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7화> 온전성
- 쿵.
침실 문이 닫히는 소리는 고요하고 부드러웠지만 위압적이었다. 알폰소는 품에 안고 있던 아리아드네를 내려놓아, 두 어깨를 잡은 채 돌려세웠다.
그는 그녀를 꽉 잡은 채, 두 눈을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도저히, 네게 ‘싫으면 지금 말해’ 따위의 선택권을 허락할 여유가 없다.”
알폰소의 표정은 평소와는 달랐다. 그의 목소리는 나직했고 태도 역시 느릿했지만 고요함이라고는 찾을 수가 없었다. 광기가 어린, 푸른 화염 같은 얼굴이었다.
- 철컹!
그는 본인의 망토부터 방의 한쪽 모서리로 벗어 던졌다. 연결되어 있던 어깨 갑옷이 나동그라지는 소리가 함께 났다.
그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고, 아리아드네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알폰소는 입고 있던 푸르푸앵 역시 대충 당겨 벗었다.
촘촘하게 엮여 앞섶을 가리고 있던 장식끈이 끊어지며 옷 전체가 그의 상체를 타고 흘러 바닥에 떨어졌다.
“알폰소⋯⋯.”
아리아드네는 무의미하게 그의 이름을 읊었다. 이제 그는 하얀 셔츠 한 장과 바지만 걸친 채였다.
알폰소는 아리아드네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고, 아리아드네는 재차 뒷걸음질을 치려다가 뭔가에 걸려 주저앉았다. 침대였다.
풍성한 깃털 이불과 흰 침대보 사이에 파묻혀 그녀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알폰소, 나는⋯⋯.”
그녀의 말은 그의 키스로 막혔다.
“읍.”
아까의 그것보다는 덜 급했으나 여전히 농밀하고, 집요하며,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는 입맞춤이었다. 알폰소는 그녀 위에 체중을 실었다.
푹신한 침대가 하중을 버티지 못하고 안으로 깊숙이 꺼졌다. 베개를 등에 댄 체 그녀는 누운 것도, 앉은 것도 아닌 자세로 그의 입맞춤을 받아냈다.
그의 두툼한 손이 그녀의 허리로 향했다. 파틀렛 같은 잔챙이는 그의 관심 밖이었다. 그는 스터머커를 고정시킨 단추를 아래에서부터 위로, 한 개씩 풀어냈다.
“으읍, 읍⋯⋯.”
짙고 빽빽한 입맞춤에 호흡이 가빴다. 그녀는 숨을 들이쉬려고 가슴을 높이 들었다가 내렸다.
알폰소가 스터머커의 맨 윗단추를 풀어낸 것과 동시였다. 아리아드네의 탐스러운 상체가 자유를 찾았다.
“하아―.”
“하.”
아리아드네가 공기를 찾아 숨을 들이켠 것과 알폰소가 짧은 탄성을 지른 것은 동시였다.
남자의 눈 흰자에 광택이 돌았다. 아리아드네는 이 잠시의 공백에 알폰소의 팔을 붙들고 애원했다.
“알폰소. 나 리드풀, 리드풀이라도.”
리드풀은 씹으면 임신하지 않도록 도와준다는 약초였다. 공공연한 거래는 불법이었지만 구하기는 쉬웠다.
예로부터 시장통에서 허드렛일 하는 여자부터 한 나라의 왕비까지 모두가 애용하는 물건이었으니까.
“쉿.”
그는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그녀가 달뜬 신음을 내며 상체를 뒤틀었다.
리드풀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알폰소는 오늘 아리아드네를 영원히 아무 데도 가지 못하게 묶어둘 작정이었다. 그의 곁에서, 오도 가도 못 하게.
“쉬잇. 착하지.”
그의 손이 겹겹이 쌓인 천 자락 사이 어딘가로 파고들었다.
아리아드네는 불에 덴 것처럼 몸을 웅크리곤 파르르 떨었다. 정말이지, 전생에서나 느껴봤던 강렬한 감각이었다.
“알폰소, 알폰소.”
그녀가 애원했다. 그녀는 다리를 비비 꼬고 있었던 지 한참이었다. 스커트가 파팅게일과 함께 말려 올라가며 흰 넓적다리가 훤하게 드러났다.
그러나 자기가 무엇을 위해 애원하는지 그녀 본인도 몰랐다.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알폰소가 정말로 멈춰버린다면⋯⋯. 울음이라도 터트릴 게 틀림없었다.
아리아드네의 애원에 고개를 든 알폰소는 그녀의 손가락 끝을 깨물어 당겼다. 온전한 오른손에 끼워진 실크 장갑이 스르르 딸려 올라와 벗겨졌다.
“아리. 넌 정말이지⋯⋯.”
흐트러진 매무새의 아리아드네는 그가 태어나서 보았던 그 어떤 여자보다, 그림보다, 조각상보다도 예뻤다.
주관적으로도 그랬고 객관적으로도 그랬다. 터져 나갈 것만 같은 농밀한 아름다움을 맨눈으로 보자 그는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미칠 듯이 아름다워.”
그는 벗겨서 침대 아래로 던져 버린 오른손의 실크 장갑을 발끝으로 멀리 밀어버렸다. 알폰소는 아리아드네의 손끝을 입술로 지분거리며 속삭였다.
“예쁜 손 가리지 말고 저런 건 앞으로 끼지 마. 불편하게. 오른손엔 흉터도 없잖아.”
달아올라 정신이 혼미하던 아리아드네는 그 말을 듣고 약 삼 초쯤 있다가 전신의 피가 싸늘하게 식어 내리는 기분을 느꼈다.
“흉터⋯⋯?”
그녀는 알폰소의 눈앞에 오른손을 들어 내밀었다.
“이게⋯⋯. 보여?”
알폰소는 어이없다는 듯이 아리아드네를 바라보더니, 재차 그녀의 오른손에 입술을 댔다.
“무슨 소리야. 거긴 아무것도 없잖아. 아픈 건 왼손이고.”
그녀는 새파랗게 질려서 자기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끝부터 팔꿈치까지 갓 도축한 암소의 피에 담갔다 뺀 것처럼 새빨갰다.
오늘은 풀숲 어딘가에 장갑을 내던져버렸다. 그러니까 알폰소를 만난 처음부터, 장갑 따윈 끼고 있지 않던 손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전신의 피가 다 빠져나가는 거 같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똑바로 섰다.
“이게 눈에 보인다고? 아까부터 다 보고 있었던 거야? 숲에서부터?”
여자의 돌변에, 알폰소도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아리아드네는 울부짖었다.
“그런데 왜 말 안 했어! 그런데 왜 말 안 했냐고!”
목소리가 비명에 가깝게 올라갔다. 알폰소는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이 손 놔!”
아리아드네는 알폰소의 손을 뿌리쳤지만, 그의 입술이 그녀의 손가락에 닿는 게 먼저였다. 이번엔 왼손이었다.
“더럽지도 않아?”
아리아드네는 다시 한번 몸을 뒤로 빼낸 후 기가 막혀서 소리쳤다.
지금은 가라앉았지만, 한때 고름과 피딱지로 가득했던 손이었다. 다 스스로 한 짓이었다.
“이게 다 보였단 말이야? 나는⋯⋯. 나는⋯⋯. 이건⋯⋯.”
그녀의 큰 녹색 눈에 눈물이 고였다. 할머니⋯⋯. 할머니⋯⋯. 한 달은 괜찮다고 했잖아요⋯⋯.
“나는⋯⋯. 나는.”
알폰소는 일체의 터치를 거부하는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바보가 된 것만 같은⋯⋯.”
아니, 엄밀히 따지자면 사실 바보가 된 것은 알폰소 쪽이다.
아리아드네는 말도 안 되는 사기를 쳐서 그의 왕자비 자리를 얻으려고 들었던 것에 지나지 않았고.
신분도, 신체도, 아무것도 온전하지 못한 여자가 어딜 감히 왕자님의 옆자리를 노린단 말인가. 그녀는 맨손으로는 궁을 돌아다닐 수도 없는 처지였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자기가 무슨 짓을 하려고 들었던 것인지 깨달은 아리아드네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지어 떨어져 내렸다.
“나는⋯⋯. 그러려던 건 아니었⋯⋯.”
사기를 치려던 건 아니었어. 내가 주술의 도움을 받아서 온전해진 줄 알았어.
나도, 이 모자란 나라도, 가장 편향된 렌즈를 끼고 좋게 보아주면 네 옆자리에 걸맞을지도 모른다고 아주 잠깐동안 착각했었어.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설명하면 되기나 할지조차도 알 수 없었다. 처참한 심경이었다.
“나는 더러운 여자고⋯⋯. 온전하지 못한 여자고⋯⋯. 몸도, 마음도⋯⋯. 이 자리에 설 자격이 없⋯⋯.”
그에게 했었던 기사의 맹세를 지켰어야 했다. 내가 그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은 충성이지 사랑이 아니었던 거였다.
그녀는 두 발로 선 채 왼팔을 오른손으로 가리고 하염없이 울었다. 새하얀 피부와 흑단 같은 머리칼과 죄의 붉은 낙인이 교차한 채로 한없이.
알폰소의 침묵이 그녀를 죽일 것만 같았다.
한참, 아주 오랫동안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던 알폰소는 돌연 그의 흰색 셔츠를 뒤집어 벗었다.
그의 성난 복근과 내복사근이 상체의 움직임에 따라 불끈불끈 움직였다. 하지만 아리아드네의 시선을 잡아챈 건 다른 거였다.
“알폰소, 그건⋯⋯?”
왕자의 배에는 거대한 구렁이 같은 끔찍한 흉터가 똬리 틀고 있었다.
칼에 맞은 자국이 틀림없는 흉터는 배꼽 조금 아래에서 시작해 옆구리를 둘러 엉덩이를 지나 허벅지까지 이어졌다. 알폰소는 담담하게 물었다.
“내가 더러워?”
아리아드네는 강하게 도리질 쳤다.
“아니, 아니, 절대로⋯⋯.”
그는 그녀의 왼손을 잡아끌어 자신의 복부 상처 위에 얹었다. 시뻘겋게 융기되어 얼기설기 아문 남자의 흉살 위에 여자의 피처럼 새빨간 오른손이 얹혔다.
“신체적 추함이 드러나면 왕궁에 있을 수 없다는 불문율을 지켜야 한다면 나도 나가야 해. 나도 똑같아.”
그는 아리아드네의 손을 흉터의 궤적대로 이끌었다. 이 흉터는 예사크 전쟁 극 초기, 막사에 숨어들어왔던 아군이 낸 상처였다.
아헨바흐 백국 측 사람이던 암살자는 알폰소 왕자의 수하에게 공을 뺏기는 일이 늘어가자 왕자를 죽여 없애려고 했던 것 같았다.
진정한 속내와 원흉은 끝내 밝히지 못했다.
아무리 봐도 율덴부르크 대공 휘하 공신 중 한 명의 소행이었는데, 모든 것을 대공에게 의지하던 당시 알폰소의 처지로서는 대공에게 대놓고 항의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암살자는 장검을 높이 들어 잠자는 왕자의 복부에 찔러 넣었고, 최후의 순간에 눈을 뜬 알폰소는 옆으로 몸을 굴려 목숨만은 건졌다.
그리고 왕자의 막사 옆에서 쪽잠을 자던 엘코 경이 허겁지겁 달려와 외팔로 위태위태하게 암살자를 처치했다.
- “왕자님!”
알폰소가 무너지면 모두가 무너지는 것이었기 때문에 왕자가 습격에 당했다는 건 절대 비밀이었다.
일체의 수발은 기사 서임을 받았기 때문에 타인의 시중 따윈 들지 않아도 되는 엘코 경이 숨어서, 고요히 들었다.
그 일 이후로 엘코 경은 알폰소의 대체할 수 없는 측근이 되었다.
하지만 다, 지난 일이었다. 알폰소는 자신의 배를 쓰다듬는 아리아드네의 작은 손을 보며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나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 여자를 위해 모든 것을 다 포기했다. 아마 엘코 경의 목을 치던 순간이었으리라.
왕좌 같은 물질적인 것은 물론이요, 과거의 관계, 친분, 죄책감, 미안함 같은 좀 더 지고한 가치들마저도.
지금 이 여자는 그가 가진 모든 것이었다. 그러니 그녀에게도, 세계가 되고 싶었다.
그녀의 조그만 손은 하복부의 흉터를 어루만지다가, 이미 나 있는 길을 따라 장골로 향했다.
“후우.”
알폰소의 호흡이 좀 더 거칠어졌다. 이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리아드네의 손길은 흉터를 따라 점점 더 내려왔다.
뻐근한 하복부의 통증은 오래된 흉터가 도져서 그런 것은 확실히 아니었다.
“아리.”
알폰소는 아리아드네의 두 어깨를 잡았다.
“나는 네가 그 어떤 상태라도 상관없어. 손이 빨갛건 아예 한 개가 없건 신분이 백작이건 왕족이건 무어인 노예이건 정말 아무것도 중요치 않아.”
과거의 약혼자가 있건, 그 사람과 어디까지 갔던, 하다못해 애가 있어도 살인자여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그의 앞에 있고 그들의 체온이 이어져 있다는 점이었다.
알폰소는 충혈된 청회색 눈을 아리아드네의 얼굴에 아주 가까이 대고 물었다.
“나 믿지?”
그녀는 얼굴을 들어 알폰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리아드네는 눈물 고인 눈으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응.”
가늘지만 단호한 긍정이었다.
알폰소는 고개를 마주 끄덕이고는 아리아드네의 양어깨를 잡은 채 그녀를 침대에 밀어붙였다. 아리아드네는 순순히 따랐다.
해야 하는, 하고 싶은 말이 무척이나 많았다. ‘아플 거야’ 라든가, 무섭지는 않으냐는 걱정이라든가, 나만 믿으라는 장담이라든가.
하지만 결국 알폰소가 속삭인 말은 한마디였다.
“사랑해.”
나를 포함해,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그 말과 동시에 한 번도 침범당해 본 적이 없었던 원시림의 휘장이 찢겼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