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1화> 트레베로
요즈음 데 마레 추기경은 골치가 끔찍하게 아팠다.
휘하 사제들과의 토의를 해도 해도 결론이 ‘트레베로에 가야 한다’ 쪽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 “이렇게 강경한 문구는 선례 없는 일입니다.”
- “서신에 ‘파문’이 직접 언급되었다는 건 역시⋯⋯.”
- “874년 성 나비기우스의 기록이 법황이 직접 서신에서 ‘파문’을 언급한 마지막 기록입니다! 성 나비기우스는 해당 호출에 응답하지 아니하셨다가 파문을 당하고 나비 세 마리의 기적을 일으키신 후에야 파문이 철회되는⋯⋯.”
데 마레 추기경은 성 나비기우스처럼 신실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파문당했다고 하늘에서 천신이 나비 세 마리의 기적을 내려줄 리가 만무했다.
그는 파문당하면 거기에서 끝이었다. 울면서 트레베로로 향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도대체 왜 나를 트레베로로 소환하는 거지?’
도무지 법황의 속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살아서 돌아올 수나 있을까?’
말도 안 되지만 으스스한 상상부터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자기를 처리해 버리려는 게 아니라면 루도비코 법황이 그를 성황청의 본산, 자신의 본거지인 트레베로로 부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루도비코 법황이 자신을 굳이 공격할 이유 역시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옛 고도였던 산 카를로를 책임지는 추기경이자 에트루스칸 왕국 교구 전체의 영도자였다.
그들은 서로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별 트러블 없이 지난 20여 년간 공존했다.
‘날 없애면 내 후임으로는 어떤 놈이 올 줄 알고!’
결정권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불확실성이었다. 악재보다 미지가 더 나빴다.
데 마레 추기경이 마음에 안 드는 건 예측 가능한 위험이었다. 법황과 추기경은 상대방이 무슨 짓까지 벌일 수 있는지 피차 서로 대충 알고 있었다.
‘이 인간 갑자기 왜 이래? 죽다 살아났다더니 열기가 뇌까지 침투해 버린 거 아니야?’
이렇게 생각하니 또 트레베로 행이 욕심이 나기도 했다. 루도비코가 상태가 안 좋은 거라면 강제로 양위시키고 차기를 노려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래, 날 바로 잡아죽일 리는 없어.’
이유 없이 그를 쓱싹해버린다면 루도비코 법황도 그 뒷수습이 몹시 골치 아플 것이다.
- 똑똑.
누군가가 서재 문에 노크를 했다.
“들어와.”
드르륵, 문 열리는 소리가 난 후 바스락거리는 드레스가 마룻바닥에 닿았다.
데 마레 추기경의 서재에 이렇게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의 둘째 딸이었다.
“아버지. 부르셨어요.”
아리아드네가 시선을 내리깐 채 추기경에게 먼저 인사했다. 고분고분한 말투였다.
그의 차녀는 최근 사석에서는 그를 ‘예하’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녀 나름의 화해 제스처였다.
추기경도 이를 알고 있었다. 그는 자못 자상한 목소리로 답했다.
“오냐.”
추기경은 방 안에 있는 가장 좋은 암체어를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 앉거라.”
아리아드네는 깍듯하게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의자에 앉았다. 추기경도 이미지 관리 차 흐뭇하게 웃어 보였다.
부모·자식 간치고는 참 마음의 거리가 먼 사이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또 완전 남은 아니었다.
가문으로 묶인 사이라, 이해득실 면에서 강제로 한배에 타고 있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추기경은 타인에게 의사를 타전할 때 붙이는 일체의 미사여구를 싹 생략한 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 아비가 트레베로로 가야 하게 생겼다.”
“예? 트레베로요?”
“그래. 루도비코 법황의 호출로.”
단어를 꺼내는 것 자체가 손이 떨리는지 추기경은 책상 위에 있던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아리아드네에게 권하지는 않았다.
“소환에 응하지 않으면 종교재판이라고 하더구나. 최대 파문.”
이 단어에는 보통 강심장이 아닌 아리아드네도 놀랐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뜬 채 마른침을 삼켰다.
잠시간의 침묵 후에야 질문을 정리한 그녀는 입을 열었다.
“⋯⋯재판에 부치는 사유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이유를 알아야 대비라도 할 것 아닌가. 하지만 데 마레 추기경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런 말이 없어. 그저 소환에 불응하면 종교재판이고, 최대 파문까지 가능하다는 말뿐이야.”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그는 루도비코 법황의 편지를 아리아드네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편지를 받아 샅샅이 훑기 시작했다.
서신을 읽는 둘째 딸을 바라보며 추기경은 은근하게 운을 뗐다.
“그래서 말인데.”
그녀는 편지에 코를 박고 아버지에겐 시선 하나 주지 않은 채 건성으로 대답했다.
“예.”
“아비와 함께 트레베로로 동행할 수 있겠니?”
대부분의 종교재판은 결국에는 신학 이론 싸움이었다.
추기경을 파문하기 위해서는 그가 성직자로서 적합하지 않다는 것, 그러니까 이단적 교리를 설파하고 있다던가, 금단의 흑마법에 손을 댔다던가 등등의 확고한 사유가 필요했다.
죽은 루크레치아의 일련의 멍청한 짓들을 제외한다면 추기경의 주변 생활은 이 시대의 성직자치고는 상당히 깨끗한 편이었다.
루크레치아의 흑마술 소동도 비교적 초반에 수습됐기 때문에 죽어버린 루크레치아 본인이라면 몰라도 추기경까지 파문하기엔 건이 조금 약했다.
그러니까 결국, 평소 추기경이 가르친 교리가 이단인지 아닌지에 대한 신학 싸움이었다.
“네가 네 나이대에서는, 아니, 나이를 생각하지 않고 보더라도 에트루스칸 왕국 최고 수준의 신학자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아리아드네의 등골에 땀이 흘렀다. 아세레토의 사도를 논박한 일을 일컫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때 그건 예전의 일을 그대로 외워서 타이밍만 딱딱 맞게 들이박은 거였다. 제대로 된 공부라고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최근 몇 년간은 신학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다른 할 일들로 바빴고 성녀 비슷한 것으로 이름을 드높일 생각이 없기도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 그게⋯⋯.”
데 마레 추기경은 주저하는 아리아드네의 말을 탁 끊었다.
“난 이번에 큰 규모의 수행원을 데려갈 수가 없어.”
그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에트루스칸 교구와 내 학파의 사제들을 주렁주렁 달고 간다면 누구라도 데 마레 추기경이 루도비코 법황과 종교재판에서 한 판 붙으려 든다고 여길 게다.”
데 마레 추기경은 바보가 아니었다.
자기가 무엇 때문에 불려가는지도 모르고 상대방의 안방으로 끌려가는 판에 싸움부터 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전투가 불가피해지기 직전까지는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조심스럽고 공손하게 굴 필요가 있었다.
“너는 내 딸이니까, 네가 가면 일상적인 가솔과 함께하는 여행처럼 보이겠지.”
추기경은 은근한 말투로 덧붙였다.
“그렇지만 말이다, 너는 그저 영애 한 명이 아니지 않니? 너는 내 자식 중 가장 큰 자랑이란다.”
쿵. 아리아드네의 심장에 울림이 있었다.
가장 사랑하는 자식, 가장 아끼는 자식, 내 자식. 저 이야기를 듣기 위해 얼마나 긴 세월 몸부림을 쳤었던가.
딸의 얼굴에 떠오른 동요(動搖)를 감지한 데 마레 추기경은 절절하게 호소했다.
“트레베로까지 동행하자. 나와 함께 말이다.”
* * *
알폰소는 여자친구의 얼굴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갈수록 죽상이었다. 마치 얼굴에 나! 고민 있소! 라고 써 붙인 것 같았다.
세상 냉정하고 유능한 것 같으면서도 표정 관리를 못 하는 것도 귀여웠다.
“고민이 저번에는 10만큼 있었다면 이제는 30이야.”
아리아드네는 무릎을 껴안은 채 눈길도 안 주고 툭, 답했다.
“30 받고 50 더.”
알폰소는 뭉근하게 물었다.
“내가 싫어서 그런 건 아니지?”
“그럴 리가.”
아리아드네는 앉은 채로 팔을 뻗어 알폰소를 가볍게 포옹했다. 그는 허리를 푹 숙여 그녀가 자신을 끌어안기 편하도록 위치를 대 주었다.
아리아드네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흰 치아가 끝까지 드러나게 웃었다.
표정을 못 숨기는 게 아니라 안 숨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리아드네는 그에게 자신의 옆자리를 스스럼없이 열고 있었다.
그들의 일상 중 뜨거운 열기와 불안한 시선이 있던 자리에 시답잖은 농담과 가벼운 애정표현이 올올히 스며들었다.
알폰소는 이 변화가 너무나 기꺼웠다. 아리아드네가 보여주는 하나하나의 애정 표시가 짜릿했다.
“내가 싫어서 그런 건 아니지.”
그는 다시 한번 중얼거리며 그녀의 손을 뺨에 얹었다. 아리아드네는 그제야 알폰소의 상태가 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를 밀어내어 눈과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깊은 연못 같은 초록색 눈동자로 알폰소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고민은 네가 있는 것 같은데.”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고민이 없으면 왜 자꾸 쓸데없는 소리를 해.”
알폰소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전혀. 아무것도.”
그는 자기 여자의 방파제가 되고 싶었다. 모든 풍파에서 그녀를 격리해 안전하게 보호하고 싶었다.
작열하는 햇살에서도 차가운 겨울바람에도 닿지 않게 그녀를 곱게 품어만 주고 싶었다.
그런데 자기의 고민거리를 거기에 털어놓아 그녀에게 시름을 더 얹는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어딘가 수상한 기미는 감지했지만 그게 뭔지 콕 짚어내지는 못한 아리아드네는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고 잡아내고 말 거야?”
“없다니깐.”
알폰소는 다시 아리아드네의 손을 잡아 자기 볼에 비볐다. 날씨가 꽤 더웠지만 그녀는 끝내 여름용 장갑을 벗지 않았다.
알폰소가 손을 만지작거리자 얇은 비단이 주름지며 손에서 탈출하려고 했다.
알폰소가 불편하니 벗지 않겠느냐고 권유하려는 순간, 아리아드네가 황급하게 말했다.
“네 말이 맞아. 나 고민 있어.”
그 말에 알폰소는 하던 행동을 멈추고 그녀에게 집중했고, 아리아드네는 그에게서 손을 빼내어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답답한 심경이 잘 드러나는 몸짓이었다.
“루도비코 법황이 아버지를 파문할지도 모른대.”
“뭐?”
알폰소의 눈동자가 커졌다.
“이게 무슨 말이야.”
데 마레 추기경이 파문당하는 건 추기경 혼자만의 일이 아니었다. 일단 추기경이 이끄는 그의 세력이 일제히 적(籍)을 잃게 된다.
그중 만만치 않은 자들은 추기경과 함께 숙청당할 것이고, 나머지는 자기를 끌어줄 우두머리 없이 연약한 맨몸으로 풍파에 맞서 싸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몰락할 추기경의 세력에는 당연히 그의 가솔도 들어갔다.
아리아드네는 본인이 초대 창립자인 백작가의 주인으로 독립된 신분과 지위를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결국엔 그녀의 아버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였다.
혈연으로 성립하는 가문은 해체할 수 없고, 가문은 함께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데 마레 추기경이 파문당한다면, 아리아드네 데 마레 백작도 지금과 같은 위치를 누리긴 힘들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당연히, 알폰소가 아리아드네를 왕자비의 자리에 앉히는 일도 두 배는 더 어려워질 것이다.
“도대체 어떤 일로 파문 이야기까지 나오는 거야.”
알폰소의 목소리에 절절함이 깃들었다.
부정축재? 성 비위? 이단적 가르침? 알폰소는 도대체 데 마레 추기경에게 무슨 일이 있을 수 있는 건지 맹렬하게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나 딱히 걸리는 건 없었다. 추기경은 성격이 괴상하고 자애롭지 못한 것과 별개로 처신에 있어서 흠 잡힐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몰라.”
아리아드네는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트레베로에서 아버지를 소환했어. 루도비코 법황이 아버지께 소환령에 응하지 않으면 파문도 각오하라고 으름장을 놓았대.”
그녀는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도 함께 트레베로로 가자고⋯⋯.”
아리아드네로서는 트레베로에 따라갈 이유는 사실 없었다.
산 카를로에서 버티며 추기경의 처분을 기다린다면 지위에 문제가 생기겠지만 트레베로에 간다면 생명과 신체에 위협이 생길 수도 있다.
그리고 추기경의 믿음과 달리, 자기가 간다고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으리란 희망도 사실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계속 마음속에서 간질간질하게 울렸다.
- “너는 내 자식 중 가장 큰 자랑이란다.”
아버지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폴리토에게 무한한 믿음을 보이고, 이사벨라의 손을 잡고 인생에 중요한 가르침을 손수 내리던 다정한 아버지를 자신이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가는 건 문제가 아닌데, 아니, 문제긴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건지 걱정돼.”
아리아드네의 말은 아리아드네의 손을 꾹 잡은 알폰소의 손짓으로 인해 끊겼다.
“알폰소?”
“가자.”
그는 그녀의 손을 꽉 붙들고 말했다. 표정에 환희가 서려 있었다.
“나랑 같이 가자. 트레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