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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374화 (677/733)

<제374화> 갈리코 왕국의 왕이 되시오

아리아드네만 귀를 의심한 게 아니었다. 알폰소 역시 자기가 제대로 들은 것인지 몰라 미간에 인상을 썼다.

하지만 일단 입 밖에 그 말을 낸 이상 낙장불입이었다. 알폰소는 때를 놓치지 않고 밀어붙였다. 다 예사크에서 배운 것이었다.

“그 말인즉슨⋯⋯. 대공녀와의 파혼에 대공께서도 동의하시는 거로군요?”

외드 대공은 말없이 알폰소를 바라보았다. 한참이나 침묵을 지킨 그는 아예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왕자. 그대는 얼마만큼의 야심이 있소?”

난데없는 화제 전환에 알폰소는 대답하는 대신 외드 대공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언변이 좋거나 닳고 닳은 사람들은 협상 테이블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갑자기 상대방이 예상하지 못했을 만한 화두를 던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알폰소는 경험이 쌓여가며 그런 상대방에게 반드시 대답해 줄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럴 때는 차가운 시선이 답이다.

알폰소 왕자의 침묵에, 외드 대공은 자신의 헛짓거리가 실패했음을 깨닫고 대답을 요구하는 대신 알폰소를 보고 빙긋이 웃었다.

“하긴, 알폰소 왕자 자네는 야심이 끓어오르는 사람은 아니야. 야심가였으면 그 검도 얻었겠다.”

외드 대공은 알폰소의 허리춤에 매달린 칼레드부흐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예사크 왕국의 권좌를 율덴부르크 대공에게 넘기지 않고 필사적으로 끌어안고 있었겠지.”

“지킬 수 있는 것과 지킬 수 없는 것을 구분할 뿐이외다.”

알폰소는 담담하게, 그러나 탐탁지 않은 기운을 굳이 숨기지는 않고 답했다.

“야심을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이오. 똑같은 향상심이라도 그것이 자기 깜냥에 맞는 거라면 욕심이 아니라 업적이 될 것이오, 본인 그릇에 넘치는 것이라면 방향이 맞더라도 가족과, 수하와, 국가를 괴롭게 하는 망발에 지나지 않소. 예사크 왕국은 이교도의 바다에 홀로 떠 있는 섬과 같아. 얻었으나 방위는 지극히 힘들 것이오.”

“오 이런? 나는 왕자가 사 년이나 종군했으니 성전에 좀 더 진심일 줄 알았소.”

알폰소는 이쯤 되자 정말로 기분이 나빠져 외드 대공을 노려보았다. 제3차 십자군 전쟁은 알폰소 왕자가 참여하고 싶어서 참여한 전쟁이 아니었다.

그리고 알폰소가 거기까지 끌려가게 된 데에는 외드 대공이 확실하게 일조했다.

그걸 다 아는 양반이 앞에서 저렇게 비아냥대고 있으니 고운 시선이 안 나갈 법도 했다.

“죄송합니다. 내가 쓸데없는 말을 했군.”

대공은 깔끔하게 굽혔다. 이런 눈치도 없었다면 필리프 4세 치하의 갈리코 왕국에서 이렇게 오래 버티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래, 왕자는 야심이 없는 게 아니라 단순한 실용주의자라고 칩시다. 그렇지만 ‘중앙대륙의 황제를 만든다’는 성검의 이름값은 해야 할 것 아닙니까.”

외드 대공은 웃는 낯으로 폭탄선언을 했다.

“갈리코 왕국의 왕이 되시오.”

옷장 안에 숨어 있던 아리아드네는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심장이 가슴에서 튀어 나갈 것 같았다.

이 말을 들은 사람이 비단 아리아드네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그녀처럼 반응했을 것이다.

하지만 엄청난 말을 내뱉은 외드 대공은 되려 차분한 표정이었다.

“에트루스칸 왕국과 갈리코 왕국의 왕좌를 둘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이야말로 ‘황제’의 자리에 가장 가까운 남자지. 이 두 땅은 중앙대륙 일통의 가장 큰 기반이 될 거요.”

외드 대공의 말에 놀란 사람은 아리아드네뿐만이 아니었다.

“지금 반역을 이야기하는 겁니까?”

알폰소의 목소리에도 쇳소리가 섞여 있었다. 적통 왕자로서 반역과 친하지 않을 위치이기는 했다. 외드 대공은 두 손을 들었다.

“반역이라니. 그건 왕을 시해할 때나 붙이는 말이고. 나는 국왕 폐하께서 좋지 못한 건강으로 인해 승하하셨을 때의 뒤처리를 말하는 것일 뿐이오.”

그는 최대한 선량한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거기에 지나치게 많은 자원을 배분하진 않았다.

타인의 보디랭귀지에 민감하지 않은 알폰소도 저 ‘승하’가 반드시 자연사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필리프 4세는?”

“현 국왕은.”

외드 대공의 필리프 4세에 대한 지칭에서도 존중의 부재가 묻어났다.

“와병 중이요. 병명은⋯⋯.”

그는 조금의 시차를 두고 말했다.

“광증.”

아리아드네는 생각지도 못했던 전개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전생의 필리프 4세는 체자레가 권좌에 오를 때까지도 아주 건장했다. 벌써부터 역사에서 퇴장할 예정이 아니었다.

‘알폰소가 살아남았고⋯⋯. 그 여파로 실패했어야 했을 십자군이 성공했으니 무언가는 바뀔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 정도 규모의 나비효과를 상상한 적은 없었다.

“우리 둘만 있으니 드디어 진솔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겠구료. 지금 갈리코 왕국은 난장판이야. 필리프는 맛이 갔고 귀족들은 패싸움 중이며 성장하는 나라의 끓어오르는 에너지는 사방으로 튀며 불협화음을 내고 있지.”

갈리코 왕국은 사실 국왕이 있건 없건 번창하고 있었다.

흑사병이 갈리코 왕국까지 퍼지지 않았던 원 역사에 비해서는 못 했지만, 도리어 새옹지마가 된 부분도 있었다.

흑사병으로 인해 사람값이 비싸지자, 농업국가였던 갈리코 왕국에서도 아주 기초적인 공업과 상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인력으로 밭을 가는 것이 경제적으로 터무니없으니 노동을 보조해 줄 기술이 발달했고, 이는 좀 더 긴 시계열에서 생산력의 폭발적인 성장을 가능케 했다.

다만 창의성보다는 단순 복제가 싸게 먹혔다.

갈리코 장인들은 새로운 농기구를 고안해내는 것보다 무어 왕국의 문물을 베끼길 선택했고, 무어 왕국이 갈리코 인들에게 배타적으로 변하자 신문물을 도입해 올 대상은 중앙대륙의 다른 국가들로 변했다.

“지금 이 나라는 조금의 도움만 주면 아주 앞으로 치고 나갈 수 있어.”

비옥한 대지를 기반으로 한 엄청난 농업생산량을 자랑하는 갈리코는 곡식을 수출해 번 외화로 탐욕스럽게 대륙 전체의 사치품과, 학문과, 문화를 수집해갔다.

현재 갈리코 왕국은 화약뿐만이 아니라 공학에서 대륙 제일이었다.

“하지만 왕이 맛이 갔으니 여력이 없어! 내 주 업무는 국가 통치가 아니라 필리프의 바보짓을 막는 것이라오.”

“바보짓?”

이는 분명히 필리프 4세가 무언가를 추진하려고 한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외드 대공은 거기에 대해서는 별말 않고 대신 국왕의 상태로 말을 돌렸다.

“필리프 4세 폐하께서는 정상적으로 국정을 돌보실 수 없는 상태이외다. 밤마다 울다 웃다, 낮에는 헛소리. 가끔 정신이 돌아오실 때가 있지만 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지.”

필리프 4세는 간혹 정신이 돌아올 때면 법학자들을 불러오라며, 자기가 보낸 용역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느냐고 추이를 물었다.

필리프는 옛 제도 한 가지를 없애고 새로운 규칙을 도입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걸 해낸다고 해서 생산력이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이미 생산한 것을 누가 나눠 먹을지에 대한 논공행상에 지나지 않았다.

공업을 서포트해야 할 시간에 정말로 쓸데없는 국력 낭비였다.

외드 대공은 그럴 때마다 학자들이 게을러서 그렇다, 아직도 용역의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며 국왕의 주의를 분산시키는 데에 온 힘을 뺐다.

처음에는 잘 먹혔지만 최근에는 필리프가 자신이 농락당하고 있단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가장 근자에 정신이 돌아왔을 때, 필리프 4세는 외드 대공에게 네가 뭐라도 된 듯이 나대지 말라고, 네 목은 내가 취하겠다고 펄펄 뛰며 장검을 들고 덤볐다.

천만다행으로 의사가 왕에게 처방한 안정제가 조금 늦게나마 약효가 돌아 그는 장검을 든 채로 대리석 바닥에 고꾸라져서 잠들고 말았다.

그리고 외드 대공에게는 다행으로도, 필리프 4세가 맨정신으로 돌아오는 시간은 그가 구두로 한 묘사보다도 더 드문드문해지고 있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오래된 드레스를 입혀놓은 베개를 껴안고 울다 웃다 중얼거리면서 보냈다.

그런 필리프 4세를 외부에 보이지 않게 단속하는 것도 큰일이었다. 명색이 국왕이니 어디 감금해 둘 수도 없고 아주 죽을 맛이었다.

“국왕께서는 미혼이시라 정통 후사가 없소. 형제이신 루이 왕자님도, 오귀스트 공주님도 모두 돌아가셔서 왕위를 계승할 선왕의 직계는 계시지 않소.”

현 국왕을 기준으로 갈리코 왕실에는 삼촌 이내의 촌수가 아무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외드 대공 본인은 필리프 4세의 칠촌으로 본디 계승권이 있어야 했지만, 삼대 전의 후계 다툼에서 패한 그의 할아버지는 목숨을 부지하는 대가로 발로아 대공으로 독립해 나오며 새 성을 받아 브리앙 왕조의 왕위계승권을 영구적으로 포기했다.

국왕의 사촌은 몇 명 남아 있었다. 북해 연합 중 한 나라의 공주도 있었고, 그레도 왕국의 대공도 있었다. 그리고 알폰소 왕자도 갈리코 국왕의 사촌 중 한 명이었다.

“갈리코 왕국의 왕이 되십시오.”

“⋯⋯!”

외드 대공은 재차 권했다. 다시 들어도 귀를 의심케 하는 문장이었다.

오늘의 회동이 외부에는 절대적으로 비밀이고, 외드 대공이 온갖 양보를 하면서도 반드시 알폰소 왕자를 면대면으로 보려고 했던 이유가 이 청에 모두 들어있었다.

“나에게는 계승권이 없지만 갈리코 왕국은 실질적으로 내가 통치하고 있습니다. 높은 확률로, 내가 지명하는 사람이 왕이 됩니다.”

대공의 말투는 어느새인가 아주 공손해져 있었다.

“나와 동업합시다. 내 딸 라리에사와 결혼하세요. 왕자에게는 모자란 아이라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이야기한 외드 대공은 짧은 한숨을 쉬었다.

“인제 와서 숨길 게 무에 있겠소. 내 딸 라리에사는 지금 몸이 별로 좋지 못합니다.”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는 없었다. 외드 대공은 이 ‘거래’에 필요한 내용만 뭉뚱그려서 전달했다.

“그 아이는 아마 아이를 낳을 수 없을 겁니다. 정상적인 왕비의 역할 수행도 어려울 거예요. 많이 바라지 않습니다. 내 딸과 혼인하되 그 에트루스칸 신흥귀족과 에트루스칸 왕국에서 부부처럼 사십시오. 라리에사는 여생 동안 내가 갈리코 왕국에 잘 데리고 있겠습니다.”

이 제안에서 외드 대공이 얻는 것은 갈리코 왕국의 통치권이다.

그는 자기 핏줄을 권좌에 올리는 것을 포기한 대신에, 남은 평생의 안전을 확보하고 싶은 것이다.

“라리에사와의 혼인은⋯⋯. 동업의 증표 같은 거지요. 나도 왕자를 왕위에 올린 후 신분보장을 받을 담보가 있어야 할 것 아니오.”

다만 이 부분은 미묘했다. 왕의 외척이 우대받는 이유는 정말로 생활을 함께하기 때문이다.

같은 이불을 덮고 자는 아내의 아버지를 참살하긴 쉽지 않았다.

잠자는 동안 같은 침대를 쓰는 사람이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경우 외드 대공은 언어와 풍습이 다르고, 프리노약 산맥을 넘어야 하므로 지역적으로도 멀리 떨어진 땅의 총독으로서 퇴출시키기가 어렵다는 이점은 가지고 있겠지만, 진짜 아내의 아버지가 아닌 이상 외척의 통상적인 이득을 누리진 못했다.

“내 한 가지만 청하겠소. 왕자의 후계자는 어차피 그 에트루스칸 왕국의 여자가 낳은 아이들이 될 겁니다. 그 아이들이 호적상으로는 우리 집 후손이 되어 갈리코 왕국도 이어받겠지요.”

외드 대공에게 멀쩡한 딸이 하나만 더 있었다면 이 자리에 밀어 넣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에게 남은 딸자식은 라리에사뿐이었다.

방계의 여아를 입양해 수양딸로 보내는 수도 있었지만, 외드 대공은 알폰소 왕자와 합의점에 이르기 위해 이 부분은 통 크게 양보하기로 했다.

에트루스칸의 왕자가 산 카를로의 신규 여백작에게 눈이 멀었다는 이야기는 프리노약 산맥을 넘어 몽펠리에 궁에까지 들어왔다.

왕국도 얻고 사랑도 얻고, 대공은 이게 왕자에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 되리라 확신했다. 대신 그가 생각한 타협점 또한 있었다.

“그 애를 몽펠리에 궁으로 보내주시오. 갈리코 왕국에서 최고의 교육을 시켜 갈리코 왕국과 에트루스칸 왕국의 차기 왕으로 키우겠소.”

인질.

여기까지 모두 듣자 비로소 외드 대공의 구상이 온전하게 드러났다. 그러나 알폰소는 외드 대공의 말에도 깊게 고민하는 대신, 곧장 입을 열었다.

“대공, 나는⋯⋯.”

외드 대공은 여기까지만 듣고도 손을 들어 알폰소를 제지했다. 왕자의 답이 거절이라는 걸 직감한 것이다.

“지금 당장 답변 주실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열흘은 더 트레베로에 머물 예정 아닙니까?”

사실 열흘 안에 결정할 필요도 없었다. 필리프가 죽기 전까지만 결정하면 된다.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왕자가 결정하는 날이 필리프가 죽는 날이다.

“천천히. 고민해 보시고 답 주십시오. 중요한 이야기는 다 나왔습니다. 종이에 빨간 잉크로 아무 내용이나 편지를 써서 보내시면 승낙으로 알겠습니다.”

외드 대공은 자신이 있었다. 자신의 영토를 늘리는 것. 대륙의 황제가 되는 것. 이는 모든 국왕의 영원한 꿈이었다.

지금은 사랑에 눈이 멀어 거절할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밤에 눈을 감고 천장을 보면 지도에 그려진 광활한 영토가 눈앞에 둥둥 떠다닐 터였다.

‘이걸 거절할 남자가 어디 있겠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외드 대공의 재킷이 팔랑였다. 대공의 소맷부리는 에트루스칸 왕국 식으로 재단한 복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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