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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376화 (679/733)

<제376화> 살갗 하나마저 모두 나의 것

거대한 백마 한 필이 옆의 수풀을 헤치고 앞으로 나섰다. 기승한 말의 주인은 핏발 선 눈으로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숲을 가로질러 달려온 알폰소였다.

“누구 마음대로.”

아리아드네는 갑작스러운 알폰소의 등장에 깜짝 놀라 말고삐를 당겼다. 그녀의 말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어떻게⋯⋯ 찾은 거야?”

“네가 무슨 생각을 할지 정도는.”

알폰소는 땀에 젖은 금발을 손으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

“손바닥처럼 속속들이 알고 있어.”

여기는 트레베로 성벽의 쪽문으로 향하는 오솔길이었다.

법황의 사냥터와 이어져 있는 그 쪽문은 트레베로 성에서 유일하게 야간에도 열렸다.

법황의 사냥터는 군데군데 사냥꾼의 오두막이 서 있는 와중에 수목은 우거진, 인공적으로 조성된 아름다운 숲이었다.

“후.”

아리아드네를 찾았다는 안도감에 알폰소는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맨몸으로 국경으로 향할 리 없다고 여긴 알폰소는 부하들을 산개시킨 이후 본인은 이쪽으로 향했다.

데 마레 추기경이 있을 팔라지오 델리체로 향할까도 잠시 고민해 보았으나, 결국 정답은 이쪽이었다.

알폰소는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오며 아리아드네에게 손을 내밀었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돌아가자. 난 너 절대로 정부로 안 만들어. ”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순순히 그의 말에 따르는 대신 세 걸음 더 뒤로 빠졌다.

“⋯⋯그게 문제야.”

“무슨 소리야?”

아리아드네는 재차 말했다.

“네가 날 정부로 만들지 않고, 그 제안을 거절할 거라는 게 문제야.”

아리아드네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뭐?”

알폰소는 어이가 없어서 반문했다.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진지했다.

“십 년 뒤 어느 날, 국력이 모자라서 자존심을 버리고 허리를 굽히고 아쉬운 소리 하고 돌아온 날. 네 옆자리에 있는 나를 보며 ‘그날, 저 여자 손만 안 잡았으면 에트루스칸 왕국의 미래는 달랐을 텐데’ 같은 소리 안 할 자신 있냐고.”

그 말을 하는 아리아드네의 표정은 두려움에 가득 차 있었다.

- “너만 아니었으면! 너만 없었다면 아름다운 이사벨라는 나의 아내였어!”

- “네가 신분이 조금만 더 탄탄했더라면 수도 귀족들도 내 편에 섰겠지.”

- “아쉽구나. 네가 아들이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 “네 존재 자체가 민폐야.”

체자레와, 데 마레 추기경과, 루크레치아의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모르게 뒤섞여서 그녀의 귓가에 우렁차게 외쳤다.

네가 어쩔 수 없는 사유로, 네가 아무리 노력해도 변하지 않는 생래적인 이유로 내가 피해를 보았다고.

- 너만 아니었으면. 너만 없었으면.

자기가 원하는 대상을 못 갖는 건 오히려 상관없었다.

아리아드네는 포기와 체념에 숙달된 채 첫 번째 생애를 살았고, 두 번째 생에서는 결과적으로는 모든 것을 누리며 살았다.

그 과정을 거치며 아리아드네가 깨달은 것은 남들의 욕망과 내가 원하는 것은 다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굳이 배운 점 하나를 더 덧붙이자면, 자신의 간절한 소원이 이루어지는 게 꼭 스스로에게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도. 예컨대, 체자레의 사랑을 얻는 것 같은 종류의 일 말이다.

그러나 그녀가 아직 화해하지 못한 부분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너 때문에 내가 불행해졌다’고 원망하는 일이었다.

상대방의 절대적인 행복을 바라는데 내가 그의 유일한 오점이라면, 자신이 떠나 주는 것 외에 그 어떤 대안이 있겠는가?

알폰소는 낮은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리.”

“언젠간 너도 후회할 거야.”

“아리아드네.”

그러나 아리아드네는 멈추지 못했다. 그녀는 방언 터진 사람처럼 정신없이 말을 이었다. 자기도 모르는 새 눈물이 터져 눈가가 축축했다.

“네가 버린 게 뭔지 깨달을 거야. 그리고 날 원망하게 되기 전에⋯⋯.”

“아리아드네 데 마레!”

격앙된 알폰소의 목소리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넌 왜 항상 도망만 쳐!”

알폰소는 가슴을 치며 외쳤다.

“난 너에게 진심이 아닌 적이 없었어!”

아리아드네는 눈을 크게 뜬 채 그 자리에서 굳었다.

‘내가⋯⋯?’

자신이 도망치는 사람이라고?

그 와중에 알폰소가 절절하게 물었다.

“넌 내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

아리아드네의 녹색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나는⋯⋯. 나는⋯⋯.”

그녀는 도망친 적이 없었다. 언제나 한 걸음 앞서 나가서 대비책을 만든다고 생각했었다. 하나⋯⋯.

“넌 항상 혼자서 생각해! 앞서나가서! 이모저모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까지! 그리고 어쩌면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일들까지도!”

알폰소의 목소리가 폐부에서부터 긁어내듯이 찢어졌다.

“그게 고민이 되고 불안하면 나한테 말을 하란 말이야! 혼자 앞서서 뛰쳐나가 버리지 말고!”

제발. 내 손을 잡아달라고. 내 손을 놓지 말라고. 나를 버리지 말라고.

알폰소는 피를 토하듯이 외쳤다.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워?”

아리아드네는 알폰소를 바라보며 눈을 깜박였다. 저 질문은 참으로 그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남들보다 머리 한 개는 족히 컸고 몸통은 사람 반 명쯤은 더 들어가 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두툼했다.

지금 알폰소의 가슴을 두드리고 있는 팔뚝은 적게 잡아도 그녀의 허벅지만 했다.

그리고 외양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알폰소는 신뢰의 의인화 그 자체였다. 승리의 아이콘, 수하를 거두는 주군.

그리고 무엇보다도 알폰소는 이제껏 자신이 그녀에게 했던 모든 약속을 지켰다.

그 생각이 들자 아리아드네는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저 남자와 함께하니 저 사람은 이렇게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상황으로 몰리는구나.

알폰소를 좀 더 잘 보필해줄 사람이 어딘가 있지 않을까. 그의 신뢰에 넘치는 믿음으로 보답해주는⋯⋯.

“네가 못 미더운 게 아니야.”

거기까지 들은 알폰소는 백마의 허리를 툭 쳤다. 주인과 함께 전장에서 닳고 닳은 말은 발을 한 번 크게 굴러 앞으로 도약했다.

순식간에 아리아드네의 옆에 다가서 붙은 알폰소는 그녀의 허리를 잡아채 자기 말 위로 납치했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두툼한 입술로 아리아드네의 입술을 덮었다.

“우웁! 웁!”

아리아드네는 몸부림치며 그의 가슴을 쳤다. 평소 같았으면 아리아드네의 조그만 꺼려하는 기색에도 알아서 멈췄을 알폰소였다.

하지만 지금 그는 조금의 사정도 봐주지 않았다. 그녀의 입 안으로 뜨거운 체온이 거침없이 침입했다.

그는 그녀의 입술 깊은 곳을 향한 후 하나도 남김없이 빨아들였다.

아주 거친 키스 후에 아리아드네는 간신히 호흡을 골랐다.

“하아⋯⋯.”

하지만 알폰소는 아리아드네와 달리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대신 알폰소는 핏발 선 청회색 눈으로 아리아드네의 얼굴을 아주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넌 날 하나도 안 믿는구나.”

아리아드네는 눈을 크게 뜨고 알폰소의 코앞에서 고개를 들었다. 둘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그는 아주 차갑게 중얼거렸다.

“비겁자.”

그리고 그는 재차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이번에는 좀 더 부드러웠다. 알폰소가 그녀의 입술을, 점막을, 치아를, 숨결을 하나하나 다 어루만지며 확인했다.

그러나 아리아드네는 알폰소의 키스가 여느 때와 조금 다르다고 느꼈다.

이건 사랑하는 여자를 새로이 알아가는 기쁨, 좀 더 가까워지는 기쁨보다는⋯⋯. 좀 더 작정한 느낌이었다.

땅을 점령하기 전에 그 지장물이 뭐가 있는지 조사하는 서기관 같은 움직임. 아리아드네는 그의 가슴팍을 밀어 보았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흐, 흐으⋯⋯.”

그러나 키스가 전달하는 느낌이 어떻든 간에, 입안 구석구석을 유린하는 그의 체온은 집요했고 또 달콤했다.

같은 곳을 세 번 핥는 알폰소의 움직임에 아리아드네는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반항을, 생각을 포기했다. 좀 더, 더 해주었으면 했다.

“으음⋯⋯.”

그런데 그 마음이 들자마자 귀신같이, 알폰소는 입술을 뗐다. 길고 눅진한 거미줄이 그들 사이에서 반짝였다.

아리아드네가 입을 열기 전에 알폰소가 속삭였다.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봐.”

그녀는 마성에 홀린 듯이, 고분고분 알폰소의 명령에 따랐다. 아리아드네는 알폰소가 시킨 대로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호수처럼 고요하던 알폰소의 청회색 눈이 폭풍우가 치는 밤바다처럼 위험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난 너한테 모든 것을 다 걸었어.”

아주 차분하게 가라앉았지만 그래서 더 무섭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그는 왕위도, 왕국도, 아니 백성마저도. 다 그녀와 함께하기 위해 옆으로 미뤘다. 알폰소의 책임감의 목록 가장 위에 있는 것은 아리아드네였다.

솔직히, 나머지가 어떻게 되든 큰 상관은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없어지면 그는 더는 살 수 없었다.

알폰소는 아리아드네의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너도 나에게 모든 것을 걸어야 할 거야⋯⋯. 오늘 이후로는.”

그는 결심했다. 오늘 밤 아리아드네는 그의 것이 될 것이다.

그 예쁜 두 다리로 달아날 수 있는 곳은 이 대륙 전체, 아니 이교도들의 땅을 포함하더라도 그 어느 곳에도 없을 것이다.

그녀의 살갗 하나, 손톱 하나, 피 한 방울마저도 오늘 이후로는 모두 그의 것이 될 것이다.

“너는 도망 못 가.”

아리아드네는 알폰소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들을 것 같기도 하고 헷갈리기도 하고, 온통 알쏭달쏭했다.

일단 입맞춤에 취해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녀는 약간 풀린 눈으로 알폰소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그녀가 알아들었는지와 상관없이 아리아드네의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을 주었다.

“아앗!”

무게중심이 옮겨지며 남자 냄새가 훅 끼쳐왔다. 땀 냄새와, 약간의 나무 냄새. 그리고 어디서 올라오는 것인지 모를 달콤한 향기.

꽉 밀착한 그녀의 상체 전체로 남자의 성난 육체와 그의 체온이 느껴졌다.

민망해진 아리아드네는 엉덩이를 뒤로 빼려고 했지만, 한 손으로 말고삐를 움켜잡은 알폰소는 그녀를 풀어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강철같은 팔에 힘을 재차 꽉 주며 속삭였다.

“그러다 떨어져.”

알폰소가 그녀를 끌어안는 힘에 아리아드네는 다시 한번 그에게 단단하게 안기고 말았다.

도망치려고 할 때마다 단단한 그에게 전신으로 밀착하게 된 아리아드네는 부르르, 옅게 떨었다.

어딘가 수치스러웠기 때문이다. 자기도 알폰소만큼이나 달아올랐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안긴 채로 당한 역방향 외승(外乘)은 길지 않았다. 아니, 길었는데 그녀의 인식 속에서 몹시 짧았던 것일 수도 있다.

알폰소의 백마는 거침없이 달려 팔라지오 델리체로 들어섰다.

야심한 밤인데다 기사들이 모두 흩어져 나간 덕에 풀벌레 소리를 제외하면 사방이 고요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아리아드네를 품 안에 껴안은 채로 말에서 뛰어내렸다.

- 쿵!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그녀를 안은 채 폭풍우 같은 기세로 돌진했다. 그리고 눈을 떠 보니, 알폰소의 침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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