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9화> 대리하는 자
만프레디 경이 터덜터덜 돌아와 찾은 곳은 숙박 장소로 차출된 군소 영주의 성이었다. 그는 가장 큰 침실을 차지한 알폰소 왕자를 찾아 경례했다.
“만프레디, 부대 복귀했습니다!”
알폰소는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측근들을 모두 물리고 아리아드네와 차 한잔을 하고 있던 차였다.
그는 자신의 양손 대검, 칼레드부흐를 닦느라 만프레디 경을 올려다보지도 않고 싱겁게 답했다.
“만프레디, 생각보다 늦었군.”
“꼼꼼하게 일하느라요.”
그는 성의 원래 주인 등 외부인이 없는 것을 흘긋 확인하고선 편지 한 통을 꺼내 협탁 위로 털썩, 던졌다. 지친 모습이었다.
만프레디 경은 어차피 자초지종을 잘 모르는 알폰소 왕자가 아니라 그의 곁에 기대앉은 데 마레 백작에게 보고를 올렸다.
“⋯⋯백작님 말씀이 맞았습니다. 베델리아 양은 제가 보낸 편지를 받았던 적이 없어요.”
* * *
갑옷을 전부 다 차려입고 불쑥 리날디 가에 쳐들어간 만프레디 경은 리날디 백작에게 장검으로 두들겨 맞을 뻔했다.
리날디 백작은 마음에 안 드는 자는 검으로 공격하는 버릇이 있었다.
만프레디 경은 펄쩍 뛰면서 투구를 벗고 왕자 저하의 명령으로 베델리아 데 리날디 영애에게 물어볼 것이 있어서 왔다고 사정사정한 끝에야 들어갈 수 있었다.
그 호전성에 있어서 자기 아버지를 쏙 빼닮은 베델리아 양 역시 공격을 시도했다.
자기 집 응접실에 전 약혼남이 나타나자마자 재차 따귀를 날리려고 한 것이다.
다행히, 그녀의 선공은 진입 시점부터 저번에 맞았던 따귀의 아픔을 잊지 않고 몸을 사리던 만프레디 경의 서전트 점프에 막혔다.
“내가 편지를 받았다고요? 이 거짓말쟁이! 당신이 뭐라고 감언이설을 늘어놓아도 사실이 아닌 게 사실이 되지는 않아요! 이 손 놔! 당신은 마저 맞아야 돼!”
베델리아 양은 도통 그의 설명을 들어주려 하지 않았다.
데 마레 대저택에서 떠나자마자 곧장 리날디 백작가로 향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만프레디 경은 수도의 자기 부모님 집에 들러 본인이 보냈던 열린 봉투의 편지를 가지고 갔는데, 그게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완고하게 만프레디 경의 주장을 부인하던 베델리아 양은 이제는 너덜너덜해진 낡은 편지 봉투를 받고는 말을 잃었다.
그녀는 고요히 그 편지를 읽었다.
편지의 내용은 언제나의 만프레디 경 같았다. 까불까불하고 실없는. 하지만 한 단락이 그녀의 눈에 띄었다.
「이 끝없는 사막은 정말이지 지치고 힘들고 지루한 땅입니다. 감히 절망적이라는 단어를 쓰겠습니다. 내일 눈을 뜨고 또다시 이 흙먼지와 이교도를 마주할 생각을 하면 아, 주님께서 왜 오늘 내 목숨을 거두지 않으셨지 하는 한탄마저 들지요.
그럴 땐 저는 베델리아 양을 생각합니다. 당신과 나누던 이야기들, 우리가 함께 말하던 미래를, 이번 파견에서 얻은 영지로 당신과 우리 아이를 부양할 생각을 합니다.
아니 사실 그렇게 먼 미래도 아닐 거에요. 그렇지요? 당신은 내가 오늘을 살아 숨 쉬는 유일한 이유예요.」
베델리아 양은 두 손에 편지를 든 채로 왈칵,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 * *
소환장을 대신 받아든 젊은 남자는 죽어가는 병자의 옆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성황청의 사절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보시다시피, 갈 처지가 안 됩니다. 아베르루체 수도원장께서는⋯⋯.”
누가 보아도 곧 천신의 부름을 받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성황청 사절은 단호했다.
“성황청에서는 이번 소환령에 응하지 않으려면 파문도 각오하라고 하셨소.”
검소한 로브를 걸친 젊은 남자는 대꾸하지 않았다. 하고 싶었던 말—죽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이 성직자로서는 매우 부적절했기 때문이다.
“부수도원장님!”
그 와중에 죽어가는 아베르루체 수도원장의 손을 잡고 있던 어린 수사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수도원장님께서, 수도원장님께서⋯⋯!”
젊은 남자는 노 수도원장의 코 밑에 손을 대어 보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임종하셨습니다.”
남자는 새하얀 손으로 성호를 그었다.
“수도원장님의 영혼이 천신의 인도를 받아 좋은 땅으로 가시길.”
“아멘.”
“아멘.”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를 따라 성호를 그었다. 성황청 사절도 마찬가지였다.
사절은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성호를 긋고 고개를 숙였다.
아베르루체 수도원의 사제들은 황급히 가져온 멱목으로 시신의 얼굴을 덮은 후 이를 통째로 미리 준비한 관에 옮겼다.
젊은 남자는 성황청의 대리인에게 물었다.
“⋯⋯이제 수도원장님께서 트레베로로의 소환에 응하실 수 없음은 확실해졌지요? 우리는 장례식 준비를 해야 하니 이제 그만 돌아가 주시지요.”
그러나 수도원장의 죽음도 중앙의 소환 앞에선 방패가 되지 못했다.
“나는 아베르루체 수도원의 책임자를 트레베로로 소환하라는 법황 성하의 명을 받아 왔소!”
추기경의 호출은 깔아뭉갤 수 있어도 파문 선고가 가능한 법황의 명령은 무시할 수 없다.
성황청의 사절은 젊은 남자를 거만하게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게 솜털이 보송보송한 애송이건 뭐건 상관없소.”
늙은 여우가 아니라 애송이가 온다면 오히려 좋았다.
“대표자가 올 수 없다면, 수도원 전체가 같이 파문당하는 수밖에.”
‘파문’이라는 이야기에 수도원장의 장례를 준비하던 사람들이 움찔, 동요를 보였다. 젊은 남자는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표자가 가기만 하면 되는 겁니까.”
“그렇소.”
“그럼 내가 가겠습니다.”
그 말에 어린 수사들은 동요하며 젊은 남자에게 매달렸다.
- “부수도원장님!”
- “저희 때문이라면 그러시지 않으셔도 돼요!”
- “저, 저 사람들이 부수도원장님께 해코지하면 어떡해요?”
그러나 성황청의 사절은 되레 당신에게 대표권이 있냐는 듯 고압적으로 물었다.
“댁은 누구요?”
“아베르루체 수도원의 부수도원장입니다.”
“이름 말이요, 이름.”
젊은 남자는 쓰고 있던 로브의 후드를 벗었다. 눈부시게 하얀 피부와 그보다 더 하얀 은발이 촛불에 반사되어 은은하게 빛났다.
“라파엘 데 발데사르로, 아베르루체 수도원의 부수도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 * *
알폰소와 아리아드네 일행이 트레베로로 향하는 여로는 늦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나무랄 데 없이 좋았다.
남들의 눈이 있어 아리아드네는 알폰소 왕자보다는 데 마레 가문의 마차에서 추기경과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삭초제근(朔草諸根) 해야지.”
카루소 대표의 일을 친구의 일처럼 에둘러 물어본 아리아드네의 말에, 추기경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인데도요?”
추기경은 아리아드네의 것과 똑같은 녹색 눈을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평생 납작 엎드려만 있을 거냐?”
아리아드네는 아버지의 눈빛에 흠칫 놀랐다.
“내가 약하면야 눈에 안 띄게 수그려 있는 게 가장 좋은 방도이기는 하지. 그런데 이미 싸움이 붙어버렸다면서.”
“예.”
“그러면 거기서 최선을 다해 물어뜯어야 되는 거다. 얌전히 있으면 수프도 빵도 안 돼. 네가 고양이에게 덤비는 쥐새끼여도, 이빨이 아주 날카로운 쥐새끼라는 사실을 상대방에게 명명백백히 보여줘야 다시는 공격을 안 해와.”
데 마레 추기경이 아리아드네를 대하는 태도는 확실히 이전과는 달랐다.
“집안의 중요한 문서는 전부 내 서재의 비밀금고에 들어있다.”
“그 서재에 비밀금고가 있나요?”
금시초문이었다. 추기경은 자세히 일러 주었다.
“내 책상 아래에 발치에 보면 마루가 조금 다를 거다. 뚜껑처럼 열게 되어 있어.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면 된다. 지을 때 미리 만들어 놨어.”
추기경은 덧붙였다.
“그러느라 우리 집 중앙계단이 남들보다 좀 더 높은 거야. 층고를 확보해야 했거든.”
아리아드네는 눈을 크게 뜨고 아버지를 보았다.
“꿈에도 몰랐어요.”
데 마레 추기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구나.”
그가 이 저택을 지을 당시엔 갓 수도 근처로 상경한 주교였던지라 공사에 동원된 인부들을 다 죽여 없앤다거나, 설계자를 불구로 만든다거나 하는 짓을 할 수가 없었다.
해당 비밀 시설이 타인에게 드러날지 여부를 순전히 운에 맡긴 셈이었는데, 이렇게 재주 좋은 자기 친딸도 몰랐다면 성공한 셈이었다.
“그 안에는 내가 남한테 빌려준 받을 돈과⋯⋯.”
체자레 데 코모 백작을 허무인인 왕의 남동생의 아들, 체자레 데 카를로 공작으로 신분 세탁시켜준 증거가 들어있었다.
데 마레 추기경은 몹시 주도면밀한 사람으로, 매해 새로 구입한 양피지 중 일부를 새것인 채로 따로 보관해 놓는 버릇이 있었다.
서류를 위조할 때 가장 곤란한 부분은 새 종이를 쓰면 바랜 정도가 달라서 한눈에 티가 난다는 점이었다.
그는 들키지 않기 위해 아예 연도별로 성황청에서 사용하는 바로 그 양피지를 구매해서 쌓아놓았다.
“뭐, 이거저거 안에 있다. 내가 죽으면 열어보렴.”
체자레 공작의 신분 세탁 사건 당시 데 마레 추기경의 주도면밀함을 알게 된 레오 3세는 크게 기뻐했다.
역시 추기경의 일처리는 산 카를로 제일이라고, 그 누구에게도 들킬 일이 없겠다고.
새로 위조된 레오 3세의 존재하지 않는 남동생의 출생신고서는 아주 완벽했다.
대성황당 지하 문서고에 보관된 체자레의 출생명부는 다른 사람들의 것도 함께 적혀 있어서 아예 바꿔치기할 수는 없었으나, 대신 겉면을 얇게 깎아낸 뒤 섬세하게 아버지의 이름을 바꾸어 써넣는 방법으로 위조되었다.
그러나 막상 얇게 깎아낸 체자레의 출생명부는 데 마레 추기경의 금고 안에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으로 남아있다.
“여는 방법은 이것과⋯⋯.”
추기경은 자기 품 안에서 반쪽짜리 열쇠를 건네주었다.
진짜 열쇠는 그가 여전히 보관하되, 그가 난데없이 잡혀가 그걸 전달할 기회가 없을 상황을 대비해 보조 열쇠를 주는 것이었다.
아리아드네는 그것을 받아 자세히 살펴보았다.
구리로 만든 것이었는데, 세로 면에 난 홈을 보니 두 개를 합쳐서 열쇠 하나로 만들어 돌리게 되어 있었다.
자주 사용하지 않았는지 청색 녹이 슬어있었다.
“내 사후에 집사에게 물어보거라.”
아리아드네가 뭐라 대답하려던 찰나, 덜컹! 마차가 멈췄다. 그녀가 차창에 친 커튼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는 것과 동시에 데 마레 추기경이 차분하게 말했다.
“트레베로로구나.”
아리아드네의 눈앞에 웅장한 황금빛 성벽과 그보다도 더 높은 깎아지른 첨탑이 모습을 드러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압도적인 위용이었다.
산 카를로에서는 느슨하게 구릉을 따라 펼쳐진 건축을 최상으로 쳤는데, 그 덕분에 오늘 본 트레베로의 성벽과 첨탑은 산 카를로에 있는 그 어떤 건물보다도 높았다.
첨탑의 최상단에는 거대한 십자가와 거기에 매달린 예사크의 곤이 있었다.
황금으로 주조된 예사크의 곤은 자비 어린 시선으로 일행을 굽어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흥분에 가쁜 숨을 내쉬었다.
‘이곳이⋯⋯. 트레베로⋯⋯!’
천신을 대리하는 자, 법황이 통치하는 황금의 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