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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367화 (670/733)

<제367화> 조금의 진심

“왕자님께서 여기까진 어인 일로⋯⋯.”

데 마레 추기경은 조금 당황했다. 알폰소 왕자는 추기경을 데리러 여기까지 올만한 급이 아니었다.

일반적인 의전 서열상 왕자와 추기경은 동등하다. 하지만 알폰소 왕자는 조금 특별했다.

마르그리트 왕비가 더는 아이를 낳을 수 없다—그게 건강 문제이건 왕과의 금슬 문제이건 간에—는 사실이 명확해진 이후, 유일한 왕위계승권자임이 확실한 알폰소 왕자는 왕세자의 대우를 받았다.

보통은 왕비 사후에 새로 들어올 계비의 자식 등을 고려해 그런 식의 암묵적인 대우는 허용하지 않지만, 갈리코 왕국과의 관계와, 계비가 들어온다손 쳐도 그 새 왕비가 낳을 아이와의 나이 차이와, 그리고 무엇보다도 알폰소 왕자 본인의 뛰어남이 그런 대우를 당연하게 만든 것이다.

레오 3세를 제외한 나라 안의 모든 자가 알폰소 왕자에게 허리를 굽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폰소 왕자는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추기경 예하께서 트레베로까지 먼 길을 가신다고 해, 함께 가시면 어떨까 해서 한번 들러 보았습니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편안한 어조로 말했다. 마치 마을 공동우물에라도 같이 가자고 권유하는 듯한 말투였다.

“이편이 조금은 더 안전하기도 하실 거고요.”

‘조금 더 안전’이라기엔 데려온 기사단의 머릿수가 소규모 정복 전쟁 급이었다. 백국 정도는 한 번에 함락시킬 수도 있어 보였다.

“기사단이 오백 명은 족히 되어 보입니다만⋯⋯.”

기가 질린 추기경이 중얼거렸다. 알폰소 왕자는 정정했다.

“삼백오십. 단출합니다.”

중세의 기사는 개개인이 소규모 영지의 영주일 정도로 유지 비용이 많이 드는 고급 전투병과였다.

알폰소 왕자의 검은 투구 기사단은 전쟁터의 생존자를 모아 만들었다는 태생상 아직 각자에게 영지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삼백오십명이 ‘단출하다’고 묘사할만한 숫자는 결코 아니었다.

애초에 알폰소 왕자가 산 카를로로 돌아오며 이끌고 온 기사단 전체 병력의 절반에 가깝다.

그는 원래 팔백 명 전원을 데리고 가려고 했으나, 루도비코 법황의 히스테리에 가까운 반발과 마주했다.

“법황께서 출입 허가는 하셨습니까⋯⋯?”

팔백 명의 중장기사단이라면 사실 타국 군대를 자기 영토 내에 점령시키는 것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지배자가 싫어하는 게 당연할 정도로. 하지만 알폰소 왕자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답했다.

“방문 조건이었습니다.”

뭐, 타협을 하긴 해야 했다. 팔백 명에서 삼백오십 명으로.

그 과정에서 실무자들이 피똥을 쌌고 알폰소 왕자를 반드시 만나야 하는 외드 대공이 자신이 보증을 선다고 사정사정해 루도비코 법황을 간신히 설득했다.

이렇게 큰일을 이렇게 아무 일 아닌 것처럼 말하는 것도 재주였다.

본인이 직접 추기경을 데리러 왔으면서도 생색내지 않는 것 또한 비슷한 맥락의 태도였다.

어찌 보면 아주 여유로운 자세다. 그러나 데 마레 추기경은 늙은 여우여서 왕자가 무슨 생각으로 여기에 왔는지 쉽게 짐작했다.

‘나를 데리러 왔겠어?’

제 뒤에 서 있는 자신의 딸이 에스코트의 대상일 것이다.

추기경은 왕자가 참 여자에게 약하다며 속으로 혀를 찼다. 루크레치아에게 목매던 자기 과거는 까맣게 잊은 모습이었다.

“아리야.”

그는 뒤에 서 있던 딸을 불렀다.

“예, 아버지.”

아리아드네가 건조하게 대답했다.

무려 왕자가 예법을 파격적으로 무시한 채 그녀만을 위해 기사단을 이끌고 데리러 왔건만 목소리 한번 차분했다.

데 마레 추기경은 자기라면 방방 뛰면서 좋아했으리라고 생각하며 혀를 찼지만 동시에 그래서 자신의 둘째 딸이 왕자에게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긴 여행에 대비한 성장(盛裝) 차림이었다.

부드럽게 땋아 내린 머리에는 높은 모자와 베일을 써서 태양을 피할 수 있게 했고, 여로가 길고 험한 만큼 산 카를로에서 유행하는 목둘레선이 깊게 파인 장식적인 드레스 대신 목 끝까지 올라오는 우플랑드를 입었다.

데 마체 추기경의 차녀는 집안 식구들까지 합쳐 도합 사백여 명은 족히 되는 남정네들 사이에 혼자서만 햇살을 독점하는 것처럼 눈에 띄었다.

귀티가 나면서도 동시에 극히 매력적이어서 남들의 시선을 잡아챘다. 추기경은 새삼 뿌듯해졌다.

“왕자 저하께서 고마운 제의를 해 주시니 내 기꺼이 받아들여야겠다.

일단 우리 집안의 마차로만 가려고 준비해 놓았는데, 말 먹이용 건초라던가 몇몇가지 물품들이 불필요하게 겹치는 게 분명히 있을 테니⋯⋯.”

추기경은 알폰소 왕자 쪽에서 누가 살림을 전담하는지 알아내려고 실눈을 떴다. 때맞춰 만프레디 경이 앞으로 뛰쳐나왔다.

“안토니오 데 만프레디입니다, 예하!”

싹싹한 미소와 함께였다. 하지만 추기경은 만프레디 경에게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바로 아리아드네에게 일렀다.

“그래, 여기 만프레디 경과 의논해서 왕자님의 기사단 쪽에 좀 맡겨 두거라.”

큰 관심이 없어 보였지만 윗전이 나타나면 텐션이 올라가는 만프레디 경은 여전히 싹싹하게 외쳤다.

“알아서 모시겠습니다!”

만프레디 경은 사근사근하게 물었다.

“백작님,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안내만 해 주십쇼. 다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자세한 것은 아마 집사 니콜로가 알고 있을 것이다. 만프레디 경은 아리아드네를 에스코트해 집사를 찾으러 떠났다.

딸을 떨어뜨려 놓은 데 마레 추기경은 알폰소 왕자를 보며 말했다.

“왕자 저하, 준비가 될 때까지 저와 가볍게 산책이라도 하시겠습니까?”

독대 신청이었다. 알폰소는 체고가 높은 말 위에서 현관에 서 있는 추기경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작은 체구의 나이 든 성직자였지만 데 마레 추기경에게는 일종의 아우라가 있었다.

이게 실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가 아리아드네의 아버지였기 때문에 혼자 느끼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뭐 어느 쪽이면 어떠랴. 미래의 사위는 장인의 독대 신청을 거절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는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럼, 잠시 걸으실까요?”

종자에게 말고삐를 넘기며 알폰소가 제의했다.

* * *

데 마레 추기경은 알폰소 왕자를 데 마레 대저택의 후원으로 안내했다.

‘여기는⋯⋯.’

알폰소는 익숙한 장소에 얼굴이 홧홧해졌다.

이곳은 그가 구아티에리 후작의 만찬에서 술에 제대로 취해 아리아드네를 찾아와 진상을 부렸던 바로 그 후원이었기 때문이다.

“별 볼거리는 없습니다만, 저희 집 후원입니다. 처음 와 보셨지요.”

“아, 예, 뭐⋯⋯.”

처음 와 봤냐는 말에 양심이 쿡쿡 찔렸다. 사실 한 번만 왔던 것도 아니었다.

갈리코 왕국으로 가기 전날 몰래 담을 넘어 들어오기도 했고—이날은 무려 따님의 방에까지 들어갔다—최초의 방문으로 거슬러 올라가자면 아리아드네의 입술을 처음으로 훔쳤던 날도 이 후원을 통해 달아났었다.

알폰소가 데 마레 추기경에게 저지른 못 할 짓은 죄다 이 후원 출입과 관계가 있었다.

“아름답게 꾸미는 것보다는 튼튼하게 짓는 데에 치중했습니다. 크게 장식적인 건 없지만 담이 높아 외부인이 침입하긴 어렵지요.”

‘외부인’은 지레 찔려 헛기침을 했다. 알폰소는 이쯤 되면 추기경이 뭔가를 알면서 이러는 거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미래의 사윗감이 침착함을 완전히 잃기 전에, 데 마레 추기경은 입을 열었다.

“사교계에서 도는 소문은 저도 건너 건너로 들었습니다.”

아리아드네와 만난다고 선언한 것을 일컫는 말이었다.

지금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한 알폰소 왕자의 귀에 저건 ‘내 허락도 받지 않고 내 딸과 만났겠다?’로 들렸다.

그의 입 안이 버석하게 말랐다.

교제를 반대한다고 말씀하시려나?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 된다?

정말 말 그대로,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중앙대륙 최고의 사윗감이면 뭘 하나.

그가 원하는 단 한 명의 여자의 아버지가 난 자네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 남들이 뭐라고 하건 그대로 끝인데.

아니나 다를까, 추기경은 알폰소 왕자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최소한 알폰소의 귀에는 이게 추궁으로 들렸다.

“제 모자란 여식을 사랑하시나요?”

“⋯⋯예?”

‘네! 사랑합니다!’가 정답이었겠지만 알폰소는 앞의 ‘모자란 여식’이라는 단어에 정신이 팔려 그만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아니, 어디가 모자란단 말씀입니까? 예쁘고 귀엽고 혼자서 다 하는데!

그러나 저렇게 반박하기에는 추기경의 어조가 어딘가 좀 이상했다. 담담하고 건조한 말투였다. 죽은 날짜를 받아놓은 환자 같았다.

“루도비코 법황이 저를 왜 트레베로로 불렀는지는 들으셨을 겁니다.”

“아.”

통상적으로 붙여야 하는 존칭이 생략된 상태.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화법.

알폰소는 상대방이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제나 사려 깊은 그는 입을 다물고 발언권을 저쪽에 양보하기로 했다.

“저는 아마 이번 트레베로 행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 무슨⋯⋯.”

“파문당한 고위 성직자란 무릇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법이니까요.”

추기경은 알폰소 왕자를 빤히 바라보며 무어라 발언하려는 왕자의 입을 막았다.

“가벼운 위로는 삼가주십시오.”

괜찮을 거라느니, 누가 감히 데 마레 추기경 예하를 건드리겠느냐 같은 입에 발린 말은 지금 추기경이 듣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법황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에트루스칸 왕국에 있는 우리 중 아무도 모르는 것이 사실이지 않습니까. 루도비코 법황이 저를 친다면 제가 그 뒤로 살아있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지금 제 모든 게 법황의 의중 하나에 매달려 있습니다.”

“⋯⋯가벼운 위로가 아닙니다.”

알폰소 왕자는 천천히, 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추기경 예하께 안 좋은 불상사가 일어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알폰소의 단단한 청회색 눈동자가 데 마레 추기경을 바라보았다.

“제가 보증합니다.”

믿음직했다. 제 딸이 왜 옆자리를 비워놓은 채 오매불망 자기만 목매달고 기다리는 체자레 공작을 버리고 자신의 것이 될 수 있을지 여부가 불확실한 왕자를 택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추기경은 픽 웃었다.

“이 늙은이마저 녹여 버리실 것 같습니다. 그러면 안 돼요.”

그는 며칠 안 되는 기간 동안 살이 많이 빠져 더 늙어 보였다. 노인의 지방은 갑옷의 역할도 하나 보다.

평소의 단단한 껍질에 균열이 가, 주변인에게도 잘 내보이지 않았던 추기경의 연한 속살이 조금 드러난 느낌이었다.

아마 생전의 루크레치아에게나 보여주었던 모습이리라. 평생의 짝을 잃은 남자는 이해받을 곳이 없었다.

“그나마 저는 제 여식보다는 좀 더 비관적인 편입니다. 왕자님의 약속이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습니다.”

데 마레 추기경과 알폰소 왕자의 마지막 독대는 알폰소 왕자가 에트루스칸 왕국으로 귀국한 직후였다.

그때 알폰소 왕자는 데 마레 추기경에게 잘못된 일의 힌트를 구하려 손을 내밀었지만, 추기경은 자신의 최대 이익을 위해 그 손을 외면했었다.

“저는 이제 왕자님께 정치적 도움이 될 수가 없어요. 드릴 것이 없습니다.”

알폰소 왕자는 데 마레 추기경에게 추가로 받을 정치적 자산도 없었고, 갚을 빚도 없었다. 작은 원한이 있다면 있을까.

“제가 파문당하고 나면, 데 마레 가문도 쉽게 넘어가진 못할 겁니다. 제아무리 데 마레 백작 작위의 주인이 아리 그 아이고 저는 겉으로는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해도요.”

추기경은 긴 한숨을 쉬었다.

“괴롭히는 사람도 여러 군데에서 나타날 것이고, 좋은 신분의 자리에도 가지 못하게 되겠지요.”

이것은 데 마레 추기경이 파문당한 이후, 아리아드네가 왕자비가 되긴 어려울 것이란 이야기였다.

데 마레 추기경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부탁 하나만 하겠습니다. 내가 죽은 다음에도, 내 딸을 책임져 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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