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9화> 이번 생 세 번째 청혼
뜻밖의 청혼에, 아리아드네는 입을 벌린 채 알폰소를 바라보았다.
“나, 나랑 지금 결혼하면⋯⋯.”
레오 3세의 허락이 없는 것은 당연했고, 귀천상혼 문제도 있었다.
“상황도 복잡하고, 후계 문제도 있고, 부모님 허락에, 갈리코 왕국과의 관계도⋯⋯.”
알폰소의 물에 젖은 손가락이 그녀의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쉿.”
수분을 한껏 머금은 상태였지만 남자의 손은 어쩔 수 없이 거칠었다. 굵은 손 마디가 아리아드네의 말랑한 입술과 만났다.
알폰소의 손가락이 아리아드네의 아랫입술 겉면을 지분대다가, 그 사이로 틈을 비집고 들어와 치아와 입 안의 점막을 처음 알아가는 생소한 지형지물처럼 탐색했다.
“으―응⋯⋯.”
그는 그녀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옳지. 소리가 거의 정확하게 잘 났어.”
어제의 희락에서 그도 확신했다. 아리아드네는 자신을 열렬하게, 세상에 둘도 없이 사랑한다는 걸.
“이럴 땐 그냥, ‘응’이라고 하는 거야.”
그와 그녀는 마치 상대방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
처음 연주해보는 선율도 그녀와 함께라면 아주 익숙한 노래가 되었고 동시에 머릿속에 폭죽이 터지는 불꽃놀이가 되었다.
움직임 하나하나, 몸짓 하나하나가 환희였고 기쁨이었다.
“으응⋯⋯. 흐응.”
아리아드네가 알폰소의 손놀림을 따라 야릇한 소리를 냈다. 그는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그게 아니라. 똑바로 말해봐.”
아리아드네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알폰소는 아리아드네의 턱을 쥔 채 손가락을 마저 놀렸다.
그는 마치 천재 음악가 같았다. 악기를 연주하면 할수록 급격하게 실력이 느는 종류의 연주 신동 말이다.
“하⋯⋯. 앙⋯⋯.”
물속에 잠긴 그녀는 결국 도리질을 치며 알폰소를 떼어냈다.
“그렇지만!”
그녀는 두 손으로 알폰소의 가슴팍을 밀어젖힌 채 항의했다.
“이렇게 중요한 일을 지금 대답하라고?”
그러고는 자기 몰골을 가리켰다. 그녀가 걸친 거라곤 젖은 이불과 욕조와 거기에 담긴 목욕물이 다였다.
“이 꼴로?”
알폰소의 눈에 물에 촉촉이 젖은 아리아드네가 보였다.
수분을 가득 머금은 매끄러운 피부, 약간 부푼 빨간 입술, 그 사이로 톡 튀어나온 귀여운 토끼 이빨까지도 다 참을 수 없게 예뻤다.
알폰소는 욕조 안에서 두 무릎을 올려 아리아드네를 자기 품 안에 가뒀다.
“아앗!”
“그래서.”
그는 그녀의 몸통에 커다란 두 손을 얹고 부력에 힘입어 그녀를 물속에 가볍게 띄웠다.
“나랑 결혼하기 싫으시다?”
그의 청회색 눈이 약간의 웃음기와 아주 많은 애정을 담은 채 그녀를 응시했다. 아리아드네는 겸연쩍은 미소를 띤 채 고개를 살짝 비틀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매일 내 옆에서 잠들고.”
그는 그녀의 콧잔등에 입술을 맞췄다.
- 쪽.
“매일 내 옆에서 눈뜨고.”
이번에는 코끝에. 잠들고 일어나기까지 사이에 뭘 해야 할지는 생략이다.
- 쪽.
“내 옆자리에서 국빈을 맞이하고.”
이번에는 인중에.
- 쪽.
한 가지 더 말하고 싶은 게 있었지만 그건 속으로만 삼켰다.
그는 이번에는 아무 말 없이 아리아드네의 입술에 키스했다.
이번에는 쪽, 이 아니라 농밀한 편의 입맞춤이었다. 여자의 입술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하, 하응⋯⋯.”
둘은 주파수 자체가 맞았다. 그가 새로운 시도를 하면 그녀가 바로 희열로 답했다.
“나랑 평생 이렇게 있기 싫어?”
그는 그녀를 물속에서 껴안았다. 그새 시간이 제법 지나 김이 모락모락 나던 목욕물은 체온 언저리까지 사그라들어 있었다.
“하나만 생각해 봐. 국가도, 후계도, 장애물도, 그런 복잡한 거 모두 잊고. 본질만 생각해 보자.”
축축하게 젖은 알폰소의 눈이 아리아드네를 똑바로 주시했다. 식어가는 물속에서도 그의 육체는 강건했다.
그 팔 안에 갇힌 그녀도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췄다.
“나와 함께하고 싶은지, 아닌지만 고려해서 대답해 줘.”
그는 조금 전까지의 장난스러운 기색은 모두 지운 채 한 음절 한 음절 또박또박 물었다.
“저와, 결혼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알폰소의 표정에서는 애정이 넘쳤다. 그가 그녀를 꼭 안은 가슴은 단단했고 품은 듬직함 그 자체였다.
식은 물속에서 뜨거운 것은 그의 체온, 단 하나뿐이었다. 절대로 영원히 차가워지지 않을. 세상의 끝까지 타오를 생명력.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랑을 포함한 그 어떤 감정도, 아니 인간부터가 영원하지 못하다.
하지만 알폰소의 온기에는 불가해한 끌림이 있었다. 머리로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일에 설득당하게 만드는 매력. 아니 마력.
아리아드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폰소는 크게 웃었다. 그가 그녀를 격하게 껴안느라 욕조에서 세차게 물이 튀었다.
커다란 창으로 환하게 들어오는 햇살이 부서지는 물방울에 사방으로 반사되어 눈부신 장관을 만들어냈다.
그는 인스턴트 무지개 속에서, 그녀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 줄게. 약속해.”
* * *
루도비코 법황과의 면담을 끝낸 아베르루체 수도원의 부수도원장, 라파엘 데 발데사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날 왜 부른 거지?”
루도비코 법황은 라파엘에게 정말로 이해가 가지 않는 질문 세례만 해댔다.
그나마 처음에는 비교적 정상적이었다. 그러니까, 예측 범위 내였다는 말이다.
- “데 마레가 어떤 비위를 저질렀나? 횡령? 배임? 돈 받고 매관매직한 건 없어? 돌아가신 자네의 수도원장이 뭐라 하던가?”
법황은 눈을 반짝이며 라파엘을 채근했다.
- “말해보게. 뭐가 없을 리가 없잖아.”
- “저는 성직에 투신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잘⋯⋯.”
루도비코 법황은 호인처럼 웃었다. 하지만 그가 꺼내는 말은 전혀 호인답지 않았다.
- “순진한 척하지 말게.”
법황은 마치 어제 먹은 식사 메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편안하게 말했다.
- “난 자네가 1123년에 해외로 돈 심부름을 간 사실을 알고 있어.”
그는 덧붙였다.
“에트루스칸 왕국 성황청 지부의 통행허가증을 들고 말이지.”
추가적인 서류도, 증빙도 필요 없었다. 이 정도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의 심증 그 자체가 반박해야 하는 사실이 된다.
예상치 못한 일격을 당한 라파엘은 뻣뻣하게 굳었다.
그는 아리아드네의 돈 심부름을 갔을 때, 중간 기착지로 항구도시에 세워진 수도원들을 이용했다. 아리아드네와 합의했던 내용이었다.
첫 번째 전달은 그가 직접 했지만 그 이후의 전달은 보카네그로 상회의 일반 직원들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중간에서 누군가가 빼돌리는 상황을 막을 안전장치가 필요했다.
그래서 성황청의 행사인 척 속여 고립된 수도원의 성직자들을 이용해 금액을 이중으로 확인하게 만든 것이다.
루도비코 법황은 사람 좋은 미소를 띠고는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 숙인 채 은근하게 물었다.
- “말해보게. 그거, 데 마레의 자금 세탁용 여행 아니었는가.”
그러나 산 카를로의 ‘무소 테리빌레’(muso terribile)는 포커 쳐서 딴 악명이 아니었다.
공포의 주둥아리가 되려면 입이 걸어야 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순발력이 어마어마하게 좋아야 한다.
딱 맞는 욕설을 적재적소에 들이박는 것은 여간 머리 회전이 빠르지 않고서야 못 하는 일인 것이다.
산 카를로의 공포의 주둥아리는 역시,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은 채 매끄럽게 반문했다.
- “자금 세탁이라니요? 기부금품 전달 말씀입니까?”
라파엘은 법황이 저렇게 나오는 이유가 에트루스칸 성황청 내부의 투서일 거라고 의심했다.
데 마레 추기경이 횡령한 내역이라도 있지 않은 한 법황이 이렇게 치밀하게 추기경을 파댈 리가 없지 않은가.
라파엘은 루도비코가 데 마레 추기경 개인을 노리고 있다고는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어느 쪽이건 그는 오늘 처음 본 법황 앞에서 아리아드네의 아버지이자 자국의 추기경인 사람을 팔아넘길 생각이 없었다.
그에게 황금의 진짜 출처를 알려줄 생각은 더더욱 없었고 말이다.
라파엘은 시침을 뚝 떼고 말했다.
- “아주 큰 금액의 기부금품⋯⋯. 성전을 위한 군자금이었지요.”
루도비코 법황은 되물었다.
- “성전 군자금?”
예상치도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라파엘은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요. 율덴부르크 대공을 통해 에트루스칸 왕국의 알폰소 왕자님께 전달되었습니다. 그쪽에 문의해 보시면 영수증도 남아 있을 겁니다.”
법황은 인상을 찡그린 채 물었다.
- “성전에 기부금품을 전달하려면 에트루스칸 국왕을 통해서 공식 루트로 넣으면 되지, 왜 그렇게 뒷구멍으로 특사를 보냈지?”
포르토 공화국의 물류보급선을 통해서 보내도 되고, 방법은 많았다. 라파엘은 과장되게 인상을 쓴 채 말했다.
- “당시 팔라지오 카를로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주 큰 비밀을 알려준다는 투였다. 외부인들은 음모론에 지나치게 열광하는 경향이 있었다.
- “물론 왕궁을 통해 가는 게 맞기는 하는데, 국왕 폐하의 정부인 루크레치아 공작부인이 중간에서 농간을 좀 쳤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돌아가신 왕비 전하의 적자인 알폰소 왕자님이 전공을 세울까 봐요.”
루도비코 법황은 인상을 썼다. 그는 명문가의 둘째 아들로 푸른 피를 타고나지 못한 자들이 호가호위하는 것을 기본적으로 싫어했다.
그리고 에트루스칸 왕국의 알폰소 왕자는 현재 그가 가장 사랑하는 젊은이였다.
그가 역사책에 기록되고 내세에까지 내세울 공은 제3차 십자군 전쟁이었다.
알폰소 왕자라면 그 위대한 승리를 최전선에서 확보한, 천신의 가장 예리한 검 아닌가.
- “왕궁에서 돈을 정식으로 보낼 수가 없어서 성황청으로 우회했다는 말이 파다했습니다.”
루도비코의 가뜩이나 선 굵은 얼굴이 험악해졌다. 뭐? 더 줘도 모자를 값에 보내지를 못해?
- “금전의 출처야 단순한 심부름꾼인 저는 모릅니다만, 그게 설령 성황청의 에트루스칸 지부에서 나온 돈이라고 하더라도 성전에 전달되었다면 적법하게 쓰인 돈 아닐까요?”
루도비코는 미묘한 목소리로 물었다.
- “데 마레가⋯⋯. 성전을 지지해?”
- “그렇다마다요.”
거짓말을 할 때는, 그것도 자기가 잘 모르는 부문에 대해 거짓말을 할 때에는 최대한 단호하고 확신 있게 단언해야 한다.
라파엘은 동어반복에 불과하지만 아무도 부정할 수는 없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 “마음 가는 데에 돈 가는 법입니다.”
위와 같은 대화를 나누고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라파엘이 법황의 꿍꿍이를 고심할 때, 루도비코 법황은 방에 홀로 앉아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전환을 겪고 있었다.
‘내가⋯⋯. 왜⋯⋯. 데 마레를 빼놓고 생각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