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359화 (662/733)

<제359화> 새로운 거물

아리아드네는 예상하지 못했던 알폰소의 반응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알폰소는 그 이마에 바로 입을 맞췄다. 그녀는 키스를 받으면서도 어안이 벙벙했다. 아리아드네는 조심스레 물었다.

“화나지 않아?”

알폰소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아리아드네는 자신의 죄를 스스로 읊었다.

“내가⋯⋯. 내가 마음대로 상인들의 하극상을 주도한 거나 마찬가진데.”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더 기어들어 갔다.

“머리 쓰는 게 기분 나쁘다거나⋯⋯. 아니, 아무래도, 네 앞에서 이런 적은 없었으니까⋯⋯.”

알폰소는 쿡쿡 웃었다.

“넌 정말이지⋯⋯.”

그가 왜 웃는지 모르는 아리아드네는 미궁에 빠진 표정으로 알폰소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가 사랑하는 토끼 앞니가 보였는데, 윗입술 아래로 앞니가 살짝 엿보이는 모양새가 마치 길을 잃은 다람쥐 같았다.

평소에는 놀라울 정도로 영민하지만 가끔 묻어 놓은 도토리를 까맣게 잊어버리고는 근처를 빙빙 도는 다람쥐 말이다.

“내 앞에서 머리 쓴 적이 왜 없어.”

아리아드네는 긴장했다. 알폰소를 처음 만났을 때 작정하고 그에게 접근한 걸 눈치챘을까 봐서였다.

하지만 알폰소가 꺼낸 것은 다른 시점의 이야기였다.

“내가 미레이유 공작을 죽였을 때.”

“아.”

알폰소의 분위기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아리아드네는 저도 모르게 그런 그의 팔뚝을 잡았다. 알폰소는 굳은 그녀를 품에 안아주었다.

“그 뒷수습 하던 걸 다 봤잖아.”

“아⋯⋯.”

아리아드네는 마르그리트 왕비와 논의해 미레이유 공작의 사후 수습을 했다.

갈리코 왕국이 미레이유 공작의 죽음을 계기로 얼토당토않은 요구를 하려던 일의 뒷수습이었다. 알폰소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예사크로 황금을 보냈을 때도 그래.”

아리아드네는 열다섯 살 소녀라고는 상상조차 되지 않는 일처리 능력을 보였었다.

“정기편을 통한 연락이 원활하지 않으니 친구를 통해서 직통편을 보내고 그 뒤로 상단을 통해 정기적으로 안전한 현금 수송 루트를 만들고.

왕궁의 행정관들도 그렇게는 못 해. 난 감탄했어. 하나만 봐도 열을 알아.”

행정관들에게 일을 맡기면 처음에는 인원이 부족하다, 다음에는 예산이 부족하다, 사람과 돈을 챙겨주면 이젠 시간이 부족하다고 나왔다.

보고서를 잘 꾸미는 사람은 많았지만 일이 되게 만드는 사람은 귀했다.

“그리고. 마음대로 하극상을 주도했다니. 네 마음대로 하지 않으면 누구 허락을 받고 빌린 돈을 갚게 할 건데? 친애하는 국왕 폐하?”

아리아드네는 레오 3세의 이름을 듣자 그만 풋 웃어 버렸다. 확실히, 정당한 권리를 되찾아주는 일에 허락을 받아야 할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레오 3세라니, 옳은 일일수록 더 하지 말라고 할 위인이었다.

하지만 즐겁게 웃을 수 있는 아리아드네와는 반대로, 레오 3세의 이름을 꺼낸 알폰소는 마음이 무거워지고 말았다.

트레베로로 가라는 레오 3세의 말도 안 되는 제안은 일축했다.

하지만 그다음에 그가 따로 받은 서한이 알폰소를 고뇌에 빠트렸다. 그 편지는 갈리코 왕국에서 온 것이었다.

「친애하는 알폰소 왕자에게,

갈리코 왕국은 이번에 트레베로의 루도비코 법황 성하께서 보내신 초대장을 받았습니다.

필리프 4세 폐하를 모시고 가건, 내 단독으로 가게 되건 방문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이리된 것, 일전에 성사되지 못했던 회동을 트레베로에서 가지면 어떻겠습니까?

⋯⋯(중략)⋯⋯. 혼인서약서에 대한 이야기를 이번에 확실하게 끝맺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발로아 대공, 외드.」

알폰소는 라리에사 대공녀와의 혼인 문제를 어떻게든 마무리 지어야만 했다. 그는 스스로에게 다짐한 바가 있었다.

서류 문제를 깔끔하게 처리하고 아리아드네의 머리 위에 왕자비의 티아라를 올려 준 다음에야 그녀를 취하겠다는 결심 말이다.

알폰소는 그런 말도 안 되는 다짐을 한 스스로를 두 번 세 번 원망했지만 그는 약속은 지키는 남자였다.

라리에사를 정리하기 전에는 아리아드네와 뭔가를 더 진전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바꾸어 말하자면 그는 외드 대공을 반드시 만나야 했다. 자유의 몸이 되려면 말이다.

그는 아리아드네와 진전을 시키지 못해 안달이 난 상태였으니까.

그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이 모든 고뇌의 진원지, 아리아드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그의 시선에, 그녀는 순진무구하게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빨간 앵두 같은 입술이 오물거리며 단어들을 속삭였다.

“왜?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그 얼굴이 너무 해맑아 보여서 알폰소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뺨에 코를 비볐다.

아리아드네는 작게 깔깔댔고 그는 그 볼에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당장이라도 앵두 입술을 삼키고 싶었지만 아직, 아직은 안 된다. 조건이 성취되지 않았다.

그는 불덩이가 돌아다니는 것 같은 몸뚱이를 추스르며 평이하게 답했다.

“아냐. 없어.”

저번에 국경을 넘었을 때는 돌아오는 데에 거의 5년이 걸렸다.

그는 다시는 아리아드네를 혼자 두고 가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래, 산 카를로를 떠날 수는 없다.

“아무 일 없어.”

다짐하듯 말한 그는 부드럽게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고민이 그게 다야? 종교재판소를 이용할 아이디어를 냈다는 거?”

이미 끝난 일이라 더 고민할 거리도 없는 것 아닌가.

종교재판소는 거하게 이용당했고 카루소 대표는 수도원을 통해 재판을 이겼으며 콘타리니 백작은 자기 저택도 사용하지 못하고 집에서 쫓겨났다. 그럼 된 것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아리아드네는 얼굴을 찡그렸다. 콧잔등에 귀여운 주름이 갔다.

“으응. 그게 아니라. 뒷수습이 잘 안 돼서.”

아리아드네는 진짜 고민을 알폰소에게 털어놓았다.

“카루소 대표의 청대로 압류한 재산을 강제집행시켜주고 싶은데⋯⋯.”

그녀는 자신의 안배들이 다 무위로 돌아갔다는 것, 그리고 사실 이걸로는 뭔가 부족한 듯 싶다고 토로했다.

“강제집행을 하고 그걸로 끝내면 대귀족들이 카루소 대표를 가만 안 둘 텐데. 정말 그걸로 괜찮을까?”

일리가 있는 지적이었다. 알폰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보기에도 위험해.”

상단이나 거래선의 문제가 아니었다. 영지에 기반한 대귀족들에게는 사실 카루소 대표를 경제적으로 압박할 방도가 크게 없었다.

카루소 대표는 대역병 시기 동안 단순히 물건을 떼어다 파는 일종의 내륙 물류업자에서 거상으로 거듭났다.

해외에서 사치품뿐만이 아니라 각종 의료용구며 생필품을 들여오는 독점적 지위를 공고히 다졌기 때문이다.

귀족들이 다 같이 비단과 향신료를 끊고 불매운동하는 것을 넘어 아파도 약을 쓰지 않고 그대로 집에서 앓을 생각이 아니라면 카루소 대표의 보카네그로 상회를 불매할 수는 없었다.

설령 그렇게 하더라도 카루소 대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귀족들이 취할 다음 스텝은 뻔했다. 카루소 대표는 신체에 대한 위협을 고민해야 할지도 몰랐다.

“내 기사단이 수도에 있긴 하지만 나에게 치안을 담당할 권한이 공식적으로 있는 건 아니야.”

제아무리 큰 군사가 손안에 있어도 합법적으로 이를 이용할 명분이 없다면 활용하기 어렵다.

“수도 안에 있을 때 알음알음 지켜주는 것 정도가 최선이고, 수도 밖으로 상행을 떠났을 때는 정말로 내 손에서 벗어나. 거기는 영주들의 땅이니까.”

대영주에게는 자기 영지와 영지민에 대한 사법권이 있었다. 타란토 대공녀 비앙카가 가진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범죄를 저질렀다는 의심을 산 사람이 영주의 땅 안을 배회하면 영주는 언제나 그자를 잡아다가 투옥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범죄를 저질렀다는 의심’을 대영주가 온전히 혼자 해도 상관없다는 거였다. 아리아드네는 미간을 찡그렸다.

“지방 상행이 문제라는 말이지.”

“그렇지. 그리고 일이 터졌을 때 나에게 수사권이 있는 것도 아니야.”

보카네그로 상단은 내륙과 외해를 막론하고 일 년에도 수십 차례의 상행을 다녔다.

“지방 상행을 나간 사이에 그 땅의 영주가 카루소 대표를 여하간의 사유로 자기 감옥에 잡아넣으면, 그걸로 끝이야.”

“순식간에 우두머리를 잃는 거네.”

아리아드네는 생각에 잠겼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그녀가 입을 열어 말을 꺼내려고 할 때, 알폰소는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입술을 막았다.

“말하지 마.”

아리아드네는 입술을 오리처럼 내밀고 뭉개진 발음으로 불평했다.

“애아 무스마를 할 줄 아고.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알폰소는 못 말리겠다는 듯한 미소를 띠고 말했다.

“일을 꾸민 건 너라고, 카루소 대표는 바지사장이라고 네가 전면에 드러날 생각이잖아.”

아리아드네는 눈을 똥그랗게 떴다. 언제부터 알폰소가 독심술을 배웠지?

그녀는 입술을 더 앞으로 내밀어 그의 손가락을 치워내곤 항의했다.

“그렇지만. 푸.”

알폰소의 손가락은 따끈한 빵 냄새가 났다.

“그들은 날 그렇게 건드릴 수는 없을걸!”

아리아드네는 랑부예 구휼원의 성녀이자 빈민의 대모로 이름이 높았다.

대귀족이 그녀를 시해하려다가 들키는 날엔 분노한 군중에 의해 성벽에 매달리게 될 수도 있었다.

“난 그들이 건드리지 못할 정도로 거물이니까!”

심각한 이야기 중이었지만 알폰소는 스스로를 거물이라고 칭하는 아리아드네가 귀여워서 한번 또 웃었다.

그런데 막상 ‘거물’ 이야기를 꺼낸 아리아드네는 그 자리에 석상처럼 선 채 되뇌었다.

“잠깐만. ‘건드리지 못할 정도로 거물’이라⋯⋯.”

알폰소는 웃었다.

“카루소 대표에게 빈민 구휼을 시켜서 너만큼 키우려고? 당장은 무리야.”

역병이라도 돌아야 구휼밀을 푸는 사람에게 감사하지 평시에는 카루소 대표의 전 재산을 다 쓰더라도 아리아드네만큼의 명성을 쌓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지체 높은 귀족이나 왕가의 여자와의 통혼으로 거물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이미 장가를 들었고 그런 혼사에 동의할 왕족 내지 귀족 여성도 없을 것이다.

“아니, 아니아니.”

아리아드네는 뭔가 생각이 난 것처럼 자리에서 빙그르르 돌았다.

“카루소 대표를⋯⋯. 카루소 대표에게 불체포특권을 줘 버리면 어때?”

“뭐?”

* * *

알폰소에게 아리아드네는 자신의 구상을 실컷 떠들다가 돌아왔다.

“난 아무래도 말하면서 생각하는 사람인 거 같아.”

그녀는 침대에 걸터 누워 산차에게 종알거렸다.

“혼자서 생각할 때는 순서나 중요도 같은 게 잘 정리가 안 됐는데, 알폰소랑 이야기하니까 그게 한 번에 따다닥 맞아 들어가는 거 있지!”

산차는 대답 없이 아리아드네의 머리카락을 빗겨 주었다. 산차는 약간 의기소침한 기색이었다.

“나와 알폰소가 잘 맞는 걸까?”

체자레와 이야기할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기분 좋을 때의 체자레는 아리아드네에게 잘한다 잘한다 박수를 쳐 주는 스타일이었다.

칭찬 세례를 받을 때면 신은 났지만 토의가 건설적이지는 않았다.

반대로 알폰소가 아리아드네의 질문들에 하는 답들은 흥미로운 가설로 이어졌다.

알폰소는 아리아드네와는 아예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았다.

그녀가 구릉지를 보며 여기에 상업 도시를 건설하면 수익이 크겠다는 상상을 한다면 그는 같은 땅을 보며 군대의 전진로를 생각하며 평시의 경작지를 가늠했다.

“있잖아, 우리가 오늘 무슨 얘기를 했는지 알아?”

산차가 되물었다.

“뭔가요?”

“우린 카루소 대표에게 영지를 줄 거야.”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