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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371화 (674/733)

<제371화> 법황의 검

루도비코 법황은 자리에서 일어나 새로 들어온 이들을 환영했다.

“어서 오시게!”

이 중에서 특히 그의 관심을 독차지한 것은 알폰소 데 카를로 왕자였다.

“예사크 성전의 영웅!”

루도비코 법황은 알폰소 왕자에게 다가가 오래된 친우처럼 턱! 어깨와 어깨를 맞댔다.

“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네만큼은 꼭 만나고 싶었어!”

신성한 권력의 최고점에 있는 법황과 세속 군주의 후계자라기보다는 아버지 친구 같은 태도였다.

그리고 이는 동시에 나머지 참석자들을 불쾌하게 할 수 있는 언사이기도 했다. 자네들은 별로 보고 싶지 않았다는 말이니 말이다.

단순한 실언으로 치기엔 이자는 루도비코 법황이었다. 계산 없이 말을 내뱉을만한 사람이 아니다.

과연 살라만타 왕국의 초대 손님은 조금 언짢은 모양이었다. 정확하게는 살라만타 왕국의 노 추기경이 표정 관리에 조금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정작 그 옆, 국가의 대표로 온 바리아티 후작은 미미한 미소를 띠었을 뿐이다.

이는 어느 정도는 그에게는 불쾌해할 권리가 없다는 데에 기인했다.

그는 살라만타의 국왕이 아니었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살라만타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본디 에트루스칸 왕국 출신으로, ‘철갑의 바리아티’라는 이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용병대장이었다.

키가 크고 잿빛 머리를 한 사내였는데, 오십대 초중반이었지만 탄탄하게 단련된 몸이 마치 사십대 같아 보였다.

알폰소는 법황의 격렬한 환대에 화답했다.

“법황 성하. 천년고도 예사크를 수복하신 천신의 대리인에게 영광 있으리.”

이는 법황이 가장 듣고 싶어 했던 공치사였다.

계속 빙글빙글 웃음을 짓고는 있었지만 밀랍으로 만든 가짜 웃음 같았던 그의 입가가 정말로 무방비하게 늘어졌다.

“예사크에서는 다들 어떻게 생각하나?”

법황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천신의 기사단이 이교도의 땅을 점령해 악의 무리를 박멸한 것을 감사해하겠지?”

그 땅의 원주민은 굳이 따지자면 이교도였다. 예삽교를 믿는 예사크인들은 예전에 고도에서 쫓겨나 중앙대륙으로 도망쳤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중앙대륙인들이 군대를 몰고 쳐들어와봤자 모르는 자들에게 점령당했을 뿐이지 굳이 감사해할 계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무딘 알폰소라도 전쟁터에서 구른 세월이 있었다.

정확하게는 전술회의에서 위험한 최전선으로 내몰리지 않기 위해 아귀다툼을 했던 세월이 있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루도비코 법황이 성전에 진심이라는 사실을 느꼈다.

“법황 성하의 결단으로 천년고도의 주민들이 진정한 신앙의 품에 안겼나이다.”

늘 바른말만 할 줄 아는 것 같던 알폰소가 저런 간지러운 소리를 하자 아리아드네는 눈을 뚱그렇게 뜨고 알폰소를 바라보았다.

루도비코 법황과 알폰소 왕자가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걸 본 바리아티 후작이 본인도 끼어들었다.

다만 그가 관심 있는 상대는 루도비코 법황이 아닌 알폰소인 듯 했다.

“왕자님의 승전보는 제 수하들도 마음 뛰게 했답니다.”

“‘철갑의 바리아티’시군요.”

알폰소는 목례했다.

“그 위명은 저도 익히 들었습니다.”

“저야말로 예사크 성전의 영웅, ‘알폰소 카스코 네로’를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바리아티 후작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알폰소를 바라보았다. 정확하게는 알폰소가 아니라 알폰소 허리춤에 있는 양손대검을 본 것이다.

“‘칼레드부흐’입니까?”

알폰소는 미미하게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들고 다녀서 좋을 일이 없는 귀물이었지만 레오 3세를 믿을 수가 없어서 여기까지 가지고 왔다.

“그렇습니다.”

“만져 봐도 될까요?”

아리아드네는 그게 굉장히 실례인 발언이라고 생각했지만 알폰소는 별말 없이 양손대검을 풀어 바리아티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아리아드네는 이내 알폰소가 왜 그랬는지 알 수 있었다.

- 캉!

거대한 양손대검은 바리아티의 손에 들어가는 순간 무게가 천 배로 는 듯 바닥으로 고꾸라져서 박혔다.

루도비코 법황조차도 매우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성검을 쳐다보았다.

“호오⋯⋯.”

바리아티는 바로 웃으며 사과했다.

“이런. 제가 실례했습니다. 귀물은 귀물이군요.”

알폰소는 별말 없이 검을 회수했다. 바리아티는 비굴하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제가 필요하실만한 일이 생기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십시오.”

그는 고용용병대장이었기 때문에 세속군주들과 안면을 터놓는 일이 중요했다. 알폰소도 마주 웃었지만 구체적인 대꾸는 하지 않았다.

물론 철갑의 바리아티가 중요한 인물이기는 했다. 그는 대륙 유일의, 돈으로 고용할 수 있는 중장기사단을 운용하는 용병대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직한 자는 결코 아니었다. 그는 예전 갈리코 왕국이

몽펠리에 중장기병대로 에트루스칸 왕국의 국경을 위협했을 때 레오 3세의 고용 제안을 거절한 바가 있었다.

가장 필요할 때 나타나지 않는 검을 어디다 쓸 것인가.

알폰소 왕자를 중심으로 해서 만찬장 안의 분위기가 돌아가자 살라만타 왕국의 추기경이 불만에 찬 표정으로 한 마디 얹었다.

“지금 고용계약 타진하시는 겁니까? 가실 일이 있으시면 안 되지요.”

꼬장꼬장한 백발노인인 그가 꺼낸 언어는 대륙 공용어인 고대 라탄어였다. 그만 에트루스칸 왕국 출신이 아니었다.

거의 반세기 가까이 성황청에서 부대낀 감 덕에 대충 아는 단어 몇 개로 때려 맞춘 것이다.

철갑의 바리아티는 현재 살라만타 왕국의 국왕에게 고용된 상태로, 그 인연으로 살라만타 왕국을 대리해서 트레베로로 왔다.

살라만타 국왕은 떡밥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자기 혈육을 고기방패로 내세울 만큼 모질지는 못해, 돈 받는 자를 대신 보낸 것이다.

“알폰소 왕자님께서 직접 지키실 텐데, 용병대장을 고용할 일이 무에 있겠소. 바리아티 후작께선 살라만타 왕국과의 계약이나 잘 지켜 주십시오.”

도리어 살라만타 국왕과 확실하게 가까운 쪽은 이 노 추기경이었다.

지금의 지적과도 일맥상통했다. 그러나 법황이 파안대소하며 끼어들었다.

“알폰소 왕자가 제4차 십자군 원정에 나설 수도 있지!”

그는 신이 나 칼레드부흐도 가리켰다.

“허리춤에 찬 저 성검도 써봐야 할 것 아니오!”

아리아드네는 표정 관리에 애를 먹었다. 얘를 또 전쟁터에 보낸다고요? 제아무리 법황이시라지만 선 넘으시네!

“아, 이쪽은.”

이야기가 길어지자 법황은 데 마레 추기경과 아리아드네를 소개했다.

“친애하는 데 마레 추기경과 아리아드네 데 마레 여백작이오. 데 마레 추기경은 벨라스코 추기경과는 구면이지.”

‘데 마레 추기경’이라는 말에 바리아티 후작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는 작달막한 데 마레 추기경보다는 머리 한 개 반쯤 컸다.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살라만타 왕국의 추기경은 좀 더 메시지에 집중했다.

“법황 성하! 이제 막 제3차 십자군이 중앙대륙으로 귀환했는데 바로 다시 4차 십자군이라니요. 각국의 군주들도 내치에 전념해야지요. 흑사병도 돌았고⋯⋯. 인심이 여러모로 흉흉합니다.”

루도비코 법황은 기분이 팍 상한 표정으로 살라만타 왕국의 추기경을 바라보았다.

추기경은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법황에게 설교했다. 깐깐한 태도였다.

“법황은 예삽교의 영적 지도자이기도 하지만 중앙대륙의 육신도 잘 보살필 의무가 있습니다!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신의 충언이니 너무 고깝게 듣지 마옵소서.”

루도비코 법황은 오묘한 얼굴로 벨라스코 노 추기경을 바라보곤 딱 한마디 했다.

“추기경. 온 데에는 순서가 있지만 가는 날에는 순서가 없다네.”

그리고 만찬 다음 날, 벨라스코 추기경은 뇌물수수 혐의로 교회 법정에 끌려가 당일 저녁 바로 처형당했다.

* * *

아리아드네가 트레베로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동안, 이사벨라는 산 카를로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다. 아리아드네가 단순히 견문을 넓혔다면 이사벨라는 인생에 관한 쓴맛을 배우고 있었으니, 어떤 면에선 더 큰 공부를 하는 셈이었다. 문제는 이사벨라는 이런 인생의 쓴맛 따위 전혀 알고 싶지 않았다는 점이다.

“개새끼!”

이사벨라는 화가 나서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바닥에 패대기쳤다. 그걸로도 분이 풀리지 않아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옷가지에 발길질을 해댔다.

“더러운 새끼!”

이사벨라는 최근 ‘사업’을 벌인다며 투자자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상인들이 방물장사로 쏠쏠하게 돈을 모으는 걸 보니 자기도 제법 할만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아이템이었다. 그녀는 무어 제국 산 사치품을 지방으로 유통하고 싶었는데, 최초의 재고를 사들일 종잣돈이 필요했다.

최고의 안목을 가졌다 자부했기 때문에 들어갈 금액도 컸다.

자그마한 물건부터 시작해 늘려나가는 게 정석이었지만 이사벨라는 시시껄렁한 물건을 팔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줄 게 없으면! 손도 대질 말던가!”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가진 것 중 가장 큰 가치가 있는 물건은 그녀 자신이었다.

이사벨라는 수도의 귀족 가문들에 미팅을 신청해서 투자 권유를 하고 있었다.

이사벨라는 그걸 투자 권유 차원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미팅에 흔쾌히 응한 남자들은 그녀의 초대를 좀 다르게 받아들였다.

오늘 그녀와 단둘이 저녁을 같이한 체피넬리 후작은 이사벨라를 바톨리니 백작가로 바래다주는 뚜껑 없는 마차 안에서 이사벨라의 가슴을 만졌다.

이사벨라가 깜짝 놀라 몸을 피하자, 술이 거나하게 들어가 있던 그는 혀 꼬부라진 소리로 화를 냈다.

- “아 거, 겁나 비싸게 구네! 어차피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되려고 날 부른 거 아냐?”

- “뭐라고요?”

- “네 남편은 이제 쫄딱 망한 처지 아냐! 강제집행이 성공하는 순간 대저택이 없어질 텐데. 껍데기만 남은 백작위로 어디에 행세하고 다니겠어?”

이사벨라는 그래서 자기가 돈을 버는 거라고 항변하려 들었지만, 중년의 후작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 “애들 장난 같은 짓은 집어치워. 다들 상단을 구성해서 자금력으로 밀어붙이는데 아줌마가 하나둘씩 고른 소꿉장난으로 뭐가 될 거 같아?”

- “아줌마?!”

- “아줌마지 그럼 댁이 처녀야?”

그는 불콰해진 얼굴로 떠들었다.

- “그냥 좋은 말 할 때 고분고분 치마나 들쳐. 내가 댁 하나쯤은 눌러앉게 해줄 수 있으니⋯⋯.”

- 짝!

이사벨라는 참지 못하고 체피넬리 후작의 따귀를 갈기고 말았다.

- “이년이⋯⋯!”

손을 들고 덤벼들려던 체피넬리 후작은 무어인 기사, 아고스토에 의해 저지당했다.

아고스토가 뭘 한 건 아니었다. 그저 그가 기대어 서 있던 호위용 외부 발받침에서 반걸음 앞으로 나가 팔짱을 끼고 중년의 후작을 노려보았을 뿐이다.

그렇지만 평균적인 에트루스칸 인보다 확연히 큰 덩치에 흑요석처럼 반짝이는 피부는 몹시 위압적이었다.

후작은 즉시 순한 양, 정확히는 입만 산 순한 양으로 변했다.

- “후회할 거다, 건방진 것!”

하지만 건방지기로 산 카를로 제일인 사람은 다름 아닌 이사벨라 데 콘타리니였다.

- “내가 치마까지 벗을 거면 댁 같은 피라미한테 벗을까 봐?”

그녀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 삿대질했다.

- “뭐? 이 이사벨라 데 마레를 정부로 앉혀? 저까짓게? 이 대물도 못 되는 잡스러운 고기 주제에!”

이사벨라는 거의 쌍욕을 퍼부으며 체피넬리 후작의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체피넬리 후작은 뭐라고 더 대거리를 하려고 하다가, 자기 마부와 아고스토의 덩치를 비교해 보고는 크게 코웃음을 쳤다.

“퉷! 집으로 돌아가자! 원, 재수 없어서!”

마차에서 내려 자기 옷에 분풀이를 한 이사벨라는 그래도 화가 가시지 않아 선 채로 씩씩거렸다.

“자.”

아고스토는 떨어진 이사벨라의 겉옷을 들어 팡팡 턴 다음, 자신의 어깨에 걸치고는 본인이 입고 있던 망토를 내밀었다.

술에 알딸딸하게 취한 이사벨라는 그 망토를 받고 아련한 눈빛으로 무어인 기사를 바라보았다.

“넌 나 안 버려? 난 이제 너한테 줄 돈도 없잖아.”

그는 무뚝뚝한 말투로 대답했다.

“네가 나더러 노예라고 했다. 노예는 월급을 받지 않는다.”

이사벨라는 흐트러진 매무새로 까르르 웃었다.

“그지. 그렇지. 내가 돈을 주고 널 샀지.”

고용인으로 데려와 어느 순간부터 급여 지급을 뭉갠 쪽이었지만 아고스토는 굳이 따지지 않았다.

어차피 이사벨라가 지급하는 금화 따위는 그의 몸값에는 턱없이 미치지 못했다. 그러니까, 대가 없이 옆에 있겠다는 말이었다.

누군가는 아고스토의 말에서 위로를 받았겠지만 자기 마음대로 기억을 조작해버린 이사벨라에게는 더 큰 허무만 건드린 모양이었다.

“하인처럼 일시불로 샀어야 했는데, 친구도, 사랑도. 깔깔!”

아고스토는 거기에 대해 별 감정이 없는지, 아니면 ‘일시불’이란 단어를 알아듣지 못했는지 별말 없이 그냥 그대로 서 있었다.

그때 걸쭉한 남자 목소리가 이사벨라를 불렀다.

“야!”

이사벨라는 뒤를 홱 돌아보았다. 또 어중이떠중이가 수작을 거는 거 아닌가 분노에 찬 상태였다.

“넌 또 무슨⋯⋯, 어?”

남자의 얼굴을 본 이사벨라가 여러 가지 의미로 놀랐다.

“오빠?”

그녀를 불러 세운 남자가 그녀의 친오빠, 이폴리토였기 때문이다.

“오빠, 얼굴은 왜 또 그 모양이야?”

이폴리토의 얼굴에서 그나마 봐줄 만했던 높은 코는 부러져서 엉망으로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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