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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363화 (666/733)

<제363화> 견제

누군가가 조건조차 걸지 못하고 고기 방패를 자처하며 원하는 트레베로행 특사 자리는 누군가에게는 권유 자체만으로도 화가 나는 제의였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이것은 주관적인 기분의 차이가 아니라 객관적인 급의 차이로 빚어진 상황이었다.

오히려 알폰소 본인은 비교적 담담하게 넘어간 편이었다.

당사자가 아닌 아리아드네가 되레 알폰소가 레오 3세로부터 트레베로로 가서 루도비코 법황을 만나고 오라는 제의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자 화를 숨기지 못했다.

“Vergogna sul padre! (애비로서 부끄럽지도 않나!)”

레오 3세는 탐욕스러운데다 수치를 몰랐다. 게다가 사회적으로 본인이 수행해야 할 역할을 죄다 방기하고 있었다.

친아들을 대하는 모습으로서도 최악이었고, 웃어른으로 해야 할 처신으로도 끔찍했고, 심지어 좋은 거래상대로도 빵점이었다.

“갈리코 왕국에 끌려갔다 예사크 왕국까지 도망쳐 국격을 올려놓고 왔으면 감사한 줄이나 알아야지, 뭐? 자기 대신 트레베로에를 가?”

아리아드네는 진심으로 분노했다.

“자기가 가긴 무서우니까 그런 거잖아! 위험할 거 뻔히 알면서 어떻게 아버지가 되어서 친아들한테 그런 소리를 해?!”

데 마레 추기경보다 더 심한 사람은 찾기 힘들었는데 하필이면 예비 시아버지 자리가 그런 사람이었다.

여자친구가 자기 아버지를 욕하는 상황에서도 알폰소는 할 말이 없었다.

솔직히 아리아드네의 레오 3세에 대한 평가에 본인도 동의했기 때문이다.

아리아드네는 재차 목소리를 높였다.

“게다가 그걸 우나이솔라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들이밀어? 납작 엎드려서 꼬리 흔들라, 이 말이네!”

알폰소는 그저 쓰게 웃었다. 아리아드네는 분노를 숨기지 못한 채 깃털 펜을 꺼내 양피지 위에 무언가를 거칠게 갈겨 썼다.

0.35.

질 좋은 노란 가죽 위에 숫자 하나가 덩그러니 올라간 모양. 이는 사치스러움을 넘어 기이해 보였다.

“이게⋯⋯. 뭘 뜻하는 거지?”

알폰소의 물음에 아리아드네가 답했다.

“3할 5푼.”

아리아드네의 어투에는 레오 3세를 향한 분노와 고까움이 한껏 담겨 있었다.

“우리의 최후의 저지선.”

여전히 알쏭달쏭했다.

알폰소의 표정에서 자기가 지극히 불친절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아리아드네는 알폰소에게 자리에 앉으라며 자기 옆자리를 툭툭 쳤다.

설명할 준비를 마친 아리아드네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국왕은 분명히 우나이솔라를 자유도시로 승격시키며 자기 이득을 취하려고 할 거야.”

알폰소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국왕 ‘폐하’ 호칭이 빠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여기에서 자기 이득을 추가적으로 취할 거라는 게 안 믿겼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더?”

봉건영주의 힘을 빼면서 추가 세수까지 확보되는데 도대체 무얼 더 바랄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여기서 뭘 더 받아 가시려고? 받아 갈 수 있는 게 있어?”

“황금.”

아리아드네는 현재 우나이솔라의 세율에 대해 짧게 설명했다. 핵심은 두 가지였다.

도시의 총 생산력의 1할 5푼인 580 두카토가 구아티에리 후작에게 바치는 연 상납금으로 책정되어 있지만, 그건 꽤 옛날에 결정된 액수라는 것, 지금 도시의 실제 여력은 그것보다 상당히 높아 1할 5푼이라는 말도 안 되는 고율의 세금에도 불구하고 실질 세율은 그렇게 높지 않다는 것.

“아마 폐하께선 우나이솔라의 세율을 더 올리려고 하실 거야.”

알폰소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토지세로 1할 5푼도 비상식적인 수준인데.”

보통의 토지세는 군주별로 차이가 있었지만 2푼 내지 5푼 사이에서 그쳤다.

그들이 딱히 자비로워서가 아니라 납세 여력 때문이었다. 백성이 부담하는 세금은 토지세뿐만이 아니다.

“그것이 우리의 레오 3세 폐하이시니까.”

알폰소는 참으려고 노력했지만 그만 가볍게 웃음이 터졌다. 그래, 그것이 우리 아버지, 레오 3세 폐하이시지.

“폐하께서 어디까지 올리실지는 모르겠지만 3할 5푼, 이게 우나이솔라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마지노선이야.”

실제로 우나이솔라가 창출하는 부가가치가 밖에 알려진 것보다 서너 배는 큰 덕이었다.

이를 감안하면 3할 5푼의 세율이라도 실질적으로는 수입의 약 1할가량을 세금으로 내는 정도에서 그쳤다.

“이걸 넘어가면 고율의 세금 때문에 도시 자체가 망가질 거고, 우나이솔라 주민들이 납세에 동의하지도 않을 거야.”

세금은 도시가 제공하는 서비스—치안, 청결, 교통의 편의, 모여 있는 상권, 훈련된 고급 인적 자원 등—을 이용하기 위해 지불하는 것이지만 특정 선을 넘어서면 수지타산이 안 맞게 된다.

더 불편한 교통과 덜 훌륭한 인적 자원으로도 참을 수 있을 것 같으면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떠나게 되어 있었다.

우나이솔라의 대안이자 경쟁상대로는 바로 북쪽에 포르토 공화국이 있었다.

“폐하와 3할 5푼까지로 체결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하고 와.”

아리아드네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께서 그거보다 더 큰 액수를 원하신다면⋯⋯. 우린 아마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거야.”

* * *

알폰소는 이내 아버지의 구체적인 탐욕을 계량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가겠습니다, 트레베로.”

레오 3세는 자기에게 나타난 두 번째 옵션에 소리 없이 미소를 지었다.

최근 그의 유일한 적자는 호락호락하지 않게 굴려고 노력 중이었다. 아마 여기에 따라오는 조건이 있을 것이다.

“대신 우나이솔라를 구아티에리 후작령에서 빼내어 국왕에게만 충성하는 자유도시로 만들어 주십시오.”

그러면 그렇지. 레오 3세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알폰소의 요구는 아버지가 원하는 트레베로 행은 맨입으로는 불가하다는 일종의 청구서였다.

공짜로 보낼 수 있는 능력 없는 체자레냐, 대가와 결부된 야무진 알폰소냐.

모든 것이 흡족한 완벽한 옵션은 없었지만 선택권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이다.

레오 3세는 자신의 왕자가 건 딜에 가부를 논하기 전에 일단 빙긋이 웃으며 물었다.

“우나이솔라를 자유롭게 만들어 주고 싶은 이유가 무엇이냐?”

일종의 함정이었다. 알폰소도 어수룩하게 넘어가진 않았다. 여기서 자신의 진정한 저의를 부는 건 정말이지 열두 살짜리 소년 왕자나 할 짓이다.

그것도 아버지와의 신의가 두터운 사랑받는 소년 왕자 말이다.

둘 중 어느 것도 아닌 알폰소는 석고상 같은 은은한 미소를 띤 채 답했다.

“일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알폰소는 입술에 침 하나 안 바른 채 상인 도시를 구아티에리 후작령에서 빼내어 독립시켰을 때 중앙정부가 거둘 수 있는 추가 세수, 부강해질 중앙정부, 봉건영주인 후작가가 제공하지 않는 군사적 방비를 중앙정부가 제공하며 그것을 핑계 삼아 해군력을 증강할 수 있다는 장점 등등을 아버지에게 제시했다.

“⋯⋯모두, 에트루스칸 왕국의 발전과 레오 3세 폐하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레오 3세는 이젠 머리가 다 굵어진 아들의 말을 단 한 마디도 믿지 않았다. 그는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걸쳤다. 아들의 그것과 몹시 닮긴 했으나 훨씬 비열한 각도의 미소였다.

“그렇구나.”

그렇기는 개뿔이.

그의 젊은 아들은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상인 계급을 선택한 것이었다.

넘치는 황금과 유사시 군선으로 차출할 수 있는 갤리선단(船團).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줄을 잘못 섰어.’

대귀족과 상인 사이에 하나를 고른다면 당연히 대귀족을 고르는 게 맞다.

상인은 전시에 동원할 수 있는 해상 자원을 가지고 있었으나 대귀족은 언제든지 당장 사용할 수 있는 훈련된 군사력을 보유했다.

그들은 영지의 지배권을 가지고 식량의 생산과 영토의 수호를 담당했다.

상인들이 제아무리 물류를 맡고 있대도 실어 나를 식량이 없다면 무용지물 빈 배일 뿐이다.

‘클클클.’

하지만 레오 3세는 아들의 헛발질이 불유쾌하지 않았다. 알폰소는 예사크에 다녀온 뒤로 지나치게 체급이 커졌다.

안 그래도 은근히 거슬리던 차였다. 이런 멍청한 짓을 해 주면 고마울 따름이다.

“네 말도 일리가 있구나.”

국왕은 한껏 자비로워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우나이솔라를 자유도시로 지정한다면⋯⋯. 새로이 군주의 신실한 신민이 된 상인들에게 큰 격려가 되겠어.”

어조와 발성도 다정하고 기운을 북돋웠다.

구력이 짧은 사람이 레오 3세의 이 발언을 들었다면 국왕도 자유도시 성립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허나⋯⋯.”

늙은 토끼의 본론은 언제나 저 단어 뒤에 나왔다.

“자유도시를 신설하는 건 대귀족들을 화나게 할 게다. 반발이 심할 거야.”

국왕의 눈가에 까마귀주름이 졌다. 목소리가 의미심장하게 가라앉았다.

“아주.”

알폰소는 묵묵히 국왕을 주시할 뿐이었다.

당황해서 ‘그러면 어떻게 하죠?’라고 반문한다거나, ‘국왕 폐하께서는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라고 본인의 패를 까 보이는 법이 없었다.

이에 레오 3세는 조용히 입맛을 다셨다. 생각보다는 아들의 협상 태도가 좋았다.

‘자기도 전쟁터에서 좀 굴러먹어 봤다, 이거지?’

알폰소의 노련함은 레오 3세에게 두 가지 상반되는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자신의 후계자가 똘똘한 것이 흡족하면서도, 젊고 덩치 좋은 녀석이 제 앞에서 이렇게 빳빳하게 군다는 건 역시 어딘가 불쾌했다.

저 좋은 협상 태도로, 나한테 납죽납죽 엎드리며 싹싹하게 굴면 오죽이나 좋아?

국왕은 결국 자리 입으로 본인의 용건을 꺼냈다.

“그러니 대귀족을 위무하기 위한 지출 세목을 따로 마련해야겠다. 지금 우나이솔라가 구아티에리 후작에게 자치권 확보를 위해 연 얼마를 지급하고 있다고?”

알폰소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는 국왕이 정말로 황금 이야기를 꺼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정액으로 580 두카토, 현재 생산력의 약 1할 5푼입니다.”

그 말을 들은 레오 3세는 눈을 반달로 접으며 웃었다.

“3할 5푼으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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