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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362화 (665/733)

<제362화> 여러 개의 선택권

“가, 같이?”

함께 트레베로로 가자는 알폰소의 말에, 아리아드네는 얼떨결에 반문했다.

“네가 어떻게 해외로 나가?”

왕위계승권자니까 국내에 있는 것이 맞다는, 지극히 합리적인 말이었다. 하지만 알폰소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반문했다.

“언제는 안 갔나, 외국?”

거기까지 이야기한 알폰소는 새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나만큼 외국에서 널 잘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또 누가 있겠어.”

아리아드네가 간다면 그도 가야 했다. 이번 트레베로 행은 목적이 아주 분명한 여로였다.

알폰소는 아리아드네를 힘있게 껴안으며 며칠 전, 레오 3세와 가졌던 독대를 떠올렸다.

* * *

엊그저께 알폰소가 아리아드네의 청을 들어주기 위해 국왕을 찾았을 때, 레오 3세는 역시나 반대급부를 원했다.

“자유도시라⋯⋯.”

그는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장탄식했다. 알폰소는 아버지의 꺼리는 기색을 모른 척하며 여느 때와 같은 말투로 사안을 설명했다.

“예, 폐하. 상인들의 도시 ‘우나이솔라’는 이미 외부 영주의 보호가 필요 없습니다.”

늪지대 한가운데 떠 있는 섬은 영주가 지어주는 성벽 따위와는 늪에 가득 찬 뻘의 밀도만큼이나 거리가 있었다.

내치(內治)는 상인들 가운데 선출된 ‘7인 위원회’가 담당했다.

우나이솔라에 정착한 상인 중 인망 높은 자들로 구성된 7인 위원회는 상하수도와 도로를 구비하고 병원과 학교를 짓는 등 행정을 담당하고 이를 뒷받침할 세금을 걷었다.

“영주가 제공할 수 있는 편익이 없는데 그들을 굳이 영주에 대한 봉건적 의무로 묶어둘 필요 있습니까.”

알폰소 왕자는 덤덤하게 말했다.

“세금은 중앙정부에 바로 바치면 되는데요.”

이는 레오 3세에게 던진 회심의 덫이었다. 대영주의 권한을 축소해 중앙권력을 살찌우는 것은 현 국왕의 인생 목표였으니까.

하지만 교활하고 늙은 토끼는 쉽사리 넘어가지 않았다. 레오 3세는 마치 지금 알폰소에게 아무런 말도 듣지 못했다는 듯이 툭, 물었다.

“그래, 내가 했던 이야기는 생각해 보았느냐?”

“이야기라 하시면⋯⋯.”

갑자기 대화의 화제가 옮겨갔다. 우나이솔라와 상인들의 자치권 이야기에서 멀어진 것이다.

“트레베로 행 말이다.”

레오 3세는 짐짓 자상한 투로 물었으나 은근히 기대하는 말투를 숨기지 못했다.

“그 뒤로 생각할 시간이 좀 있었지 않니.”

레오 3세는 루도비코 법황이 내민 미끼를 무시하지 못했다.

그는 줄곧 ‘에트루스칸 왕국이 루도비코 법황의 소환에 응하면 어떤 이득을 얻을 수 있을지’에 대해 자신이 머릿속으로 그린 무지갯빛 청사진 안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아.”

알폰소는 아버지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레오 3세의 화법을 거울처럼 반사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바마마.”

왕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날씨를 물었고 국왕의 안부를 여쭈었다.

과일이 맛있다는 이야기, 국왕의 말이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는 이야기도 했다.

여기서 아까의 화제로 아득바득 돌아가는 것은 교양있는 화술이 아니었다.

레오 3세 역시 일말의 어색함 없이 매끄럽게 알폰소가 제시한 새로운 화제로 녹아들었다.

그러나 국왕은 결코 자신의 목적을 잊지 않았다.

대화가 끝날 때가 되어 왕자가 일어나도 되겠느냐고 청하자, 왕은 눈가에 깊은 까마귀 주름을 지으며 웃어 보였다.

“트레베로. 생각해 봐라.”

알폰소는 평이한 미소를 띤 채 고개를 숙여 부친에게 인사를 올리고 국왕의 알현실을 나왔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 걸린 미소는 내심을 반영하지 않았다.

늙은 토끼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알폰소는 아버지가 흥정을 붙일 줄 알았지, 이렇게 아무런 조건도 제시하지 않은 채 자신이 원하는 것부터 강압적으로 들이밀 줄 몰랐다.

레오 3세의 말은 결국 우나이솔라의 자치권이 필요하다면 알폰소는 레오 3세 대신 트레베로로 향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문제는 레오 3세가 ‘트레베로에 다녀오기만 하면 우나이솔라의 자치권을 주겠다’고 확약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이 구도대로라면, 국왕이 입을 씻어버렸을 때 왕자는 아무것도 주장할 수 없었다.

“하⋯⋯.”

입맛이 썼다. 트레베로 따위, 사실 가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영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사실 트레베로 행을 생각하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 거부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본능이 보내는 위험 신호일까?’

산 카를로를 떠나는 것이 내키지 않는 이유에 대해 알폰소는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품 안에 안긴 아리아드네의 입에서 ‘나도 트레베로에 가야 한다’는 말이 나오자마자 그는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트레베로행을 결심했다.

‘사실 나는.’

트레베로 행이 싫었던 것이 아니었다. 해외로 도는 외유가 지겨워진 것도, 그렇다고 국경 밖으로 나가는 여정이 두려웠던 것도 아니었다.

‘아리와 떨어지기가 싫었던 거구나.’

사실 두려움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익숙하지 않은 땅에서 기댈 곳 없이 떠도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두려움이 있었다.

기약 없는 외국행으로 그녀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게 두려웠다.

그가 또 그녀에게 아무런 약속을 해주지 못한 사이에 그녀가 다른 남자의 손을 잡아버릴까 봐 무서웠다.

그가 돌아왔을 때, 그녀가 이름 모를—혹은 이름을 아는—다른 자의 품에 안겨 흰 면사포를 쓴 채 눈부시게 웃고 있는 장면을 목도하게 될까 봐 몸서리쳐지게 두려웠다.

‘아무도 감히 범접하지 못하게 하겠어.’

이것은 중의적인 의미에서였다. 그 어떤 사내도 그녀 옆에 똬리를 틀 수 없을 것이다. 알폰소는 아리아드네를 혼자 두지 않을 작정이었으니까.

그리고 동시에 알폰소는 해외에서 아리아드네의 신변에 위협이 갈 일 역시 결코 허용하지 않을 심산이었다.

그의 휘하에는 중앙대륙 최대 정예인 검은 투구 기사단이 있다.

기사단은 평야에서의 전투를 대비한 병과지만 의장단과 호위대의 역할을 동시에, 그것도 아주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었다.

‘루도비코든 갈리코든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하게 하겠어.’

알폰소는 트레베로 행에 차출할 기사단의 인원수를 가늠해보기 시작했다.

* * *

그러나 모든 상황은 변하기 마련이고, 레오 3세를 대신해 떠나는 트레베로 행 특사의 자리도 알폰소만을 위해 기다리고 있지는 않았다.

“국왕 폐하.”

피사노 공작 체자레는 레오 3세를 모시고 나간 가벼운 외승(外乘)길에서 예의 경쾌한 미소를 띠고 말을 건넸다.

“트레베로로 보낼 폐하의 대리인을 선임하는 데에 고민이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

그의 미소가 조금 짙어졌다.

“참, 자식조차도 마음대로 안 되죠.”

레오 3세는 체자레가 깔아준 자리가 참 반가웠다. 국왕은 서장자에게 자신의 적자에 대해 가진 불만을 여과 없이 쏟아냈다.

“떼잉, 알폰소 녀석! 머리 굵어졌다고 바로 이 아비와 흥정이나 하려 들고 말이야!”

국왕은 주로 알폰소의 태도에 대해 화를 냈다. 고분고분하지 못하며 국왕인 아비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주 토로였다.

체자레는 인내심 있게 국왕의 불평불만을 세심하게 헤아리며 하나하나에 다 맞장구쳐 주었다.

“본인이 누리는 그 모든 영광이 다 폐하께서 나온 것일진저, 알폰소는 영 감사한 마음이 모자란 것 같습니다.”

자기소개나 다름없었지만 레오 3세는 격렬하게 동의했다.

“그러게나 말이다!”

그러나 레오 3세는 자신이 정해둔 미묘한 선을 넘지는 않았다.

그는 알폰소가 트레베로 행에 대해 내세운 반대급부가 ‘자치도시 우나이솔라의 자유도시 승격’이라는 이야기는 체자레에게는 꺼내지 않았다.

알폰소를 위해 비밀을 지켜준 것이 아니라, 그런 정치적 문제는 체자레가 알 필요가 없는 사항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국경 영지를 가진 공작으로서의 정치력에는 의문이 있었으나 왕의 숨겨진 아들로서의 눈치는 그 누구보다도 빠른 체자레는 레오 3세가 자기에게 다 털어놓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은 짐작했으나 굳이 캐려 들지 않았다.

그가 공략해야 할 부분은 가족으로서의 감정적인 면이었다.

“그렇지만 알폰소가 또 국경 밖으로 나가기를 꺼리는 이유도 알겠고, 폐하께서도 강경하게 요구하지 못하시는 마음도 알겠습니다.”

체자레는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사려 깊게 고개를 주억였다.

“그 녀석이 바다 건너에서 그 고생을 하고 왔는데, 폐하께서도 아비 되신 입장에서 그 녀석이 고생하는 꼴을 또 보고 싶으시진 않을 것 아닙니까.”

아들의 고생은 안중에도 없고 그저 낯이 없어 요구하지 못할 뿐이었지만 레오 3세는 자기에게 주어지는 감정적 면죄부에 격렬하게 긍정했다.

“그렇지, 바로 그거야!”

금칠이란 무릇 자기 스스로 하면 모양이 안 사는 법이다. 남이 해 줘야 빛이 나니 군주에게는 귀에 단 소리를 해 주는 신하가 필요했다.

“알폰소 녀석을 또 외국으로 보내기는⋯⋯. 다른 이유로도 조금 꺼려지는 게 사실입니다.”

체자레는 짐짓 위험한 분위기를 잡았다.

“루도비코 법황은 잔인하고 예측 불가한 위인이라 알려져 있습니다.”

잘생긴 눈가에 그늘이 졌다. 표정을 바꾼 것만으로도 공기가 휙휙 바뀌었다.

여기가 연극무대였다면 소녀들이 자지러지는 소리가 대강당을 가득 메우고도 남았을 것이다.

“알폰소는 에트루스칸 왕국의 하나뿐인 왕자인데⋯⋯. 만에 하나 법황이 왕위계승자의 신체에 해코지 같은 짓을 하려 든다면⋯⋯.”

그는 ‘후계자’ 같은 단어를 피해 최대한 가치중립적인 단어를 사용하려 애썼다.

객관적 상태를 묘사하는 ‘왕자’라거나, 알폰소도, 비앙카도, 체자레 본인도 해당하는 ‘왕위계승자’라는 단어 말이다.

“폐하께서 알폰소를 밖으로 내돌리기 꺼리시는 심정도 이해가 됩니다.”

체자레는 염려 가득한,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왕을 얼렀다.

“그러니⋯⋯. 차라리 저를 보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레오 3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체자레를 바라보았다.

“네가?”

체자레는 대외적으로 국왕의 조카였으니 그를 못 보낼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피사노 공작은 두 가지 이유에서 레오 3세의 후보군에서 벗어나 있었다.

국왕이 무슨 생각을 했건 간에, 체자레는 짐짓 슬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뛰어난 것이 없는 놈이라 이렇게밖에 국왕 폐하를 보필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레오 3세는 속으로 생각했다. ‘자기도 내가 저를 왜 안 보내는지 알긴 아는구나.’

그렇지만 동시에 레오 3세는 이게 생각 외로 구미가 당기는 방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국제무대에서 자기 판단으로 행위가 가능한 알폰소와 다르게, 체자레는 국왕의 허락 없이는 큰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이는 체자레가 정치 경험이 일천한 것과도 관련 있었고 그가 결국엔 방계에 불과하다는 사실과도 관련 있었다.

그렇지만, 만일 루도비코 법황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요구한다면 도리어 ‘본국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한 발 빼기에도 유리할 것 아닌가?

체자레는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꿈에도 모른 채, 준비해 온 대사를 멜로드라마틱하게 읊었다.

“저를 폐하의 체스판에서 나이트로 사용하세요.”

그는 자신의 아름다운 흑마 위에서 먼 산을 바라보며 혼잣말하듯이 중얼거렸다.

“적장자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밖으로 내돌리는 서자가 제게 주어진 역할이라면⋯⋯. 저는 국왕 폐하를 위해 이를 기꺼이 수행하겠습니다.”

한여름 이른 아침의 선선한 기운을 머금고 있는 공기가 바람을 타고 휘돌았다. 에트루스칸 왕국 중부 지역 특유의 아름다운 날씨였다.

체자레는 왕국에서 이맘때, 이 시간에만 내리쬐는 눈부신 햇살을 맞으며 교회의 대리석 조각상처럼 하얗게 빛났다.

다분히 연극적인 순간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장삼이사라면 시각적 아름다움에 압도되어 체자레의 아무 말에 왈칵 눈물이라도 쏟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레오 3세는 그러기에는 지나치게 노회했다.

동시에 그는 감동해야 하는 순간에 감동해줄 줄은 아는, 기본적인 교양과 눈치는 갖춘 군주였다.

“오오, 체자레⋯⋯!”

레오 3세는 말에 올라탄 채 한쪽 팔로 와락, 자신의 서자를 껴안았다.

“⋯⋯아버지.”

아리아드네와 국왕의 결혼식을 파토낸 이후 단 한 번도 불러보지 못했던 단어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시 입에 올려도 될 것만 같았다.

체자레는 양 허벅지로 힘있게 자기 흑마를 조여 균형을 유지한 채 윗몸을 한껏 돌려 레오 3세가 자신을 껴안기 편하게 자세를 잡아 주었다.

레오 3세는 감격한 듯 크게 외쳤다.

“네 충정이 내 가슴을 울리는구나!”

그러나 국왕의 머릿속에서는 순간 수많은 계산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국왕의 뇌리에 가장 큰 공간을 차지한 생각 두 개가 있었다.

하나는 역시나 체자레의 능력에 대한 의구심이었고, 다른 하나는 ‘고기 방패’라는 단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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