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0화> 인생은 제멋대로 흘러가는 거
루도비코 법황이 트레베로로 각국의 군주와 실세 추기경들을 불러 모은 첫 번째 이유는 누가 그를 독살하려 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가 이런 번거롭기 짝이 없는 짓을 한 두 번째 이유이자 유일하게 생산적인 이유는 그의 후계자를 찾기 위해서였다.
‘너무 젊은 친구는 안 돼.’
그는 길어도 반년 안에 죽을 테니, 어느 정도 기반이 있는 성직자 중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반년은 뭘 새로 하기엔 형편없이 짧은 시간인데, 어린애를 세워놓고 후계자의 기반을 다져주지 못한 채로 법황이 서거하면 늙은 여우들이 걜 산 채로 잡아 뜯을 게 불 보듯 뻔했다.
아르투르에게 했던 것처럼 마음에 쏙 드는 어린 친구를 새로 찾아 맞춤형 인재로 키울 시간은 그에게 허여되지 않았다.
하늘은 다 주는 법이 없었다.
‘유능하면서도⋯⋯ 고분고분해야 해. 내 유지를 받들어 제4차 십자군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야 하니까.’
데 마레 추기경은 이 ‘고분고분’ 요건 때문에 당연히 루도비코 법황의 마음속 목록에서 배제된 상태였다.
숏리스트는커녕 롱리스트에도 없었다.
그러나 그럴 만도 했다. 둘은 겨우 두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동년배로, 심지어 출신지도 에트루스칸 왕국으로 같았다.
자연히 어려서부터 라이벌 의식이 없지 않아 있었다.
물론 항상 우위에 있는 쪽은 루도비코였다.
명문가의 자제로, 큰 덩치와 호감상인 외모, 사내다운 리더십마저 갖춘 루도비코는 믿을 거라곤 머리 하나밖에 없는, 조그맣고 쪼잔한 데 마레를 압도했다.
그러나 흑요석처럼 반짝이는 조그만 쥐 눈으로 골 아픈 신학 이론을 떠벌리며 저를 노려보는 데 마레의 반항심 어린 면상에는 그냥 웃어넘기기만은 힘든 면이 있었다.
뒤돌아 생각해보면, 그건 루도비코가 갖추지 못한 어떤 뛰어남이었다.
그러나 당시엔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고 주먹만 들었다 놓았다 했을 뿐이다.
조금만 더 어려서 만났더라면 흠뻑 패 줬을 텐데, 같은 셈만 하면서 말이다.
가끔 주먹을 번쩍 들면 데 마레는 오던 길을 홱 돌아서 콧대를 높게 쳐들고 가고는 했다.
그렇지만 젊은 루도비코는 그때마다 후들대는 데 마레의 오금을 보고 낄낄거렸다.
‘클클클. 인생이 참 이상해.’
정말이지, 인생은 제멋대로 흘러가는 거였다.
그가 가장 사랑한 아르투르가 그의 뒤통수를 이렇게 칠 줄은 몰랐고, 세속적이기 짝이 없는 자기 인생의 숙원사업이 무려 성전일 줄은 꿈에도 몰랐으며, 그 숙원사업을 마무리해 줄 사람으로 젊은 시절의 앙숙 데 마레를 점찍게 될 줄은 정말로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괴상하면 괴상할수록 꼼꼼히 봐야지.’
확인해 볼 것들이 조금 더 있었다. 예를 들어.
‘정말로, 데 마레가 순순히 내 말을 따를까?’
같은 사소한 질문들 말이다. 하지만 잘 될 것이다. 법황은 만족스레 자신의 풍성한 수염을 쓰다듬었다.
루도비코가 없는 세상이 여전히 루도비코로 가득 차 있도록. 오늘도 건배.
* * *
돌아오지 않는 딸내미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데 마레 추기경은 곧 그런 사소하다면 사소한 일 따위는 까맣게 잊고 말았다.
급작스러운 법황의 호출이 울린 것이다.
“지금 당장 오셔야 합니다. 당장!”
법황의 사자는 무슨 큰일이라도 난 듯이 호들갑을 떨었다.
용건도 밝히지 않으면서 저렇게 구는 게 꼴 보기 싫었지만 똑같은 술책에 당해 산 카를로에서 트레베로까지 울며 겨자 먹기로 끌려왔는데 트레베로에 다 와서 법황의 거처까지 굳이 못 끌려갈 이유도 없었다.
데 마레 추기경은 의관을 정제할 틈도 없이 허겁지겁 뛰쳐나갔다.
얼마나 급하게 호출에 응했는지, 조끼마저 뒤집어 입고 나갔다. 당황스럽지만,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법황의 거처에 도착해 궁둥이를 붙인 뒤엔 일이 더더욱 당황스럽게 풀렸다.
처음 복도 구석에 있는 아주 작은 의자에 앉아 혼자 있게 되었을 때는 오히려 좋았다.
손톱만큼의 시간을 활용해 스테인드글라스에 비친 자기 잔머리며 뒤집어 입고 나온 조끼의 솔기 등을 정리했다.
한참을 혼자 보낸 후엔 눈치를 더럭더럭 보며 문제의 조끼를 제대로 뒤집어 입기까지도 성공했다. 문제는 그 뒤였다.
정말로 아주 오랫동안 아무도 그를 찾지 않았다.
오전에 도착했건만 점심시간이 지나고, 오후의 차 마실 시간이 지나고, 저녁 시간이 다 되어 갈 때까지도 아무도, 데 마레 추기경을 찾지 않았다.
‘날⋯⋯. 잊었어?’
굉장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안 불렀으면 안 불렀지, 불러 놓고 투명 인간 취급이라니!
이게 루도비코가 자존심 싸움을 하기 위해 그를 불러 놓고 일부러 앉혀 놓은 건지, 아니면 정말로 잊은 건지를 가늠해보려 해도 분간이 가지 않아 더 억울하고 서글펐다.
주린 배를 껴안은 채 멍하니 앉아 있는데, 닫힌 문 저쪽에서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그거, 내가 한 짓⋯⋯.”
데 마레 추기경은 귀를 쫑긋 세웠다.
차마 누가 들어올까 무서워 앞으로 달려가 문에 귀를 대는 채신머리 없는 짓은 못 했지만, 더 들으려는 최선의 노력을 경주한 것이다.
“⋯⋯데 마레 녀석, 최우수논문 선집 수록 나한테 뺏기⋯⋯. 우리 아버지가 영향력을 써서 뺏은⋯⋯.”
유창한 에트루스칸 어. 굵고 우렁차게 울리는 목소리. 이건 루도비코 법황이었다.
법황의 이야기는 계속 들렸다.
“데 마레가 치리아니 주교위를 놓친⋯⋯. ⋯⋯그것도 내가⋯⋯.”
치리아니 교구는 산 카를로 대교구로 올라오기 위한 디딤돌 같은 곳이었다.
승진하기 위한 핵심 부처였고, 그곳의 주교위는 누구나 탐내는 노른자위 자리였다.
수도와 가깝고, 교구 재정도 풍요로웠으며 신학 공부하는 젊은 수도자들이 모인 수도원도 부설로 가지고 있어 실적 내기가 참 좋았다.
“⋯⋯올라가면서 후보 추천을 해달⋯⋯. ⋯⋯데 마레⋯⋯. 내가 데 마레 만큼은 절대로 안 된다고 했어. 껄껄껄!”
루도비코 법황은 치리아니 주교로 성직 생활을 오래 하다가 산 카를로 대교구장을 찍고, 대주교와 추기경 서임을 연달아 받은 직후에 법황이 되어 트레베로로 떠났다.
“⋯⋯그럴 필요까진 없었⋯⋯, 그 찌질이가 수도로 올라올 기회를 놓쳤을 때의 표정이 일품이었어. 순전히⋯⋯. 그 면상 보고 싶⋯⋯ 저지른 거야.”
‘!’
데 마레 추기경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루도비코 데 주스티니, 그러니까 당시의 치리아니 교구를 맡고 있던 주스티니 주교가 전임 산 카를로 추기경의 서거로 인해 영전했을 때, 비어버린 치리아니 교구를 맡을 사람으로 모두가 데 마레 당시 대사제를 지목했었다.
- “그 자리는 아무래도 데 마레가 가지 않겠나?”
- “경력이건, 성과건, 마땅한 다른 사람이 없지.”
- “시몬, 드디어 출세하겠어! 솔직히 떼 놓은 당상일세! 하하하!”
그리고 모두의 예상을 비켜나 치리아니 주교위는 데 마레 추기경의 5년 후배인 새파란 젊은 놈에게 돌아갔다.
새 치리아니 주교는 명문가의 가주가 꽂아 넣어 준, 꽃보직만 도는 귀족 가문 출신의 한량이었다.
세상인심은 참 차가웠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름을 불러 주며 친근하게 굴었던 사람들이 치리아니 교구의 인선이 발표되자마자 인상을 싹 굳히고 모른 척했다.
- “참⋯⋯. 안타깝게 되었네.”
- “아니,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아니, 차라리 모른 척해준 사람들이 양반이었다. 한두 마디씩 얹으며 기색을 살피는 인사치레에 표정 관리하는 건 정말로 곤욕이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타란토의 작은 벽돌집이었던 당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루크레치아의 반응을 데 마레 추기경은 아직도 기억했다.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이폴리토가 각종 사고를 치는 걸 뒤에 방치한 채 루크레치아는 울분을 토해냈다.
- “당신만 믿으랬잖아! 수도로 데려가 준다고 했잖아! 당신 같은 사람을 뭘 믿고 내가 저 핏덩이를 낳아 키웠지! 우리는 영원히 이 비린내 나는 바닷가 촌동네를 떠나지 못할 거고 그건 다 당신이 무능하기 때문이야!”
그날 루크레치아는 그를 거의 떠날 뻔했다.
데 마레 추기경은 퇴근 시점에는 자기가 전혀 뭔가를 잘못했다는 생각 없이 집에 돌아왔지만, 밤이 깊어진 이후의 어느 순간부터 본인의 무능함을 눈물로 자책하면서 루크레치아의 치마폭을 붙들고 밤새 그녀를 달랬다.
그날은 단연코 데 마레 추기경 인생 최악의 날 중 하나로 당당히 꼽혔다. 그런데⋯⋯. 이게 다⋯⋯. 주스티니가 한 짓이라고?
귀가 트였는지 법황의 말소리가 점점 더 똑똑히 들렸다. 추기경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세레토의 사도도 내가 일부러 보낸 거였는데. 걜 치워야 아르투르가 차기 법황 선출을 위한 콘클라베에서 에트루스칸 지역표를 받아 갈 수 있었단 말야.”
아세레토의 사도 때문에 이단심판관에게 끌려갈 뻔했던 날 또한 추기경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복덩이 작은딸이 아니었다면 그날 꼼짝없이 이단을 옹호했다는 죄명을 뒤집어쓰고 교단에서 징계당했을 것이다.
아니, 징계로 끝나면 다행이지. 법황이 마음먹으면 무슨 죄목을 뒤집어씌워서든 아예 치워버리는 것도 가능했다.
벨라스코 추기경이 잡혀 죽은 것만 봐도 그랬다.
추기경의 처형이라니. 루도비코가 선을 제대로 넘어 버린 것이긴 했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법황이란 휘하 사제들에게 그런 힘을 지닌 지위였다.
입이 마르고 침이 말랐다. 눈에 핏발에 섰다. 그는 항상 루도비코의 눈치를 보며 살아왔다.
젊어서 두각을 보이는 비슷한 또래 사제로 꼽혔을 때에도, 천신만고 끝에 산 카를로 대교구의 추기경이 되어 남부럽지 않은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된 뒤에도, 사실 그의 목줄은 언제나 루도비코에게 잡혀 있었다.
‘평생 이렇게 살라고?’
정정당당한 경쟁의 결과라면 승복할 수 있었다. 패배한 자는 따르는 게 옳으니까.
그런데⋯⋯. 부모를 뒷배로 가지고 있는 것도 부럽고 미워 죽을 뻔했는데, 실제로 부모 배경을 사용해서 나를 밀쳐냈다고?
게다가 심지어 승진을 두고 경쟁한 것도 아니고, 순전히 내가 미워서 일부러, 계속 건드렸다고?
데 마레 추기경은 고개를 흔들어 잡생각을 떨어냈다. 이렇게 생각해봤자 나만 손해다.
루도비코 저놈이 내 머릿속을 가지고 장난질을 치려는 게 틀림없다.
저 용의주도한 장난꾸러기가 내가 여기 앉아 있는 걸 모를 리도 없고 제 하는 소리를 다 듣고 있는 것도 아마 다 알 거다.
이렇게 생각하며 이를 악물고 참던 데 마레 추기경에게, 루도비코 법황의 목소리가 마저 들렸다.
“꼭 아르투르 때문만은⋯⋯. 데 마레가⋯⋯. ⋯⋯해서⋯⋯. ⋯⋯참 운도 더럽게 좋아. 안초비처럼 말라서 남의 눈치나 보는 찐따 새끼가.”
펑.
머릿속에서 뭔가가 폭발했다. 욱, 하고 피가 역류하면서 눈앞에 폭죽 내지는 몹시 밝은 빛 같은 것이 펑펑 터졌다.
‘이 새끼가⋯⋯!’
분노한 데 마레 추기경의 귀에 루도비코 법황의 말이 마저 들렸다.
“⋯⋯가져오게, 차. 나 뜨거운 거 안 마시잖아. 식은 차로. 뭐? 뜨거운 것밖에 없다고?”
데 마레 추기경의 눈앞에 쪽문과, 그 바로 앞에 대기하듯 주차된 티 트롤리가 보였다.
그가 앉아 있는 공간이 보통 허드렛일하는 하인이 대기하는 공간인 모양이었다.
밖에 내어갈 티 트롤리가 있고, 각종 청소 도구들이 있는 손바닥만 한 휴게실.
티 트롤리 위엔 식은 지 오래된—추기경이 입장하기 전부터 있었으니—생강차가 놓여 있었고, 그 바로 아래 선반에는 「쥐약」이라고 쓰인 항아리가 있었다.
쥐약, 다른 말로는 비소다.
데 마레 추기경의 손이 고뇌에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이에 기름을 붙일 말이 마저 들렸다.
“어떻게든 찾아와! 당장 가져와!”
우렁우렁 외치는 재수 없는 큰 목소리와.
“⋯⋯성질⋯⋯. 이래서 저번 주에도 내 독살 시도가 있었나? 하하하.”
호탕한 척하는 대책 없음과.
그리고 데 마레 추기경은 저 문장 속에서 재미있는 실마리를 잡았다.
저번 주에도 독살 시도가 있었어? 그렇다면 누가 한 건지 못 찾지 않을까? 루도비코 새끼를 죽이고 싶어 하는 게 한두 명이야?
“왜 그렇게까지 했냐고? 하하하하하하. 같잖아서 그랬어, 같잖아서. 사실 데 마레가 애지중지하던 그 엉덩이 큰 여자 있었잖은가. 그 여자가 나한테 그렇게 꼬리를 쳤었는데. 그런 줄도 모르고 그 여자 끌어안고 나한테 이빨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게 너무나 같잖아서.”
2차 폭발이다. 머릿속에서 폭죽이 펑펑 터졌다. 데 마레 추기경은 충혈된 눈으로 쥐약 항아리를 핥듯이 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