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1화> 후계자 발탁
그러나 한참 동안이나 비소 항아리를 노려보던 데 마레 추기경은 결국 법황의 찻주전자에 독약을 타지 않았다.
대신 추기경은 양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천장을 본 채 한숨을 쉬었다.
“하.”
그러고 나서는 놀랍도록 꼿꼿한 정자세로 앉은 채 아주 오래 움직이지 않았다. 명상 같기도 했고, 기도 같기도 했다.
추기경이 뭘 하는지는 정확하지 않았지만 일단 당장 법황을 독살하지는 않으리란 사실은 명확했다.
- 쾅!
갑자기 몹시 요란한 소리와 함께 추기경이 앉아 있는 휴게공간에서 법황의 응접실로 이어지는 쪽문이 열렸다.
- 짝짝짝짝짝!
그리고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한 사람이 치는 손뼉이 아니었다. 최소한 네다섯 명의 박수 소리였다.
“데 마레!”
곧이어 루도비코 법황의 굵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법황을 필두로 저 손뼉을 친 사람들이 좁디좁은 복도로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
데 마레 추기경은 영문을 몰라 눈을 크게 뜬 채 양옆을 두리번거렸다.
루도비코 법황이 법황이라기 보다는 선장에 더 잘 어울릴 얼굴에 거대한 미소를 띠고 해적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데 마레 추기경은 위압감에 등을 의자 등받이에 더 바싹 붙였다.
“이게 무슨⋯⋯.”
그의 말은 루도비코 법황에 의해 중간에 끊겼다.
“역시! 내가 뭐랬어. 저 친구 모범생이라니까.”
루도비코의 한마디에, 주변에서 무지성 축하가 이어졌다. 아르투르가 실각한 후 떠오른 루도비코의 임시 측근들이었다.
“자제력이 대단하십니다, 데 마레 추기경님!”
“예하! 감축드립니다!”
데 마레 추기경은 아직도 어안이 벙벙해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법황 성하⋯⋯? 도대체⋯⋯?”
“자네는 내 테스트를 통과했네!”
설마 했던 데 마레 추기경은 그 말을 듣고서야 이게 정말로, 루도비코가 마련한 장난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머릿속에서 세 번째 폭죽이 터졌다.
“으아아아!”
그는 울컥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분노는 두려움도 위계도 다 잊게 했다. 데 마레 추기경은 흰 눈을 뜨고 루도비코 법황에게 덤볐다.
“법황이고 나발이고 이 미친 자야! 이런 도를 넘는 장난 따위⋯⋯!”
급하니 라탄어 따위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루도비코는 근육이 위축되는 증상으로 고생하는 와중에도 한 손만으로 데 마레를 손쉽게 제압했다.
“장난이라니.”
루도비코는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흰 이빨이 드러났다. 그 역시도 모국어로 답했다.
“대부분 다 진실이야.”
데 마레 추기경은 충격적인 말에 자기 귀를 의심했다.
“사, 사실이라고⋯⋯?”
말까지 더듬는 조그만 추기경을 보고 법황은 유창하게 말을 이었다.
“최우수논문 선집의 맨 앞자리가 원래 자네 것이었는데 내가 대신 수록된 것. 원래 자네가 치리아니 주교로 임명될 예정이었는데 전임자인 내가 자네만은 안된다고 비토를 놓아서 다른 놈에게 간 것. 아세레토의 사도를 내가 일부러 그때 자네에게 보낸 것. 자네 마누라가 나한테 꼬리친 것.”
루도비코 법황은 빙글빙글 웃으며 데 마레 추기경을 바라보았다.
“저 중 두 개는 사실이고 두 개는 거짓일세. 어느 것이 거짓말이려나?”
추기경은 쥐약을 찻잔에 들이붓지 않은 일 분 전의 자신에게 깊이 실망했다.
쥐약? 아니 저놈은 산 채로 불에 태워죽여도 모자란다.
추기경은 주먹을 꽉 쥐었다. 한 대 치고 끌려가는 한이 있더라도 저 새끼한테 주먹 한 방은 박아 봐야겠다.
그 주먹질을 막은 것은 법황의 한 마디였다.
“데 마레. 난 조만간 죽어. 짧으면 한두 달, 길어봤자 반년.”
잠깐 멈춘 데 마레 추기경의 귓구멍 속에, 뭔가 엄청난 단어들이 날아와 쏙쏙 들이박혔다.
“내 후계자는 자넬세. 시험에 통과한 것을 축하하네.”
“잠깐만요, 뭐? 후계자? 죽는다고?”
어느새인가 존칭이 되돌아와 있었다. 루도비코는 데 마레 추기경의 연약한 어깨에 솥뚜껑처럼 두꺼운 자기 손을 척 얹었다.
“그래. 다음 법황은 자네야.”
* * *
루도비코 법황은 데 마레 추기경을 후계자로 발탁한 원인에 대해 푹신한 의자에 앉아 예의 그 빙글대는—데 마레 추기경에 따르면 아침에 보면 다음 날 정오까지 재수 없는—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난 나의 성전(聖戰)을 완성해 줄 후계자가 필요해.”
의문의 보랏빛 액체를 한 방울 더 빨아먹으면서였다.
“그건 뭡니까.”
“나를 살려두는 독약.”
루도비코 법황은 근육이 오그라들고 물을 보면 발작하는, 일종의 뇌 기생충에 감염되었다.
그가 지금 먹는 고약은 수은과 여러 가지 약초 배합물을 졸인 것으로, 기생충을 억제하는 유일한 약물이었다.
“문제는⋯⋯. 이걸 장복하면 어차피 죽어. 평균치는 한 석 달?”
중금속은 그의 전신 세포 하나하나에 꾸준히 쌓여가고 있었다.
입 마름, 시력 협착, 각종 피부염과 구내염에 시달리게 했지만 그래도 당장 사지가 오그라들며 바닥에 쓰러져 발광하다 죽는 걸 막아주기는 했다.
“제3차 십자군 전쟁은 예삽교 세계의 엄청난 승리였어. 우리는 천년고도를 수복하고 이교도의 땅에 중앙대륙의 위대함을 설파했다네. 온누리에 예삽교의 칭송이 울려 퍼지고 있지!”
그리고 루-도-비-코의 거룩함에 대한 돌림노래도.
천년 예사크 왕국 시대를 열어젖힌, 초대 법황의 진정한 후계자, 예삽교의 중시조. 법황 루도비코 1세.
그러나 무어 제국은 습지대에 끼는 이끼 같았다.
아무리 정성을 들여 제거하고 깎아내도 눈 깜짝할 사이에 똑같은 자리에서 다시 돋아나는, 그런 종류의 것 말이다.
“하지만 누가 봐도 알아. 예사크 왕국은 오래 가지 못하리라는 걸.”
예사크는 항구도시가 아니라 내륙에 깊숙이 갇힌 도시다. 그리고 예삽교도들의 세력권은 발리안티를 기점으로 해안가에만 간신히 미쳤다.
“우리가 탈환한 이 아름다운 도시는 그 배후지를 확보하지 못하면 다시금 더러운 오랑캐들의 손에 떨어질 거라네. 난 그 꼴을 눈 뜨고 보지 못하겠어. 죽어서도 눈을 뜨고 있을 거야. 분명.”
루도비코 법황에겐 제4차 십자군 전쟁이 필요했다. 그의 영광을 역사책의 한 줄이 아니라, 한 챕터로 박제해 줄 최후의 전쟁이.
“다음 법황은 제4차 십자군을 준비해 예사크를 넘어 라트갈린 지역으로 보내줘야 해. 갈리폴, 아이손, 디야르사. 전부 다 영원무궁한 예삽교도의 땅이 되어야 천년고도 예사크가 우리 품 안에서 영원할 걸세.”
갈리폴, 아이손, 디야르사는 순서대로 점점 더 예사크를 감싸고 있는 라트갈린 지방의 내륙에 있는 도시들이었다.
심지어 그중 디야르사는 예사크보다도 더 내륙에, 그러니까 그 도시가 예삽교도의 통행이 허가된 라트갈린 지방에 속하는지 아니면 아예 무어 제국의 땅인 헤자즈 지방의 일부인지 오랜 분쟁이 있는 아주 깊숙한 곳에 있었다.
“그 말인즉슨⋯⋯.”
“라트갈린과 헤자즈 반도에 걸친 거대한 예사크 왕국, 아니 제국이 생기는 걸세!”
법황 루도비코 1세의 치적으로 영원무궁할 새로운 왕조가 창설되는 거였다.
자기도 가문을 남기고 싶어 했던 데 마레 추기경이었지만 이 말도 안 되는 스케일의 야심을 가진 루도비코 데 주스티니 앞에서는 그만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이거 순 미친놈 아닌가? 그러나 추기경의 상념은 법황의 돌출행동으로 끊겼다.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루기엔 자네가 딱이야!”
루도비코 법황은 자기 바로 앞에 앉아있던 데 마레 추기경의 손을 덥석 잡았다.
“관리자형이지, 똘똘하지, 소심하지! 내 그 비소를 못 타고 부들부들하고 있는 걸 보고 알았네. 이 자야말로 나 후계자감이다!”
데 마레 추기경이 새삼 울컥해서 그 쥐약 병 어딨나 다시 찾기 직전에, 법황은 추기경의 손을 여전히 쥔 채로 은근히 물었다.
“법황, 하고 싶었지?”
“⋯⋯.”
오늘 심력을 너무 소모한 나머지 도저히 ‘아니오.’라는 답이 나오질 않았다. 추기경은 입술을 바들바들 떨었다.
법황은 추기경의 대답 따위 기다리지도 않은 채 그의 손을 잡고 안쪽으로 이끌었다.
“자네는 콘클라베에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겠군? 그거부터 알려주지.”
분노를 욕심이 이겼다. 법황이 된다면 그는 중앙대륙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된다! 고아 소년 시몬에서 법황 시몬 7세로!
“저번에 나 쓰러졌을 때 보니까 요리조리 고개 잘 디밀고 다녔던데, 어림 반푼어치 없었지?”
울컥, 다시금 울분이 몰려왔다.
“그럴 만해. 법황, 하면 좋아.”
다시금 욕심이 이겼다. 추기경은 쥐약 단지는 모두 잊고 순순히 루도비코의 뒤를 따라 각종 서류가 보관된 내실로 향하기로 했다.
육 개월만 이 지긋지긋한 작자를 참으면 그의 세상이었다. 육 개월쯤이야, 누워서 케이크 먹기지.
* * *
오늘은 트레베로에서 데 마레 추기경만 난데없는 호출에 당황한 것이 아니었다.
외드 대공 역시 나타나서는 안 될 사람이 나타난다는 연락을 받자 혼비백산했다.
“뭐? 필리프가 어떻게 여기에 나타나!”
필리프 4세라면 분명히 상태가 계속 엉망이었기 때문에 몽펠리에 궁에 두고 왔다.
당분간 제정신을 차릴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갈리코 국왕이 지금 트레베로에 나타난다고?
그리고 필리프보다 더 예상치 못한 방문자도 있었다. 누가 이리로 오고 있는지에 이름을 들은 외드 대공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뭐라고? 라리에사가 지금 여기를 왜 와!”
그는 머리를 쥐어뜯다가 눈을 비볐다.
“안 돼, 안 돼, 안 된다. 걔가 여기 지금 오면 될 것도 안 돼. 왕자의 눈에 띄기 전에 얼른 돌려보내야지. 여봐라, 사람을 보내서⋯⋯.”
그러나 외드 대공의 안색은 수하의 보고를 받고는 더더욱 창백해졌다.
“대공 합하, 대공녀께서는 국왕의 행차에 딱 붙어서 움직이고 계십니다. 도저히 저희 인원이 가서 강제로 잡아 오거나 할 상황이 아니어서⋯⋯.”
외드는 가뜩이나 필리프 상대로 얇은 줄을 타고 있었다.
제아무리 제 딸을 데려오려는 거라도, 필리프의 행차 앞에서 물리력을 쓰다가 왕의 심기를 건드리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합하, 일단 대공녀께서 트레베로에 도착하실 때까지는 기다리시는 것이⋯⋯.”
라리에사를 트레베로에 데리고 오는 건 절대로 정답이 아니었다. 그러나 답지가 아닌데도 펼쳐야 하는 때가 살면서 반드시 오는 법이다.
외드 대공은 머리카락을 부여잡고 책상에 이마를 쿵쿵 찧었다. 그는 성호를 그으며 중얼거렸다.
‘천신께서 굽어살피셔 제발 아무 일 없길⋯⋯.’