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5화> 당신을 위한 희생
옷장 안에서 아리아드네는 죽은 사람처럼 미동 하나 없이 앉아 있었다.
‘동군연합⋯⋯.’
원래 별개의 국가였던 두 땅이 같은 군주를 모시게 되는 것을 기화로 제국으로 거듭나는 것을 일컫는 말이었다.
전쟁 없이 통일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군주들이 가장 선호하는 그림이었고, 중앙대륙의 혼맥이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동군연합도 될 만한 땅이 있고 어림도 없는 경우가 있었다. 알폰소가 예사크 왕국에 전혀 욕심내지 않았던 이유도 그에 기인했다.
에트루스칸 왕국과 예사크 땅 사이를 백중해가 가로막고 있었다.
서로 전언이라도 전달하려면 몇 달씩이나 배를 타고 가야 하는데 행정의 효율성이 담보될 리 없었다.
반면에 에트루스칸 왕국과 갈리코 왕국은 비록 프리노약 산맥으로 가로막혀 있기는 해도 국경이 맞닿아 있었다.
게다가 서로의 장점도 극명했다.
에트루스칸 왕국의 항구와, 갈리코 왕국의 농업생산력이 만난다면 중앙대륙 최강대국이 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심지어 인종과 언어도 완전히 같지는 않았지만, 얼추 비슷한 면이 많았다.
이 두 나라가 동군연합으로 맺어져 백여년 정도 무리 없이 보낼 수만 있다면
정말로 화학적 결합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필리프 4세가 알폰소를 억류해가면서까지 원했던 그림⋯⋯.’
아리아드네만 정부로 남는다면, 루비나 공작부인처럼 본처가 없는 곳에서 호가호위하는 여자가 되기만 한다면, 알폰소는 중앙대륙 최강대국의 군주가 될 수 있다.
내 남자의 성공을 위한, 나의 희생.
‘난 어디까지 그를 위해 희생할 수 있지⋯⋯?’
그녀는 조금씩 더 몸을 웅크렸다. 갑자기 몹시 추웠다.
옷장의 암흑 속에서 아리아드네는 몸을 공처럼 만 채 두 팔로 스스로를 감싸고 두 눈을 감았다.
* * *
알폰소가 아리아드네를 숨긴 옷장의 문을 연 건 한참이나 후였다.
“아리, 오래 기다렸지!”
- 끼긱!
오래된 옷장의 문이 활짝 열리며 경첩에서 죽을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새파랗게 변한 구리 녹이 떨어져나가는 소리였다.
“콜록! 먼지 대단하다. 늦게 와서 미안해. 저쪽 사람들이 다 철수했는지 보고 오느라⋯⋯.”
외드 대공이나 대공 측 사람에게 아리아드네가 숨어 있었단 사실을 들킬 수는 없었다.
알폰소는 꼼꼼하게 머릿수까지 세어가며 갈리코 왕국 측 일행이 모두 철수한 것을 확인하고서야 아리아드네를 데리러 왔다.
“⋯⋯?”
그런데, 아리아드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알폰소는 어두컴컴한 옷장 내부를 잘 보려고 외드 대공과의 면담때 테이블 위에 켜 두었던 촛불을 가지고 왔다.
외드 대공과의 약속은 저녁 즈음이었고, 회동이 모두 끝난 지금은 심야에 가까워 오고 있었다.
“아리⋯⋯?”
처음에는 그녀가 구석에서 잠들어서 대답이 없나 싶었던 알폰소는 불안한 예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촛불을 든 채 구석구석을 비추어 보았다.
“아리?”
동시에 조금 더 큰 목소리로 재차 부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 옷방 구석, 원래 옷이 걸려서 가려졌어야 했을 구석에 있는 작은 나무 미닫이문이 시야에 걸렸다.
사람이 출입하기 위한 사이즈는 아니었고 작은 창문만 한 크기였다. 그게 벽 위가 아니라 바닥에 붙어 있다는 점이 특이했다.
‘⋯⋯설마.’
알폰소는 창백해진 표정으로 허겁지겁 달려가 그 나무문을 드르륵, 열어보았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차가운 냉기가 훅 끼쳤다.
“만프레디!”
알폰소는 그 자리에서 곧장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앞에서 뒤처리를 하고 있던 만프레디 경이 우당탕탕,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예, 예! 왕자님!”
“기사단을 산개시켜. 수색대를 보내. 이 근방 20 미글리오를 전부 다 뒤져!”
만프레디 경이 조심스레 물었다.
“뭐, 뭘 찾는 거지요?”
작은 나무 문 안에는 돌로 만든 좁은 복도가 있었다. 성인 하나가 겨우 기어나갈 수 있을 정도의 넓이였다.
의심이 많아 기사를 주둔시켜 놓을 옷방까지 따로 만든 백 년 전의 갈리코 성주는 호위 기사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비밀통로도 같이 만들어 두었던 것이다.
“아리아드네!”
그의 검은 머리카락의 여인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 * *
아리아드네는 묶여 있던 기사단의 말 한 필을 빌려 타고 박차를 가했다.
아리아드네도 알폰소가 자기를 찾기 위해 풀 충분한 인력이 있으며, 그들의 최상급의 정찰병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래서 결국, 관건은 속도였다.
‘내가 미리 벌어둔 시간은 짧으면 반 시간, 기껏해야 두 시간⋯⋯.’
그 시간적 우위를 십분 활용해서 빠르게 빠져나가야 한다.
달리는 말의 고삐를 단단하게 붙잡은 아리아드네의 볼에 활엽수 가지가 타닥타닥 부딪혀 자국을 냈다. 그녀는 거슬리는 줄도 몰랐다.
두 시간은 아예 자취를 감추기에는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이었다.
그 안에 국경선을 넘을 수도 없었고, 기사들은 밤새워서 그녀를 찾아 달릴 텐데 자신이 계속 그들보다 더 빨리, 더 멀리 움직이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장점을 십분 살리기로 했다.
‘순방향으로 가면 안 되고, 역방향으로 가야지.’
아리아드네는 데 마레 추기경을 찾아가는 일도 제쳤다. 짐을 찾고 아버지께 인사도 하면 좋았겠지만, 필수 불가결한 일은 아니었다.
둘 중 더 아까운 부분은 짐을 찾는 일이었다.
아빠한테 인사를 안 하고 몇 년간 잠적하는 건 충분히 할 수 있었지만, 노잣돈을 안 들고 맨손으로 광야를 누빌 생각은 전혀 없었으므로.
‘트레베로로.’
아리아드네는 루도비코 법황의 날개 밑으로 숨을 작정이었다. 정확하게는, 대도시의 익명성을 활용할 예정이었다.
‘트레베로에서 전당포를 쓰면 되고. 알폰소가 루도비코 법황에게 나를 찾아 달라고 부탁할 때까지 최소 여섯 시간 이상은 걸릴 테니, 날이 밝자마자 빠져나가자.’
부자가 됐다는 건 이럴 때 좋았다.
오늘은 평범한 날이었고—물론 갈리코 왕국의 반역 예비‧음모를 들었다는 점에서는 전혀 평범하지 않았지만, 굳이 성장(盛裝)하는 날이 아니었다는 뜻이다—평범한 날처럼 입고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귀에는 70 두카토 짜리 귀걸이가, 목에는 150 두카토 짜리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머리 장식이니 반지니 해서 현금화하기 좋은 것만 합쳐도 그녀가 몸에 걸친 것만 300 두카토는 되고도 남았다.
이것만 팔아치워도 석 달간 도피할 지금은 충분히 나올 것이다.
‘다음은 어디로 가지? 우나이솔라?’
새로 친구의 남편이 다스리게 된 땅에 가서 몸을 숨겨도 좋을 것이다.
‘아니면 아예 국외로 나가는 편이 나을 수도 있어.’
카루소 비텔리는 왕권에 대한 충성보다 아리아드네 개인에 대한 충성도가 더 높은 사람이었으므로 알폰소가 뭐라고 하든 그녀를 중앙으로 넘기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중앙정권이 군대라도 끌고 쳐들어와서 자기가 직접 보겠다고 하면 카루소 대표, 아니, 비텔리 도제가 이를 막을 방도는 없었다.
‘⋯⋯날, 찾기는 할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아리아드네는 쓰게 웃었다. 알폰소는 당장은 그녀를 찾아 헤맬 것이다.
남자에게 있어서 아직 육체적으로 함락시키지 못한 여자는 그 가치가 최고조에 있기 마련이니까. 아리아드네는 이 사실을 아픈 방식으로 배웠다.
그리고 그녀는 이번에는—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남자의 애간장이 가장 끓어오를 만한 타이밍에 떠났다.
당연히, 알폰소 아니라 그 누구라도 눈이 돌아서 찾겠지.
하지만 육체적 매력은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그 인상이 흐려지는 법이다. 그리고 알폰소에게 제시된 이득은 말도 안 되게 컸다.
에트루스칸 왕국과 갈리코 왕국 사이의 동군연합은 필리프 4세가 친족 살해와 전쟁을 감수하고서라도 가지려 했던 것이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석 달이 지나고 계절이 바뀌면 아마 알폰소도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일 것이다.
라리에사는 건강 문제가 심해 본처로서의 소임을 수행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니 알폰소는 함께 에트루스칸 왕국을 다스릴 누군가가 필요하기는 할 것이다.
사교계를 다스리고, 똑똑하고 건강해서 차기 에트루스칸-갈리코 제국의 황제가 될 아이에게 자기와 똑 닮은 특성을 물려줄 그런 여자.
‘⋯⋯나는 싫어. 더는 싫어.’
전생의 경력직은 고개를 저었다. 머리로 생각하면 사실 손해 볼 것 없는 제의였다.
본처의 지위가 없다는 점만 제외하면 본처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편익을 다 누릴 수 있는 자리였다.
전생보다도 조건이 나았다. 이번에는 심지어 그녀의 자녀가 보위에 오를 거라는 보장도 있었으니까.
‘그래도 나는 못 해.’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그러니까 모두가 칭송하는 훌륭한 남편감이거나 만인이 부러워하는 좋은 직업이라도 거절해야 할 때가 있었다.
모두가 욕망하는 최고의 것이라도 나에게 맞지 않으면 그건 맞지 않는 거였다.
욕심이 앞서서, 혹은 줏대가 없어서 그 자리에 꾸역꾸역 밀려가도 영영 불행할, 그런 일들이 세상에는 있었다.
‘전생을 버틸 수 있었던 건, 영원히 음지의 여자로 남지는 않을 거라는 그 희망⋯⋯.’
수많은 죄를 지었으나 적어도 가장 중요한 단 한 가지에서는 천신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될 거라는 그 믿음.
내가 불륜을 선택한 여자가 아니며, 언젠가는 내 남자와 축복 속에서 당당한 결합을 할 거라는 그 자존심.
여기까지 생각한 아리아드네는 피식 웃었다.
‘내가 지은 죄가 얼만데.’
그녀는 긴 장갑을 낀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순간 답답함을 참을 수가 없어서 장갑을 잡아당겨 벗어 던졌다.
새빨간 점이 다닥다닥 나 팔 전체가 피에 물든 것 같았다. 역병 환자 같기도 했고, 살인마 같기도 했다.
남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지만 아리아드네 자신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그녀가 죽인 사람 한 명이 그 손의 점 한 개로 형상화되어 있었다.
전생의 일은 지금 이 손엔 남지 않았지만, 전생에도 똑같은 점이 찍혔다면 알폰소도 점 한 개가 되었으리라.
그녀는 왼손을 높게 들어 별빛에 비추어 보았다.
“하, 하, 하하하하하하.”
우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말 등에 앉은 채 고개를 뒤로 젖혔다.
갑자기 고삐가 당겨지자 훈련을 잘 받은 군마는 탑승자의 명에 따라 제자리에 멈춰 섰다.
“순리대로 되었다.”
다 헛된 욕심이었다. 천하의 죄인은 행복해질 자격이 없다. 영원히 속죄하는 게 마땅하다.
“여기까지다.”
모두, 끝이었다. 입 밖에 꺼내서 말을 하고 나니 도리어 시원했다.
그런데 아무도 없는 숲속이라 그 어떤 반향도 없어야 하는데,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 마음대로.”
낮은 저음의, 헐떡이는 남자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