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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368화 (671/733)

<제368화> 데 마레 추기경의 아버지로서의 마음

데 마레 추기경은 찬찬한 어조로 말했다.

“어려운 부탁이라 미안합니다.”

“⋯⋯.”

“물론, 제가 파문되어 모든 문서에서 이름이 사라지고 살아 있는 육신은 길거리를 떠돌다가 죽게 되더라도, 모든 사람이 데 마레의 혈육에게 돌을 던지게 되더라도 왕자님께서 제 딸 하나 거두어 안전하게 보호하시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압니다.”

데 마레 추기경의 목소리는 나직했다. 하지만 그는 강렬한 눈빛으로 알폰소 왕자를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제 딸아이는 그런 걸로 만족할 아이가 아닙니다. 무슨 말인지 알아 들으시지요.”

아리아드네는 정부의 자리를 원하는 여자가 아니었다.

고작 그런 것이 목표였다면 진작에 달성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이젠 지위 그 자체 또한 아니었다.

왕비 자리만 원했다면 레오 3세의 계비가 되어 이미 왕비의 티아라를 머리에 얹고 있었으리라.

그녀는 반듯한 남자의 온전한 옆자리를 원했다.

알폰소의 생각에 그녀는 그런 위치에 앉기에 완벽하게 근사한 여자였다. 그릇이 크고, 반듯하고, 우아한.

“무슨 말씀인지 아주 잘 알아들었습니다.”

알폰소 왕자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리는 제가 잘 지키겠습니다.”

지키다 뿐인가. 이 트레베로 행 여행 자체가 그녀의 머리 위에 그녀의 기품에 걸맞은 관을 씌워주기 위해 떠나는 길 아닌가.

“그리고 그녀의 자리는 제 바로 옆, 왕자비의 의자입니다. 추기경께서는 그런 면에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데 마레 추기경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자기 딸이 안전한 손에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으리라.

그가 생각하지 못한 건 반대로, 자기 딸이 누군가를 위한 날개가 되어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데 마레 추기경은 오로지 자신만이 가문에서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여겼다.

“이 늙은이의 청이 하나 더 있다면.”

“말씀하십시오.”

“둘째를 낳거들랑 데 마레의 작위는 그 아이에게 주어 독립시켜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알폰소 왕자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데 마레 추기경을 바라보았다.

아리아드네가 알폰소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는다면 그 자식은 데 마레가 아니라 카를로 왕가의 일원이 된다.

파문당한 자의 딸이라도 왕자비로 맞이해 달라는 아주 어려운 부탁은 흔쾌하게 승낙한 알폰소 왕자는 되려 이 청에는 말을 잃었다.

둘째를 내놓으라는 이야기가 데 카를로의 체면에 흠이고 뭐 이런 종류의 생각 때문이 아니었다.

‘둘⋯⋯?’

일단 자식 둘이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인지부터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아리가 둘을 낳을까? 낳겠다고 할까?’

미래 사위의 눈이 흔들렸다.

데 마레 추기경은 이걸 자기가 지나친 요구를 한 것으로 잘못 해석했다. 늙은 여우는 재빨리 한 발짝 물러났다.

“아, 독립이라 하면 당연히 성을 데 마레로 바꾸거나 카를로 왕가의 상속권을 박탈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데 마레 백작위가 왕가에 부속되어 대대손손 내려가는 작위 중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독립된 가문으로 유지될 수 있게 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뜻입니다. 오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물론 처음 말할 때는 그 뜻이 아니었다.

독립 작위도 주고 성도 카를로가 아니라 데 마레로 내놓으라는 말이었지만 그 정도는 참을 수 있다.

추기경이 빙글빙글 웃으며 왕자를 압박했다. 알폰소는 가까스로 대답했다. 이거 외에 할 말도 없었다.

“아리와⋯⋯. 의논해 보겠습니다.”

* * *

데 마레 추기경에게는 자기만 믿으시라며 큰소리를 팡팡 치고 나온 만프레디 경은 막상 집사 니콜로와 짐을 어떻게 다시 싣고 나눠야 가장 효율적인 동선이 나올지의 이야기를 나누게 되자 당황해서 쩔쩔맸다.

예사크에 있던 시절 부관은 엘코였고, 지금 이런 잡다한 안살림을 맡아 하는 사람은 베르나르디노 경이었다. 만프레디 경은 영 행정에 재능이 없었다.

그는 그저 시키는 대로 검을 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 게 체질에 맞았다.

고생하는 만프레디 경은 집사 니콜로의 밥이었다.

집사 니콜로가 노련하게 만프레디 경을 어르고 달래자 모든 귀찮은 일은 만프레디 경의 차지가 되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났다.

하지만 어찌 됐건 왕자가 시킨 일은 다 마무리한 셈이다.

가까스로 한숨 돌린 만프레디 경은 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아리아드네에게 한탄했다.

“어휴! 이런 건 정말로 머리가 어질어질하다니깐요. 여행길 짐 꾸리기도 이렇게 힘든데 전쟁터 보급은 어떻게 하는 건지 원.”

“예사크에서 잘하시지 않았나요, 그래도?”

“잘하긴요! 형편없었습니다. 그런데 비단 저뿐만이 아니라 남들도 다 엉망이어서 그럭저럭 동티가 안 났을 뿐이에요.”

만프레디 경은 신이 나서 전쟁터에서의 무용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높으신 분을 만나면 텐션이 올라가는 만프레디 경인데 예쁘고 높으신 분인 아리아드네 데 마레 백작이 자기 얘기를 귀 기울여 들어준다니 신날 만도 했다.

“우리만 못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잘난 척하는 포르토 공화국 놈들도 엉망이었어요.”

“왜요. 썩은 빵이라도 줬나요.”

“썩은 빵은 기본으로 먹는 거죠.”

센 척을 한번 해 본 만프레디 경은 아리아드네가 썩은 빵을 배급해야 할 일이 있으면 만프레디 경에게부터 먹여도 될까? 라고 생각하는 것은 꿈에도 모르고 포르토 공화국에서 편지를 잘못 보내온 이야기를 했다.

“그놈들은 자기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보급선을 지배한다! 뭐 이런 소리를 하면서 거들먹거렸거든요. 그런데 그⋯⋯. 제가 편지를 안 보냈다고 해서 파혼당하지 않았습니까.”

“아. 베델리아 양과의 일은 참 안 됐습니다.”

“어휴⋯⋯. 그 일도. 참 할 얘기가 많죠.”

여기까지 말한 만프레디 경은 억울했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제가 안 보냈다는데 그건 진짜 아니에요. 제가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는데, 서신 수발은 포르토 공화국 측에서 전담했단 말입니다?”

“보급과 연락을 그쪽에서 모두 맡았었지요.”

“중앙대륙으로 보낼 편지들을 모두 모아서 가져갔었거든요. 제가 베델리아 양에게 보낸 편지도 거기 있었었지요.”

만프레디 경은 자기가 얼마나 정성껏 편지를 써서 고이고이 모시다가 한 달에 한 번 있는 정기선 편에 넣어 베델리아 양에게 보냈는지 허풍을 섞어 자랑했다.

“아니 그런데, 그다음 달에 배가 중앙대륙에서 돌아와서 각자 자기 편지를 가져가라고 돌려줬는데, 그만 제 편지가 그대로 돌아오지 않았겠어요?”

“베델리아 양이 반송한 건가요, 아니면 배달이 아예 안 되고 돌아온 건가요?”

“베델리아 양이 반송한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분명히 밀봉해서 보낸 편지였는데, 돌아올 땐 뜯겨 있었거든요. 편지봉투용 나이프 같은 걸로요.”

아리아드네의 눈이 가늘어졌다.

“답장 같은 건 없었고요?”

“예, 아무것도⋯⋯. 꺼내서 읽은 흔적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종이가 좀 제멋대로 구겨져 있었거든요.”

“그런데 베델리아 양은 왜 편지를 못 받았다고 했죠?”

“그건 저야 모르죠! 파혼은 그쪽에서 저와 하고 싶었던 거 아닐까요?”

아리아드네는 자신과 알폰소 사이의 서신 수발이 일절 불가능했던 일에 대해 그게 죽은 엘코의 단독 범행이었는지, 아니면 좀 더 큰 다른 공범이 있었는지가 항상 궁금했었다.

“베델리아 양에게는 물어봤나요?”

만프레디 경은 말끝을 흐렸다.

“에, 꼭 그렇게까진⋯⋯. 아니오.”

엘코가 아리아드네와 알폰소 사이의 서신을 한사코 훔치고, 나머지 기사들의 서신은 자연스럽게 분실됐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원래 백중해를 건너가는 서신이나 물건이 잘 도착하길 기대하는 건 어렵기도 하고 일반 기사들의 편지는 왕족 직계의 물건보다 더 험하게 취급했을 테니까.

그런데 만프레디 경의 편지에도 손댄 흔적이 있었다? 게다가 그걸 알폰소 왕자의 군영이 아니라 포르토 공화국 측 영내에서 발견했다는 건 엘코가 손댄 게 아니라 제3의 인물이 있었다는 뜻이었다.

아리아드네는 하늘을 보았다. 아침 닭이 운 지부터는 시간이 꽤 지났지만 정오에 울리는 교회의 종소리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리날디 가에 다녀오시죠.”

“예?”

“이쪽은 마차로 움직이니까 속도가 느려요. 만프레디 경이 지금 당장 리날디 가에 가서 베델리아 양을 만나보고 온 다음에 말로 따라붙으면 점심 먹을 때 좀 지나서는 합류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만프레디 경이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아니, 그, 저, 제가 부관인데. 마차나 이런 것도 제가 봐야 하고.”

얼굴이 새파래졌다가 새빨개졌다. 저번에 맞은 뺨이 다시금 시큰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 그, 통솔도 제가 해야 하고.”

그는 결국 울상이 되어 물었다.

“도대체 이제 와서 베델리아 양에게 가 무슨 말을 한단 말입니까!”

아리아드네는 간단하게 지정했다.

“무슨 말을 하긴요. 정말로 그 편지를 받아본 적이 없었는지, 편지 보낸 일자와 그 편지가 개봉됐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베델리아 양에게 물어보면 돼요.”

그녀는 아직도 얼굴이 벌게져 있는 만프레디 경에게 톡 일침을 놓았다.

“누가 다시 가서 사귀래요? 이건 일이에요,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프레디 경이 울상을 지은 채로 미적거리는 와중에, 데 마레 추기경과의 산책을 끝낸 알폰소가 나타났다.

그는 마치 산책을 끝낸 강아지가 당연히 집으로 돌아오듯 아리아드네 옆으로 붙었다.

“아리!”

아리아드네의 허리를 끌어당겨 안은 알폰소는 그녀의 이마에 부드럽게 키스했다. 장인어른의 허락까지 받았겠다 거칠 것이 없었다.

아리아드네는 알폰소의 팔을 잡고 만프레디 경을 지목했다.

“나 저분한테 오전 중에 일 하나 시키고 싶은데, 그래도 돼? 산 카를로 귀족가 한군데에 들렀다 오는 거라서 우리 일행엔 오후에 합류 가능해.”

만프레디 경은 입을 쩍 벌리고 아리아드네를 쳐다보았다. 알폰소 왕자는 만프레디를 돌아보지도 않고 손짓했다.

“다녀와.”

만프레디는 펄쩍 뛰었다.

“왕자님! 무슨 일인지 물어보시지도 않으시고! 저는 왕자님의 명령만을 들으며 기사단의 지휘명령체계는⋯⋯.”

만프레디의 첫 문장이 시작함과 함께 알폰소는 천천히 옆으로 몸을 돌렸다.

철탑 같은 상체가 만프레디 경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만프레디 경은 꿀꺽, 침을 삼켰다.

알폰소 왕자의 표정이 무시무시했던 것이다.

‘이거 연병장 30바퀴 구르게 시킬 때 짓던 얼굴인데⋯⋯.’

다행히도 알폰소는 연병장에 대한 언급 없이 딱 한 마디만 했다.

“다녀와.”

만프레디 경은 바로 크게 경례를 붙였다.

“옙!”

그리고 바로 리날디 가로 떠난 만프레디 경이 먼저 북쪽으로 출발한 일행을 따라잡은 것은 그날 오후가 아닌, 약속된 첫날 숙박장소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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