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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370화 (673/733)

<제370화>의외의 성품

- “에트루스칸 왕국의 특사, 알폰소 데 카를로 왕자님 행차하십니다!”

황금의 도시 트레베로의 성문이 양쪽으로 쫙, 아가리를 벌렸다.

아리아드네 일행이 탄 마차는 천천히 그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트레베로에 진입한 이후로는 모든 것이 정신없었다.

알폰소 왕자가 도착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루도비코 법황은 바로 알현 일정을 통보했다.

- “세 시간 후, 만찬을 함께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마침 살라만타 왕국의 대리인께서도 오늘 도착하셨습니다. 다 같이 인사라도 하게 되면 좋을 것 같군요.”

세 시간 후라면 거의 짐 풀고 씻은 직후였다. 일행은 허겁지겁 흩어져 준비를 시작했다.

* * *

데 마레 추기경은 트레베로에 들어선 직후부터 위화감을 느꼈다. 어딘가, 뭔가가 올바르지 않았다.

그 위화감의 정체를 처음 발라낼 수 있었던 것은 루도비코의 초대장을 들고 온 사제를 만났을 때였다.

- “만찬에는 부슈뒤렌 대주교님을 비롯해, 몇몇 성황청 관계자께서도 여러분을 환영할 예정입니다.”

- “부슈뒤렌 대주교는 잘 지내나.”

부슈뒤렌 대주교, 아르튀르는 젊은 나이에 대주교의 위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루도비코 법황의 오른팔이었으며, 젊은이답지 않게 인품이 좋아 따르는 자가 많았고 그 애민정신(愛民正信)으로 유명했다.

루도비코 법황 또한 그 젊은이를 자신의 후계자로 여겨 몹시 아꼈다. 한 마디로, 트레베로가 사랑하는 젊은이였다.

데 마레 추기경이 저번 트레베로행 이후로 법황이 될 야심을 상당 부분 버린 데에는 부슈뒤렌 대주교의 존재가 컸다.

도무지 이길 방도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부슈뒤렌 대주교의 이야기가 나오자 수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 “아⋯⋯. 새로 임명되신 부슈뒤렌 대주교님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잘 지내십니다.”

- “아르튀르는?”

- “돌아가셨습니다.”

아르튀르는 기껏해야 서른 언저리로 젊은 나이였으며 앓는 지병도, 안 좋은 생활 습관도 없었다.

그의 사망 소식이 믿기지 않은 데 마레 추기경은 수사에게 몇 가지를 더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수사는 추가 질문을 피하려는 기색이 역력했고 얼른 자리를 피해 버렸다.

트레베로가 이상한 것은 부슈뒤렌 대주교의 부재뿐만이 아니었다.

만찬장에서는 더더욱 섬세한 익숙한 얼굴들의 교체가 있었고, 또 루도비코 법황의 기묘한 식습관이 있었다.

“어서들 오시게! 먼 길 오느라 고생하셨소!”

루도비코 법황은 두 팔을 넓게 벌리고 에트루스칸 말로 일행을 환영했다.

완벽한 억양이었는데, 그는 애초에 에트루스칸의 명문 귀족인 주스티니 가문 출신이었으니 이는 당연했다.

큰아들에는 가문을 물려주고 둘째 아들은 성직으로 보냈는데 큰아들은 자식 없이 일찍 죽고 차남에게도 사생아를 비롯한 일체의 자식이 없어 가문이 없어져 버린 경우였다.

그의 옆에는 언제나 함께하는 에트루스칸 출신의 개인 수행비서가 있었다.

사제서원을 받긴 했지만 그가 귀족 도련님일 시절부터 데리고 다니던 측근이라고 했다.

그런데 오늘, 그 자리는 누가 봐도 진짜 수사로 보이는 어린 친구로 교체되어 있었다. 소년 수사가 쩔쩔매며 법황의 사소한 수발을 들었다.

데 마레 추기경은 날카로운 눈썰미로 이를 하나하나 확인하며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법황 성하를 뵙습니다. 성하의 발자취 하나하나에 천신님의 가호가 깃들기를.”

“데 마레, 우리끼리 굳이 뭐 그런 딱딱한 인사말을 하는가!”

루도비코 법황은 크게 웃으며 법황의 보좌에서 내려가 어깨동무하듯 데 마레 추기경의 등을 툭툭 쳤다.

호화로운 예복을 걸친 기골이 장대한 사내였다.

데 마레 추기경보다 두 살이 많아 이제 슬슬 중년을 넘어 노년을 넘볼 나이였지만, 붉게 생기가 오른 피부와 온몸에 알처럼 배긴 근육만 보면 전혀 그런 인상을 받을 수가 없었다.

딴딴하게 어깨가 떡 벌어진 법황에게 등을 맞은 데 마레 추기경의 가녀린 체형이 툭툭, 흔들렸다.

성직자가 아니라 용병대장이나 일국의 왕이라고 해도 믿을 인상이었다.

“법황 성하께서는 여전히 좋아 보이십니다.”

그러나 데 마레 추기경은 친근하게 구는 루도비코의 태도에도 긴장의 끈을 전혀 놓치지 않았다.

“내가 항상 그렇지 뭐, 하하하하하!”

사람 좋게 웃은 루도비코 법황은 추기경 뒤에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선 아리아드네를 보았다.

“오, 이쪽은? 데 마레, 자네 딸인가?”

데 마레 추기경은 미소를 지었을 뿐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았다.

트레베로로 산 카를로에 뒤지지 않아 성직자도 자녀를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루도비코 법황이 후사가 없는 이유는 방탕한 생활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고자라서 그렇다는 설이 지배적이었지만 흠을 잡힐 수는 없었다.

홈그라운드에서 웃음 짓는 루도비코 법황과 파문을 목전에 둔 데 마레 추기경은 입장이 다른 법이다.

루도비코 법황의 재촉하는 듯한 눈길에 아리아드네는 마지못해 무릎을 굽히며 예를 올렸다.

“아리아드네 데 마레 백작이라고 합니다.”

사실 얼떨떨했다. 아리아드네는 자신이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루도비코의 인상에 눈을 깜박였다.

이런 친근한 환대도 예상했던 범위 밖이었다. 이 사람은 아버지의 정치적 라이벌이고, 아버지를 파문하기 위해 이곳 트레베로로 부른 것 아니었나?

그러나 언제나 흔들리지 않는 태도야말로 아리아드네의 장점이었다. 그녀는 정확한 궁정 예법으로 법황을 대했다.

“법황 성하의 드높은 존함이야말로 중앙대륙을 떨쳐 울리니, 이렇게 직접 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이옵니다.”

“랑부예 구휼원의 성녀!”

법황은 직접 아리아드네에게 다가와 손을 맞잡았다.

“자네야말로 중앙대륙을 떨쳐 울리지 않았나! 나 같은 늙은이는 뒷방 신세지.”

그 태도에 전혀 음흉한 곳이라고는 없었고 되레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마저 느껴졌다.

“송구합니다.”

“그래, 직접 돌아다니며 백성의 생활상을 보니 어떤가?”

법황은 아리아드네에게 흑사병 시기에 돌아다니는 것이 어땠는지, 디테일한 것들을 몇 가지 물었다.

그는 ‘뒷방 늙은이’라는 본인에 대한 묘사와 정반대로 아주 예리한 물음을 몇 개 던졌다.

말을 몹시 많이 했지만, 이 와중에도 그는 물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다.

“분명히 구휼원 수용자들이 어느 시점에는 자네를 넘어뜨리고 식량을 탈취하려 들었을 것 같은데.”

“운이 좋았습니다. 집안에 자경대를 두었던 것이 다행히 도움이 되었어요.”

“가문 안에 자경대라! 어린 영애가 할 만한 생각이 아닌데! 영민해, 영민해!”

법황은 칭찬 세례를 퍼부음과 동시에 질문 세례를 던져 디테일을 뽑아내는 데에 능했다.

우락부락한 인상과 다르게 굉장히 호감 가는 화술의 소유자였다.

“힘들었지? 주변인들이 마구 띄워주고 말이야. 내 몸은 한 개인데.”

“사실 제 그릇 이상으로 좋아해 주시는 분들이 많아 죄송하기만 할 따름입니다.”

“그게 남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자의 숙명이라네!”

법황은 자신이 법황 위에 오른 이후로 겪었던 곤란한 일들을 나열하며 공감을 유도했다.

“한번은 말이지, 흉작으로 난리가 난 마을에 시찰을 나갔더니 나더러 떡 한 광주리를 백 명 몫으로 불려 달라는 거야! 법황이시니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느냐면서! 하하하. 그래서 뭐 별수 있나? 마차에 싣고 간 밀떡을 가서 펼쳐놓고 떡이 늘어난 척했지.”

그는 사람 좋게 웃으며 물었다.

“어린 친구인데 도대체 어떤 계기로 사람들을 돕게 된 건가?”

법황의 표정이 웃는 상 그대로 밀랍으로 뜬 탈처럼 변했다.

“소명의식이라던가?”

이렇게 리딩하면 어린 친구들은 술술 불기 마련이다. 자기가 믿는 특정 사조라던가 성인의 가르침을 술술 불면서 말이다.

법황은 통통한 벌레가 거미줄에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순간 등골을 타고 오르는 냉기에 몸서리를 쳤다. 법황이 자기를 어디로 몰고 가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기는 성 프란체스코의 계시를 받았다느니, 성모님의 목소리를 들었다느니 하고 나불댄 머저리들이 한가득이었구나!’

성황청의 인가 없이 기적을 보았다고 진술하는 건 자기 목숨줄을 이단심판관에게 쥐여주는 짓이었다.

물론 대부분의 성자나 성녀는 성스러운 이적을 먼저 일으키고 그 이후에 추존되지만, 그건 성황청이 그들을 좋게 보아 넘겼을 때의 일이다.

장작더미 위에서 타죽은 사람이 훨씬 많았다.

아리아드네가 대답을 주저하자 법황은 예의 그 호탕하게 사람 좋은 웃음으로 그녀를 한 번 더 찔러보았다.

“그 왜, 아스만의 성녀께서도 천사 이시엘의 목소리를 듣고 마지막 곡물을 털어 집 앞에 구걸하러 온 비렁뱅이를 먹이시지 않았나.

그 비렁뱅이가 바로 라탄 제국 병사들의 손에서 도망치신 초대 법황 베드로셨고.”

“저는, 저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리아드네는 손사래를 쳤다.

“평소에 자주 봉사활동을 하러 가던 곳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어서 그저 집안 창고에서 남는 곡식을 좀 나눴을 뿐입니다. 딱 자기 주변 사람만 챙기는 소이기주의에 불과합니다. 아스만의 성녀처럼 신의 계시를 받아 마지막 끼니를 모르는 자와 나눈 숭고한 의지가 아니었습니다.”

이는 아리아드네가 루도비코 법황의 유도신문에 넘어가 바로 앞에서 했던 이야기의 뉘앙스—구휼원 사람들이 가끔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와도, 그녀가 벌였던 구휼 사업의 규모와도 객관적으로 배치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신의 계시 쪽 이야기로 끌려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녀는 자기 말에 논리적 불협화음이 생기건 말건 단호하게 루도비코 법황의 몰이를 잘라냈다.

‘요것 봐라?’

루도비코 법황은 아리아드네의 저항에 감탄했다. 그는 어쨌거나 중앙대륙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자였다.

그가 당장 상벌을 내리지 않는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의 눈치를 보며 비위를 맞췄다. 그가 몰아가는 쪽에 맞장구치지 않는 사람은 참 보기 드물었다.

‘눈치도 빠르고 강단도 제법인데.’

그는 대충 자기의 고충 토로로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이적을 행하는 성인이 안 나타나신 지 꽤 돼서 말이야. 누가 기적 좀 행해 줬으면 좋겠네. 예사크 성전이 성황리에 종료된 뒤로 요새 딱 그런 성인 한 분만 나타나시면 소원이 없겠구먼!”

그렇지만 다 잡은 먹이를 이대로 보내기엔 어딘가 아쉬웠다.

자기 등 뒤로 데 마레 추기경이 딸에게 필사적인 눈짓을 보내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우습기도 했다.

그는 순전히 데 마레 추기경을 괴롭힌다는 차원에서 한마디를 더 던졌다.

“성녀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자네 말고 누가 있겠나!”

그러나 데 마레의 젊은 딸은 단호하게 그를 잘랐다.

“무지렁이에게 부담스럽습니다.”

아리아드네의 확고한 거절에 법황은 입맛을 다셨다.

“안타깝구먼, 안타까워!”

여러 가지 의미에서였다. 데 마레의 딸은 제 아비보다도 나았다. 말을 너무 많이 해서 목이 탔지만 그는 마실 것을 집지 않았다.

막상 한마디도 안 하고 뒤에 얌전히 서 있었던 추기경이 목이 타서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법황은 이를 흘긋 확인했다.

법황이 그의 친애하는 추기경에 대한 다음 괴롭힘은 뭐로 할지 고민하던 차에, 아리아드네와 데 마레 추기경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만찬의 나머지 손님들이 입장했다.

법황은 붙잡아놨던 데 마레들을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 “에트루스칸 왕국의 후계자, 알폰소 데 카를로 왕자 입장하십니다!”

- “살라만타 왕국의 대표, 로렌조 데 바리아티 후작 입장이요!”

- “살라만타 왕국의 벨라스코 추기경 입장입니다!”

오늘의 메인 디시는 이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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