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6화> 고개를 치켜들고
“구아티에리 띨빡 새끼, 내가 아직도 지 가신인 줄 알아.”
자신을 소환하는 구아티에리 후작. 그리고 후작의 가신인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자작. 카스틸레오네 남작은 눈앞에 있는 구아티에리 후작의 대리인에게 호쾌하게 일갈했다.
“후작 놈에게 전해. 지가 후작이면 다냐고. 그리고 너! 다신 여기 나타나지 말아!”
남작이 자작에게, 그리고 그를 넘어 후작에게 소리를 지르는 보기 드문 진기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친정에 방문해 아버지와 함께 티타임을 가지고 있던 카멜리아는 왜인지 이게 앞으로는 그렇게까지 보기 어려운 광경은 아닐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1127년의 에트루스칸 왕국에서 황금은 왕이었다.
귀족들이 새로운 왕에게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다는 새로운 진실은 곳곳에서 균열 사이로 머리를 치켜들고 있었다.
카스틸리오네 남작은 크게 외쳤다.
“여봐라! 손님께 문이 어딨는지 보여드려라!”
“예!”
기가 산 카스틸리오네 가문의 하인들이 신나게 구아티에리 후작의 가신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런 대접은 상상도 못 했던 후작의 가신은 카스틸리오네 남작에게 마지막으로 호소했다.
“카스틸리오네! 자, 자네 이러기인가?!”
자못 친근한 어투였다. 그쪽도 이쪽도 구아티에리 후작가의 가신 가문이었으니 선대 어디에는 인연이 있었을 수도 있었겠다.
하지만 저 얼굴은 기억에 없었다.
가문이 가진 은원은 가문의 것이었고 이는 동부에서 싸리비로 두들겨 맞기 직전까지 몰리고서 수도로 올라올 때 모두 끊겼다.
남작은 ‘모두 갚았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할 만큼 한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남작 개인의 은원뿐이었다. 그리고 저놈은 개인적으로는 초면이다.
“이거 봐, 그쪽. 거 이름이 뭔가? 아니다. 말할 필요 없어. 어차피 까먹을 테니까.”
들어봤자 앞으로 통성명할 일이 없을 이름이었다. 그의 사위는 사흘 전, 상인 협회의 대표로 선출되었다.
오늘 팔라지오 카를로에서 발표한 국왕 레오 3세의 칙령과 조합하면 그건 그의 사위가 신 자유도시 우나이솔라의 지도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우나이솔라는 지금 산 카를로와 타란토를 잇는 에트루스칸 왕국의 제3도시로 떠오르고 있었다. 웬만한 영주 따위는 명함도 못 내밀 직위다.
영광은 비텔리 가문만의 것이 아니었다. 카스틸리오네 남작 본인도 다음 달 정기회의에서 우나이솔라의 미래를 결정하는 7인회에 합류하게 될 것이다.
7인회는 가문 단위로 참여하게 되는데, 이제 비텔리 가문과 카스틸리오네 남작가의 영구 합류로 9인회로 명칭을 바꾸게 되는 셈이다.
이제 구아티에리 후작의 가신 따위, 그자의 계급이 자작이건 백작이건 상관없이 카스틸리오네 남작과 겸상도 할 수 없는 자다.
카스틸리오네 남작은 저 이름 모를 자작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주군과 공신(貢臣)의 예는 모름지기 주군의 은덕으로 시작하기 마련이라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베풀 수 있는 것이 더 많기 마련이니까. 흉작에 구휼을 하고, 자연재해에 구호를 하고, 병에 걸린 사람을 구해주고 그 대가로 충성을 맹세 받는다.
“자네는 구아티에리 후작한테 뭘 받는가.”
자작의 눈이 흔들렸다. 본인이 받은 것들을 헤아리는 것이렸다.
“나는, 나는 구아티에리 후작에게 뭘 받았나?”
카스틸리오네 남작의 목소리가 격앙되기 시작했다.
“제가 나에게 월급을 줘, 거래처를 알선해 줘, 집을 빌려줘, 그것도 아니라면 귀족 사회에서 보호를 해줘?”
카스틸리오네 남작가의 화려한 응접실이 노남작의 목소리로 까랑까랑하게 울렸다.
“아무것도!”
그의 목에 핏대가 섰다.
“구아티에리 후작이 나에게 공신의 충성을 바랐다면 최소한! 그 일이 있었을 때 내 딸은! 내 딸만은 보호해줬어야지!”
이사벨라 데 콘타리니가 부인들을 모아 카멜리아의 콜레지오니 발 파티의 출입을 막았을 때 뒤에 서서 깔깔대던 귀부인 중에는 구아티에리 후작부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내 딸이 하혈을 하면서 쓰러질 때 도와주진 못할망정, 거기서 뒤통수를 쳐?”
그 자리에 없어서 직접 보진 못했지만 그 욕심이 뒤룩뒤룩한 여편네가 제 딸을 어떤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어떤 시선으로 비웃었을지 눈에 선했다.
“못하게 하지는 못할망정, 아니면 우리 쪽에 미리 귀띔이라도 해 줘야지 거기서 같이 팔짱을 끼고 웃어?”
구아티에리 후작의 가신으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자작은 일단 당황해서 손사래부터 쳤다.
“아, 아니, 그게⋯⋯. 그러셨을 리가⋯⋯.”
“그 집구석을 모시는 자작이라면 자네가 제일 잘 알 거 아뇨! 그 육시랄 마누라 그러고도 남을 여자라는 거!”
솔직히 부인할 수가 없었다. 구아티에리 후작부인은 욕심 많고 무리 지어 다니기를 즐겨서 항상 소소한 구설수를 달고 다녔다.
집안에서의 행실을 생각해 보아도 별로 편들어주고 싶은 사람이 아니었다. 자작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내 뒤통수를 그렇게 친 양반들이 자네 뒤통수는 안 칠 거 같아? 내 딸한테 그 짓을 한 양반들이 자네 딸한테는 안 그럴 것 같냐고!”
자작의 침묵은 더더욱 길어졌다.
“내 말 알아들었지? 천금을 들고 와서 빌어도 난 그쪽이랑 다시 연을 맺을 생각이 없어!”
카스틸리오네 남작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황금이라면 이쪽에 더 많아! 됐으니까, 썩 꺼져! 다시는 내 집구석에 나타나지 마!”
남작가의 하인이 다가와 자작에게 정중히 출구를 안내했다. 자작이 봐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구아티에리 후작가는 잘못을 했고, 카스틸리오네 남작에게 그 잘못을 덮을 만큼의 이득도 줄 것이 없었다.
구아티에리 후작의 진심 어린 사과가 상황을 반전시킬 약간의 가능성이었지만 일개 가신에 불과한 그로서는 이를 약속할 수가 없었다.
그는 반박 없이 조용히 하인을 따라 저택을 나갔다.
구아티에리 가의 이름 모를 자작이 떠난 후, 아버지의 뒤에 앉아 있던 카멜리아는 찡해진 눈가로 아버지를 불렀다.
“아빠⋯⋯.”
카멜리아가 유산을 한 뒤로 핑계만 있으면 딸을 불러들여 설탕이고 과자고 몸에 좋다는 수상한 즙이고 챙겨 먹이는 카스틸리오네 남작이었다.
그녀는 뒤에서 아버지를 껴안았다.
“아빠⋯⋯. 감동이에요.”
항상 거리감이 있던 아버지였다. 자식들보다는 황금에 더 큰 관심이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오늘 당당히 떨쳐 일어나 딸을 괴롭힌 자들에게 결별 선언을 했다.
카멜리아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삼키기 위해 눈을 계속 깜박깜박 떴다 감았다. 반대로, 카스틸리오네 남작은 막대기같이 뻣뻣해져서 외쳤다.
“뭐, 뭐가!”
카멜리아는 아빠의 등에 뺨을 댔다.
“저 때문에⋯⋯. 후작가랑 싸우시기도 하고⋯⋯. 사실, 명문가에 시집보내고 싶어 하셨는데 흔쾌히 남편과 결혼을 허락해 주신 것도 그렇고⋯⋯.”
“큼, 큼!”
남작은 크게 헛기침했다.
“따, 딱히 너 때문에 결정한 건 아니다.”
그는 답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비텔리 서방네 상회가 점점 커져 가서 거슬리던 참이었는데 이렇게 화학적으로 합병할 수 있게 되면 좋은 일이기도 하고!”
얼굴이 벌겠다.
“구아티에리 놈들이 재수가 없기도 하고! 그래, 그런 거다!”
카멜리아는 쿡쿡 웃으며 아빠의 등을 때렸다.
“아이, 아빠도 참.”
카스틸리오네 남작은 빽 소리를 질렀다.
“아파 이것아!”
“안 아프면서.”
카멜리아는 아버지를 한 대 더 쳤다.
“진짜 아파!”
유산한 딸이 안타까워서 몸에 좋다는 건 다 가져다 먹였더니 그게 건강으로 안 가고 다 근력으로 간 모양이었다.
딸이 한 번 더 손을 들어 올리는 것을 본 카스틸리오네 남작은 황급하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 * *
아리아드네는 차곡차곡 트레베로 행을 준비했다. 그녀가 가장 먼저 챙긴 것은 언젠가 알폰소가 그녀에게 보관을 부탁했던 라리에사 대공녀의 메모였다.
「에트루스칸 국, 산 카를로 교구의 데 마레 추기경의 사생아인 아리아드네 데 마레를 죽이거나, 그에 준하게 해쳐 주십시오.
1123년 3월 18일,
라리에사 드 발로아.」
날것의 악의. 아리아드네는 겉으로 보기에는 무덤덤하게 금고를 열고 쪽지를 꺼내어 여행 짐 가장 안쪽에 깊숙하게 잘 넣었지만 아무런 동요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짓까지 하며 날 없애고 싶었다니⋯⋯.’
미움받는 상황은 겪다 보면 무뎌지지만 아무래도 완전히 괜찮아지지는 않았다.
뭐, 존재 그 자체로 미움받는 게 아니라 아리아드네가 가지고 있는 것—알폰소의 애정—으로 미움받는 거니 그나마 참을 만하기도 했다.
밑도 끝도 없는 악의야말로 소화하기 힘든 것 아닌가. 이유가 있으면 그나마 나았다.
아리아드네는 어찌 됐건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나름의 유쾌함을 유지하는 성향은 아리아드네 성격의 최대 장점이기도 했다.
‘그래도 이 쪽지 덕분에, 라리에사 드 발로아 대공녀와도 완전히 이별이다.’
아리아드네는 사실 탐욕 자체를 혐오하지는 않았다. 누구나 끓어오르는 인생 목표 하나쯤은 있는 법이다.
중앙대륙에서 통치권 없는 방계 대공의 딸로 태어났는데 자기에게 에트루스칸 왕국의 적통 왕자와 결혼할 기회가 굴러들어온다면, 그 앞에서 고고하고 양심적으로 굴 여자가 몇이나 있으랴 싶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짓까지 해놓고도 성공하지 못했으면⋯⋯. 대가를 치러야지.’
모험은 얻을 것과 잃을 것을 계량해서 실패할 각오를 하고 걸어야 했다. 이기기만 하면 모험이 아니다. 그게 모험의 속성이었다.
이 쪽지가 공개된다면 라리에사는 에트루스칸 왕국으로 시집올 생각은 영영 접어버리는 편이 나을 것이다.
외국인이, 왕자비 자리를 얻기 위해 에트루스칸 사람을 살해할 음모를 꾸몄다고? 그것도 페스트 사태 때 인망을 얻은 ‘랑부예 구휼원의 성녀’를?
이는 에트루스칸 왕국에 팽배한 반 갈리코 정서와 왕자의 배우자감, 그러니까 국민 며느리에게는 음전함과 정숙함을 요구하는 여론에 폭발하라고 불을 붙이는 짓이었다.
정상적인 왕자비 직 수행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이게 공개된다면 다른 정상적인 혼처를 구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아리아드네는 알폰소가 이미 법률적으로는 혼인신고가 되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말에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쪽에서는 쪽지를 절대 비밀로 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내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라리에사 대공녀가 절대로 그럴 수는 없다고 뒤집어질 수는 있겠지만 그녀의 아버지인 외드 대공은 분명히 그럴 것이다.
아리아드네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것으로 라리에사 대공녀와도 완전히 이별이다. 아리아드네는 자신 있었다.
* * *
자신이 없는 건 데 마레 추기경 쪽이었다. 그는 출발 일자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점점 더 불안함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파문이라⋯⋯.’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고, 다음에는 분노했다. 그러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수록 데 마레 추기경은 그 두려움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나는 이번 트레베로 행에서, 파문당하고 나의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겠다.’
그간 한 짓이 너무 많았다. 일단 아무래도 가장 마음에 걸리는 건 루크레치아의 흑마술 소동이었다.
당시 연관된 루크레치아의 몸종은 죽여서 입을 막았고 남은 사람들은 다 믿을만한 사람들이라지만 티끌만한 관련 증언만 나와도 골로 갈 상황이니 불안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 외로도 데 마레 추기경이 걱정하는 일들은 많았다.
그는 이제껏 자신이 썼던 수많은 저술을 일일이 재검토하며 그게 이단과 연루될 수 있을 만한 꼬투리를 찾아보았으나 그 분량은 너무나 방대했고 그는 입장상 객관적일 수가 없었으며 그만 종이로 쌓은 탑 아래에서 그는 탈진해 버렸다.
여로에 오르기로 한 날짜인 오늘, 데 마레 추기경은 반쯤 해탈한 상태였다.
“아버지. 다들 일 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이번에 그와 동행하는 차녀, 아리아드네가 점잖게 그를 재촉했다. 집안에 하나 남은 자식이었다.
이 집이 사남매로 북적이던 시절도 있었으나 루크레치아의 죽음과 함께 모두 다 사라져버렸다.
“⋯⋯그래.”
추기경은 깎아지른 각도의 데 마레 대저택의 중앙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혹시나 루크레치아도, 그 자식들도 다 흑마법으로 만든 신기루가 아니었을까 같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면서였다.
추기경은 집사의 도움을 받아 현관을 나섰다.
두꺼운 떡갈나무 문이 열렸고, 노안에는 지나치게 강렬한 늦여름의 산 카를로 햇빛이 실내로 일제히 침범해 들어왔고, 요란한 함성이 지축을 울렸다.
- “추기경 예하께, 경례―!”
- “Salute!”
- “예하께 신의 가호를!”
데 마레 대저택의 앞마당을 검은 투구와 형형색색의 갑옷으로 완전 무장한 사나이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들은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을 모두 점유하고도 넘쳐나 정문 바깥쪽 빈 땅에까지 달했다.
그 인파 속에서 미끈한 체형의 남자 하나가 사람들을 밀치고 앞으로 나섰다. 알폰소 왕자보다는 덩치가 좀 작은, 젊은 남자였다.
“추기경 예하! 데 마레 백작님! 모시러 왔습니다!”
이번 트레베로 행의 부관으로 낙점된 만프레디 경이었다.
데 마레 추기경은 왕자의 부관에게 인사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뒤에서 그림자가 나타나 만프레디 경을 가려버렸다.
침침한 노안을 껌벅이며 이게 무슨 일인가 앞을 살피는 추기경의 눈앞에 은빛 갑옷의 사내가 천천히 말을 몰고 나타났다.
인파를 헤치고 나타난 알폰소 왕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