 저 입술과 더한 것을 호로록 잡아먹는 상상을 지칠 줄도 모르고 계속 머릿속에서 돌리고 있는 자기가 나쁜 놈이라면 모를까.

자기에게 천진난만하게 안겨 있는 그녀는 나쁜 사람일 수가 없었다.

알폰소는 지금 자기 여자가 연쇄살인마라고 해도 그냥 넘어갈 수도 있을 만큼 그녀에게 푹 빠져 있었다.

그리고 그 진심은 아리아드네에게도 와 닿았다.

“실은⋯⋯.”

아리아드네는 알폰소에게는 한 번도 내색한 적이 없던 이야기를 꺼냈다.

“이번에, 산 카를로에서 좀 시끄러웠던 일 있잖아⋯⋯.”

카루소 대표를 슬쩍 밀어 교회를 뒤에 업고 종교재판소에서 빚을 받아내게 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녀는 이 말을 꺼내면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음모를 꾸미는 책사. 체자레에게는 전생에서도, 이번 생에서도 수도 없이 보여주었던 모습이었다.

그의 그림자에 들어앉은 음흉한 책략가는 체자레와 그녀의 관계에 있어서 필수 불가결한 부분이었다.

체자레를 위해 모략을 꾸미지 못하는 아리아드네는 그의 곁에 남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알폰소에게는 그녀는 여자로 남고 싶었다. 쓸모가 있어서 곁에 두는 게 아닌, 사랑스러워서 함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사랑스러운 여자에게 음지에서 계략이나 꾸미는 모양새는 어울리지 않았다.

허나 언제까지나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이제 알폰소에게도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야 한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가 받아 주지 못한다면⋯⋯.

“⋯⋯그래서 그 일이 터진 거야.”

“너였어?”

알폰소는 고저 없는 억양으로 바로 물었다. 어딘가 건조한 말투였다.

아리아드네는 알폰소의 억양에서 감정을 읽어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평소와 똑같은 것 같으면서도 묵직하게 내려앉은 것이 실망한 것 같기도 하고, 그녀로서는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가 이런 그녀의 모습을 받아 주지 못한다면 그들의 관계는 여기까지일 것이다.

그녀는 이제 자신을 구겨서 상대방에 맞출 수 없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게 가능했다면 아리아드네는 여전히 체자레의 곁에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들이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대면하는 것은 언제나 아픈 일이었다.

그녀는 알폰소의 표정을 확인하기가 무서워서 고개를 숙였다. 심판의 시간을 기다리는 기분이었다.

그 조마조마한 심정을 알폰소의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깨트렸다.

“내 여자 천재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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