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5화> 기세 싸움
체자레는 알폰소의 무신경함이 믿기지 않아서 멍하니 입을 벌렸다.
경쟁 붙은 모든 걸 이겨 놓은 주제에 남들 다 보는 앞에서 ‘이야기 좀 하자’니, 본인의 승리를 당사자 앞에서 만끽하며 수치라도 주겠다는 건가.
체자레는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지만 알폰소는 그 무응답에도 불구하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여유작작한 몸놀림이었다.
“피사노 공작.”
알폰소의 백마가 우아한 속보로 체자레의 흑마 바로 옆에 따라붙었다.
주인 속도 모르고 체자레의 흑마, 레오폴도는 알폰소의 백마의 장단에 맞추어 발걸음을 놀렸다.
알폰소의 백마는 레오폴도보다 체고가 한 뼘쯤 더 높았고 알폰소는 체자레보다 머리 반 개가 더 컸다.
체자레의 얼굴에 사선으로 그림자가 졌다. 그는 본능적인 위압감에 어깨를 움츠렸다.
“트레베로 행에 자원했었다더군.”
너무나 자연스러운 하대. 긴장이라고는 엿보이지 않는 일상적인 태도와 말투.
지금 여기서 알폰소에게 호칭을 올려야 하나 내려도 되냐부터를 고민하고 있는 체자레와는 모든 것이 달랐다.
체자레는 그만 뭔가가 울컥 치밀어올라 뾰족하게 내뱉었다.
“지금 놀리러 오신 겁니까?”
존대가 나온 건 기세에서 밀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에서 밀렸다고 해도 화까지 사그라든 건 아니었다.
“국왕 폐하의 신임에, 해외 외유에, 제 전 약혼녀와 동행까지 하시게 되셨다고 들었습니다.”
체자레는 부러 ‘나의 전 약혼녀’라고 아리아드네를 호칭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돌아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 인생은 완벽하고 네 인생은 시궁창이라고 쪼개러라도 오신 거지요, 아우님?”
“체자레 공작.”
굳이 동생이라고 호칭하는 것도 기 싸움의 일환이었다. 알폰소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에 찌든 숨이었다.
“세상이 자네가 그리는 상(狀)과 반드시 일치하진 않아.”
알폰소도 지금 체자레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는 대충 감이 잡혔다. 저렇게 적개심을 대놓고 불태우는데 모르기도 쉽지 않았다.
알폰소를 지극히도 사랑하는 레오 3세가 자신을 밀쳐내고 적자에게 부당한 이득을 줬다고 여기는 것이겠지. 사실이 아니지만.
타인의 겉모습만을 보며 부러워하는 것은 참 무의미한 심력의 낭비였다. 체자레가 상상하는 세계는 그 어디에도 없는데 말이다.
“적당히 하게.”
더 자세하게 말해줄 수도 없었고 그럴 사이도 아니었다.
하지만 알폰소의 느릿느릿한 말투는 체자레에게는 권태와 나른함으로 읽혀 그의 분노에 불을 붙였다.
체자레의 새파란 눈이 동토에서 이따금 발견된다는 불타는 얼음처럼 이글거렸다.
“절 붙들고 잘난 척할 목적으로 오신 거라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는 분에 겨워 한마디를 더 얹었다.
“주군이 이렇게나 심심해하실 때까지 내버려 둔 측근들의 무능이 빛을 발하네요.”
체자레가 악에 받쳐 분풀이 한 거라는 사실은 알폰소도 알았다. 저런 멘트는 그를 전혀 불쾌하게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알폰소가 체자레를 불러낸 이유는 따로 있었다.
파들파들 떠는 체자레 공작이 말머리를 돌려 뛰쳐나가기 전에 이 이야기는 해야 했다.
“이번 트레베로 행에 자네가 자원해 나섰다고 들었네.”
체자레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문제라도?”
그는 팩 외쳤다.
“어차피 원하시던 것을 모두 얻으셨으니 상관없으신 것 아닙니까?”
알폰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트레베로 행의 특사 자리를 따내니 마니 하는 잡스러운 것과는 조금 달랐다.
그거보다 훨씬 굵직하고 단순했다.
하지만 이걸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시간 순서대로, 당면한 일부터 고지하기로 했다.
“나는 이번에 트레베로로 가서 외드 대공을 만날 거야.”
밖에서 떠들고 다니지 말라거나 같은 사족은 굳이 붙이지 않았다. 그런 것이 무의미한 상대였다.
“라리에사 대공녀와의 혼담 문제를 마무리 지으려고 해.”
체자레는 또렷한 눈으로 알폰소를 바라보았다. 불안한 예감에 동공이 흔들렸고 세상은 아주 선명해짐과 동시에 무의미해졌다.
그의 눈에선 수많은 문장이 타올랐지만 입은 꾹 다문 채였다.
알폰소는 체자레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을지 반쯤은 짐작했고 반쯤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하지만 어차피 체자레에게 발언권을 허여할 생각은 없었다.
“그 일만 끝나고 나면. 나는 아리아드네에게 정식으로 청혼하고 약혼할 생각일세.”
쿵.
체자레는 어디선가 천둥이 치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늘은 맑았고 공기는 건조했고 그 어디에서도 큰 소리는 나지 않았다.
주변을 돌아보았으나 사람들이 떠들고 소리치는 것처럼 자잘하고 파편화된 소음뿐이었다.
그는 힘겹게 단어를 찾아냈다. 하고 싶은 말이 몹시 많았지만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말은 이것밖에 없었다.
“국왕 폐하께서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겁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해.”
알폰소는 단호하게 끊었다.
“자네가 걱정해줄 문제가 아니야.”
체자레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허파 가득 공기를 머금었지만 호흡이 가빴다. 공기 중의 습도가 가득 차올라 물방울이 허공이 떠다니는 듯했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알폰소는 천천히 말을 골랐다.
“자네와 아리는 끝났어. 옆에서 맴돌아봤자 소용없단 말일세.”
이 말엔 드디어 체자레가 격분했다.
“그걸 왜 그쪽이 결정하지?”
알폰소는 생각했다. 저 말은 맞다. 그가 결정할 일이 아니라 아리아드네가 직접 결정할 일이다.
하나 아리아드네의 결론은 알폰소와 같을 것이다. 그는 그 점에 있어서는 그녀에게 100%의 믿음이 있었다.
그렇지만 알폰소는 체자레에게 경고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자네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함이지.”
이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체자레 데 코모가 아리아드네 데 마레를 주위를 맴도는 꼬락서니를 보기 싫었기 때문이다.
“우린 결혼할 거야.”
체자레는 빽 소리를 질렀다.
“누구 마음대로!”
“내가 그렇게 만들 걸세.”
알폰소는 언성을 높이지 않고 자분자분 말했다. 하지만 미간은 어쩔 수 없이 구겨져 있었다.
그는 이마에 굵은 주름을 만든 채, 체자레를 참을성 있게 바라보았다.
“자네의 손을 떠났으니 순리대로 보내 줘.”
“그건 그쪽이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내 마음대로 할 겁니다!”
“트레베로 행에 자원한 것도 뭐라도 해 봐야 할 것 같아서 한 거지.”
오늘 알폰소는 그치고는 지극히 많은 말을 했다.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입지를 다지고, 세력을 만들고, 국왕 폐하의 인정을 받아 신부에게 걸맞은 남편감이 되기 위해서.”
체자레는 ‘멋대로 넘겨짚지 말아라’라고 외치는 대신 이를 악물고 알폰소를 노려볼 뿐이었다.
“아리는 그대에게 아무 관심이 없어. 급을 맞추고 말고랑 관계없어.”
알폰소의 청회색 눈이 체자레의 물빛 눈과 마주했다.
“노력해봤자 소용없네. 쓸데없는 짓은 그만하고 여기까지 하게.”
알폰소의 용건도 여기까지였다. 더는 체자레와 할 말이 없었다. 알폰소는 박차에 힘을 주었다.
왕자의 백마가 부드러운 울음소리를 남기며 앞서서 달려 나갔다.
인파 속에 홀로 남은 체자레는 충혈된 눈으로 알폰소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누구 마음대로.”
그의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알폰소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체자레 공작이 수도로 돌아온 이후 아리아드네는 그에게 완벽한 거리를 두고 움직였다.
그를 굳이 피하려 들어서 어색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의식하지도 않는 우아한 경계선이 있었다.
“샌님 알폰소는 모르고 있겠지만.”
체자레의 눈동자에 붉은 빛이 번득였다. 흰자위에 그새 실핏줄이 터져서였다.
“여자를 갖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어.”
하나는 그녀의 동의를 얻는 거였다. 의사의 합치를 보아 둘이 손을 잡고 같은 곳을 바라보며 걸어가는 길.
다른 하나는 좀 더 간명하고 전통적이며 폭력적인 방식이었다.
“네가 아무리 철석같이 그 여자 믿어 봤자.”
지하 감옥에 갇혀서 밧줄 하나에 온 체중을 지탱하고 있으면 그 아리아드네 데 마레라도 별수가 없지 않을까?
그 지하 감옥 돌바닥 위에 알폰소 데 카를로의 수급이라도 구르고 있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체자레가 세계를 인식하는 상(狀)이 좀 더 뒤틀린 방향으로 무럭무럭 자라나기 시작했다.
* * *
「자치도시 우나이솔라는 에트루스칸 왕국의 수많은 백성이 모여 장인정신을 발휘해 진귀한 예술품과 정교한 함선, 선진적인 항해 도구를 생산해내는 나라의 보물이다. 내 그대들을 더 중히 쓰기 위해 나의 명령만 받드는 특별한 구역으로 만드니, 이를 ‘자유도시’라 칭하느니라.」
“이게 말이나 되는 짓이야―!”
- 쨍그랑!
구아티에리 후작은 분에 차서 온 집안의 집기를 다 부쉈다.
후작부인은 물론이고 집사며 하인 하녀며 모두 덜덜 떨며 앞에 나설 엄두를 내지 못했다.
“도대체 어떤 새끼가 국왕에게 이런 안을 올린 거야―!!”
그는 알폰소 왕자가 그 당사자일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당장, 당장 카스틸리오네 새끼더러 여기로 달려오라고 해!!”
“예, 후작 각하!”
과거 그의 가신이던 카스틸리오네 남작은 이제는 수도 상인들의 우두머리 비슷한 것이 되어 거들먹거리고 있었다.
보카네그로 상회와 혼맥으로 이어진 이후로 상계는 분열 없이 하나로 뭉쳐 제법 따르는 녀석들도 많아지고 힘깨나 쓰게 된 모양이었다.
카스틸리오네 녀석을 조지면 이게 누구의 힘으로 된 일인지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가 후작의 계산이었다.
그러나 후작은 이내 빈손으로 돌아온 가신과 마주해야 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놈은 어디 가고 너 혼자 돌아와!”
“소, 송구하오나 후작 각하⋯⋯.”
가신은 그와 눈도 못 마주치고 바닥을 향해 고개를 푹 숙였다. 이건 무슨 사건이 있었던 거다.
뭔가 일이 있었는데 나에게 보고를 하지 못하는 거다.
구아티에리 후작은 자기 성질머리를 이기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곧이곧대로 보고해!”
가신은 차마 말도 꺼내지 못하고 더럭더럭 후작의 눈치를 보았다. 가신이 그렇게 나올수록 후작은 오기가 생겨 확고하게 고집했다.
“그 새끼가 뭐라고 했는지 한 마디 한 마디 빼놓지 말고 그대로 읊어!”
“하오나 후작 각하⋯⋯.”
“지금 당장!”
한참을 고심하던 가신은 말하지 않고는 자리를 떠나지 못할 것 같자 눈을 질끈 감더니 침을 꿀꺽 삼키고는 외쳤다.
“‘구아티에리 띨빡 새끼, 내가 아직도 지 가신인 줄 알아.’라고 하셨습니다.”
구아티에리 후작은 뭔가 목과 뒤통수를 따라 화끈하게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우욱!”
그는 머리를 부여잡고 뒤로 쓰러졌다. 혈관 안의 힘찬 박동과 손에서 빠지는 힘이 참 서로 안 어울렸다.
후작부인이 깜짝 놀라 뛰쳐 들어왔다.
- “여보!”
가신들도 우왕좌왕이었다.
- “후작 각하!”
- “후작님!”
구아티에리 후작부인이 허둥지둥하며 외쳤다.
- “의사를 불러와라, 의사를!”
구아티에리 후작은 이 와중에도 화가 식지 않아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아악! 아악! 아아아악!”
40 몇 년 인생에 오늘처럼 분통이 터지는 날은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